베드로의 집인가, 요한의 집인가?

가버나움은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sty,기원전 140-37년) 시대에 갈릴리 호수의 북단에, 어부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당시에 인구가 1500 정도 되었다고 한다. 세배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여기서 살았고, 또한 베드로와 안드레가 사도가 되기 전에 여기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었다.

아주 부유한 도시가 아니면, 세상의 어느 도시나 마을에도 주위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을 짓게 되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진흙밖에 없었으므로 수메르인은 진흙으로 서판도 만들고 지꾸랏도 지었다. 예루살렘에는 돌밖에 없으므로 돌로 집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시절에 가버나움의 집들은 현무암 (basalt)으로 지었고, 이것은 화산작용으로 분출된 회색이나 검은 색의 돌이다.

가버나움 마을의 집들은 간단하게 지어졌다. 이 마을에는 남북으로 큰 길이 하나 나 있고, 길 양쪽에 집들이 붙어 있었으며, 가로로 샛길이 나 있지 않았다.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옛 건물들은 대체로 잘 다듬은 네모난 돌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담벽을 쌓는 데 쓰이는 것처럼 울퉁불퉁한 돌을 쌓아서 지었다. 1세기에 있던 집들의 벽은 주로 현무암으로 쌓았고, 작은 돌로 현무암 돌 사이를 채웠으며, 이런 벽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모르타르도 쓰지 않고서 엉성하게 집을 지었다.

가버나움의 중요한 볼 거리는 가버나움 회당과 이른바 “베드로의 집”이다. 이 두 곳 사이에 있는 집들을 보면, 당시 가버나움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넓은 뜰이 있고 그 주위를 돌담으로 쌓은 집들이 둘러 싸며, 돌계단으로 각 집의 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게 지어졌다. 몇 가구가 이렇게 함께 살았고, 사람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집의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문을 잠그고 열 수 있게 하려면, 상당히 정확하게 직각의 문틀을 만들고 그 속으로 문을 여닫게 하는 목공 기술이 필요한데 당시에 이런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경제력도 없어서 이런 가난한 어촌에 쓰였을 리가 없다.

대체로 다듬지 않은 돌이 사용되었으므로, 2층 건물을 짓기가 어려웠다.  4각형으로 담을 쌓은 뒤에 적당히 막대기들을 네 벽에 걸쳐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서 집을 지은 것 같다. 그러니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왓장을 치우고 중풍환자를 거실로 내려놓는 것이 가능하고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집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기와를 잠시 옮겨 놓은 것이다.
가버나움은 유대인의 1차 독립전쟁(서기 66-73년)에도 그리고 바 콕바 (Bar Kokhba) 전쟁 때에도 (서기 132-135년) 말려 들지 않아서 이 마을은 대체로 전쟁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갈릴리 지방의 장군이었던 요세푸스 (Josephus)가 말에서 떨어져, 가버나움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가버나움에서는 예수의 일생에서 적어도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드론에서 내려다 본 가버나움 광경. 왼쪽에 회당 유적이 보이고, 팔각형 지붕은 베드로의 집이라 이름난 곳(아마도 세배대의 집이었던 듯).

1. 중풍 병자를 고친 일
마가 복음(2장)은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신도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그 중풍병자를 들 것에 뉘어 지붕을 뜯고 예수가 강연하는 바로 앞에 내려 보내어 고침을 받았다고 한다.


중풍병자를 이렇게 지붕을 통해 내려 보냈다. 가버나움의 그리스 정교 회당.






“베드로 집”의 남은 돌 (현무암) 조각들, 가버나움.
 

2. 이른 바 “베드로의 집”
기독교인들이 지은 가버나움 교회는 전통적으로 베드로의 집이라고 하는 곳 위에 세워졌고, 여기는 가버나움 회당과 갈릴리 바닷가 사이에 있다. 이 베드로의 집 주위에는 1세기 초에 여러 집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1세기 기독교인의 낙서 (예를 들면, Jesus is the Lord)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독교 신자들이 그 자리를 예수 시절의 어떤 사건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예수가 가버나움에 들어가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다고 하지만, 이것이 꼭 기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사건보다는 중풍병자를 고친 것이 신자들이 머리에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에게리아(Egeria)라는 어떤 스페인 순례자가 서기 381년과 384년 사이에 성지를 순례하면서 가버나움을 방문한 일을 기록하였다. 그 여자가 수녀였는지 어쩐지는 이론이 분분하다. 보통 수녀라면, 수녀원에서 한가히 성지를 순례하라고 허락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에게리아는 아마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수녀가 되었고, 집 재산으로 교회에 헌금도 하고 순례를 했을지도 모른다.

티베리아스(Tiberias)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어떤 요셉이라는 유대인이 살았는데, 그는 서기 330년부터 337년 사이에,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로부터 가버나움에 있는 교회를 포함하여, 네 교회를 지을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Stephen Langfur) 따라서, 에게리아가 방문한 가버나움 교회는 예전의 “베드로의 집”을 가운데 지붕을 든든히 강화한 집 교회 (domus ecclesia)였을 것이다. 5세기에 들어서서 기존의 교회를 부수고 다시 8각형의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에게리아의 글이 영문으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And in Capernaum, what is more, the house of the prince of the Apostles has been transformed into a church, with its original walls still standing. Here the Lord healed the paralytic. There is also the synagogue where the Lord healed the man possessed by demons; one goes up many steps to this synagogue which was built with square stones.” (ELS, p. 299, 442)

“게다가 가버나움에는 으뜸 사도의 집이 교회로 바뀌었고, 최초의 담은 그대로 있었다. 여기서 주는 중풍병자를 고쳤다. 또한 주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곳에는 회당이 있다. 여러 디딤돌을 딛고 계단을 올라가서 그 회당에 들어가며, 회당은 반듯한 돌로 지어졌다.”

과연 누구의 집에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 벌어졌을까?

누가복음 5장에는 이 집으로 갈릴리의 각 촌에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수백명이 집 안 뿐 아니라, 집 바깥에서도 모였들었던 듯하다.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고, 장모와 함께, 아마도 작은 집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른바 “베드로의 집”은 예수 시절에 상당히 큰 집이었고, 가난한 베드로는 그렇게 큰 집에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게 하려고 기왓장을 친구들이 들어내기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그 집은 어느 유지 아니면 부자의 집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굴된 중에서 이 집이 가버나움에서 가장 큰 집이었던 것 같다.

이 마을에서 돈이 있던 유지라면 베드로가 아니고 세배대였다. 에게리아가 본 “최초의 담”은 작은 베드로의 집의 담일 수 없다. 이뿐 아니라 세배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곱이 또한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최초의 담이 큰 집의 담이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집이 아니라, 세배대 또는 요한과 야곱의 집일 수밖에 없다.

세배대가 가버나움의 유지였다는 사실은 예수가 안나스(Annas)의 저택으로 끌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안나스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다는 기록이 입증한다.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기 전에, 요한은 안나스의 저택까지 예수를 따라 갔다.

요한 복음 1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요한]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요한]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왔더니…”

이 글에서 요한은 겸손하게 자신을 언급하였다. 12 제자 중에서 요한만 대담하게 따라가고 겁 먹은 베드로는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저택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었다. 아마도 요한의 집은 안나스와 잘 아는 사이였고 문 지키는 여자도 베드로를 들여 달라는 요한의 부탁을 들어 줄 정도로 면식이 있었던 것 같다.

으뜸가는 사도가 베드로였고, 열 두 사도 중에 베드로가 가장 유명했으니,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베드로의 집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에게리아는 분명히 이곳에서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쳤다고 말한다.

베드로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몇 백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예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집이 아니었다. 세배대는 당시에 가버나움에서 부자였고, 예루살렘에서 살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와도 잘 알 정도의 유지였으며, 이 집은 또한 요한과 야고보의 집이었다. 그러니, 이른바 “베드로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요한과 야고보의 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가버나움 회당
가버나움 교회는 서기 1세기에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모이던 곳은 가버나움 회당이었다.

가버나움 회당은 수입해 들여온 흰 석회암으로 지어져 있다. 4세기에 돌에 새겨진 기록에는 회당을 봉헌한 사람의 이름이 아람어로 “요한의 아들 제비다, 그 아들 알패오(Alpheus the son of Zebidah, the son of John, made this column. May it be for him a blessing.”)가 이 기둥을 헌납했다. 이 기둥이 그에게 복이 되기를”이라고 적혀 있다. 물론 제비다는 신약에 그리스어로 세베대(Zebedee)로 적혀 있다. 그러니 4세기에 세배대의 아들 알패오가 회당의 일부를 짓는 데 돈을 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흰 석회암 건물의 기초에는 1세기에 현무암으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전의 회당 기초가 있다고 한다. 로프레다(Loffreda)는 이 초기 현무암 회당이 예수가 한 때 설교한 적이 있는 가버나움 회당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가버나움에 회당은 여기 뿐이니까 이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이 가버나움 회당은 예수의 시절에 있었던 가버나움 회당의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7장에는 로마인 백부장의 하인을 예수가 고쳤다고 하며, 예수가 이 백부장이 지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여러 번 설교했다고 한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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