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사자왕 리처드 (Richard Lionheart)은 회교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와 상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1192년에 살라딘(Saladin)과 휴전 협정을 맺고 돌아왔다. 이노슨트 3세(Innocent III)가 1198년에 교황이 되어 다시 십자군이 일어나기를 호소했다. 이노슨트 교황은 이전의 십자군의 지휘권이 각국의 임금에게 나뉘어져 있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자기가 지휘하려고 하였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십자군이 배로 나일강 삼각지까지 가서, 거기를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나 독일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고 프랑스 사람들이 십자군의 주류였고, 여기에 플랑드르와 베니스를 포함하여, 유럽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얼마큼 참전하였다. 몽페라토의 보니파치오 (Bonifacio del Monferrato)가 4차 십자군을 주도하기로 선택되었다.
이전의 십자군은 바다로 예루살렘까지 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육로로 예루살렘까지 가느라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생도 많았던 듯하다. 육로로 가는 동안에 아나톨리아를 (지금의 터기 지역) 지나야 했다. 먹을 것을 많이 들고 갈 수 없었을 터이고,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먹을 것을 조달해야 되었을 터이니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베니스는 자라(Zara, 지금 크로아시아의Zadar)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는 데 특히 관심이 있었는데.
이노슨트 교황은 약 35,000명의 십자군이 베니스(Venice, Venezia)에 1년 후에 집결할 터이고, 십자군은 은(銀) 85,000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베니스 공화국과 협의하였다. 베니스도 이처럼 돈을 요구해야 되었는데, 베니스가 당시에 최대의 조선소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배를 만드는 데 시일이 걸리고, 또한 많은 베니스 시민이 (위키에 따르면, 최소한 2만 명, 당시 베니스 인구는 6-10만 정도) 장사를 걷어 치우고 승무원이 되어 예루살렘까지 이 십자군을 수송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년 동안 다른 장사를 그만두고 배를 건조하였는데, 정작 출항할 때에 (서기 1201년) 십자군이 12,000 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이번의 십자군은 대부분 프랑스인이었고 항해비로 은 51,000 마르크 밖에 낼 수 없었다. 베니스는 큰 손해를 보고 십자군을 보낼 수 없었다. 베니스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는 성마가 성당에서 십자군에 가담하면서 십자군에게 자라를 먼저 공격하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나머지 잔금을 지불하라고 제안했다.
산 마르코 성당
자라는 원래 베니스의 보호를 받았으나 얼마 전에 베니스 상인들을 축출하고 독립을 얻었다. 자라는 베니스와 함께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이탈리와 크로아시아 사이의 바다) 무역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교황은 이전에 십자군에게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했으나, 돈이 없는 십자군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자라는 1주일 만에 함락되었다 (서기 1202년 11월 23일).기독교 도시국가 자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노슨트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했지만, 얼마 있다가 파문을 취소하였다.
한편 비잔틴 제국 (Byzantine Empire)에서는 알렉시우스 3세(Alexios III)가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 이삭 2세(Isaac II)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1195년). 이삭 2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는 이번에 보니파치오를 만나서 황제의 자리를 되찾으려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삼촌 알렉시우스 3세를 몰아내고, 아버지 (이삭 2세)의 제위를 찾아주면 (1) 베니스에게 나머지 빚진 돈을 갚아주고, (2) 은 20만 마르크를 십자군에 주며, (3) 십자군의 에집트 정복을 위하여 병사 1만 명을 제공하고, (4) 예루살렘에서 기사 5백 명 유지할 비용을 대며, (5)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주겠다.
Blue Mosque (이스탄불의 술탄 아메드 모스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라고, 007영화에도 나온다.
베니스의 총독 단돌로 (Enrico Dandolo)는 이 제안을 열렬히 지지하였는데, 그는 80대의 노인이고 장님이었으나, 이러한 제안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잘 알았을 터이지만, 베니스에 천년에 한 번 있을 기회가 온 것을 본 듯하다. 콘스탄티노플은 9백년 동안 무역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부자 도시였고 (인구가 50만) 베니스와 함께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