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여자 아이들을 가르친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에 베니스에서 태어 났다. 아버니 죠바니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는 성 마가 성당에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버지처럼 비발디는 성 마가 성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1696년).
당시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신부가 되는 것이 공짜 교육을 받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그는 신부가 되는 공부를 시작하여,1703년, 25살이 되어 신부로 서임을 받았다. 그러나 천식이 있어 미사를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 속한 피에타(Ospedale della Pietà) 병원에서 바이올린 선생으로 임명받았다.

병원의 상관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Francesco Gasparini)가 오페라 자곡가였고 비발디의 작곡 능력을 보고 바이올린 선생으로 고용한 듯하다. 붉은 머리털 때문에 붉은 신부라고 이름이 나 있었다.

1. 버림받은 아이들과 병원
초기의 작곡의 상당수는 고아원과 수녀원을 겸한 피에타 병원의 여자 아이들을 위하여 작곡한 것이다. 베니스에는 이러한 병원이 넷 있었고 교회에 부속되었다. 이 병원들은 전에 십자군을 돌보는 병원이나 호텔의 역할을 했는데, 십자군의 활동이 줄어들자 역할이 달라졌다.

Ospedale degl’Incurabili (불치자 병원)은 매독 환자, 고아, 창녀들을 받았고, Ospedale della Pieta는 버림받은 아이들을 받았으며, Ospedale di Santa Maria는 집없는 아이, Ospedale di San Lazarus e dei Mendicanti 는 문둥병자를 돌보았다.

베니스에는 사생아들을 이 병원에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창녀의 수는 2만 명이나 되었다. (요즘에는 악화되어 아기를 쓰레기 통에 버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병원에는 이런 아이들을 받는 스카페타(scafetta, 아기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서랍)가 문 앞에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어머니가 병원의 벨을 누르고 버리는 아기를 스카페타에 놓아두고 얼른 도망가면, 병원에 있는 직원이 나와서 아기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이것은 비밀 기록부에 저장되었다. 어떤 어머니는 나중에 다시 찾아올까 하여 표적이 되는 물건의 절반을 잘라서 함께 넣어 두었다. (어머니는 언제고 아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기록원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왼쪽 팔뚝에 P-자 (아마도 Pieta의 두문자)의 낙인을 찍었다.

각 병원에 들어온 어린아이들은 음악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고, 재주 있는 소녀들은 합창단에 들어가 정기적으로 공연하였다. 이러한 합창단의 인기가 높아지자, 버림받지 않은 아이라도 음악 재주가 있는 아이들을 받게 되었고, 또한 이들의 명성이 높아지자, 합창단을 구경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많은 사람이 베니스를 방문하였다. (Alison Curcio: Venice’s Ospedali Grandi: Music and Culture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병원에서 10살이 되면, 남자 아이는 직업 교육을 받고 15세가 되면 병원을 떠났다. 당시 베니스에는 큰 조선소가 있었고, 16000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었다.

대다수의 버림받은 아이들은 여아였고, 이들은 요리사, 청소부, 바느질 따위의 일을 배웠다. 16세기 중반부터 이 중에 소수, 재주 있는 여자 아이들은 합창과 여러 악기 훈련을 받았다. Figlie del coro (합창단의 딸)에 계속 남는 여자들은 음악 학교처럼 연주와 작곡 훈련까지 받았다. 병원에서는 이러한 음악 교육이 영적 훈련을 받는 데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다른 곳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음악 교육을 받았다.

고아원이라고 하지만 이 병원에는 귀족이 애인과 낳은 私生兒를 집에서 기를 수 없어 이 고아원에 흔히 맡겼다. 모두가 건강한 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익명의 귀족들이 자기 자식을 돌보라고 이 병원에 자금을 충분히 댔으며, 따라서 이곳에서 자라는 소녀들은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을 받았다. 피에타 병원에 6천 명까지 여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이 음악회에 공연할 때는 베일 뒤에서 공연하므로, 대중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에 대중 앞에서 여자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피에타의 직원은 한 때 200명이나 되었다. 당시에, 여자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결혼하든지 수녀원에 들어갔다. 물론, 병원의 목적은 이 여아들을 잘 교육시켜서 좋은 남편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길은 병원의 합창단에 음악 봉사자로 (inservienti della musica) 남아 있는 생활이었다. 자기보다 더 교육받은 여자를 아내로 얻으려는 남자들이 베니스에 드물었고, 여자들은 합창단에 남아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들은 1년에 최소한 100리라(lira) (약 20 두캣, $1200)를 벌었다고 한다.

이 병원들은 베니스가 버린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쳤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멘디칸티 (거지) 병원에서 공연한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나보니, 대개가 가난하고 얼굴이 추한 여자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어떤 여인은 끔찍하게 생겼고, 어떤 여인은 외눈박이였고, 어떤 여인은 점투성이었고, 얼굴이나 몸에 흠이 없는 여자 아이는 거의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2. 비발디의 작곡 정신
비발디는 피에타 병원에 (1703-1715년, 1723-1738년) 바이올린 선생으로 고용되었고, 여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1714년에는 합창단 지휘자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가 사임하였고, 비발디가 그 자리를 맡게 되어 이후부터 교회 음악을 작곡하게 된다. 콘체르토 450곡, 그리고 40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다른 음악가들은 영감이 떠오르면 작곡하고, 실제 연주할 때는 콘체르토이던 합창이든 그 음악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연주자나 가수를 골랐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와 반대로 비발디는 버림받은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작곡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남자 아이들은 물론) 여자 아이들은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을 시켜 긍지를 심어 주었고, 남이 부러워 할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들을 길렀다. 여러 아이가 솔로로 연주하는 부분이 있도록 여러 악기로 실험했고, 생도들은 여러 악기로 훈련을 받았다.

비발디는 각 여자 아이의 특성을 잘 알았고, 그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작곡했다. 오페라 그리셀다(Griselda)는 지로를 위하여 작곡했다. 오보에를 위한 곡이 여럿이 있는데, 이것은 펠레그리나를 위하여 작곡한 것들이다.

펠레그리나는 베이스(bass)로 시작했다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고, 나중에 오보에(oboe) 연주자가 되었는데, 62세가 지난 뒤에 다시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이가 다 빠져서 오보에를 불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비발디에 대한 비판
비발디에 대하여는 두 가지 비판이 있었다. 하나는 신부와 제자 지로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화려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1717년에 비발디는 만투아 시장, 필립 폰 헤쎈(Philip von Hessen of Hess-Darmstadt)의 초청으로 만투아(Mantua)에 2년 동안 일했다. 여기서 안나 지로 (Anna Giro)라는 가수를 만나는데, 이 여자는 그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로 많이 기용된다. 만투아에서 사계절(Four Seasons)이라는 콘체르토를 작곡하였다. 지로는 비발디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비발디는 지로가 그 누이 파올리나처럼 같이 사는 가정부였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의 희곡 작가 칼로 골도니 (Carlo Goldoni)는 비발디와 안나 지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이 신부는 재주가 탁월한 바이올린 주자이지만, 평범한 작곡가이다. 지로를 성악가로 훈련시켰다. 이 여자는 젊고 베니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가발 제조업자의 딸이다. 우아하지만, 아름답지 않고, 키가 작으며 아름다운 눈과 매력 있는 입술을 가졌다. 목소리가 작았지만, 여러 나라 말로 (불평 따위) 열변을 토했다.”

비발디가 오페라를 경영하면서, 돈을 만지게 되고 화려한 생활을 한 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업 경영에 필요했던 것 같다. 로마와 다른 여러 도시에 머무르기도 했으나, 비발디는 피에타 병원을 위하여 계속 일했다. 매 달 콘체르토 두 곡을 베니스로 보냈고, 한 곡에 1 두캣(ducat)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돈으로 1곡에 $60 정도를 받은 것이다.

그가 풍족했다면, 한 달에 두 두캣($120)을 받으려고 콘체르토를 두 곡씩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콘체르토 전체가 머리 속에 있다고 해도, 컴퓨터가 없던 당시에 작곡한 것을 악보로 옮기는 것은 순전한 노동이었다. 1500년 경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년에 100 두캣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Abagond)

비발디는 오페라도 많이 작곡하였다. 콘티에 따르면 “3개월 동안에 비발디는 세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둘은 베니스를 위하여, 하나는 플로렌스의 어느 극장을 위하여 오페라를 썼다. 이 오페라는 그 극장의 명성을 높였고, 비발디는 돈을 많이 받았다”

1730년에는 아버지, 그리고 제자인 안나 지로와 함께 프라그로 갔고, 거기서 오페라를 60여 곡이나 지었다고 한다. 1735년 후에는 봉급이 올라서 피에타 병원에서부터 1년에 100 두캣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돈으로 따지면 1년에 약 $6000를 번 셈이다.
 

4. 죽음
1930년 이후부터 50대가 된 비발디의 오페라는 인기가 차츰 떨어지게 되었다. 1738년에는 피에타 병원에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그의 후원자였던 필립 폰 헤쎈이 죽자, 교회는 비발디와 지로의 관계를 의심하여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비발디는 가난해진 것 같다. 1740년에 베니스가 불황을 겪게 되자, 비에나로 이사갈 생각으로 피에타 병원의 작곡가 자리를 사임하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6세(Charles VI, Holy Roman Emperor)를 만난 뒤에 그의 후원을 받아 비에나로 이사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황제가 곧 죽었고, 그에게 가난이 닥쳤다. 가난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듯 하다. 그는 비에나에서 얼마 있다가 1741년 7월 28일에 죽었다.

좋은 생각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 온다.

비발디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여자 아이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여 음악 교육을 시켜서 그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고 희망을 주었다. 그런 고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길렀으니, 하나님이 하늘의 음악을 내려 주어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비발디는 하늘의 음악을 얼핏 들었는지도 모른다.



18세기에 어느 무명의 이탈리 화가가 그린 유일한 비발디 초상화. Civico Museo Bibliografico Musicale, Bologna (볼로냐 시립 음악문헌 박물관)


비발디의 콘체르토를 연주한다는 광고. (성 마가 실내악 오케스트라)

Michael Sartorius(www.baroquemusic.org)를 참조하였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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