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의 역사

 

 

黃帝의 아내, 누조(嫘祖, Leizu) 또는 시링쉬(西陵氏, Xi Lingshi)가 기원전 2700년 경에 처음으로 비단을 만들고 명주 짜는 베틀을 발명했다고 한다. 비단 만드는 법이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기원전 1122년에 기자가 5천여 명의 무리를 끌고 조선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을 두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많은 양잠 기술자가 조선으로 옮겨 갔다는 설이 있다. 고조선 말기에 辰韓과 弁韓의 여러 자치국에서 이미 비단을 생산했다 (신채호/김종성: 조선상고사). 이 당시에 직조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비단 조각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한반도에서 비단이 생산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국과 로마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직접 무역을 하지 않고, 중간에 있는 파르티아와 쿠샨 사람들이 매개하여 이익을 남겼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세계에서 비단은 보기 드문 상품이었으나, 서기 1세기 초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였을 때는 이미, 로마 제국에서 비단 옷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중국이 푸른 유리를 로마에서 수입했다고 해도 자체 내에서 유리를 생산하였으므로 그 수입량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로마도 중국과 무역 적자 액수가 심각하게 컸던 것 같다.

이른바 해금(海禁)은 명대의 초기에 원나라의 잔재 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해적 행위를 없애려고 부과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은 중국인이 곧 대부분의 해적 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선과 일본도 이러한 쇄국 정책을 흉내내게 되었다.

  1. 비단 제조법

누에가 고치를 짓는 데는 사흘이 걸린다. 농부들이 누에 고치를 뽕나무에서 모은다. 상품, 중품, 하품으로 고치를 분류하고, 속이 죽은 고치나 물든 고치나 쌍고치 등 결함이 있는 고치를 가려낸다.

누에는 고치를 지은 후에 고치 속에서 번데기로 탈바꿈하고,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나오면 고치실이 끊어지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나방이 되기 전에 번데기를 죽여야 한다.
분류한 고치들을 실로 만드는 첫 과정은,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기 전에 고치를 섭씨 55 – 115도의 건열로 약 40분간 깨끗이 말린다. 이 과정에 번데기가 죽으며 고치가 부패하지 않게 된다.

마른 상태에서는 고치실이 풀려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치를 삶아 세리신을 연화시켜 고치실이 잘 풀리게 만든다. 고치를 물에 삶는 과정을 자견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세리신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생사를 얻는다. (한국 잠사 박물관).


이것이 고대의 산업 혁명이었다.

물 속에 있는 고치의 실 끝을 찾아내어 얼레로 감아서 비단 실을 뽑는다. 이 생사는 틀에 다시 감아 타래를 만든다.

큰 바퀴도 쓰였다.

베틀을 사용하여 생사로 직물을 짜면, 비단이 된다.

고대에도 품질 관리가 철저했다.

한 해에 양잠의 수확이 큰 것에 대하여 조상에게 감사를 드린다.

최종 생산품. 淸明上河圖의 일부.
  2. 장건의 비단길 개척
  秦의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2세 황제 胡亥의 실정으로 인하여 206년에 망했다. 기원전 133년에 漢 武帝는 마읍(馬邑)으로 흉노의 군대를 유인하고 30만 대군을 매복하여 흉노를 치려고 했으나, 흉노의 군신선우(軍臣單于)가 눈치채고 회군하여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벌할 생각이 있었으나, 투항한 흉노를 통해서 월지가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패하여 도망간 소식을 듣고서, 대월지국에 연합을 추진하는 사자를 보내고 싶어 사람을 모집했고, 이에 장건(張騫)이 자원하였다.
월지국은 어디로? 기원전 139년에 한무제는 장건에게 흉노 출신 감부(甘父)와 수행원 1백 명을 주어 월지국으로 보냈다. 흉노 땅을 지나다가 잡혀서 10년을 묵여 살았으나 탈출하여 월지국을 찾아갔다. 그러나 월지국은 한나라와 연합 작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변의 大夏國(박트리아)를 점령하여 살면서 흉노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장건은 한나라로 돌아오면서 흉노에 다시 붙잡혀 1년 동안 억류되었으나 내란으로 어수선한 틈에 다시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의 보고를 받고서 한무제는 페르가나, 박트리아, 파르티아와 무역을 시작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박트리아의 공주, 기원전 3천년 말 – 2천년 초기.


동시대. 박트리아의 공주.

한무제는 장건의 정보를 기초로 하여 흉노 정벌에 나섰고, 기원전 121년에 흉노는 한나라의 곽거병에게 항복한다. 흉노 정벌 이후에 한무제a는 기원전 119년에 장건을 烏孫(월지국 근처에 살던 유목 민족)에게 보낸다. 장건이 서역을 향하여 떠난 길을 후일에 비단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길을 통하여 중국과 서양의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3. 서양의 무역 적자
대플리니우스 (Pliny the Elder) 로마에서 비단은 금값에 맞먹을 정도로 비싼 상품이었다. 수입된 비단의 상당량은 코스 섬으로 들어와서 옷으로 만들어지고 로마의 여인들을 입혔다. 대플리니우스는 자연사(Natural History, 서기 77-79년)에 이 사치품을 사들이느라고 로마의 경제가 피폐해진 것을 한탄하는 글을 이렇게 적었다:

이제 우리는 천을 얻느라고 중국까지, 진주를 얻기 위하여 홍해의 깊은 바다까지 여행하고, 에메랄드를 찾아서 땅속 깊은 곳까지 샅샅이 뒤지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과 아랍 반도는 매년 우리 제국에서 1억 세스테르시우스나 빼앗아 간다. 우리의 사치 풍조와 여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거금을 낸다.

1 세스테르시우스(sestertius)는 오늘날의 가치로 10 – 20 달라 정도이니, 로마의 금 유출은 오늘날의 값으로 따지면, 매년 10 – 20억 달라 정도가 된다.

무역의 불균형이 너무 심각해서 로마의 상원은 로마의 여자들이 비치는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금하려고 했으나, 비단은 로마 세계로 계속 흘러 들어왔다.

  4. 해상 비단길
육로와 해로의 장단점 육로로 비단길을 통과하는 데는 낙타를 동원하여 1년이 걸리고 짐을 그다지 많이 실을 수 없었지만 중간에 머무르는 여러 곳에서 무역을 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바다의 비단길은 6개월이 걸리고 배에는 카라반보다 훨씬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인도양을 거치는 배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양쪽, 홍해나 페르시아 만에 짐을 부렸고, 이것은 다시 육로를 거쳐서 지중해에 도달하여 이탈리아나 유럽의 다른 도시까지 미칠 수 있었다.


해상 비단길

이슬람과 해상 무역로 서기 632년에 이슬람교 창시자 무하마드가 죽고나서, 4명의 정통 칼리파가 661년까지 아라비아 반도와 레반트에서 북으로 코카서스 지방과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이란을 지배하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661년부터 750년까지 이 아랍 제국을 통치했다. 이러한 정복 전쟁 때문에 육로를 거치는 무역보다 바닷길을 통한 해상 무역이 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한 해상 무역로에는 해상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동중국 해로의 역사는 3천년이 된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많은 중국인이 한반도로 피신하여 양잠하는 기술을 들여왔다고 한다. 이러한 신기술은 다시 일본으로 전달되었으나, 비단은 당나라 시대에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바다를 건너 직접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남중국 해로는 광저우에서 시작하여 인도양을 거쳐서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렀다. 중국은 비단과 차와 그릇을 수출했고, 말, 향료, 유리와 양털을 수입했다. 로마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에서 고급 유리를 생산하여 중국으로 수출했다. 로마의 유리 제품은 광저우 뿐 아니라 5세기에 신라의 경주에서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비단을 좋아했지만, 중국인에게는 양탄자가 인기였다.

명과 청대에 이르러 해상 무역을 금지한 결과 해상 비단길은 사라졌다.

남송 시대

남송 시대의 해상 무역로

원나라 시절  
원나라 시대의 해상 무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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