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사후(死後) 여행

마가 복음의 저자 마가(Mark, 라틴 이름 Markus)의 유대인 이름은 요한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John Mark라고도 한다. 마가가 성이고 요한이 이름이라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 유대인 사이에는 성과 이름이 따로 없고, 요셉의 아들 요수아, 또는 나사렛의 예수와 같은 식으로 이름과 출신 지역을 붙여서 사람을 호칭하였다. 마가는 유대인 사이에서 요한이었지만, 당시에 현대식으로 마가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마가는 또한 바나바(Barnabas)의 사촌이었다. 예수의 사도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던 듯하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지였다. 바울이 쓴 사도행전 (12장)에 따르면, 베드로가 체포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 난 다음에 간 곳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고, 거기에 많은 신자가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전에 사도와 제자들이 모이곤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마가 행전에는 (Acta Marci, 외경 중에 하나) 마가가 예루살렘에 집이 있었고, 조상으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 받았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만찬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http://www.mythicistpapers.com/2012/09/29/summary/)
 

1. 마가의 행적
(1) 마가복음의 기록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 (Eusebius)에 따르면, 헤롯 아그리빠 (Herod Agrippa)가 서기 42년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James, son of Zebedee)를 죽였다. 이렇게 야고보는 12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고, 신자들이 해외로, 특히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로 흩어졌다. 베드로는 이 해에 로마에 도착했는데, 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왔다.

초기에는 예수를 눈으로 직접 보고 따랐던 사도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으로 신자들이 만족했으나, 차츰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지거나 죽자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을 신자들이 느낀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 교회 역사)에 따르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이요 그의 가르침을, 연대순으로는 아니라도, 자세히 적었다고 (마가복음) 파피아스(St. Papias)가 말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에 널리 쓰였고, 아마도 베드로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여, 부자집에서 자라고 당시로서는 현대 교육을 받은 마가의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로마의 신자들은 베드로가 설교한대로 마가에게 복음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베드로는 그리스어로 마가 복음의 초벌 기록을 보고 나서, 승인하였다고 한다. (The Golden Legend, The Life of Saint Mark the Evangelist). 베드로가 67년에 죽었고 마가가 아퀼레이아(Aquileia, Venice의 동북쪽에 있는 도시)에 가서도 계속 복음을 썼다는 전설이 있으니 마가 복음은 67년 전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물론 현재 마가복음의 끝부분은 나중에 다른 작가가 더한 것이다.

(2) 마가와 바울의 관계

서기 45-46년에 (요세푸스에 따르면, 44-48년) 기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신자들이 바친 재산을 공동으로 쓰고 대부분이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곧 교회의 재산이 바닥이 났다. 기근이 닥쳐오자 이 교회의 회중을 도와 주려고 바울은 이방인들로부터 모금했다. 이 헌금을 전하고 난 뒤에,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안티옥으로 갔고, 바울의 첫 전도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갔다.

마가는 바울과 잠시 함께 있었으나,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로 갈 때, 마가는 이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 갔다. 그래서 두번 째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바울은 마가를 데려가기를 거절했다. 마가와 바울이 어째서 사이가 나빴는가는 확실치 않다. 바나바의 편에서 보면, 마가가 나이 어리므로 심부름꾼으로 데려 갈 생각이었으나, 마가는 나이가 비슷한 바울의 심부름을 하기가 싫었을지 모른다.

바울과 마가는 거의 같은 나이였던 것 같다. 마가는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제자 중에 하나였고 바울은 예수를 본 적도 없고 예루살렘에서 2주 동안 베드로에게 교육받은 것 밖에 없는데 사도로 행세하였다. 마가 편에서 보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고 더 크게 행세하는 바울을 곱게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마지막 만찬도 마가의 집에서 사도들이 예수와 함께 들었고, 예수가 돌아가신 뒤에 40일이나 그 집에서 사도들이 (공짜로) 먹고 지냈으며, 그 2층의 방(cenaculum, Upper Room)에서 사도들이 오순절을 지내기도 했으니, 마가는 사도들이 무시할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바울은 베드로와 요한 외의 사도들을 얕잡아 보았던 것 같다. (가말리엘의 제자란 자부심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 마가를 바울이 홀대하였으니, 바나바가 바울과 갈라지는 것도 당연했을지 모른다.

1세기 초에 로마(Roma)는 인구가 1백만이 되었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아마도 1백만이 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런데도 바울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다. 아마도 마가가 거기서 교회를 세웠고, 또한 바울이 질투할 만큼 똑똑한 전도사 아폴로스(Apollos)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여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1세기에 세계에서 제일 컸다.

마가가 예수를 따라 다니거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고 우기는 역사가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마가 복음 14장에,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고 달아나는 젊은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가가 바로 자신을 언급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가가 언제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에 초대 교회를 세운 다음에 아니아누스(Anianus)에게 주교 자리를 물려 주고, 바울과 베드로와 합세하기 위하여 로마로 간 듯하다.

(3) 마가의 죽음

전통에 따르면, 마가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에집트 기독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베드로는 마가를 아퀼레이아(Aquileia)로 전도하라고 보냈고, 그는 에르마고라스(Ermagoras)를 신자로 만든 뒤에 베드로에게 데리고 가서 그를 아퀼레이아의 주교로 임명하게 하였다. (나중에 에르마고라스는 이교도에게 죽음을 당했다.) 아퀼레이아에서 마가는 또한 복음을 계속 썼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마가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어느 날 마가는 구두 수선공 아니아누스(Anianus)의 왼 손을 고쳐주었는데, 그는 복음을 믿게 되었다. 아니아누스는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Sain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 Gentile Bellini and Giovanni Bellini.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가. 어느 교회 복사판. 原畵는 밀라노의 브리라 화랑 (Pinacoteca di Brera, Milano)에 있다.

부활절에 마가가 미사를 올릴 때 사람들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마가는 그 도시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 네로가 황제였다. (57년이라 하나 그 시기는 네로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할 때, 67년이었던 것 같다.)
 

2. 마가의 유골의 여행
7세기 초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모하메드가 일어나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서기 641년 3월에 알렉산드리아는 모슬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 Heraclius)는 콘스탄티노플에(Constantinople) 대군을 집결하였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모인 군대는 흩어졌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는 9월에 함락되었고 에집트는 모슬렘 국가가 되었다.

한편 베니스는 마가를 그 도시의 후원자로 정하고 나서 (아마도 마가가 인근 도시 아퀼레이아에서 전도한 것이 영향이 있었을지 모른다), 무엇인가 마가의 유골이 필요하여, 마가의 유골을 훔쳐오라고 선원 2명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


검사관이 돼지 고기 냄새를 맡고 피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익. 1660년.

알렉산드리아의 성 마가 교회(그리스 정교)의 수도사 Stauracius와 Theodorus는 마가의 유골 관리자였는데, 베니스의 두 상인, Tribunus와 Rusticus는 알렉산드리아의 칼리프 (모하메드의 후계자)가 마가의 유골을 파괴하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이 수도사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라센들이 (이슬람 교도) 마가의 유골을 해치기 전에 안전한 베니스로 옮기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베니스 상인들은 석관에서 사체를 꺼내고, 사체를 싼 비단을 벗기고 사체를 꺼낸 다음 원래의 석관에는 다른 사체(St. Claudia)를 대신 집어 넣었다.

큰 바구니 속에 마가의 유골을 넣고 그 위에 돼지 고기와 상추를 덮고서, 이를 베니스의 상선에 실었다. 모슬렘 관리들이 상자의 검사를 요구했을 때, 돼지 고기의 냄새를 맡고서 코를 막고 피했다고 한다. (Peter Ackyroid)


Il Corpo di San Marco e accolto solennemente a Venezia (베니스에서 성마가의 사체를 엄숙하게 환영하였다)1660년경.


Il corpo di San Marco venerato dal doge (총독이 마가의 시체에 존경을 표하다)
베니스의 총독(doge)은 이 때문에 자기의 궁전 옆에 성 마가 성당을 지었다.



성 마가의 사체를 훔쳐오기, 틴토레토, 아카데미아 미술관.

최초에 지은 마가 성당은 976년에 불탔다. 1063년에 성당을 다시 짓는 동안에 마가의 유물이 잠시 사라졌으나 다시 찾아서 석관에 넣어 두었다.

콥트 (에집트 교회)는 마가의 머리가 아직도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고 (아마도 목이 졸려 죽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시체의 일부가 카이로의 성당에 남아 있다고 한다. 나머지는 베니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Shinbone of Saint Mark) 마가의 정강이 뼈 (교회 당담자의 말)


CORPUS DIV MARCI EVANGELIST (아마도 전도사 성? 마가라는 뜻인 것 같다)
이 석관에 정확히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리와 정강이 뼈를 제외한 유골일 것이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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