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의 사인(死因)은 무엇인가?

1. 모짜르트의 교육과 일생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1756년 살쯔버그(Salzburg)에서, 아직 의무 교육이 실시되기 전에 태어났다. 생가의 주소는 Getreidegasse 9, Salzburg이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살쯔버그는 당시에 신성 로마제국에 속했다.


Salzberg Dom Cathedral (잘츠부르크 대성당)


모짜르트의 生家.


생가 입구의 장식.


모짜르트 생가(아파트)의 단촐한 부엌, 여기서 어머니 마리아 안나가 아이들의 요리를 해주었다.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찰스 6세(비발디를 비에나로 초청한 왕)의 딸이었고, 아버지가 죽자 1740년부터 여왕의 자리로 즉위하였다. 1775년에 6세부터 12세 사이의 소년 소녀들이 학교를 다니게 함으로 의무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모자라트는 19살의 어른이었다.)

물론 음악 교육은 아버지 레오폴트가 담당하였다. 어머니는 뒷바라지를 해 준 듯하다. 아버지 레오폴트(Leopold)는 살쯔버그를 다스리는 대주교 (archbishop), 폰 피르미안(von Firmian)의 음악단에 속하여 바이올린 주자였다. 아버지는 작곡도 얼마큼 했다. 아버지가 누이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모짜르트는 세 살 때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흉내내며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익혔다.

누나 (Anna Maria, 별명 Nannerl)의 회상록에는 모자르트가 5살 때부터 짧은 곡을 작곡했고, 아버지 레오폴트가 이를 악보에 옮겼다고 한다. 레오폴트는 아들에게 음악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아들의 작곡 솜씨가 늘어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작곡을 그만두었다.

(1) 모짜르트의 성장기

1762-73년: 누나인 안나 마리아와 모짜르트는 천재 음악가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여러 곳에서 연주했다. 어머니 마리아 안나가 (1762-68년) 돌보아 주느라고 따라 다녔으나, 이태리 여행(1769-73년)에는 어머니가 집에서 머물렀다.


모짜르트가 살던 집. 아마도 아버지가 돈을 벌어 더 큰 집으로 이사한 듯.
1773-77년: 살쯔버그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Hieronymus Colloredo) 밑에서 궁정 음악가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봉급이 1년에 150 플로린(더킷과 같은 무게의 금화)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돈으로 $30,000 정도 되었다.


Hohensalzburg Castle, 대주교가 거하던 성.


접대실, 모짜르트가 여기서 연주했다고 한다.

1777년에 살쯔버그의 직장을 그만두고, 아우스버그(Ausburg), 뮤니크(Munich), 만하임(Mannheim ), 파리(Paris)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고, (아마도 아버지는 집에서 쉬고) 어머니가 따라 갔으나 일자리를 구하지는 못했다. 알로이시아 웨버 (Aloysia Weber)와 잠시 연애하게 되었다.

파리에 가서 베르사이 궁전에서 오르간 주자 자리가 있었으나 관심이 없었고 돈이 떨어져 뮤니크로 가서 알로이지아를 만났으나 그 여자는 흥미를 잃었다. 1778년에는 (아마도 여행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따라왔던 어머니가 병이 나서 7월에 돌아가셨고, (아마도) 돈이 떨어져, 의사를 늦게 불렀다고 한다. 1779년 1월에 살쯔버그로 돌아와 오르간 주자와 지휘자가 되어 연봉 450 플로린을 받았다. ($90,000)

(2) 비에나 시절

1781년에 모짜르트가 연봉의 반이 되는 돈을 받고 황제 (요세프 2세) 앞에서 연주하려 했으나 대주교가 이를 막았다. 이 때문에 다툰 뒤에 사직하려고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곧 대주교가 마음을 바꾸고 그를 해임하였고, 모짜르트는 자유를 얻어 비에나로 갔다.

1782년에 비에나에서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 (후궁에서 벌어진 유괴)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마침 웨버 가족이 만하임에서 비에나로 이사왔다. 알로이시아는 이미 결혼했고, 모짜르트는 셋째 딸 콘스탄자(Constanza)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가 반대했는데도, 1782년 8월에 결혼했다.

비에나에서 연 여러 음악회에서 모짜르트는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성공하여 한 때는 돈을 잘 벌었다. 비싼 아파트 (임대료가 1년에 460 플로린, $92000)에서 살았고, 900 플로린($180,000)이나 되는 피아노를 샀다.

1784년에 조세프 하이든(Joseph Haydn)을 비에나에서 만나고 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때때로 함께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하이든은 모짜르트의 작품을 아낌없이 찬사를 돌렸다고 한다. 베토벤도 당대의 젊은이였으나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돈을 잘 벌었으나 아들 칼(Karl)을 사립 학교에 보내고, 집에 하인을 두어 지출이 많아졌다.

1786년부터 오페라를 다시 작곡하기 시작하여, 돈 죠바니(Don Giovanni)와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을 작곡했다.

(3) 줄어드는 소득과 죽음

1787년에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입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황제 요세프 2세가 그를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하였으나, 1788년에는 비에나의 교외로 옮겼다. 1791년에 “[유대인 독립 투쟁을 진압한 로마] 황제 타이투스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의 공연을 감독하려고 혼자 프라그에 갔다가 (콘스탄자가 따라 가지 않은 듯하다) 병을 얻었다. 9월에 그가 작곡한 마술 피리(Magic Flute)를 지휘하기도 했으나, 건강이 나빠졌다.

아내가 돌보았으나 회복되지 않아서12월에 죽었다. 뉴 그로브 (New Grove) 음악 사전에 따르면 모자르트는 (빈민의 묘지가 아니라) 평민의 묘지에 묻혔고, 그의 장례식에, Salieri, Sussmayr(레퀴엠을 끝낸 제자), van Sweeten과 다른 두 음악가가 참석했다고 한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요세프 2세는 장례식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례식의 허례를 줄이고 신부가 참석하지 말라고 이전에 명했다. 또한 영구 마차는 밤에만 시 바깥으로 시체를 나를 수 있고, 중간에 주점에 들리지 못하게 했다. 술을 마신 뒤에, 영구 행렬이 겉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2. 모짜르트의 사인은 무엇인가?
(What killed Mozart? Jan Hirschmann 의사의 글을 요약하고 참조하였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1862년에 살균법을 창시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위생이 무엇이니 몰랐다. 깨끗하지 않은 음식이나 먹을 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먹어서 병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모짜르트는 35세에, 1791년 12월 5일에 죽었는데, 담당 의사는 독살 따위를 의심한 만한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검시는 하지 않았다.

(1) 위령곡 소문

1798년에 프리드리히 로슈리츠(Friedrich Rochlitz)는 음악 잡지의 편집장이었는데 1791년 여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실었다고 한다.

어느날 마차가 다가와서 낯선 사람이 말했다… 얼마큼 나이들고 심각하고 위엄이 있는 사람, 권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모짜르트도 그 아내도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

“나는 아주 높은 사람의 사자로 왔다. 그는 자기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게 아주 소중하고 언제까지나 그럴 사람이다. 그 여자의 죽음을 조용하지만 보람있게 기념하기를 바라며, 그 목적으로 그에게 위령곡을 (Requiem) 당신이 지어주기를 요청한다.” [모짜르트는 돈을 받았고] 당장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보를 적고 있었다. 피곤을 견딜수 없어 몇 번이나 악보 위에 기절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프라하의 프란츠 니멧첵 (Franz Niemetschek, 콘스탄자는 두 아들을 이 사람 밑에서 교육받도록 보냈다)는 “이 후원자의 신분을 알려고 하지 말라, 쓸데 없는 노력이 될 것이다”라고 모짜르트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이 사자는 1791년 8월 말에 다시 나타났고, 모짜르트 부부가 레오폴트 2세의 즉위식에 가려고 마차를 탈 때 나타나서 물었다: “이제 위령곡은 어찌 되는 것이오?” [모짜르트는 비에나도 돌아와서 계속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라그에서 모짜르트는 병이 났고, 끊임없이 잠에 빠졌다. 얼굴 빛이 창백해지고 슬픈 빛이 보였다. 비에나로 돌아와서 당장에 위령곡을 다시 썼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고 그는 우울해졌다. 아내도 이를 눈치챘다. 어느 날, 프라터[비에나의 공원]로 마차를 몰았는데, 모짜르트가 죽음에 대하여 비로소 이야기하며, 자신을 위하여 위령곡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나의 종말이 곧 올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소. 누군가 나에게 독을 먹인 것이 확실하오. 이 생각을 지울 수 없소…”

그가 죽는 날 악보를 침대로 가지고 오게 했다. “내가 자신을 위하여 위령곡을 쓴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가 죽자 마자 그 사자가 나타나서 악보를 요청했고, 마치지 않은 악보를 받았다. 그 순간부터 그 미망인은 이 악보를 요청한 사자를 다시 보지 못했다. 영화 아마디어스 (Amadeus, beloved of God, 신의 사랑을 받는 자)에는 이 사자가 살리에리의 심부름을 한다고 암시한다.)

(2) 살리에리가 독살했다는 소문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년)는 당대에 모자르트와 경쟁하던 작곡가였는데 정신 이상을 일으켰고, 목을 잘라서 자살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조카 칼(Karl)은 “살리에리는 자기가 모짜르트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고 기록하였고, 베토벤의 비서인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는 “살리에리가 다시 아프고, 아주 정신이 나갔다. 자기가 모짜르트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독으로 그를 없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그나즈 모스켈레스(Ignaz Moscheles)는 베토벤과 살리에리의 제자였는데, 살리에리가 갇혀 있는 병원에 찾아 가서 그의 입으로부터 직접 이런 말을 들었다: “비록 이것이 나의 마지막 병이지만, 내 명예를 걸고 보장하는데, 그 어처구니 없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가 모짜르트를 독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악의로 하는 말이다. 세상에 전해 달라. 늙은 살리에리가, 곧 죽을 몸이, 너에게 그리 말했다고.”

살리에리가 질투심으로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흥미있는 영화의 주제는 될 것이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전혀 모짜르트를 죽일 동기가 없었던 듯하다. 살리에리는 궁정에서 황제의 음악가들의 우두머리였고, 봉급도 많이 받았으며, 오페라도 많이 작곡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짜르트의 음악을 더 좋아할지 모르지만, 당대에 살리에리는 황제를 구어 삶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오페라도 많이 공연할 기회를 가졌으므로, 공연히 자기보다 형편이 못한 모짜르트를 죽일 할 동기가 없다. 그러나 모짜르트가 죽고 난 후에, 그를 생전에 도와 주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도 아주 정중했던 듯하다. 모짜르트는 살리에리와 그의 애인을 마차에 싣고마술 피리(The Magic Flute) 공연에 데려다 주었다. 적어도 모짜르트는 살리에리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살리에리는 모짜르트가 죽을 때 갓 태어난 아들, 프란츠 모짜르트를 가르쳤다. 미워서 죽이고 싶기까지 한 모짜르트였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의 아들에게 몇 년이나 음악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살리에리의 말은 신빙성이 있다.

(3) 돼지 고기를 잘못 먹었는가?

모짜르트의 아들, 칼 토마스는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7살이었는데, 날자가 적히지 않은 메모에, 아버지의 죽음이 의심스럽다고 하며 병 증상을 기록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모짜르트가 죽기] 며칠 전에, 그의 몸 전체가 잔뜩 부었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독한 냄새가 났고, 사후에 더욱 심해져서 검시를 할 수 없었다.

허쉬만(Hirschmann) 의사는 식물성 중독의 경우에는 몸이 빳빳해지고 차지는데, 모짜르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모짜르트의 전기를 쓰면서 게오르크 폰 니쎈(Georg Nikolaus von Nissen, 콘스탄자의 둘째 남편)은 소피(Sophie Haibel, Constanze의 누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소피는 모짜르트의 죽음을 관찰했다. 그 여자가 회상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자, 모짜르트가 병이 났는데, 앞으로 입을 수 있는 밤 샤쓰를 우리 둘이서 만들었다. 왜냐하면, 몸이 부어서 그가 돌아 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짜르트가 죽는 날에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당장 나를 불렀다: “아, 귀여운 소피, 와 주어서 고맙구나. 여기서 오늘 밤 머물러야 해. 내가 죽는 것을 보아야 해. … 나는 이미 혀로 죽음의 맛을 보았다…” [의사가]와서 뜨거운 머리에 찬 압박 붕대를 처방했는데, 이것이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고, 죽기 전에 다시 의식을 찾지 못했다.

니센은 모짜르트의 죽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마지막 병은 침대 위에서 15일이나 계속되었다. 손과 발이 붓기 시작했고,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자기 게우기 시작한 이 병은 군대 병 (military fever, 갑자기 열이나고 발진이 나는 잡다한 병의 총칭)이다.

여러 가지 증세를 보고서 선모충증(旋毛蟲症)이었을 것이라고 허쉬만(Hirschmann)의사는 진단을 내린다. 모짜르트는 1791년 9월 6일에 프라그에서 병을 얻었고, 9월 30일에 마술피리의 첫 공연을 지휘하였다.

이 병은 발병하는 데 50일까지도 걸리는데,어느 날 저녁에, 아마도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어느 레스토랑에서, 리허설 (연습)이 끝나고,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잘 익히지 않은 돼지 고기 요리를 먹었을지 모른다.

아내 콘스탄자에게 쓴 편지에 (1791년 10월 7일), 병이 나기44일 전에 “내 몸에 무슨 냄새가 나는가? 돼지 구이! 얼마나 맛있는지. 당신의 건강을 축하하기 위하여 먹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Hirschmann)

아내 콘스탄자는 비에나 교외에 남아 있었으니, 이것은 프라그에서 쓴 편지 같다. 허쉬만 의사는 10월 7일에 돼지 고기 요리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한 달 전에, 프라그에서 9월 6일에 병을 얻었다.

물론 아내 콘스탄자는 자식들을 돌보느라고 (프란쯔가 7월에 태어났다) 프라그로 따라가지 않았을 터이고, 모짜르트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사먹었을 것이다. 씀씀이가 헤픈 모짜르트가 식품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직접 요리한 것 같지는 않다.

집에서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이 아니라, 타향에서 맛 있지만 불결한 돼지 고기 요리를 여러 번 먹은 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모짜르트의 어머니도 (물론 가기 전부터 몸이 불편했지만) 그를 따라 파리에 갔다가 돌아가셨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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