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실체 (3RR)

  99편, 종교의 사회적 문제 (멜기세덱)

100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멜기세덱)

101편, 종교의 참 본질 (멜기세덱)

102편, 종교적 믿음의 기초 (멜기세덱)

103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멜기세덱)

104편, 삼위일체 개념의 성장 (멜기세덱)

105편, 신과 실체 (멜기세덱)

106편, 실체의 우주 수준 (멜기세덱)

85편에서 91편까지의 논문들은 종교의 진화에 관하여 주로 찬란한 저녁별이 쓴 글이다. 99편에서 103편까지 이 다섯 편은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종교의 본질ㆍ믿음ㆍ체험에 관하여, 쓴 글이므로 이를 흔히 ‘종교 논문집’으로 부른다. 계속된 3편의 논문은 삼위일체 개념, 신과 실체에 관하여 작성한 글이다.

종교는 변하는 사회의 조건에 따라 자체를 수정해야 살아남지만, 제도화된 종교는 그것이 지원하던 사회의 유기적일 일부가 되기 때문에 사회의 재건설을 방해하는 영향력이 된다. 99편의 요점은 개별 신자가 사회 운동을 지지할 자유는 있어도, 신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사회 및 경제 운동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100편은 개인의 종교적 성장에 관한 글이다. 올챙이가 하루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히 사는 것이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의식함에 달려 있다. 성장의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을 낳는다.

하나님(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좋은 방법은 사심 없는 기도요, 고행이나 금식이 아닐 것이다.

101편은 종교의 참 본질에 관한 글이다. 종교는 시간 세계에서 영원한 실체를 맛보는 체험이요, 종교적 체험은 인격자가 살아남는다는 확신을 낳는다. 진화된 방법으로 종교적 진실을 깨닫는 과정에 말할 수 없이 긴 세월이 들 터인데, 세월을 절약하기 위하여 계시를 정기적으로 인류에게 준다.

지능이 있는 자는 그가 물질 우주의 일부인 것을 알지만, 과학으로 원인과 결과를 아무리 살펴도 과학적 방법으로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비물질적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하며, 영적으로 외롭다는 느낌을 치료한다.

102편은 종교적 믿음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가 설명하는 글이다. 어떤 물질적 표징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 조절자는 완전(하나님)을 찾으려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믿는 사람은 불멸을 이미 얻은 것처럼 이 현세의 생활에 반응한다.

계시는 신이 계신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알려준다. 사람은 일찍부터 그가 혼자가 아닌 것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자의식이 생겨난다. 믿음은 하나님 의식으로 이끈다. 오로지 믿음으로, 체험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103편은 종교적 체험의 실체에 관한 글이다. 어린아이가 도덕적 충동을 느끼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가리킨다. 아이의 머리 속에서 처음에 일어나는 싸움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원시인은 희생물을 바치곤 했다.

죄를 지은 느낌은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자아의 욕구와 이타심의 욕구가 절충될 때에야 인간은 행복을 얻게 된다. 이상의 추구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104편은 삼위일체 개념과 일곱 가지 삼자일치 및 두 가지 삼극일치의 차이를 설명한다.

105편은 스스로 계신 이와 실체에 관한 논문이다.

실체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스스로 계신 이 안에 “처음” 의지가 표현되고 “처음” 반응이 일어나는 시간을 이론적으로 가정해야 한다. (신과 물질 우주 등의) 실체는 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성으로부터 스스로 분화(分化)된 것,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 등으로 분화된 것이다.

과도기에 스스로 계신 이는 일곱 절대자(첫째ㆍ둘째ㆍ셋째 근원 중심, 파라다이스, 신ㆍ무제한ㆍ우주 절대자)와 근원적 관계를 가지며, 이들은 실체의 기초가 된다.

유한 수준에서 실체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i) 최상위ㆍ궁극위가 솟아난다.

(ii) 초우주가 물리적으로 조직된다.

(iii) 하보나에서 완전한 인간, 초우주에서 완전해진 인간이 출현한다.

(iv) 최상위와 함께 완전한 자와 완전해진 자가 통합된다.

(시공 세계 바깥에서) 초월적인 것들이 진화되며, 이것은 궁극위의 영역이다.

 

106편은 유한한 실체(유한자 및 물건)의 일곱 단계를 설명한다.

제1 단계는 유한 기능의 통합이며, 1차 수준에는 날때부터 완전한 인격자와 처음부터 완전한 하보나가 있고, 2차 수준에는 시간이 걸리고 체험을 거쳐서 완전해지는 인격자와 빛과 생명 시대에 이르는 초우주가 있다.

제2 단계는 칠중 신이 권능을 얻음으로 필사자들이 완전하게 되고 최상 존재가 대우주의 진화를 완성시키는 단계이다.

제3 단계는 전능 최상위의 출현으로 제1 체험적 삼자일체(궁극 삼자일체 = 최상 창조자들ㆍ최상 존재ㆍ총 우주 건축가들)가 완성되는 단계이다.

제4 단계는 궁극위가 통합하는 단계. 총 우주 전체를 지휘한다.

제5 단계. 최상위와 궁극위가 솟아나서 제2 체험적 삼자일체(즉 절대 삼자일체=최상위ㆍ궁극위ㆍ우주 운명 종결자)의 기초를 놓는다. 하보나ㆍ대우주ㆍ총 우주의 진화가 끝나야 절대 삼자일체가 완성된다.

제6 단계. 절대 삼자일체의 결과로 신 절대자(절대자 하나님)가 성격화될 것이라 추측된다.

  99편, 종교의 사회적 문제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종교가 이 세상의 제도와 관련이 가장 적을 때, 종교는 사회에 최대의 직무를 이행한다.

종교의 주요한 문제는 정치 및 경제 문화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에서 악을 선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영속시키고, 그 문명을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새 사회 질서를 창조하거나 오래 된 질서를 보존하는 데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생활 조건이 급속히 바뀌어, 제도의 수정은 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종교는 이 변하는 사회 질서에 대하여 적응을 서둘러야 한다.

1. 종교와 사회의 재건 기계의 발명과 지식의 보급은 문명을 수정하고 있다. 인류는 조정하고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도덕적 안정과 영적 진보를 위하여, 변하는 조건 하에서 힘찬 영향력이 되어야 한다.

사회라는 배는 전통의 보호를 받던 아늑한 만(灣)에서 바깥으로 나왔고, 거친 바다로 뱃길을 떠났다. 도덕 기준이 적힌 해도(海圖)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종교적으로 안내하는 나침반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아야 한다.

종교는 새 임무가 없지만, 변하는 인간 상황에 안내자이자 조언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다.

종교는 진보의 효소들이 문화적 맛을 파괴하는 것을 방지하는 소금으로서 작용해야 한다.

과거에는 상층 계급이 무력한 하층이 겪는 고통에 귀를 막고 있어도 종교가 수동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하층 계급이 무지하지도 정치적으로 무력하지도 않다.

종교는 사회의 재건설과 경제의 재조직에 유기적으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종교의 정신은 영원하지만, 사전(辭典)이 수정될 때마다 다른 표현으로 진술되어야 한다.

2. 제도화된 종교의 약점 제도가 된 종교는 사회의 재건설과 경제의 재조직을 지도할 수 없으니, 바로 그 체제의 유기적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밀라노 대성당

그런 종교가 먼저 자체를 개혁하지 않고는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 기존 질서의 필수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가 근본적으로 재건되기까지, 그런 종교는 자체를 다시 만들 수 없다.

종교가는 사회에서, 산업에서, 정치에서 개인으로서 활동해야 하지만, 집단이나 정당이나 기구(機構)로서 활동해서는 안 된다.

집단적 종교 활동은 종교 운동의 육성에 노력을 국한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형제로서 사랑하려는 소망을 제외하면, 사회를 재건하는 과제에 종교가는 종교가 없는 자보다 더 가치가 없다.

제도화된 교회는 기존의 정치ㆍ경제적 질서를 찬양함으로 지난날에 사회에 소용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살아남으려면 교회는 그런 활동을 그쳐야 한다.

제도화된 교회에 유일하게 적절한 태도는 비폭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현대 종교의 문제는 자체가 전통이 되고 제도화되도록 버려두었기 때문에,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 대하여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처럼 행하려고 애쓰는 체험에서 얻은 지혜를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전해 준다.

3. 종교와 신자 초대 기독교는 국내의 분규와 경제 연맹에 전혀 매이지 않았다.

제도화된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정치 및 사회 구조의 유기적 일부가 되었다.

하늘나라는 사회 질서도 경제 질서도 아니요, 하나님을 믿는 개인들의 영적 형제 단체이다.

신자들은 사회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고, 국가의 불공정한 처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경제적 견해를 무시하지 않고, 전제 정치에 대하여 감각이 무디지도 않다.

높은 문화를 가진 문명은 이상적 부류의 시민을 요구하며, 다음에 그러한 시민이 경제 및 정치 제도를 통제할 수 있는 적당한 사회적 장치를 요구한다.

지나친 거짓 감정 때문에, 교회는 불운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봉사해 왔고, 이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바로 이 감정은 종족에서 퇴화된 핏줄을 영속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인식되지 않은 종교적 동기가 사회의 재건에 큰 역할을 한다. 이 종류의 종교 활동의 큰 약점은 공개된 종교적 비판을 받고 자기 수정(修正)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설적 비평으로 단련받고, 철학으로 확대되고, 과학으로 정화(淨化)되고, 충성스러운 친교로 자양분을 받지 않으면, 종교는 성장하지 않는다.


체르토사 디 파비아 수도원

전쟁시에 싸우는 나라가 종교를 군사 목적에 팔아넘기는 것처럼, 종교가 왜곡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종교는 다음 방법으로 이 세상과 결속을 피할 수 있다.

(i)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철학.
(ii)
어떤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연합에도 매이지 않는 태도.
(iii) 사랑으로 친교 범위를 확대하는 것.
(iv) 영적 통찰력을 기르는 것.
(v) 과학적 태도로 광신을 방지하는 것.

신자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종교 외에 어떤 것에도 아랑곳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누구나 개별 시민으로서, 사회나 경제를 재건하는 운동에 지도자가 되어도 좋다.

이렇게 사회에 봉사하도록 개별 시민을 인도하기 위하여, 충성심을 북돋아 주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4. 과도기의 어려움 진정한 종교는 신자를 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인간 사회를 보는 통찰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종교 집단의 형식화는 그 집단이 추진하려는 가치 기준을 파괴하는 일이 흔하다.

종교는 아이들과 함께 가족 생활을 조화시키는 약이다. 아이들 없이는 가족 생활을 누릴 수 없다.

개인의 인품을 개발하고 조화된 인격을 키우려면, 종교는 표준화되어서는 안 된다.

체험을 평가하고 가치 기준으로 쓰이려면, 종교가 판에 박혀서는 안 된다.

사회적ㆍ경제적 성장에 무슨 격변이 있는가에 상관 없이, 종교가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이 지배하는 체험을 개인 속에서 키워준다면 진정하고 가치가 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가 행위를 결정하고 그 성과를 지배한다.

20세기의 불안한 시대에, 경제적 격변, 사회 문제의 역류 속에서 허다한 남녀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전례 없는 과학의 발전과 직면하여, 사람들은 영적 침체에 빠져 있다.

사람의 큰 영적 위협은 부분적 진보에 있으며, 두려움의 종교를 버리면서, 사랑의 종교를 즉시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과도기에는 반드시 혼란이 따르며, 다음 세 가지 종교 철학 사이에 투쟁이 끝날 때까지, 종교 세계에 평안이 거의 없을 것이다:

(i) 많은 종교에서 심령 현상을 믿는 것.

(ii) 여러 가지 철학의 인도주의 및 이상주의적 믿음.

(ii) 과학 분야의 기계론 및 자연론 개념.

이 세 가지 부분적 접근법은 종교ㆍ철학ㆍ우주론의 계시적 발표로 궁극에 조화되어야 한다.

5. 종교의 사회적 모습 종교는 개인의 영적 체험(하나님을 아는 것)이지만, 이의 필연적 결과는 타아(他我)들에 대한 자아의 조정이 따르는 것이며, 이것은 종교 생활의 사회적 모습을 포함한다.

사람이 사교적인 사실은 종교 집단이 생길 것을 보장한다.

참 종교는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이고, 사람이 너희 형제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의 종교는 인류를 움직이는 가장 힘찬 영향력이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완전하라고 인류를 불렀다.

사람이 온통 타락했다는 교리는 종교가 사회에 영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줄였다.

예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선언함으로 사람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종교적 체험은 일상 생활에서 어김없이 “영의 열매”를 맺는다.

사람들은 믿음대로 어떤 종류의 종교 집단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신자들은 같은 이상과 목적 때문에 실제로 협동할 것이요, 같은 신학 관념이 사람의 협동을 얻지는 않는다.

신약은 믿음이 바라는 사물의 본질이요, 보이지 않는 사물이 있다는 증거라고 선언한다.

원시인은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말이 아니라, 춤으로 표현하였다.

현대인은 많은 신조를 생각해냈다.

미래의 신자들은 종교를 생활에서 실천하고,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추종자들이 어떤 형식의 말씀을 외우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무슨 일을 하라고 (공동체의 저녁을 먹으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지난 시대에 종족의 깨우침에 기여한 사람들이 역사적 지도자였던 것을 부인하라고 요구할 때, 기독교인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르는가?

6. 제도적 종교 여러 종파로 갈라지는 것은 제도적 종교의 질병이다.

종교가 없는 교회보다, 교회가 없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 낫다.

이것이 집단 종교 활동의 목적이다:

종교에 충성함을 표현한다,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의 유혹을 크게 만든다,
최고의 가치 기준의 매력을 키운다,
사심 없이 친교하는 봉사를 향상한다,
가족 생활의 잠재성을 영화롭게 한다,
종교 교육을 촉진한다,
지혜로운 조언과 영적 안내를 마련한다,
모여서 예배보는 것을 격려한다.

살아 있는 종교는 우정을 격려하고, 도덕을 보존하고, 이웃의 복지를 촉진하며, 기본적 복음의 전파를 수월하게 만든다.

종교가 제도화됨에 따라서, 종교가 선을 행할 힘을 줄어들고, 악을 행할 가능성은 늘어난다.

형식화된 종교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믿는 관념이 경직된다.
세속화의 증가와 함께, 기득권의 축적.
진실의 표준화.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봉사하는 옆길로 빠진다.
지도자들이 봉사자가 아니라 행정가가 되는 성향.
다른 종파와 경쟁하는 파벌을 만드는 경향.
교회 권한이 사람을 억압하는 경향.

“선민”의 태도가 생기는 것.
종교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현재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과거을 존중하는 경향,
세속 기구의 기능과 얽히는 것.
여러 종교적 계급의 차별.
다른 종파의 정통성을 판결하는 재판관이 되는 것.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유익한 말씀을 차츰 잃어버리는 것.

7. 종교의 기여 교회와 기타 종교 집단은 세속의 활동에 초연해야 하지만 사회의 제도적 조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회 재건 활동에서 종교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환경이 급변하는 와중에서 인간은 멀리 내다보는 시각(視覺)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통치를 명상하고 현실을 헤아리지 않으면, 사람은 현세의 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하거나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서로 의존하는 경제와 형제다운 사회는 궁극에 형제 정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적 필요는 사람을 현실에 묶어 놓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사람이 항상 진보하는 시민이라는 영원한 현실을 잊지 않게 만든다.

   
  100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종교는 각 사람의 진보를 촉진함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든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각자는 더욱 진보한다.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고역(苦役)을 귀중한 일로 만든다.

1. 종교적 성장 사람의 성숙도는 개인의 쾌락 대신에 더 고상한 의미를 찾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영적으로 침체되는 위험에 빠져 있다.

어휘가 늘어난다고 인품이 성장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상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성장을 가리킨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 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하루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히 사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모든 보통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가 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겪는 개인적 체험이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은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종교적 성장은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임을 가리킨다.

2. 영적 성장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 영적 세력과 연락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계속 맺는 데 달려 있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울러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의식하는 데 달려 있다.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리고 나서 가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선의 종교는 인격의 지성ㆍ상물질ㆍ영 수준에서, 즉 지성에 대하여,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작용할 수 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신에 도달한 정도, 조절자와 조화된 정도를 측정한다.

자아를 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유일하게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은 신답고, 영적이고, 영원하다.

인간은 육체의 기쁨을 즐기고 인간적 사랑의 만족감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멸의 인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기초는 아니다.

인간의 곤경ㆍ이기심ㆍ잔인ㆍ미움ㆍ악의ㆍ질투로 혼이 시련받을 때, 너희는 마음 속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조절자의 요새가 있다는 확신으로 안심해도 좋다.

가장 소중했던 포부가 물거품이 되고 간절한 꿈이 깨어지는 동안에 차분히 구경할 수 있다.

3. 최상의 가치에 관한 여러 개념 종교는 정신의 지극한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시중드는 데 자아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하나님이란 낱말은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을 가리킨다.

혼자서만 누리는 이기적 기쁨은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가치 기준은 결코 정지(靜止)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가치 기준은 언제나 실재하면서도 잠재한다―현재 있는 것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연결하면 성장이 된다.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어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성장은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은 자란다.

사랑을 만들어내거나 돈으로 살 수는 없고, 사랑은 자라야 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우주 기법이다.

4. 성장의 문제 새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로지 갈등 속에서 솟아난다.

종교적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아무런 성장이 있을 수 없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지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非靈)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지성은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사람은 건강과 위생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만, 행복에 관해서는 거의 깨우친 것이 없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낳는다.

네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면, 너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짜증나게 하는 이웃을 일단 이해하면, 너는 너그러워질 터이고, 너그러움은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어 사랑이 될 것이다.

너희의 원시 조상 한 사람을 상상해 보아라 ―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러운 뚱뚱이이며,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곤봉을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씩씩거린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사람의 신다운 위엄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을 확대해 보자. 활기가 생긴 이 인간 앞에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 두 그림에서 똑같다.

오직 이 둘째 스케치에서 너희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한 사람 더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잘 번진다. 진정하고 사심 없는 사랑이라야, 참으로 전염된다.

5. 감화와 신비주의 세상에는 길 잃은 혼이 가득하다.

종교적 권한에 복종하는 대신에 어떻게 생활 철학을 세우는가 배운 사람들이 너무 적다.

강의 바닥이 강은 아니지만, (강을 지탱하는) 강 바닥을 무시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통하여 사람이 성장하므로, 이 경로(사람의 성장을 돕는 이 상징)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종교적 성장의 발걸음은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안정된 길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빠진 처지로부터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이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바울처럼 위기에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 많은 신자가 갑작스러운 갑화 없이 영적 진보를 겪었다.

종교적 감화와 연결된 현상의 대부분은 심리적 성질이 있지만, 영적 체험이 이따금 일어나기도 한다.

상의식 수준은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지대이다. 한 가지 큰 위험은 놀라운 꿈이나 환상과 함께, 신비스러운 체험을 신이 인간과 접촉하는 것이라 잘못 여기는 것이다.

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더 좋은 방법은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리라.

지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啓示)요,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종교적 백일몽에 잠기는 습관은 현실 도피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격이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황홀경 같은 상태를 종교적 체험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이보다 건전한 태도는 신을 예배하고 감사드리는 기도에 있다.

육체의 피로, 금식, 성욕 충동 따위가 신비스런 상태를 촉진한다.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결코 그런 방법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6. 종교적 생활의 표시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신자가 자신과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성실한 신자는 초인간적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의식한다.

초인간적 이상을 달성하려는 노력의 특징은 참을성ㆍ인내심ㆍ불굴ㆍ관대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요, 봉사하는 인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존재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종교 생활의 놀라운 표시 중의 하나는 숭고한 평안이니,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이다.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되어 있다.

승리하는 영광을 깨닫고 보장받는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최상위의 실체를 깨달은 신자의 의식 속에 거한다.

계시 종교는 진정할 뿐 아니라 우수하다. 계시를 받아 영적 시력이 확대되면, 사랑과 헌신은 새 수준에 이른다.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차이점은 새 품질의 신다운 지혜이다. 이 지혜가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더해진다.

7. 최고의 종교 생활 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른 동안에 얻은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이다.

어떤 사람(빌라도)은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그의 강건한 인품은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실을 가르친 그대로 예수는 진실을 실천하였다.

그의 세대에게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런 진실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분별이 있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비겁하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했으니, 인품이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에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모든 민족에게 그의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일렀다.

그는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실망에 면역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

때때로 슬픔의 잔을 깊숙히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다.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101편, 종교의 참 본질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는 야만인이 원시적 두려움에 빠진 상태로부터 나중에 문명화된 필사자가 신앙으로 해방을 얻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식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종교가 겉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은 인간 사회의 윤리적ㆍ도덕적 운동력에 힘차게 영향을 받는다.

믿지 않는 물질 지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적 논리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며, 믿는 인격자의 믿음은 이러한 논리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종교는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1. 참된 종교 참된 종교는 이치로 타당함을 밝히는 철학 관념의 체계가 아니다.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다.

종교는 시간 세계에서, 아직 육체를 입은 동안에 영원한 실체를 맛보는 체험이다.

생각 조절자는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특별 장치가 전혀 없다. 필사자의 정신 작용을 통해서 이러한 체험을 겪을 수 있다. 이것이 조절자가 그 물질 지성과 교통하기가 어려운 것을 설명한다.

조절자는 느낌이나 감정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영적 생각 분야에서 필사자와 접촉한다. 너희를 하나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너희의 생각이지, 느낌이 아니다.

하나님을 헤아리고 조절자의 소리를 듣는 지성은 순수한 지성이다. “아무도 거룩하지 않고서 주를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시각(視覺)이나 느낌이 아니라, 믿음과 통찰력을 통해서 종교는 살아 있고 번성한다. 종교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현실을 맛보는 체험이다.

종교는 물질적 우주론의 산물이 아니요, 신비스러운 명상에서 태어나지 않고, 혼자 숙고함으로 생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종교는 늘 얼마큼 신비스럽고, 논리로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종교적 체험은 결국 하나님 의식, 그리고 믿는 인격자가 살아남는다는 확신을 낳는다.

계시의 빛을 받으면 도덕적 성품이 깊이 영향을 받아, 사람의 지성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권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지에 이른다.

2. 종교적 사실 종교적 사실은 보통 인간들이 겪는 종교적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겉보기에 자연 과학, 그리고 종교에 관한 신학은 서로 반대되는 듯이 보인다.

계시는 이 두 가지,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여 설명하며, 무한자가 물질 속에서, 어떻게 그의 계획을 성취하는가 필사자가 던지는 질문을 인간의 체험 속에서 대답한다.

이성(理性)은 과학의 방법이요, 믿음은 종교의 방법이며, 논리는 철학이 시도하는 기법이다. (하늘에서 주시는) 계시는 인간이 상물질 관점이 없는 것을 보상해 준다.

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첫째 원인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첫째 원인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인 것을 깨닫는 데는 종교적 믿음이 필요하다.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을 믿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i) 깃드는 생각 조절자가 어떻게든 머리에 떠올린 희망.

(ii) 진실의 영이 애를 쓰거나, 신다운 아들이 자신을 수여하거나, 기록된 말씀을 내려 줌으로 진실이 계시되는 것.

과학은 첫째 원인을 가정하면서 탐구를 그친다. 종교는 하나님을 확신할 때까지 믿음으로 비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종교에서는 인격자가 살아남도록 하나님이 보살핌을 거리낌없이 믿는다. 계시는 철학조자 해내지 못한 일, 과학에서 첫째 원인과 종교에서 하나님은 같은 신인 것을 확인한다.

이치는 과학을, 믿음은 종교를 증명하며, 논리는 철학을 증명한다. 계시가 타당한 것은 인간의 체험이 확인한다.

물질에 에너지를 더하면, 어떤 조건 밑에서 생명이 되어 겉으로 보인다. 이처럼 자연 생명은 일시 지속되지만, 잠시 뿐이다. 자연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믿을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믿음은 혼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낸다. 계시는 사람이 그 하나님을 자연 속에서 볼 수 있게 만든다. 지음받은 자와 창조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자연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으면, 자연의 연구는 우주를 영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신기원(新紀元)의 현상으로서, 계시는 정기적으로 일어난다. 필사자의 인격 안에서, 조절자로서, 진실의 영으로서, 성령으로서 신이 활동하며, 이 세 가지 재산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 최상위를 위한 봉사로서 하나처럼 작용한다.

참된 종교는 실체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요, 무슨 독단적 교리에 지적으로 찬성만 하는 것이 아니다.

조절자는 신다운 완전을 찾는 갈망을 마음 속에서 일으킨다.

종교를 깨닫는 것은 학문이나 논리에 의존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큰 성현이 속세의 지혜가 없었던 것을 설명한다.

비슷한 체험을 가진 동료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입증하려는 논의가 필요 없고, 한편 어떤 논리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3. 종교의 특징 종교는 생명력이 강하여, 배움이 없는 곳에서도 지속한다. 종교적 흥망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윤리와 도덕 의식이다.

영적 통찰력은 아버지의 선물, 생각 조절자와 관련하여 우주 지성이 부여한 것이다.

혼의 지능은 창조 영이 준 선물이다. 진실의 영은 수여 아들이 사람의 아들딸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는 동안 싹트는 영 인격을 조절자가 소유하면, 자연사를 겪은 뒤에 인격이 살아남는다.

움직임이 그치고, 물질과 영의 협동 관계가 분리될 때, 영에 기원을 가진 혼은 인간의 체험과 결합하여, 물질 자아의 분해를 견디고 살아남는다. 진정한 영적 믿음은:

(i) 동물 성향이 있어도, 윤리와 도덕이 진보하게 만든다.

(ii) 쓰라린 패배를 겪고도, 하나님이 선함을 신뢰하게 된다.

(iii) 역경을 당하고도 용기와 자신감을 가진다.

(iv) 육체의 고통이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함을 지닌다.

(v) 지독히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도, 인격의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vi) 사정 없이 잔인한 운명을 겪는 듯 보여도, 신을 의지하는 태도를 지킨다.

(vii) 온갖 반대 논리에 부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킨다.

(viii) 잘못된 과학적 가르침에도 상관 없이, 혼이 살아남는 것을 계속 믿는다.

(ix) 복잡한 현대 문명이 지워준 짐과 상관없이, 살고 승리한다.

(x) 이기심과 사회적 대립이 있어도, 이타 정신을 유지한다.

(xi) 죄악의 존재와 상관 없이, 신의 인도하심을 꿋꿋이 믿는다.

(xii) 어떤 일이 있어도, 줄곧 하나님을 섬긴다.

세 가지 현상으로 우리는 안에 신의 영이 계심을 안다. 첫째로, 개인의 체험으로, 둘째로, 개인과 종족에게 주는 계시로, 셋째로, 이 12가지 영적 성취가 보이는 바와 같이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드러내는 것으로 안다.

4. 계시의 한계 너희 세계가 물리적 기원에 관해서도 무지하니까, 때때로 우주론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반드시 앞날에 문제를 일으켰다.

계시하면서 지켜야할 법칙은 수고하여 얻지 않은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을 금지함으로 우리를 몹시 방해한다. 계시의 일부로서 어떤 우주론을 발표해도 시간이 지나면 못쓰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앞날의 학자들은 계시 안에 발표된 우주론에서 오류를 발견하기 때문에, 계시에 포함된 종교적 진실도 함께 던져 버릴 유혹을 받는다.

인류는 우리가 상관들이 내린 지침에 엄격한 제한을 받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계시하는 기록 속에 사람이 수고하여 찾아내지 않는 사실을 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 계시에 담긴 우주론은 영감을 받아 쓴 것이 아니다. 신이 준 통찰력(조절자)은 선물이지만, 인간의 지혜는 진화되어야 한다.

결국, 종교는 그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우주론을 언급하는 계시는 영감을 받아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일시나마 다음과 같이 지식을 뚜렷이 설명하므로 가치가 있다.

(i) 오류를 없앰으로 혼란을 줄인다.

(ii) 이미 알려졌거나 곧 알려질 사실과 관찰을 조정한다.

(iii) 신기원의 거래들에 관하여 잃어버린 부분을 회복한다.

(iv) 달리 얻은 지식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준다.

(v) 영적 가르침을 비추는 방법으로 우주 자료를 제시한다.

5. 계시로 확대된 종교 (제4, 제5 계시와 같이) 계시는 진화 방법으로 진실을 깨우치는 작업에서, 말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며, 종교는 오직 가치 기준에 관여한다. 그래도 종교는 두 단계에서 겉으로 나타난다:

(i) 진화로 생긴 종교. 원시적 예배의 체험. 지성에서 파생된다.

(ii) 계시된 종교. 인격이 살아남고, 궁국에 신에 도달하는 것을 믿는 것. 진화된 종교를 계시로 확대시키는 것이 계획이다.

철학도 과학과 종교와 마찬가지로, 어떤 가정을 두고 전개해야 한다.

(i) 물질인 몸.

(ii) 인간에게 무언가 초물질 단계가 있는 것.

(iii) 인간의 지성이 물질과 영 사이를 연결시키는 작용.

논리도 감정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가 아니다.

진화 종교는 신을 경배하는 버릇을 육성하는 지성 보조자가 성취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수여 영들은 계시 종교를 후원하며, 황금률을 강조한다.

첫째 단계: 진화된 종교는 온통 믿음에 의존한다.

둘째 단계: 계시된 종교는 믿는 것을 확신하게 할 뿐 아니라, 계시된 실체들을 체험하게 한다.

종교에서 셋째 단계는 상물질적 진보이다. 너희는 (경험적) 최상의 가치, 신의 선함, 궁극의 운명을 알게 될 것이다.

6. 진보적 종교 체험 살아남은 뒤에야 계시 종교의 상물질 단계가 시작된다. 이 단계에 신을 예배하려는 욕구가 따르며, 최상위, 궁극위까지도 의식할 수 있다.

물질 수준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영 지위를 얻을 때까지, 조절자의 도움이 있어야 (불완전한 세계의 하나님) 최상위가 사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덕적 인격은 상물질 인격, 영 지위의 선구자이다.

진화로 얻은 지식은 오직 원형질의 기억 물질이 축적된 것이고, 가장 원시 형태의 생물 의식이다. 동물은 지식이 있지만, 오로지 사람이 지혜를 키울 능력을 소유한다. 생각 조절자와 진실의 영의 도움으로, 진실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소용된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을 때까지 진화된 종교에 지배되어 살았다. 그 이후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까지, 예수는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로 일을 해 나갔다. 부활한 뒤에는 상물질 생명을 거쳤다.

깃드는 조절자와 일체가 되는 것, 사람과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 통합하는 것은 사람을 최상위의 일부가 되게 만들고, 영원한 생득권을 보장해 준다.

생각 및 결정, 논리적 이상을 조정하는 것은 올바른 인품을 소유하게 하며, 영적 현실에 친숙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예수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보여주었다:

(i)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고, 물질의 사슬을 벗어나게 한다.

(ii) 진실이 사람을 해방한다.

(iii)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를 벗어나게 한다. 모든 우주 생물이 형제이다.

(iv) 하보나의 조화와 파라다이스의 완전을 깨닫고 자아의 불완전을 벗어나게 한다.

(v) 최상위 지성에 도달하여, 자의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

(vi) 시간 세계를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vii) 유한을 벗어나게 한다. 신과 하나가 되고, 최후자 이후 수준에서 궁극위를 찾으려고 애쓴다.

이 일곱 가지 구원은 우주의 아버지를 만나는 체험을 겪는 것과 대등하다.

예수의 믿음을 이용하여 인간은 시간 세계에서 영원의 실체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했고, 우리 형제들은 예수를 따라갈 수 있다.

7. 개인의 종교 철학 하나의 생각은 행동하려는 이론적 계획일 뿐이며, 분명한 결정은 사람이 인가한 행동 계획이다. 개인의 종교 철학을 세우는 요소는 내면 체험과 환경 체험, 이 두 가지이다.

관념과 실험해 보는 생활이 동료들을 모방하는 경향에 수정되는 바와 같이, 종교에 관한 철학은 이 두 가지로부터 진화한다. 새 수준의 체험을 시작하고 알지 못하는 분야의 탐구를 시도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당장에 새로운 체계의 가치 기준이 존재하게 된다. 버릇과 이상이 다시 모습을 갖춘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을 얻고,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어떤 개념들이 뒤따라 생긴다.

종교 철학의 진화에 네 단계가 있다:

첫째: 전통과 권한에 복종하면서 다만 순응하는 체험이 될 수 있다.

둘째: 나날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정도에서 (철학의) 성장이 그칠 수 있다.

셋째: 지적 수준까지 철학이 진보하지만, 문화에 종이 되어 침체에 빠진다.

넷째 수준: 관습과 전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직하게, 충성스럽게, 두려움 없이 진실하게 믿는 대로 산다.

건전한 종교 철학은 하나님의 것과 케자의 것을 혼동하지 않는다.

철학은 원시 종교를 우주 현실의 가치를 맛보는 체험으로 변화시킨다.

8. 믿음과 관념 어떤 가르침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단지 믿는 관념이다. 확신을 가지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생활 방식을 실제로 지배할 때에야 믿음의 수준에 이른다.

관념은 언제나 사람을 제한한다. 믿음은 확대하고 사람을 해방시킨다. 살아 있는 종교적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사람에게 봉사한다. 관념은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믿음은 개인의 것이다.

믿음은 인생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의무를 결코 피하지 않는다.

믿음은 창조적 상상력에 쇠고랑을 채우지 않으며, 과학적 발견에 대하여 편견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9. 종교와 도덕성 진화 종교는 윤리적 책임을 육성한다. 계시는 진화 종교의 윤리적 시야를 확대한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너의 지식 및 진실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사람의 가장 높은 윤리 및 도덕 개념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상물질 현실이며, 이를 믿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참된 종교는 훈계한다.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종교의 일부이다.

깨우친 영적 의식은 특정한 지적 관념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상황에 선하게 반응하는 기법과 상관이 있다. 도덕적 의식은 윤리적ㆍ상물질적 가치 기준을 의식하는 것이다.

종교의 기능은 두 가지로 명시된다:

(i) 종교의 영적 자극은 사람의 도덕적 가치관을 동료들에게 연장시키게 만든다. (윤리적 반응)

(ii) 종교는 필사자의 일을 검열하며, 시간 세계의 실체와 영원의 실체를 믿는 확신을 준다.

믿음은 도덕적 의식과 영원한 실체에 대한 개념을 잇는 다리가 된다.

10. 사람을 해방하는 종교 지능이 있는 사람은 그가 물질 우주의 일부인 것을 안다. 운동과 긴장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그는 개별 인격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헤아린다. 물리적 원인과 결과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현실을 헤아릴 수도 없다.

논리와 이치의 가능성을 다 소모해도,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진실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물질 수준의 법칙은 인과(因果) 관계, 원인에 결과가 뒤따르고, 지성 수준은 선재하는 개념으로부터 새 개념 가능성이 따름을 암시한다. 이 두 수준을 아무리 탐구하더라도, 생명 에너지를 소모하고 나서, 일시적 인격이 꺼질 운명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에너지와 지성은 신에게로 되돌아 가지만, 사람의 에너지와 지성 재산은 신으로부터 직접 생겨나지 않는다. 오직 영적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필사인 것과 신다운 것,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 사람과 하나님을 섞음으로, 인간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다.

결코 과학이나 논리로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사리(事理)만으로 종교적 체험이 선한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으로 외롭다는 느낌을 실질적으로 치료한다. 종교는 하나님의 한 아들, 우주의 한 시민으로서 믿는 사람을 해방시킨다.

네가 그런 믿음의 변화를 체험할 때, 너는 이제 더 수학이 지배하는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 우주의 아버지의 아들이다. 영생의 지위를 얻으려는 싸움에 하나님과 온 우주가 편을 들고 있음을 인간이 의식하게 된다.

   
  102편, 종교적 믿음의 기초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믿지 않는 유물론자에게 사람은 겨우 진화에서 우연히 생긴 것이다. 아무리 대단히 에너지를 뽐내서 전시해도, 무덤을 지나서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 최선의 사람들이 기울이는 노력,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재능도 죽고 나서 사라지도록 운명이 정해졌고, 죽음은 영원히 잊혀지고 혼이 소멸되는 길고도 외로운 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사람의 종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믿음으로 손을 뻗으면, 이 캄캄한 죽음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가치 기준이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시간 세계에서 영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믿음이 태어난다.

1. 믿음의 확신 어떤 사람이라도 신의 뜻을 행하기를 선택하면, 진실의 길을 알게 된다.

과학의 논리는 시간 세계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실에 바탕을 두며, 종교에서 믿음은 영원 세계에 근거를 둔다.

반란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유란시아에서 진실의 계시는 일시적 우주론과 혼동되어 왔다. 과학을 알수록 너희는 확신이 줄어들지만, 종교는 믿을수록 확신이 늘어난다.

과학에서 확실한 것은 지능에서 출발하지만, 종교에서 확실한 것은 인격의 기초에서 솟아나온다.

어떤 물질적 표징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입증하려고 내놓을 수 없다.

사람에게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혼 속에서 완전을 찾으려는 갈망을 어김없이 불러일으킨다.

2. 종교와 실체 종교는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 종교의 사회적ㆍ지적ㆍ도덕적ㆍ영적 열매를 알아본다.

종교적 체험에서 인간이 얻은 지혜는 조절자에서 파생되니까, 어딘가 역설(逆說)이다. 참되고 더러워지지 않은 종교에서 나오는 말씀과 행위는 깨우친 필사자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된다.

믿는 사람은 마치 불멸을 손아귀에 이미 쥐고 있는 것처럼 이 현세의 생활에 반응한다. 그러한 필사자의 생활에는, 세상의 지혜만 흡수한 동료들의 생활과 영원히 다른 꾸밈없는 표현이 있다.

시간은 지식을 얻는 데 변함없이 들어가는 요소이다. 지식은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요, 너희는 언제나 배우고 있지만, 결코 절대 진실을 완전히 아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다.

필사자의 의식은 지성 수준에서 살고, 지성의 눈을 통해서 우주를 파악한다.

철학적 사고(思考) 전체가 늘 물질적 사실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참된 철학적 활력을 주는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게으른 자는 판에 박힌 교리의 피난처로 물러가서, 종교적 단련을 피하려고 애쓴다. 종교적 개념을 지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영적 죽음과 마찬가지이다. 일단 종교가 하나의 관념으로 격하되면, 이제 더 종교가 아니요, 인간 철학이 된다.

용감하게 인생의 풍파에 대응하도록 사람을 준비시키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다. 참된 종교는 행동으로 이끈다. 실제로 사람이 종교를 가졌을 때, 행동은 종교의 결과가 된다. 종교는 생각만 하거나 느낌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종교가 종교답지 않게 행동하는 사실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는 무엇인가 행한다.

3. 지식과 지혜와 통찰력 지능의 부족이나 교육의 빈곤은 상급의 종교적 달성을 불리하게 만든다.

종교적 억측은 해롭다. 논리적 사고를 맑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편, 종교가 현세의 기능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종교는 바로 이 세상과 영원히 대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은 이기적 행위로 바로 이끈다. 종교적 통찰력은 사회에 봉사하고 이타심으로 베푸는 행위로 바로 이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낼 때, 말할 수 없는 승리에 들뜬 상태를 체험하고, 동료들과 접촉하도록 재촉을 받는다.

과학은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고, 종교는 가치를 의식하게 만든다.

지식은 사람에게 자리를 정해 주며, 사회 계층과 계급 제도를 낳는다. 종교는 봉사하는 길로 이끌고, 윤리와 이타주의를 창조한다. 계시는 사람을 해방하고 영원한 모험을 떠나게 한다.

과학은 사람을 분류하고, 종교는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한다. 계시는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고, 하나님과 협동할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다.

과학은 문화 단체를 만들려고 헛되이 애쓴다. 종교는 영의 단체를 낳는다. 철학은 지혜의 단체를 위하여 애쓴다. 계시는 영원한 단체(최후 군단)를 묘사한다.

종교는 인격의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이요, 계시는 인격이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과학은 한 없는 우주의 부분들을 분석하려고 한다. 종교는 우주 전체를 붙잡는다. 스스로 계신 이가 지은 우주는 한이 없다. 스스로 계신 이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멜기세덱)는 증언한다.

과학은 신이 하나의 사실임을 가리키고, 철학은 한 절대자가 계신 것, 종교는 하나님이 자애로운 영적 성격자임을 제시한다. 계시(啓示)는 신이 계신 사실, 절대자 관념, 하나님의 영적 성격이 하나이고,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제시한다.

지식의 추구는 과학이요, 지혜의 탐구는 철학이다.

과학에서 생각은 그 생각이 실현되는 표현보다 앞서며, 종교에서 체험은 생각의 표현보다 앞서 간다.

진화 종교는 흔히 사람이 하나님 개념들을 지어내게 만든다. 진화는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처음 원인들이 있는 것에 만족하고, 종교는 최상의 성격, 철학은 통일이 있는 것에 만족한다.

4. 체험에 관한 사실 너희의 지성 속에 생각 조절자가 계시니까, 하나님의 지성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자의 지성을 의식하는 것보다 더 신비롭지는 않다.

인간의 체험은 무엇인가? 이는 단지 궁금해하는 자아와 바깥에 다른 실체 사이에 생기는 상호 작용이다.

사람은 아주 일찍부터 그가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의식한다. 자연스럽게 자의식이 생겨난다. 믿음은 이 체험을 종교로 바꾸며,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하나님이 성격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인격이 얻는 종교적 체험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서 잘못이 생길 요소는 유물론의 내용에 정비례한다.

기도는 인생을 부유하게 만들지만, 신을 예배하는 것은 운명이 보이게 빛을 밝힌다.

계시는 역사를 통일하며, 지리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화학ㆍ생물학ㆍ사회학ㆍ심리학을 조화시킨다.

5. 의도한 잠재성의 우월성 간단한 생명이 인격의 지위까지 진화로 진보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격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공 우주에서 잠재성은 언제나 사실인 것보다 우월하다. 다가올 무엇은 신이 내린 명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물의 원시적 두려움이 하나님 존경심으로 변화될 때, 의도한 우월성은 지성 작용의 진화에서 나타난다.

너희는 진화적 종교를 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몸소 체험하는 종교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도덕은 전능한 통제자(신)를 드러내지만,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드러낸다.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성이 진화된 도덕의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6. 종교적 믿음의 확실성 철학으로 종교적 두려움을 없애고 과학이 꾸준히 진보한 것은 거짓 신들의 사망률을 크게 높인다. 사람이 만든 신들이 이렇게 죽은 것은 영적 시력을 잠시 흐리게 만들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가렸던 무지와 미신을 없애버린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신성한 빛이요, 빛의 중단은 창조의 그림자를 만든다.

철학으로 도달한 신자는 개인적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믿는다.

믿음은 있음직한 철학적 하나님을 확실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킨다.

오로지 믿음으로, 체험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사리(事理)는 확률을 만들고, 믿음은 가망성을 확실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이 진실임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사실을 모르는 무지 사이에는 믿음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진실은 잘못보다, 체험은 이론보다 장점이 있다.

하나님은 과학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요, 심리학에서는 바람직한 것이며, 철학에서 있음직 한 것, 종교에서는 체험하는 사실이다. 사람의 지적ㆍ철학적 재산이, 멀리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낮은 지능에서 생겨났다고, 마침내 전혀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원시 생명에서 기원을 가진다고 계속 가정하는 한, 과학은 종교적 체험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높은 것(예: 혼과 영)이 틀림없이 낮은 것(예: 단세포)에서 나왔다고 현재의 반론을 되풀이할 때, 과학적 유물론은 파산한 것이다. 의도를 가진 창조자의 활동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요, 의도한 진화는 진실이다. 유물론은 인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7. 신다운 자의 확실성 우주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스스로 원인이 된, 하나 뿐인 사실이다.

하나님 없는 종교를 발명하려고 하는 자는 부모 없이 아이들을 가지려 하는 자와 같다. 너희는 원인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오로지 스스로 계신 이만 원인이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해도, 선하고 정직할 수도 있고, 인도주의적 성품을 더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이처럼 신이 없는 종교를 증명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체험에는 살아남는 가치, 곧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체험이 빠져 있다.

종교의 지적(知的) 표시는 확신이요, 그 사회적 열매는 사랑과 봉사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영리하기 때문에, 이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데는 눈부신 지성이 요구된다. 믿음의 확신이 가장 좋은 기법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독단적 태도로 대답해야 한다: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나의 경험을 알고 있다.” (너희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어찌 나의 경험을 부정할 수 있느냐?)

오직 한 절대자가 독단을 주장할 수 있다. 독단을 주장하려는 자는 일관성을 추구하자면, 머지 않아 절대자의 품에 끌려간다.

믿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너희 믿음이 도전받는다면, 너희는 마찬가지로, 과학이 다루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증명되지 않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사실과 관념들이 과학자나 철학자의 의식 속에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어느 두 사람의 체험이 같은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8. 종교의 증거 종교의 효력을 보여주는 가장 놓은 증거는 인간이 체험하는 사실에 있다. 죽은 뒤에 살아남고 싶은 갈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려 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구원의 값으로 그 신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하여 여러 종교는 의견이 다르다.

세상의 뛰어난 종교 스승은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여러 종교의 차이점은 사람이 현실을 다르게 이해하는 데 온통 의존한다.

사람은 최선 개념과 이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 역사적 종교도 그 종교가 인정하는 가장 높은 가치 기준으로부터 하나님을 만들어냈다.

종교가 지적 표현 방식으로 격하될 때, 종교는 감히 문명과 진보를 비판해 왔다.

개인적 종교는 도덕의 진화를 앞서지만, 제도화된 종교는 도덕 관습 뒤에 처져 따라갔다.

종교는 결코 기적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 향상될 수 없다. 계시된 종교는 권위를 증명하려고 기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는 늘 개인의 체험에 뿌리를 내린다.

예수는 육체를 입고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다가 한껏 찾아내는 사람이었고, 사람을 찾다가 완전한 혼이 한껏 만족하기까지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났다.

   
  103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이 논문은 종교적 체험이 과연 현실인가 거짓된 망상인가를 다루는 글이다. 자연이나 사회에서 겪는 체험은 되풀이함으로 검증이 가능하지만, 종교적 체험은 내면의 체험이므로, 제3자에게 꺼내서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종교적 체험을 과학적인 사실로 입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과학적 검증의 불가능은 그러한 종교적 체험이 거짓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이 멜기세덱은 사람의 종교는 진화적으로 생기지만,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계시로 이를 보충하여 종교적 발전이 제 궤도에 오르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의 종교적 반응은 예배 보조자의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이 두 가지 영향은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오래 전에 작용한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창문이요, 이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은 믿음으로 우주의 아버지를 볼 수도 있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되지만, 이따금 정기적 계시가 내려 종교의 진화를 돕는다.

유란시아에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i) 자연 종교 (진화된 종교)

(ii) 초자연 종교 (계시된 종교)

(iii) 실제의 종교 (자연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혼합)

(iv) 철학적 종교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1. 종교에 담긴 철학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동일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그러한 해석은 각자 달라야 한다.

두 필사자가 같은 종교 철학을 가졌다면, 이것은 두 존재가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방대한 종교적 체험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신조를 유지하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

신봉자들이 거짓된 것을 많이 믿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로 되지는 않으며, 이것은 종교적 체험에서 믿음이 생김으로 종교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을 가지지 않았다 (조절자가 선(先)인격이니까). 하나님이 적어도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의식할 수 없으며, 의식(意識)이 없다면 사람 밑에 있을 것이다.

2. 종교와 개인 너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종교의 탄생”은 이른바 (바울의 경우와 같이) 종교적 감화와 직접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격변을 통해야 하나님과 친교함을 의식할 수 있는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처음 자극하는 것은 공평의 충동, 그리고 친절을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의 갈등을 일찍부터 체험한다. 초인간적 도움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도덕적 충동을 느끼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정상 아이의 지성은 종교적 의식이 생기면서,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아이의 머리 속에서 맨 처음에 일어나는 싸움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요, 다른 동물을 그렇게 선택할 수 없다.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정상인 어린아이는 아주 일찍부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이타심을 향한 욕구를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이타심의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활동에 기원을 가진다.

3. 종교와 인류 사회적 상황은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에 도전한다. 열등한 종족조차 자기 이익과 집단의 이익을 구별한다.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영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진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몸소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환경이 흔히 종교를 지배해 왔다.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사람은 귀신 공포증, 동물 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 여러 가지 예식을 개발하였고, 이러한 예식은 부족 신앙으로 구체화되었다.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4. 영적 친교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는 후자가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다운 자와 친교하는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초기의 종교들은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친교 분위기는 궁극에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원시인은 친교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어떤 희생 동물을 바치곤 하였다.

죄를 지은 느낌은 사람이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예수는 속죄하는 예식을 없애 버렸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이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동기를 보고 사람을 자식으로 다룬다. 신의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움직인다.


5. 이상의 기원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일어나게 만든다. 이타주의의 이상은 신다운 영의 충동에서 파생된다.

원시인은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 예수는 (적을 사랑하기까지)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인본주의자는 이타심의 욕구를 지성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이타심의 요구가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대한 반응인 것을 인식한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둘 중에 어느 것도 개인의 흥미를 독점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겨난다.

오로지 자존심의 욕구와 이타적 욕구가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최다수의 타아(他我)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짧은 인생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逆說)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

이상을 추구하는 것― 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모든 이타적 충동이 군집 본능에서 발달된 것이라 가르치는 것은 이상주의의 싹을 자른다. 이타적 욕구가 조절자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깨달으면, 사람은 자아보다 높이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힘 없는 종이 아니요,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압력을 가하면 인격을 비뚤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어떤 교회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인정하고 구성원에게 아무 교리의 압력을 주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6. 철학적 조정 신학은 언제너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바깥에서 우주를 연구할 때 사람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를 안에서 접근할 때, 신학과 형이상학이 생겨난다. 이 두가지 방법에서 처음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조정하기 위하여 철학이 발달한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우주를 안에서 내다보는 기회를 주며, 모든 창조를 영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지성으로 우주를 분석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물질인 듯하다.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 가설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전자는 내면을 바깥에서 보는 우주로 생각하며, 후자는 바깥의 우주를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지성의 기능에 달려 있고,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하며, 영적 체험을 머리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에너지 및 사물과 영적 가치를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파악한다.

너희가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상물질 분야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실체가 명시되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에서는 이치를 따지며, 종교에서는 믿음으로 통찰력을 얻으며, 상지혜는 상물질 단계의 기법이다. 형이상학은 상물질계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좋은 의도였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은 실패였고,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상지혜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것은 계시뿐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철학이 개발되었다. 상지혜가 없는 상황에,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적절히 활동한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구분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안드족 후계자들이었다.

과학은 반드시 이치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계시는 이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의 철학은 물질에 치우칠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방향으로 치우칠 때, 철학은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필사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철학은 과학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에, 진실을 알아보는 통찰력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7. 과학과 종교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믿음은 종교를 지탱한다.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계시함으로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필사자가 조절자의 계심을 몸소 겪어야 깊어질 수 있다.

지상의 진화에서 직관의 본능이 지식의 출현을 앞서는 것 같이 영적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하늘에서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린다.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영원한 인간,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을 향함에 따라서, 그는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손을 뻗는다.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철학으로 통합하는 것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체험의 일부이다.

진실이 무슨 결론을 내려도 상관없이 진실이 이끄는대로 따를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으면 논리는 과학의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바깥에서 들여다 보면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 바깥을 보면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계시의 도움을 얻어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 모두를 확인할 있고, 과학과 종교를 모두 안정시킨다.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자아 비판이다.

진실―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실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 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든다. 영적 체험을 주는 종교는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추리를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이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영원한 최고의 영(신)을 다룬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생각 조절자의 계심은 영적 실체가 있다는 증명이다. 그러나 이 계심이 타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지만, 역사는 과학과 종교가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분야이다.

8. 철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이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지 모르지만,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최상의 신이 확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때때로 혼란을 일으킨다.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 남자라도 애정 심리학 필기 시험에 떨어질지 모른다. 배우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다른 남자는 그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다.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의심을 비치는 말이나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자들의 제안에 흔들리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철학이 과학과 종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9. 종교의 핵심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사람의 신학이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최초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역사를 통틀어서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철학적 모순이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과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관여한다.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가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에게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의 세계로 이끈다.

믿음은 이치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기꺼이 이치를 데리고 가며, 지혜를 데리고 철학의 한계까지 간다. 진실과 동반하면서 믿음은 영원한 여행 길을 떠난다.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조절자의 가정에 기초를 둔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진실과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진실을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믿음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실체(확신)가 있으며, 그러한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104편, 삼위일체 개념의 성장
글쓴이: 네바돈의 어느 멜기세덱

1934년

이 멜기세덱은 여러 진화 종교에 삼원조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삼위일체 개념은 진화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제1ㆍ제2ㆍ제3 계시를 통하여 인류에게 발표했음을 강조한다. (아마도 진화 종교가 삼위일체를 깨달으려면 장구한 세월이 소모되었으리라는 판단이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계시된 종교의 삼위일체 개념을 여러 진화 종교의 삼원조(三員組) 관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원시인은 오랫동안 셋을 넘어서 셀 수 없었다.

사람은 무릇 세 가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어제ㆍ오늘ㆍ내일. 사람들은 갈채를 세 차례 승리자에게 보냈다.

인간의 체험에서 자연스럽게 삼원조가 종교에서 나타났고, 삼위일체가 계시되기 오래 전에 나타났다.

진화로 생긴 삼원조 관념은 계시된 삼위일체 개념과 혼동되어, 이 두 가지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1. 유란시아의 삼위일체 개념
세 차례의 계시 유란시아에서 첫 계시를 약 50만 년 전에,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이 주었다. 이 삼위일체 개념은 행성의 반란이 터지고 나서 세상에서 사라졌다.

첫째 동산과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삼위일체를 두 번째로 발표했다.

약 3만5천 년이 지난 뒤에 마기벤타 멜기세덱이 세 번째로 삼위일체를 발표했다. 그가 걸쳤던 가슴받이에 세 동심원이 삼위일체를 상징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우주의 아버지ㆍ영원한 아들ㆍ무한한 영에 관하여 가르치기가 어려움을 알아차렸다.

타종교의 삼위일체 개념 살렘 선교사들을 통해서 삼위일체 개념이 유라시아와 북 아프리카에 차츰 퍼졌다. 후일에 안드 족속 시대와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삼원조와 삼자일체를 구별하는 것은 어렵고, 그때 두 개념은 서로 섞였다.

힌두교 신자 사이에서 삼자일체 개념은 존재ㆍ지능ㆍ기쁨으로서 뿌리를 내렸다.

불교 신자는 두 가지 삼자일체 교리를 개발했다. 고타마 싯달타가 발표한 삼자일체는 선생ㆍ율법ㆍ우애였고, 후일에 북쪽에서 발달한 개념은 최상의 주, 성령, 육신화한 구원자였다.

힌두교와 불교 신자의 관념들은 진정한 삼자일체설, 일신교의 하나님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는 관념이었다.

히브리인은 멜기세덱 시절에 삼위일체에 대하여 알았지만, 일신교적 열심이 그러한 가르침을 가리게 만들었다.

이슬람교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관념을 깨닫지 못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 예수는 사도들에게 삼위일체 구성원들에 대하여 가르쳤지만, 초대 기독교인은 히브리인의 편견을 물려받았다.

바울은 아버지ㆍ아들ㆍ영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알았지만, (유대인이 이를 알아듣기 어려운 것을 짐작하고서) 이에 관하여 설교하는 일이 드물었고, 새로 형성되는 여러 교회에 보낸 몇몇 편지에서만 언급하였다. 그때에도 바울은 예수와 영원한 아들을 혼동하였다.

서기 1세기에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은 우주의 아버지, 창조 아들, 신성한 봉사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사실 면에 잘못이 있었더라도, 영적 관계에서는 참말이었다. 미가엘은 영원한 아들의 신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만, 절대 성격자는 아니다.

  2.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여러 신
삼위일체는 집단의 기능 처음에 사람은 직종에 따라 신들을 세분화하였다. 다음에 최고신교(最高神敎)로 많은 신 위에 하나의 신을 높였고, 마침내 유일한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두 배척함을 통해서 일신교가 개발되었다.

충분히 시간이 지나면, 철학은 일신교의 신 개념으로부터 성격의 품질을 뽑아내는 경향이 있다. 신 속에 있는 성격은 그러한 신이 성격을 가진 다른 대등한 신과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삼위일체 개념을 인식함으로 사람은 시공 우주에 있는 사랑과 법칙의 상호 관계를 얼마큼 파악할 수 있다. 우주의 지평이 확대되면, 지역 우주들 위에 삼위일체가 통치함을 인식하게 된다.

삼위일체는 실재하는 개체요, 성격자는 아니지만 아버지ㆍ아들ㆍ영인 성격자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주는 땅에 계셨을 때, 응보는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집단의 기능이라고 훈계하였다. 신들도 개별적으로 응보를 내리지 않는다.

철학과 우주론의 논리는 첫째 근원 중심의 여러 삼자일체 연합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3. 삼자일체와 삼자일치
일곱 절대자 일곱 절대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파악해야 한다. 삼자일치(三者一致)는 삼자일체와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코 성질이 삼자일체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필사 인간은 유란시아에서 시야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하는 중대한 시대를 거치고 있다.

무한의 성질은 진화하는 우주들의 성장과 체험하는 거주자들의 불완전성과 어떤 방법으로 절충되어야 한다.

이치는 우주 실체의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사람이 겪는) 유한한 체험은 절대자가 여럿이 있고 절대자들이 조화된다는 가설을 요구한다.

이 여러 논문에서 총 실체는 다음 일곱 절대자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i) 우주의 아버지.

(ii) 영원한 아들.

(iii) 무한한 영.

(iv) 파라다이스 섬.

(v) 신 절대자.

(vi) 우주 절대자.

(vii) 무제한 절대자.

첫째 근원 중심은 아들에게 아버지요, 파라다이스 섬에게는 원본이다. 그의 성격은 아들 속에서 제한되지 않았지만, 신 절대자 속에서 성격은 잠재성이 되었다. 아버지의 에너지는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에서 드러났고, 동시에 무제한 절대자 속에서 에너지가 감추어졌다. 무한자는 무한한 영의 행위에서 늘 드러나며, 한편 우주 절대자의 가려진 활동에서 영원히 작용한다.

세 파라다이스 성격자의 연합은 첫 삼자일치, 곧 아버지ㆍ아들ㆍ영의 성격 단결을 영원하게 만든다. 이 세 분이 성격자로서 모일 때, 기능적으로 통일되는 한 삼자일치를 구성하며, 삼자일체―하나의 유기적 개체―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하나의 삼자일치, 즉 셋이 기능적으로 일치한 총합이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삼자일치가 아니다. 하나의 기능적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져 있지 않고, 나눠 놓을 수 없는 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성격자로서)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가 나눠지지 않는 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제1 삼자일치와 아무런 그러한 성격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데, 이는 제1 삼자일치가 세 분으로서 그들의 기능적 연합이기 때문이다.

실존적 삼자일치가 몇 가지 있지만, 오직 하나의 실존적 삼위일체가 있다. 삼자일치는 (성격을 가진)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능적인 것이다.

삼자일체와 삼자일치 사이에 한 가지 비교할 점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궁극에는, 구성 분자가 가진 속성들의 합과 다른 무엇인 기능이 된다.

그렇기는 해도 여러 삼자일치가 실재하며, 이러한 삼자일치 속에서 총 실체가 기능화되며, 이를 통하여 우주의 아버지는 무한의 총 기능에 고삐를 쥔다.

  4. 일곱 가지 삼자일치
제1 삼자일치 일곱 가지 삼자일치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아버지가 1차 구성원인 것을 주목하여라.

제1 삼자일치―성격ㆍ영ㆍ지성을 주고 무한한 의도를 가진 삼자일치. 이것은 세 신 성격자를 모은 것이다:

(i) 우주의 아버지 (성격을 수여)

(ii) 영원한 아들 (영을 수여)

(iii) 무한한 영 (지성을 수여)

제1 삼자일치는 무한한 의지를 가지고 삼위가 진화하는 존재들에게 (삼위일체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성격ㆍ영ㆍ지성을 주는 것을 말한다.

제2ㆍ제3ㆍ제4 삼자일치 이 세 가지는 물질ㆍ영ㆍ에너지의 진화와 상관된다.

제2 삼자일치는 공간의 물질 세계의 진화를 위하여,

제3 삼자일치는 영의 진화를 위하여,

제4 삼자 일치에서는 무한한 에너지의 통제를 위하여

삼위 중에서 두 분이 하나의 구성원이 된다. (아버지ㆍ아들, 아들ㆍ영, 아버지ㆍ영)

제2 삼자일치

제2 삼자일치―동력(=물질)의 원본이 되는 삼자일치. 자그마한 극자(極子)이든지, 타오르는 별이든지 또는 소용돌이치는 성운이든지, 물리적 원본―우주의 배치―는 반드시 이 삼자일치의 기능에서 파생된다.

삼자(아버지ㆍ아들, 파라다이스, 영)가 진화하는 공간 무대에서 물질 우주들의 건축자이다. 제2 삼자일치에서는 물질의 진화를 위하여 아들이 비운 자리에, 파라다이스가 들어간다.

이 연합은 다음과 같다:

(i) 아버지ㆍ아들.

(ii) 파라다이스 섬.

(iii) 합동 행위자.

아버지ㆍ아들의 계심이 끊임없이 에너지를 조종하고, 이 연합은 파라다이스를 가동시켜, 무한한 영이 출생하고 하보나가 나타나게 되었다.

제3 삼자일치

제3 삼자일치―영을 진화시키는 삼자일치. 영적 명시의 총체성은 그 시작과 끝이 이 연합에 있으며, 다음으로 구성된다:

(i) 우주의 아버지. (영의 본질)

(ii) 아들ㆍ영. (영의 창조 활동).

(iii) 신 절대자. (영의 잠재성)

아버지는 영에 앞서 존재하고, 아들ㆍ영은 활발한 창조 영으로서 활동하며, (영이 비워놓은 자리에 신 절대자가 잠재 영으로서 들어간다.

제4 삼자일치

제4 삼자일치―무한한 에너지의 삼자일치 (아들이 빠지고 무제한 절대자가 들어간다). 모든 에너지 실체의 처음과 끝이 영원하게 된다. 이 모임에는 다음이 들어간다:

(i) 아버지ㆍ영 (에너지의 통제).

(ii) 파라다이스 섬 (에너지 활성화 중심)

(iii) 무제한 절대자 (에너지 잠재성)

파라다이스는 우주에서 물력과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중심이다―첫째 근원 중심의 우주 위치요, 무제한 절대자의 우주 초점이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다.

제5ㆍ제6ㆍ제7 삼자일치

제5 삼자일치에는 물질 우주에서 다른 삼자일치들의 행동에 반응하는 삼자가 들어가고,

제6 삼자일치에는 물질 우주에서 연합하는 삼자가 들어가며,

제7 삼자일치에는 잠재물과 실재물을 통합하는 삼자가 들어간다.

제5 삼자일치

제5 삼자일치―무한히 반응하는 삼자일치. 이 연합은 다음과 같다:

(i) 우주의 아버지.

(ii) 우주 절대자.

(iii) 무제한 절대자.

이 모임은 신이 아닌 (즉 물질) 실체의 영토 안에서, 다른 삼자일치들이 의지(意志)하고, 원인이 되고 긴장을 일으키고 원본이 되는 행동과 계심에 대하여 한없이 반응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제5 삼자일치에서는 세 잠재성의 절대자 중에서 신 절대자가 빠지고 아버지가 들어간다.

제6 삼자일치

제6 삼자일치―물질 우주에서 연합된 신의 삼자일치. 제6 삼자일치에서는 세 잠재성의 절대자 중에서 무제한 절대자가 빠지며, 대신에 우주의 아버지가 들어간다:

(i) 우주의 아버지.

(ii) 신 절대자.

(iii) 우주 절대자.

이것은 물질 우주에 계신 신의 연합이요, 신이 되지 않은 실체의 영토에 놓인 실체들을 향하여 무한 수준에서 신성이 미치는 범위이다.

제7 삼자일치

제7 삼자일치―실재물ㆍ잠재물이 무한히 통일되는 삼자일치. 이것은 시간과 영원 속에서 기능적으로 나타나는 무한한 통일, 곧 실재물과 잠재물이 나란히 통일되는 것이다. 삼위에서 아들이 빠지고 대신에 우주 절대자가 들어간다:

(i) 우주의 아버지.

(ii) 합동 행위자.

(iii) 우주 절대자.

기타 여러 삼자일치의 궁극 수준을 모르니까, 너희는 이 일곱 가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첫째 근원 중심에게는 열 다섯 가지 삼자일치 연합이 있고, 그 중에 여덟은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여러 삼자일치는 무한을 안정시키는 평형 바퀴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어떤 삼자일치에도 통일하는 구성원이다.

이러한 연합은 아버지의 무한성을 늘이지 않지만, 그의 실체가 무한 이하와 절대 이하로 나타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5. 삼극일치
사실성의 삼극일치 아버지가 들어가지 않는 삼자일치 관계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아버지의 삼자일치 관계들과 구별되고, 삼극일치라 부른다.

사실성의 삼극일치에서는 4자 중에서 (아버지ㆍ아들ㆍ파라다이스ㆍ영) 아버지가 빠진다. 이 삼극(三極)일치는 세 가지 절대 사실의 상호 관계에 있다:

(i) 영원한 아들.

(ii) 파라다이스 섬.

(iii) 합동 행위자.

영원한 아들은 영 실체의 절대자(절대 영 실체)이다. 파라다이스 섬은 우주 실체에서 절대적인 것, 절대 원본이다. 합동 행위자는 지성 실체의 절대자(절대 지성 실체)이며, 성격과 권능이 실존적으로 신으로 합성된 것이다.

잠재성의 삼극일치

잠재성의 삼극일치. 이 삼극일치는 세 잠재성의 절대자의 연합에 있다:

(i) 신 절대자.

(ii) 우주 절대자.

(iii) 무제한 절대자.

여러 삼극일치는 체험적 신들이 우주에 출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여러 삼자일치는 체험적 신―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와 간접으로 관련되지만, 삼극일치는 직접 관여한다.

   
  105편, 신과 실체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실재한다고 부르는 모든 것의 기원 및 운명의 신비를 꿰뚫어보려고 할 때, 영원ㆍ무한을 거의 한이 없는 타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실체의 전부는 무한이며, 어떤 유한한 지능도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영원의 존재들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며, 실체 전부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묘사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그러한 발표를 시도해본다. 우리의 개념들이 왜곡될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1. 스스로 계신 이에 관한 철학적 개념 여러 우주의 철학자들은 무한 속에서 절대적 시초의 원인은 스스로 계신 이로서 활동하는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 스스로 계신 이 관념을 필사 지능에게 발표하는 것이 위험하기는 해도, 절대 기원과 무한한 운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유한한 존재들에게 기초를 마련해 준다.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성격 의미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같다. 그러나 스스로 계신 이라는 가설은 신이 되지 않은 영역에서는 뚜렷이 확인할 수 없다.

스스로 계신 이는 무한자요,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무한이다. 시간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실체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기원을 가진다.

실존적 개념으로서 스스로 계신 이는 신화되지도 비신화(非神化)되지도 않았고, 실재하는 것도 잠재성도 아니며, 성격도 비성격도 아니요, 정적(靜的)인 것도 동적(動的)인 것도 아니다.

유한자의 생각에는 단지 시작이 있어야 한다. 실체에는 결코 진정한 시작이 없었어도, 여전히 실체가 명시되는 근원적 관계들이 있다. 그 실체 이전, 원초적 영원의 상황은 이렇게 생각해도 좋다: 무한히 까마득한 어떤 가상(假想)하는 과거 영원의 순간에, 스스로 계신 이를 물체이자 비물체로서, 원인이자 결과로서, 의지(意志)이자 반응으로서 생각해도 좋다. 이 가상하는 영원의 순간에, 무한 전역에 걸쳐 아무런 구별이 없다. 무한은 무한자로 채워져 있으며, 무한자는 무한을 둘러싼다. 이것이 영원의 가상된 정적 순간이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너와 모든 다른 필사자가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체험으로 예배하는 우주의 아버지 개념은 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하다는 가설보다 작다. 신에게는 생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온 우주는 하나의 방대하고 복잡한 유기체이다. 그러나 첫째 근원 중심은 우주와 성격자들보다 무한히 더 복잡하다.

2. 스스로 계신 이는 삼자일치이자 칠중자 모든 절대 실체는 영원부터 있고, 존재하기 시작한 적이 없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라. 우리는 실존적인 세 분의 신, 파라다이스 섬, 세 절대자를 절대 실체로 언급한다.

실체의 기원을 연대순으로 묘사하면서, 스스로 계신 이 안에 “처음” 의지가 표현되고 “처음”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을 이론적으로 가정해야 한다.

실체는 무한자(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성으로부터 스스로 분화한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스스로 계신 이의 변형은 신이 된 실체와 신이 되지 않은 실체,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 그리고 이렇게 분류될 수 없는 다른 실체들로 마침내 분화되었다. 이 스스로 계신 이는 잠재 이전이자 사실 이전(以前)의 실체이며, 선(先)인격이고 일신론적 선실체이다.

혼자인 스스로 계신 이라는 철학 개념과 삼자일치인 과도기의 스스로 계신 이 개념은 칠중자를 포함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이 일곱 단계의 성품은 일곱 절대자와 가지는 관계로 제시된다.

(i) 영원한 아버지. 아들의 아버지인 스스로 계신 이. 아들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절대적 사실로 만들고, 모든 성격자가 아들이라는 가능성을 입증한다.

(ii) 우주 통제자. 파라다이스의 원인인 스스로 계시는 이. 만물의 원본이 되는 하나님이요, 모든 비성격 및 비영적 관계의 원판을 결정한다.

(iii) 우주 창조자. 아들과 하나인 스스로 계신 이. 아버지와 아들이 합하여 합동 성격자와 영원한 우주(하보나)가 나타나게 만든다.

(iv) 무한한 지지자. 스스로 연합하는 스스로 계신 이. 이 단계는 우주 절대자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v) 무한한 잠재성. 스스로 제한한 스스로 계신 이. 이 단계는 보통 신 절대자로 이해한다.

(vi) 무한한 능력. 정적(靜的)이며 반응하는 스스로 계신 이 . 이것은 끝없는 자궁이요, 미래에 모든 우주가 팽창하는 가능성이다. 이 단계는 아마도 무제한 절대자의 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vii) 우주의 무한자. 스스로 계신 이로서 스스로 계신 이. 무한의 정지 상태, 즉 무한한 실체가 영원한 사실이라는 진실이다. 공간 세계의 인간으로부터 파라다이스 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그분 속에서 살고 존재를 가진다.

3. 무한한 일곱 절대자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일곱 가지 근원적 관계는 일곱 절대자로서 영원하게 된다. 필사자의 머리에는 이 절대자들의 시작되는 시점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일곱 절대자는 시작이 없었다.

(i) 첫째 근원 중심. 신의 첫째 분이자 원초적 비신(非神)의 원본.

(ii) 둘째 근원 중심. 신의 둘째 분. “스스로 계신 이의 성격”을 실현하기 위한 기초.

(iii) 파라다이스 근원 중심. 둘째이자 비신(非神) 원본,

(iv) 셋째 근원 중심. 신의 셋째 분. 사실인 실체와 사실로 되고 있는 실체를 조정하는 자.

(v) 신 절대자. 실체의 원인이 되고 잠재적으로 성격이 될 가능성. 신의 모든 잠재성의 총체.

(vi) 무제한 절대자. 정적(靜的)이고 반응하며 정지해 있다. 모든 비성격 잠재성이다.

(vii) 우주 절대자. 신이 된 자와 신이 되지 않은 것을 통일하는 자.

무한의 일곱 절대자는 실체의 기초가 된다. 첫째 근원 중심이 다른 절대자들보다 선행(先行)하는 듯이 보일 터이지만, 일곱 절대자는 영원히 공존한다.

4. 통일과 2원과 삼자일치

 

우주의 철학자들의 세 가지 가정:

스스로 계신 이가 모든 실체의 근원이다.

스스로 계신 이가 무한의 일곱 단계로, 스스로 분할한다.

무한의 일곱 절대자가 영원에 출현했다.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삼자일치를 낳으며, 삼자일치는 만물의 조상이라고 언젠가 진술된 적이 있다. 세 가지 원초적 관계가 있다:

(i) 통일 관계. 스스로 계신 이 안에서 존재하는 여러 관계.

(ii) 이원 관계. 스스로 계신 이와 일곱 절대자 사이의 여러 관계.

(iii) 삼자일치 관계. 일곱 절대자의 기능적 연합.

절대자들의 상호 관계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삼자일치 관계들은 이원의 기초에서 생겨난다.

스스로 계신 이는 제한 없는 무한이다. 여러 가지 이원 관계는 실체의 영원한 기초이다.

실존 이전의 것들은 일곱 절대자 안에서 실존적이 되며, 실존적인 것들은 삼자일치 속에서 작용하게 된다. 여러 삼자일치가 영원하게 되면서 동시에 우주의 무대가 준비된다.

5. 유한한 실체의 선포 스스로 계신 이의 최초의 분화를 본래부터 있는 독립된 의지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실체의 선포는 파라다이스 신이 의지(意志)하는 행위와 기능적 삼자일치가 이에 반응하는 탓으로 돌려야 한다.

유한자가 신이 되기 전에는 모든 실체의 다양화가 절대 수준에서 일어난 듯 보일 것이다. 그런 유한한 실체가 등장하는 것은 절대성이 제한됨을 의미하고 상대적인 것들이 출현함을 암시한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연속된 것으로 표현하고, 유한자가 절대자로부터 파생하여 역사적으로 등장했음을 묘사하지만, 초월자들은 유한을 앞서고 또 뒤따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월 궁극자들은 유한자에게 원인이기도 하고 완성이기도 하다.

유한한 가능성은 무한자에 본래부터 있지만, 가능성이 가망성과 불가피성으로 변질하는 것은 첫째 근원 중심이 의지한 탓으로 돌려야 한다. 아버지 의지의 무한함이 절대 수준의 존재를 제한하여 궁극자가 궁극에 생기거나 유한자를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적이고 제한된 실체가 나타나면서, 새 시대―성장의 시대―가 존재하게 되며, 이것은 무한의 높이에서 유한자의 영토로 당당하게 밑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이러한 움직임이 우주 역사의 시작을 표시하고, 시간 자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표시한다. 인간에게 유한자의 시작은 실체의 기원으로 보인다. 인간의 생각에, 유한자에 앞서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 새로 생기는 유한한 실체는 두 단계에서 존재한다:

1차 최대자. 최상으로 완전한 실체, 하보나 종류의 우주와 생물.

2차 최대자. 최상으로 완전하게 된 실체, 초우주 종류의 생물과 창조.

이것이 최초에 명백히 나타난 두 가지이다: 완전하게 지어진 자와 진화로 완전하게 된 자. 이 둘은 영원의 관계에서 동급이지만, 시간의 한계 속에서 다른 듯이 보인다. 2차 유한자들은 자란다. 따라서 자라고 있는 자는 시간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파라다이스 이전에 무척 중요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를 1차와 2차 최대자라고 하지만, 또 다른 부류가 있다. 1차인 자와 2차인 자 사이에 삼자일체화하는 관계 및 기타 관계는 3차 최대자의 출현을 초래한다. ―이것들은 완전하지도 않고 완전해지지도 않지만, 조상이 되는 두 요인과 동급인 사물ㆍ의미ㆍ가치이다.

6. 유한한 실체의 반응 유한 존재들의 대두는 기능적 무한의 절대 관계에서 잠재하는 것들이 사실로 있는 것들로 변화됨을 가리킨다. 유한자의 현실화에 대하여 다음의 반응이 있다:

(i) 신의 반응은 세 수준에서 체험적 최상이 나타난다: 하보나에서 성격을 가진 영으로서 최상이요, 대우주에서 성격 있는 자가 최상의 권능을 가지게 될 가능성, 그리고 총우주에서 최상 수준의 체험적 지성(궁극위)이 생기는 한도.

(ii) 우주의 반응은 초우주 공간에서 건축이 활성화되고, 일곱 초우주에 물리적 조직이 진행된다.

(iii) 유한 실체들의 확산에 대하여 하보나에서는 완전한 존재, 일곱 초우주에서는 진화로 완전하게 된 승천자들이 출현하였다. 이것이 잘못이 일어날 가능성의 기원이다.

(iv) 진화적 불완전에 대하여 신의 반응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완전하게 되고 있는 것은 완전한 자와 완전하게 된 자, 이 둘과 통합된다.

7. 초월자의 결말 초월자들은 무한 이하이고 절대 이하이지만 유한을 넘고 생물을 초월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인 것은 유한자가 생긴 결과로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자를 예상하여, 궁극에 생긴 듯이 보일 것이다.

초월적인 것은 진화를 초월한다. 비체험적인 것이 아니지만, 체험을 초월한다. 아마도 그러한 역설(逆說)의 예는 완전한 중앙 우주이다: 중앙 우주는 도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 일곱 초우주처럼 진화로 된 유한한 창조가 아니다. 하보나는 인간으로 (하보나 토착민으로) 채워져 있고, 그들은 결코 사실로 창조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보나는 꼭 유한하지도 않고, 그래도 절대적이라 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최상위가 유한자들과 관계가 있다시피, 궁극위는 초월자들과 동일시된다. 궁극위는 최상위를 초월하는 무엇이다.

초월 수준과 관련된 실체들은 다음과 같다:

(i) 궁극위의 계심.

(ii) 총 우주 개념.

(iii) 총 우주 건축가.

(iv) 두 계급의 파라다이스 물력 조직자.

(v) 공간 잠재력의 어떤 수정(修正)

(vi) 영의 어떤 가치.

(vii) 지성의 어떤 의미.

(viii) 초한(超限) 실체.

(ix) 전능ㆍ전지(全知)ㆍ두루 계심.

(x) 공간.

우주는 유한ㆍ초월ㆍ절대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다양한 모든 실체를 몇 가지 삼자일치가 절대로, 총 우주 건축가들이 기능적으로, 일곱 으뜸 영이 상대적으로 통일한다.

칠중 신은 최대의 지위와 최하의 지위를 가진 생물에게 아버지의 신성이 계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히 아득한 과거에, 신들의 영, 신들이 낳은 성격자들이 자아 의지에 반응하여 술렁거렸다. 세월이 쌓이고 또 쌓이기까지, 첫째 근원 중심의 분화가 계속 진행되는 것이 가능하다.

   
  106편, 실체의 우주 수준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신과 우주 실체의 기원을 필사자가 얼마큼 알아야 하지만, 사람은 또한 실존적 실체와 체험적 실체, 잠재하는 실체와 실재하는 실체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대우주와 태어나는 총 우주는 몇 수준에서 존재한다:

(i) 불완전한 유한자. 이것은 하늘 가는 인간의 현재 지위이지만, 도달한 자를 제외한다.

(ii) 최대 유한자. 도달한 체험적 인간의 지위이다.

(iii) 초월자. 유한을 초월하는 수준. 파라다이스와 하보나의 상당 부분이 초월 서열이다.

(iv) 궁극자. 총 우주 중요성을 띠고 총 우주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포함한다. 파라다이스와 하보나는 여러 면에서 궁극의 중요성을 가진다.

(v) 공동 절대자. 총 우주를 초월하는 분야에서 체험하는 자들이 계획되고 있다.

(vi) 절대자. 실존적 일곱 절대자가 영원부터 계신 것을 뜻한다.

(vii) 무한. 이것은 실존 이전이며 체험 이후이다. 무한의 통일은 모든 시작보다 앞에 있고 모든 운명 이후에 있는, 가상하는 실체이다.

하보나 시대에 중앙 우주는 아무런 진화적 변화를 겪지 않았으나, 현재 초우주 시대에 진화하는 초우주들과 조정할 필요 때문에, 어떤 진보적 진화를 겪고 있다. 일곱 초우주는 언젠가 빛과 생명 속에 안정된 지위를 얻을 것이고, 다음 시대, 제1 바깥 공간 시대에는 초우주들을 현시대 운명의 한계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1. 유한한 기능의 1차 연합 유한한 실체 단계는 영에 기원을 가진 인간이 완전한 인격자로서, 우주에서는 완전한 하보나로서 직접 표현된다. 유한자의 2차 (진화) 단계는 성장의 결과로서 우주에서 통합된다. 2차 유한자는 모든 1차 완전 수준과 같은 수준에 이를터이지만, 시간 지연에 지배된다.

시간 지연은 이처럼 인간이 창조자와 협동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만든다.

공간에 아무리 깊은 데서 기원을 가져도, 허덕이는 진화 인간에게 칠중자가 신으로서 봉사하며,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을 거쳐서 창조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손을 뻗는다.

칠중 신의 여러 단계는 최상위 안에서 통일된다.

2. 최상위의 2차 유한 통합 칠중 신은 유한한 진화를 조정하며, 최상 존재는 궁극에 운명을 통합한다.

최상위는 영 성격과 진화적 권능을 통합한다.

에너지와 물질은 공간에서 진화하는 듯하다. 대우주에서 창조자 권능의 통달은 시공 우주들의 안정과, 조절자가 수여되고 파라다이스 아들들이 수여되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은 체험으로 벌어들인 권능이요, 파라다이스 신들의 실존적 권능과 대조가 된다.

칠중 신의 권능은 체험으로 얻는 것이다.

최상 존재는 시공에서 진화하는 것을 모두 궁극에 품에 안으며, 필사자도 최상위를 알아볼 능력을 얻는다.

네바돈의 미가엘은 파라다이스의 아버지와 같다. 진화하는 필사자는 체험하는 최상위와 비슷하게 될 터이니, 필사자들이 최상위의 완전함을 함께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상위 하나님은 체험을 겪는다. 일곱 절대자는 실존적 실체이며 체험 기법으로 파악할 수 없다.

하늘 가는 사람들이 일곱째 단계의 영 존재가 될 때, 여러 삼극일치의 가치를 체험할 것이다.

3. 초월적 3차 실체 연합 초한(超限) 건축가들은 계획을 만들어낸다. 최상 창조자들은 계획한 것을 존재하게 만든다. 최상 존재는 이를 충만하게 완성시킨다.

현재 우주 시대에 총 우주 건축가들은 총 우주의 행정을 조정한다. 현재 우주 시대가 종결될 때, 전능 최상위가 출현단다. 이 사건은 제1 체험적 삼자일체를 완성시킨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무한한 삼위일체이다. 절대 이하의 존재들은 이 원초적 연합과 상관이 없다.

제1 체험적 삼자일체는 궁극의 결말을 집단으로 성취하게 한다.

우리는 인력의 행위가 무제한 절대자의 공간 계심을 침입하는 것을 지켜 본다. 우리는 신 절대자가 계신 가운데 영 생물이 진화하고, 우주 및 영은 최상 존재로서 통일되고, 초월 수준에서 궁극 삼자일체로서 조정하고 있음을 탐지한다.

4. 궁극위의 4차 통합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스스로 제한한 절대자로서 활동한다. 체험하는 궁극 삼자일체는 초월적인 것을 초월자로서 조정한다. 영원한 미래에 이 체험적 삼자일체는 통일성을 높이고, 궁극 신의 계심을 더욱 활성화할 것이다.

궁극 삼자일체는 총 우주를 조정하도록 예정되어 있고, 궁극위 하나님은 총 우주 전체를 지휘하는 성격이 된 것이다.

궁극위가 완전히 솟아나면 무슨 변화가 터질지 우리는 모른다. 최상위가 영적으로 하보나에 계시는 것 같이, 궁극위도 초한 의미와 성격 초월 의미에서 하보나에 계신다.

궁극위의 현실화에 참여했던 모든 성격자가 그의 성격 가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궁극위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절대 이하이다.

5. 공동 절대 단계, 곧 다섯째 단계의 연합 최상위는 진화로 체험하는 실체의 최고점이다. 마찬가지로 궁극위도 초월적 실체의 정점이다. 이 두 체험적 신이 솟아나는 것은 2차 체험적 삼자일체의 기초를 놓는다.

절대 삼자일체는 최상위, 궁극위, 밝혀지지 않은 우주 운명 성취자, 이 셋의 연합이다. 절대 삼자일체는 잠재성의 절대자―신 절대자, 우주 절대자, 무제한 절대자 ―를 활성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절대 삼자일체의 형성은 제4차 바깥 공간 수준까지, 총 우주 전체의 진화가 완결된 뒤에야 일어날 수 있다.

이 체험적 삼자일체들은 체험하는 신의 성격 품질뿐 아니라, 다른 비성격 품질을 서로 연결짓는다. 최상위의 영 성격 품질은 전능자의 권능 특권과 분리할 수 없고, 최상위 지성의 잠재성이 이 두 가지를 보충한다.

삼자일체들은 자체로서 성격이 아니지만, 성격을 적대하지 않는다. 삼자일체들은 신의 실체이지만, 결코 성격을 가진 실체는 아니다. 개별 성격자로서 그들은 삼자일체가 아니요, 오직 하나의 집합으로서 삼자일체이다.

세 절대자―신 절대자ㆍ우주 절대자ㆍ무제한 절대자―는 삼자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이 된 자가 삼자일체가 될 수 있다. 모든 다른 결합은 삼자일치이든지, 아니면 삼극일치이다.

6. 절대 단계, 곧 여섯째 단계의 통합 세 절대자의 가능성이나 신 절대자의 비성격 수준에서 절대자 하나님이 체험으로 성격화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최상 존재의 현실화, 궁극 삼자일체의 형성, 궁극위 하나님의 출현을 위하여 총 우주의 공간 무대는 적당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2차 체험적 삼자일체의 활동은 총 우주도 뛰어넘을지 모른다.

절대 삼자일체가 완성되면, 모든 잠재성이 절대로 현실화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절대 삼자일체의 총 기능은 절대적이고, 제약받지 않는다면 질적 의미에서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적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치 않다.

이것은 확실하다: 실존적 삼위일체는 무한하고, 체험적 궁극 삼자일체는 무한 이하이지만, 절대 삼자일체는 실존적인, 잠재성의 절대자들에 부딪친다.

절대 삼자일체의 행위는 절대자들이 결국 체험적이 된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렇게 추측하는 사건들이 신 절대자가 성격화하는 것, 그리고 절대자 하나님이 성격화하는 의미가 나타나는 것을 암시한다.

7. 운명의 마지막 실체의 무한한 통합을 다루는 개념들은 형성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그런 개념이 우주 발전의 최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세 잠재 절대자 안에는 탐구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음이 틀림없다.

최종의 통합이라는 개념도 영원의 결실과 분리할 수 없고, 어떤 미래 시간에도 실현할 수 없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의지가 운명을 확정한다. 우주 운명 성취자의 행위가 아마도 우주의 운명을 정하고, 절대 삼자일체 안에서 최상위와 궁극위와 관계된다. 세 절대자는 실존적이고,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신 절대자가 절대적 하나님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무제한 절대자 무한 우주와 관계하는 가설은 타당하다. 필사자ㆍ상물질자ㆍ영ㆍ최후자ㆍ 초월자 , 그리고 다른 자들은, 절대 가치가 있는 잠재적 최종 운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부분을 너희가 아무리 많이 깨닫더라도, 너희가 의심도 하지 않은 많은 부분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끝이 없다.

그렇다고 인간은 낙심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칠중자ㆍ최상위ㆍ궁극위의 신 수준에 이를 수 있다.

대우주의 유한한 생물에게 총 우주 개념은 무한한 듯이 보인다.

총 우주 전체가 완성되는 어느 미래 순간에, 그 역사 전체를 겨우 시작이라고 우리 모두가 돌이켜볼 것이다.

무한한 운명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세 가지 절대 잠재성이 실현되는 것은 무제한 절대자ㆍ우주 절대자ㆍ신 절대자의 현실화에 기초를 둔다.

스스로 계신 이의 일곱 절대 국면이 통일되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세 가지 삼자일체 개념과 마주치게 되며, 이것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두 가지 체험적 삼자일체를 포함한다.

8. 가장 높은 삼자일체 가장 높은 삼위일체를 인간의 머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체험하는 무한자는 실존적 무한자와 같은 신분을 얻는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15가지 삼자일치 및 관계된 삼극일치의 최종 표현이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인간 이상의 존재들의 머리도 어지럽게 한다.

우리는 세 수준의 개념을 제시한다.

(i) 세 가지 삼자일체의 수준.

(ii) 체험적 신의 수준.

(iii) 스스로 계신 이의 수준.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첫째 수준에 속하고, 둘째와 셋째 수준은 첫째의 통일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첫째 수준:

(i) 파라다이스 삼위일체는 아버지ㆍ아들ㆍ영 의 연합이요, 절대 기능ㆍ초월 기능(궁극성 삼위일체)ㆍ유한 기능(최상 삼위일체)을 포함한다.

(ii) 궁극 삼자일체는 최상 창조자들ㆍ최상위 하나님ㆍ총 우주 건축가들의 연합이다.

(iii) 절대 삼자일체는 최상위ㆍ궁극위ㆍ우주 운명 성취자의 집합이다.

첫째 수준에서 이 세 가지 삼자일체의 연합은 실체의 통합을 이룬다. 이 집합은 원인과 중간에 있는자와 최후에 이른자, 시작하는 자와 실현하는 자와 성취하는 자를 포함한다.

둘째 수준: 세 가지 삼자일체의 조정은 체험적 신들과 연결된다.

(i) 최상위. 최상위는 삼위일체가 창조 아들 및 딸과 연락함으로, 첫째 단계인 유한한 진화가 완성되어 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ii) 궁극위. 둘째 삼자일체로 신이 초월적 초한 성격이 된 것이다.

(iii) 절대자.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에서 누가 셋째 구성원인가 많은 이론이 있다.

셋째 구성원에 관한 어려움은 절대자가 꼭 하나 있음을 의미하는 사실에 있다. 흔히 신 절대자ㆍ우주 절대자ㆍ무제한 절대자로 구성될지 모른다고 가정된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셋째 구성원이 우주 절대자라고 보는 것이 최소한의 왜곡일 것이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의 둘째 수준이 성격을 가졌다면, 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 하나님이 성격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수준은 세 가지 삼자일체로 구성된다.

둘째 수준은 체험으로 진화한 성격자, 체험으로 궁극에 이른 성격자,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신들의 성격 연합으로서 존재한다.

셋째 수준: 최상위ㆍ궁극위ㆍ완성된 절대자의 연합에는 일곱 절대자를 출현하게 만든 무한의 모습을 다시 조립할 수도 있다.

과거 영원에 계셨던 스스로 계신 이를 상상할 때, 그는 혼자 계시고 옆에 아무도 없다. 미래 영원을 내다볼 때, 우리는 스스로 계신 이가 실존자로서 변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지만, 그러한 개념은 충만한 자아 실현을 의미한다.

9. 실존적인 무한한 통일 가장 높은 삼자일체 개념에서, 한없는 실체의 통일이 아득히 먼 영원 속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이론을 세운다. 체험하는 실체로서 무한의 통일은 아득히 멀다.

무한한 통일을 상상하려고 할 때, 유한자는 자신의 지능의 한계에 부닥친다. 체험이 없이는 어떤 진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시간ㆍ공간ㆍ체험은 사람이 상대적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크게 도움이 되지만, 그래도 사람이 완벽하게 실체를 파악하는 데 가장 끔찍한 장애물이다. 필사자는 잠재하는 것들이 공간에서 현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실체를 통일하는 개념은 실존하는 것과 체험하는 것, 이 두 가지이다. 그러한 통일은 가장 높은 삼자일체 속에서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체험하는 자와 실존적인 자의 다른 관점이 일으키는 역설(逆說)은 피할 수 없고,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와 가장 높은 삼자일체는 각각, 오직 하나의 시공 상대성으로서 필사자들이 파악할 수 있는 영원의 관계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를 둔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차츰 체험으로 현실화되는 것에 관한 인간의 시간 관점은 이것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가정하는 영원의 관점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가장 높은 삼자일체가 겉으로 나타난 것을 탐지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 이유이다:

(i) 인간의 한정된 관점은 영원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

(ii) 불완전한 인간의 지위, 체험하는 것들의 절대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iii) 인류는 체험 기법으로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에서 우주의 아버지는 가장 높은 삼자일체에서 스스로 계신 이이다.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스스로 계신 이는 모든 실존자에 앞서, 그리고 모든 체험자 위에 존재해야 한다.

머지 않아 우리 모두가 생물의 성장이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에 비례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바탕을 둔 인생은 그러한 인간을 아버지 무한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데리고 간다.

주: 궁극성 삼위일체는 삼위일체와 유한이자 절대 이하인 자들의 관계. 궁극 삼자일체와 구별된다.

   
Tagged 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