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키 (Thessaloniki) 구경

테살로니키 (Thessaloniki)는 오늘날 그리스에서 두번 째로 큰 도시이다.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서기 330 – 1453년)에서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여동생이자 필립 2세의 딸인 테살로니케(Thessalonike of Macedon)를 따라서 지었다. 테살로니키의 교외에 있는 버지나(Vergina)에는 필립 2세의 무덤이 있다.

1. 테살로니키의 역할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로마 사람들은 금(金)의 생산을 중단했는데,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 생산의 중단은 서유럽에서 거의 1천년 동안 지속되었던 경기 침체(recession)를 낳았고 이것이 또한 유럽의 암흑시대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래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키에서 금 생산이 계속되었고, 따라서 비잔틱 제국의 1천년을 더 버틴 경제적 요인이 되었다.

커져 가는 로마 제국이 황제 한 사람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디오클레시안(244-311년)은 서기 285년에 막시미아누스 (Maximian) 장군에게 서부의 통치를 맡겼고, 그의 본부는 지금의 밀라노에 있었다. 8년이 지난 뒤에, 디오클레시안은 로마 제국을 4등분하였다. 두 사람의 정제(正帝, augustus)가 서방과 동방을 따로 다스리고, 각 정제는 부제(副帝, caesar)를 부하로 두어 도움을 받았다.

서방은 막시미아누스(Maximian) 가 다스렸고, 부제는 콘스탄티우스 1세(콘스탄틴 대제의 아버지)였는데, 이들은 브리톤(대체로 영국)과 프랑스를 책임지었다.

디오클레시시안은 정제로서 터기, 팔레스타인과 에집트를 다스렸고, 부제인 갈레리우스(Galerius)는 일리리아(Illyria, 대체로 유고슬라비아 지방)과 그리스를 통치했는데, 이 지역은 오늘날의 발칸 반도에 해당한다. 로마는 버려 두고 각 4分主는 자기 지역에 본부를 두어, 무슨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급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

디오클레시안은 갈레리우스를 양자로 삼은 뒤에, 자기 딸과 결혼시켰다. 서기 305년에 디오클레시안이 은퇴하자, 갈레리우스는 니코메디아(Nikomedia)에서 정제임을 주장했다. 무슨 공적을 세우려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초기의 정벌에 실패했다. 그러나 두번 째 전쟁에서 298년에 페르시아 임금 나르세(Narseh)를 물리쳤다. 갈레리우스는 뒤이어 테살로니키로 본부를 옮기고 거기에 궁전을 지었다. 그 궁전의 유적이 테살로니키에 남아 있다.

2. 갈레리우스의 칙령
 

갈레리우스 황제는 죽기 전에, 311년 4월 30일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일을 했는데, 기독교 허용 칙령(Edict of Toleration of Christianity)을 내린 것이다. (2년 후에 콘스탄틴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가하였다.) 기독교의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궁전에 방화했다고 주로 갈레리우스가 주장하여, 네 황제( Diocletian, Maximian, Galerius and Constantius), 서기 303년부터 기독교도를 박해해 왔고, 갈레리우스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이 정책을 유지하였다.

갈레리우스는 중병이 들어 서기 303년 4월말이나 5월 초에 죽었다. 죽기 며철 전에, 4월 30일에 그는 기독교 허용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도를 박멸하려는 그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저희(기독교도)는 우리와 공화국과 저희의 안전을 위하여, 공화국이 모든 면에서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저희가 집에서 평안히 살수 있도록 우리의 권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wherefore, for this our indulgence, they ought to pray to their God for our safety, for that of the republic, and for their own, that the republic may continue uninjured on every side, and that they may be able to live securely in their homes.” (wiki)

어찌하여 죽기 며칠 전에 갈레리우스는 마음을 바꾸었는가?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아마도 마음 속에서 갈레리우스는 이렇게 추리했을지 모른다. “나는 저희의 신을 믿지 않지만, 어라, 손해볼 것 없지 않나? 나는 아무래도 죽을 터인데.” 또는 “혹시 신이 있더라도, 손해보지 않게 처리해야겠다.” 아니면, 기독교도 박해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벌을 내린다고 의심했을지 모른다. 혹시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가?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충분히 곤경(困境)에 빠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도움되는 근원에게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체험에서 사실이다.” (유란시아서 91편)

갈레리우스는 일생 동안 신을 믿지 않다가 죽게 되니, 한 번 기도해 본 것이 아닐까? 그런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을 듣고 용서했을까?

 3. 아리스토텔레스 광장 (Aristoteles Square)
  Hotel Electra

 

거리의 음악가

광장에서 공연하는 사람들

 4. 백탑(White Tower)
 

 

 5. 테살로니키의 금 생산
로마 제국이 서기 476년에 망하자, 로마인은 금 생산을 중단하였다. 군인들엑 더 이상 돈을 지불해야 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의 비잔틴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키, 두 곳에서 금화를 계속 찍었고, 이러한 계속된 금 생산의 비잔틴 제국을 1천년 동안 더 버티게 만든 경제적 요인이다.

 

6. 아이아 소피아 교회(Agia Sofia Church)
 

 

 7. 테살로니키에 로마 사람들이 세운 담
로마 사람들이 닦은 길 비아 에그나찌아(Via Egnatia)는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키를 연결했다. 이것이 테살로니키가 두번 째로 큰 도시로 성장한 이유인 듯하다. 테살로니키에는 담도 쌓았고, 후일에 이런 담은 강화되었다.

 

 

 8. 갈레리우스의 개선문
 

갈레리우스는 케자가 되자 테살로니키를 본부로 삼았다.

9. 갈레리우스의 로툰다(Rotunda)
로툰다는 처음에는 갈레리우스의 무덤이 될 예정이었으나 갈레리우스는 다른 곳에 묻혔고 콘스탄틴 대제가 로툰다를 교회로 만들었다. 후일에 (오토만 시절) 모스크가 되기도 하였다.

 

로툰다 근처의 시장에서 수브라키(Souvlaki)를 판다.

 10. 올림푸스 산의 디오니소스 수도원 유적
 

  신자들이 지원하지 않으면 수도원은 언젠가 무너진다.

 11. 올림푸스 산

산 가까이 있는 마을

 

 12. 디온(Dion, 옛 도시)의 유적
 

고대 디온에 있었던 공중 변소. 서기 3세기에 이들의 문화는 얼마나 앞섰는가?

원형 극장이 복구된다.

방어 벽

13. 비잔틴 문화 박물관 (Museum of Byzantine Culture)

가늘고 긴 암포라를 연결하여 하수도를 만들었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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