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西周) 시대의 청동기와 도기, 1부

중국의 주(周)나라는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로 나뉜다. 은 또는 상나라가 망한 해, 기원전 1046년부터 771년에 12대 유왕(幽王)이 미녀 포사(褒?)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봉홧불로 장난을 치고 신하들을 우롱하다가 견융(犬戎)에게 살해되고 주나라가 도읍을 西安에서 洛陽으로 옮긴 때까지를 서주시대라 한다. 그 이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를 동주시대, 또한 이 시대에 제후들이 강해져서 패권을 다투었음으로, 춘추전국 시대라고도 한다.

주나라의 무왕은 여러 개국 공신들에게 주위의 땅을 나누어 주어, 초기의 혼란기를 지난 뒤에는 안정되었다. 이 때는 농경사회요, 또한 商 시대와 함께 청동기에 속한다. 청동 제기(祭器)는 대체로 제사나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쓰였고, 청동을 무기로 쓰기에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청동 병기를 갖춘 군대를 일으키기가 힘들었고, 따라서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그 경제력이 미약했을 것이다. 그리고 청동으로 방패를 주조하면 너무 무거워서, 실용적이 아니었을 것이고, 후일에 겨우 동검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주 시대는 제후들 사이에 큰 전쟁이 없이 안정되었다. 농업에는 청동 도구가 아니라,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하였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서 철기가 많이 보급되고 제후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다. 조선 땅에서는 아마도 중국을 통해서 철기가 도입된 것 같으나, 그 속도가 느려서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망했다,

1. 주나라의 화폐

카우리(cowry) 조개, 대영 박물관. 중국에서 하(厦) 나라(기원전 2070 ? 1600년)와 商代(기원전 1600-1046년)에 돈으로 사용되었다.

?(술통 유), 대영 박물관, 글자가 술통처럼 생겼다. 

 

위의 술통 뚜껑 안쪽에 쓰여 있는 글자에 조개가 보인다. 돈과 상관이 있는 한자에는 으례히 貝가 들어 간다. 貧은 돈/재산을 나누면 가난해진다는 뜻으로 만든 글자인 듯하다.

신석기 말부터 물물교환이 등장했다. 물물교환이 성했으나 상 나라 때에 카우리 조개를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주대에도 조개를 사용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에 와서야 농기구를 본따서 만든 空首布와 平首布, 그리고 刀幣가 사용되었다.

맨 왼쪽에 머리가 있는 세 화폐(#28,29,30)는 尖足布, 다음에 발 폭이 넓은 두 화폐(#31,32)는方足布이다, 모두가 춘추시대에 주나라에서 쓰던 화폐이다. 마지막 동전(#34)은 진나라가 기원전 221년에 찍은 반냥전.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고, 半兩이라 새겨져 있다. 진시황은 종전의 조개돈 및 공수포, 평수포, 도폐 따위를 모두 철폐하고 화폐를 통일하였다. 반냥전은 가운데 구멍을 통해 많은 돈을 줄로 엮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어서 교역하기에 편리했다 한다.

진시황이 조개 돈을 폐지했다는 이야기는 그 때까지 조개 돈이 서주 시대를 지나 춘추전국 시대에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개 돈 외에도 물고기 모양의 돈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2. 서주 시대의 청동기
商代에는 제사에 치중하여 찬란한 祭器들을 많이 만들었고, 이 시대의 최고의 작품은 북경이 아니라 대만의 古宮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물론 사진은 금지). 장개석이 후퇴할 때, 좋은 것은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周代에는 같은 모양이지만 장식이 대체로 더 화려해진 듯하다.

제사에 쓰이는 정(鼎), 산프란시스코 미술관. 상시대의 정을 닮았지만, 그보다 장식이 더 정교해졌다.

壺(호), 제사에 쓰이던 술담는 호리병. 산프란시스코 미술관. 이것의 특징은 아랫 쪽이 축 처진 모양과 파도같은 무늬라고.

 

方彛 (방이(떳떳할 이)), 시카고 미술관, 제사 때 술 담는 그릇, 상나라 때부타 무늬가 더 화려하다.

壺, 시카고 미술관. 용과 뱀이 얽혀 있다.

壺, 제식을 위한 술 담는 호리병.

존(尊), 제사에 쓰이던, 높은 술잔. 입이 넓은 것은 술을 붓기 쉽게 하기 위한 것.

? (궤), 피나 음식을 담는 제사용 그릇.

?(궤), 곡식 담는 그릇, 임금을 위한 그릇. 스미소니안 박물관

? (궤), 피를 담는 제사용 그릇, 대영 박물관

광(?),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술 그릇.

壺, 제사에 쓰이는 술병.

 

서주 시대 (기원전 10-9 세기), 예식에 쓰는 청동종. 스미소니안.

 

제사 음식 담는 그릇, 서주 시대(기원전 10세기)

 
호, 제사용 술 담는 제기, 기원전 11세기.

 

방정(方鼎, 4각형의 정), 스미소니안.

3. 서주 시대의 도기
서주 시대의 도기는 모양이 잘 잡혀 있으나 도료의 색갈의 선택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료를 바르는 기술이 아직 잘 발달되지 않았던 듯하다. 흔히 유액이 서툴게 흐른 자국이 보인다. 후일의 宋, 아니 唐代의 도기보다도 훨씬 서툴다. 물론 색갈을 만드는 데 오랫동안 실험을 했을 것이다.

罐(관, 항아리) 모양의 도기, 홍콩 미술관. 도료를 바르지 않았다. 마름모꼴의 무늬가 있다. 도료를 바르지 않으면 식품과 진흙이 화학작용을 일으키겠지.

豆, 음식 담는 그릇, 때로는 덮개가 있기도 하다. Xibaolou 박물관.

항아리.

碗(주발 완)

盂(바리(밥그릇) 우), 국이나 찌개를 담았던 듯

서주시대는 청동기(靑銅期)였으나 청동 제품은 귀족들의 물건이었고, 일반 서민의 손이 미치지 못했다. 서민들은 서툰 도기로 음식을 담아 먹고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대에 화폐가 생긴 것은 시장경제의 물량이 커졌다는 것, 농경사회의 성장으로 국민 소득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도 오늘날의 돈 가치로 따져서 서민의 소득은 1년에 1인당 2-300 달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오지(奧地)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준일 것이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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