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 논문집 (3M)

  92편, 후일의 종교의 진화 (멜기세덱)

93편, 마키벤타 멜기세덱 (멜기세덱)

94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동양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

95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레반트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

96편, 야웨―히브리인의 하나님 (멜기세덱)

97편,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멜기세덱)

98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서양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

92편부터 98편까지, 마키벤타 멜기세덱에 관한 글은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적은 글이다.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원시인에게 높은 계시를 내리는 것은 무익하다. 계시된 종교는 받는 사람의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진화된 종교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에 맞게 큰 계시가 내린다.

92편은 다음과 같이 인류에게 5대 계시를 주었다고 한다:

(i)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ii) 에덴

(iii) 살렘의 멜기세덱

(iv) 나사렛 예수

(v) 유란시아 논문집

93편에서 98편까지는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기원전 1900년 경에 자신을 수여한 경험과, 그의 가르침이 동양과 서양, 그리고 중간에 있는 레반트 지역에 미친 영향을 요약한 글이다. 후일에 레반트 지역에 미가엘이 오시는 것에 대비하여 유일한 하나님 개념이 히브리인 사이에서 잘 발달되었어야 했다. 이들이 미가엘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의 오심을 위하여 그러한 준비는 필요했다.

  92편, 후일의 종교의 진화
  진화 종교는 야만인 및 문명인을 보살피는 다음 영향력을 통해서 천천히 생겼다.

(i) 예배 보조자. 동물의 의식에서 신을 찾는 원초적 본능이 나타나는 것은 이 보조자의 영향을 가리킨다.

(ii) 지혜 보조자. 신이 실체라는 깨달음이 생기는 것.

(iii) 성령. 성령은 지성을 초월하는 선물이다. 인격의 체험으로서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깨달음이 생긴다.

이 세 가지 보살피는 영향은 진화 종교의 성장에 충분하다. 나중에, 생각 조절자ㆍ세라핌ㆍ진실의 영이 종교의 성장을 더욱 촉진한다.

1. 종교의 진화적 성질 처음에는 귀신을 두려워하다가, 영들을 강제하고 구슬리려고 노력하고 나중에 진화 종교가 어떻게 성장하는가 살펴보았다.

부족의 주물은 나중에 토템과 부족 신이 되었고, 마술의 주문은 현대의 기도가 되었으며, 희생의 행위였던 할례는 나중에 위생 절차가 되었다.

인류는 참 종교, 진실을 계시받기 위하여 성숙해지고 있다.

종교는 한 민족 안에서 좀처럼 멸망하거나 바뀌지 않는다.

두려움은 언제나 종교적 자극제였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두려움은 경외ㆍ찬미ㆍ존경ㆍ동정심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조절된다.

가장 높은 부류의 종교 생활을 계시한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2. 종교와 도덕 관습 종교는 인간의 모든 제도 중에서 가장 신축성이 없지만, 변하는 사회에 뒤처져 적응한다.

진화된 종교는 변하는 도덕 관습을 반영한다.

이미 있던 것은 오래 되었고, 신성하다고 생각된다.

이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돌로 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너희는 깎은 돌로 세우지 말지니, 만드는 데 연장을 쓰면, 너희는 제단을 더럽혔느니라.”

온갖 종류의 사회 관행, 법 절차까지도 옛 모습에 집착한다.

종교의 성장을 갑자기 가속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회의 도덕은 진화된 종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족의 도덕이 종교의 형태를 결정한다.

사람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종교를 겉으로만 받아들인다.

종교는 온갖 종류의 모순되는 행위를 인가한 적이 있고, 지금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한때는 인정했다.

논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양심은 인간의 행위에 안내자가 될 수 없다.

양심은 인간의 혼에게 말씀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단지 인간답게 생각한 이상적 반응일 뿐이다.

3. 진화된 종교의 성질 옛 종교와 신화는 민족들의 신앙과 전통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종교는 그 민족이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망상에 보통 물들어 있다.

희생물 바치기ㆍ기도ㆍ죄 고백ㆍ예배ㆍ정화(淨化)ㆍ예언ㆍ원죄(原罪)와 같은 기본적 종교 관념은 원시의 귀신 공포증이 있었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화된 종교는 추종자들이 그 종교가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과학과 달리, 진화된 종교는 자체를 수정하기 위한 대책이 없다.

오직 두 가지 영향이 진화된 종교의 교리를 수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서서히 변하는 도덕 관습의 압력이요, 다른 하나는 신기원의 계시이다.

숭배 집단은 오랜 세월에 걸쳐 느리게 진보한다.

종교는 여러 가지로 사회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지만, 종교가 없이는 지속되는 도덕이나 가치 있는 문명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많은 비종교 문화의 어머니가 되었다: 조각은 우상 만들기가 발전된 것, 건축은 성전 짓기에서 시작되었고, 음악은 예배하는 노래에서, 춤은 철마다 예배하는 잔치에서 비롯되었다.

종교가 문명의 발전에 필수였지만, 자연 종교는 또한 그 문명을 방해하려고 많이 애썼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종교는 산업 활동과 경제 발전을 방해했다. 노동을 헤프게 쓰고 자본을 낭비했다.

종교는 때때로 교육을 게을리하였고 과학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죽음을 부유하게 꾸미려고 삶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종교는 사회의 단결을 유지했고, 계시된 종교는 진화적 결점을 보강할 수 있게 만든다.

진화된 종교는 사람에게 비싸게 먹힌 제도였지만, 비할 수 없이 효과가 있었다.

사람이 진화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종교의 발전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는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였다. 사제들의 여가는 예술과 지식을 권장했다.

샤먼에게 많은 비용을 치렀어도, 그들은 제 값을 충분히 했다.

종교는 문명을 육성하고, 세세토록 도덕을 유지하는 경찰력이 되었다.

종교는 진화에서 효과 있는 채찍이요, 인류를 더 높은 지혜의 수준으로 사정 없이 몬다.

동물로서 올라감으로 얻은 진화된 종교를 계시된 종교와 진정한 과학으로 단련해야 한다.

4. 사람에게 내린 계시 진화된 종교들을 검열하는 것이 계시의 사명이다.

계시가 진화된 종교들을 개선하려면, 그러한 신의 방문은 그 시대의 생각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은 가르침이어야 한다.

따라서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받는 사람의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죽은 뒤에 인격 신분이 살아남는다는 개념을 가진다.

진화된 종교는 논리가 없다. 가상하는 귀신 세계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다.

실재하는 영적 세계는 계시 종교를 제시한다.

계시 종교는 신들을 믿고 의지하려는 필사자의 갈망에 우주가 반응하는 것이다.

종교적 계시가 여러 번 있었지만, 신기원의 중요성을 가진 것은 다섯 뿐이다.

(i)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칼리가스티아 영주의 참모진(1백 명)이 첫째 근원 중심 개념을 처음으로 유란시아에 선포하였다.

(ii) 에덴의 가르침.

아담과 이브는 진화된 민족들에게 만물의 아버지 개념을 다시 가르쳤다.

(iii) 살렘의 멜기세덱.

그는 네바돈의 비상시 아들이었고, 세 번째로 진실을 계시했다. 믿는 행위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선포했다.

(iv)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유란시아에서 네 번째로 발표했다.

(v) 유란시아 논문집.

이 글은 이 논문집에 속한 글인데, 이것은 유란시아 필사자들에게 주는 최근의 발표이다. 이 논문집은 이전의 계시와 다른데, 한 성격자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존재의 종합 발표이기 때문이다.

5. 위대한 종교 지도자 계시의 가르침과 진화의 산물이 혼합되어 생긴 신앙의 경우에 하나님 개념은 다음의 혼합이다.

(i) 진화 종파들의 선재하는 관념.

(ii) 계시된 종교의 숭고한 이상.

(iii)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

 

대부분의 큰 종교 시기는 뛰어난 인물의 일생과 가르침으로 개시되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존경해도 그 가르침을 무시하고, 인물을 경외해도 그가 가르친 진실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진화 인간의 가슴 속에는, 위로부터 도움을 찾는 본능적 소망이 있다.

많은 민족이 지도자가 처녀로부터 태어나고 그에게 기적 같은 사건들이 헤프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지난 1백만 년 동안 7대 종교 시대가 있었다.

(i) 셋 족속 시대.

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후에 큰 선생이 되었다.

(ii) 멜기세덱 선교사 시대.

예수보다 거의 2천 년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살렘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iii) 멜기세덱 이후 시대.

아메니모프와 이크나톤이 이 시기에 가르쳤지만, 모세는 히브리 종교의 창시자였다.

(iv) 기원전 6세기.

이 시기에 고타마ㆍ공자ㆍ노자ㆍ조로아스터, 그리고 자이나교 선생들이 일어났다.

(v) 서기 1세기.

종교 스승으로서 나사렛의 예수는 금식과 형식을 피하여 종교의 수준을 높였다. 예수를 제외하고, 바울과 빌로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다.

(vi) 서기 6세기.

모하메드가 뛰어난 종교를 창시했다.

(vii) 서기 15세기. 이 시기에 서양에서 기독교가 분열되었고, 동양에서는 새 종교 (시크교)가 합성되었다.

미래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등장할 것이다.

종교 사이에 장벽을 높이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미래 선지자들이 종교적 형제 정신을 기르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Hagia Sophia (이스탄불의 이슬람 사원)

6. 복합 종교 20세기의 유란시아 종교들은 신을 숭배하려는 충동이 어떻게 사회에서 진화했는가 보여준다.

많은 종교가 귀신을 숭배하던 시절 이후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유란시아에서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나란히 진보하고 있다.

(i) 힌두교는 가장 오래 되었다.

(ii) 히브리 종교.

(iii) 불교

(iv) 공자의 가르침.

(v) 도교.

(vi) 조로아스터교.

(vii) 신도(神道).

(viii) 자이나교.

(ix) 기독교.

(x) 이슬람교.

(xi) 시크교.

고대에 가장 진보된 종교는 유대교와 힌두교였다. 힌두인과 히브리인은 자기네 종교가 영감과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다.

국제적인 큰 신앙은 히브리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이다.

히브리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철학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종교이며, 빌로ㆍ베드로ㆍ바울, 이 세 사람이 이를 형성했다.

이슬람은 북 아프리카, 레반트, 동남 아시아의 종교 문화가 되었다.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은 삼위일체 가르침을 믿기가 어려웠다.

사람은 진화로 생긴 인간이며, 대체로 진화 기법으로 종교를 얻어야 한다.

서양에서 조상 숭배는 종족의 영웅을 존경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태도는 영어를 쓰는 민족의 이름난 대학과 산업 공동체에서 발견된다.

“민족 종교”는 로마 초기의 황제 숭배로, 그리고 신도(神道)로―국가의 황제 가족 숭배로―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7. 종교의 계속된 진화 종교는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종교는 진화된 것이 되든지, 계시된 것이 되든지, 아니면 이 둘의 조합으로 남을 것이다.

새 종교는 발명될 수 없다.

새 종교는 진화되든지 아니면 갑자기 계시된다.

어떤 집단이라도 그들의 교리가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태도는 확실한 믿음이 아니라, 오만한 신학을 가졌음을 말해 준다.

다른 종교를 연구함으로 소득을 얻을 수 없는 종교는 유란시아에 하나도 없다.

다음이 종교의 품질을 가리킨다.

 

(i) 수준 가치, 충성심

(ii) 의미 있는 것들을 개인이 민감하게 이해하는 것.

(iii) 신성한 가치 기준에 헌신하는 정도.

(iv)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보하는 시민인 것을 깨닫는 것.

어린아이의 종교적 체험은 부모와 자식 관계가 두려움 또는 사랑이 지배했는가에 달려 있다.

교육받은 사람은 신과 교통하는 데 중개인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을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신 개념 뿐 아니라 영웅들의 인품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이 영웅 요수아(예수)를 놓치고 못보았다는 것은 유감이다.

참된 종교는 문명의 기초이자 안내하는 별이 되어야 한다.

   
  93편, 마키벤타 멜기세덱
  멜기세덱은 한 지역 우주에서 광범위한 활동에 종사하기 때문에, 비상시 아들로 알려져 있다.

무슨 특별한 일을 시도해야 할 때, 흔히 멜기세덱이 그 과제를 받아들인다.

멜기세덱은 비상시에, 다양한 수준에서, 육체 수준에서도 활동할 수 있으며, 오직 생명 운반자가 그만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유란시아에서 초창기에 12명의 멜기세덱이 생명 운반자들과 함께 봉사하였다. 후일의 멜기세덱 집단은 행성 영주가 이탈한 뒤에, 지구의 관리자가 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자 12 멜기세덱 관찰자는 반과 아마돈과 함께 지구를 떠났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가 임무에 실패한 뒤에 유란시아로 돌아왔고, 나사렛 예수가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가 된 날까지, 행성 관리자로서 계속하였다.

1. 마키벤타의 육신화 멜기세덱 관리자 12명은 회의를 열고, 유란시아에서 진실의 빛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슨 조치를 취해 달라고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탄원했으나, 이 일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의 권한에 속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12명 중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비상시 아들로서 자신을 수여하겠다고 자원하였다.

2. 살렘의 현자 마키벤타는 기원전 1973년 전에 암돈이라는 갈대아인 목자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멜기세덱이요, 엘 엘리욘, 최고자, 오직 하나인 하나님의 사제이라.”

그는 물질 존재로서 94년 동안 살았고, 살렘의 현자로서 이름이 알려졌다.

멜기세덱은 가슴에 세 동심원의 상징을 지녔는데, 이것은 파라다이스 삼위일체의 상징이었다.

그의 육체는 남자의 몸을 닮기는 했으나, 실제는 영주 참모 1백 명이 사용한 몸, 특별히 지어진 몸이었다.

멜기세덱은 생각 조절자를 받았는데, 이 조절자는 육신화된 아들 안에 거하는 기법의 첫걸음을 거쳤다. 이 때문에, 미가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땅에 나타났을 때, 그의 인간 지성 속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3. 멜기세덱의 가르침 10년이 지나자,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여러 학교를 세웠다.

아브라함이 시작한 십일조 체제도 옛날 셋 족속의 전통으로부터 내려왔다.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가르쳤지만, 별자리 아버지를 엘 엘리욘(최고자)라고 불렀고, 하나님을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했다.

멜기세덱은 카트로의 가족과 함께 30년이 넘도록 같이 살았고, 그의 후손 모세는 멜기세덱 시절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멜기세덱은 언젠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처럼 육체를 입고 오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나리라고 가르쳤다.

이처럼 멜기세덱은 미가엘의 수여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세계의 일신교 단계를 위하여 준비하였다.

Basilica of San Vitale, Ravenna (멜기세덱을 그린 모자익)

4. 살렘의 종교 멜기세덱의 칠계명은 첫째와 둘째 에덴의 칠계명과 비슷했다:

1. 너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최고 창조자 외에 어떤 신도 섬기지 말라.

2. 믿음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 데 유일한 요구 조건임을 의심하지 말라.

3. 거짓 증언하지 말라.

4. 사람을 죽이지 말라.

5. 훔치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너희 부모와 장로들에게 불경함을 보이지 말라.

멜기세덱은 고기와 피를 바치는 옛 제사 대신에, 빵과 포도주의 성찬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추종자들이 희생물 바치는 관습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예수처럼, 멜기세덱은 도덕과 세상의 관습을 바꾸려 애쓰지 않았다.

그의 두 과제는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실을 땅에서 살려 두는 것과, 파라다이스 아들이 나중에 자신을 수여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멜게세덱은 살렘에서 94년 동안 기본적 진실을 가르쳤다. 아브라함은 살렘의 가르침으로 개종하고 멜기세덱의 수제자가 되었다.

5. 아브라함을 고르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명칭은 잘못일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선택된 사람이라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 없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

멜기세덱은 하나님이 한 분 계시다는 진실을 살려두는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맡겼다.

멜기세덱이 팔레스타인에서 선교하고, 미가엘이 나중에 히브리 민족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대체로 팔레스타인이 세계에서 당시에 무역ㆍ여행ㆍ문명의 중심에 자리잡았다는 이유로 결정되었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한동안 아브라함의 선조들을 지켜보았고, 테라의 아이들과 접촉하는 가능성이 멜기세덱이 에집트나 중국이나 인도나 북쪽 부족들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설명한다.

에집트에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브라함은 임금을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사령관으로서 군사적 토벌에 성공했다.

주위의 통치자들 중에 더러가 소돔에 있는 조카 롯의 재산을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은 일곱 부족의 선두에서 적을 공격했다.

아브라함은 살렘의 하나님이 그가 이기게 해주었다고 주장하고, 전리품의 10분의 1을 살렘에 금고에 바쳤다.

이 싯딤 전투에서 이긴 뒤에, 아브라함은 11 부족으로 이루어진 둘째 연방의 지도자가 되었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뿐 아니라, 근처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처리했다.

6.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맺은 서약 아브라함은 온 가나안을 정복할 꿈을 꾸었으나, 그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다는 생각에 걱정하게 되었고, 멜기세덱과 다시 한 번 회담을 주선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에집트에서 머무른 뒤에 가나안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일러 주었다. 멜기세덱의 약속대로 이삭이 출생하였고, 그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었다.

살렘의 약속을 인정한다는 표시로, 아브라함은 할례 의식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화해하였고, 아브라함은 살렘의 군사 지휘를 다시 맡았다. 이 거류지에는 십일조 내는 사람을 10만 명이 넘게 유지하였다.

7. 멜기세덱의 선교사 멜기세덱은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고 선교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가지고 갔다.

아담손의 후예는 반 호수 물가에서 있었고, 이들은 살렘 선생들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 안드 족속의 중심으로부터 유럽과 아시아의 먼 지역까지 선생들이 파송되었다.

그러나 부족들이 너무 뒤처져 있어서, 선교 결과는 분명치 않았다.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받아들이는 민족은 없었다.

오늘날 인쇄술의 장점을 누리는 너희는 옛 시대에 진실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이해하지 못한다. 새로운 계시는 언제나 예전의 진화된 신앙에 오염된다.

8. 멜기세덱이 떠나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뒤에 얼마 안 있어, 마키벤타는 비상 수여를 마치기로 작정했다.

주요한 이유는 둘러싼 부족들이 그를 초자연 존재로 보는 성향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9. 멜기세덱이 떠난 뒤 멜기세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시련이었다.

아들 이삭의 결혼을 주선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안심하고 죽었다.

이삭의 손자 요셉은 문관 행정자로 일했다.


팔려가는 요셉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라고 구약에 기록된 것은 실제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회담이었다.

아브라함은 구약에 기록된 만큼 늙지 않았고, 아내는 훨씬 더 젊었다.

유대인의 민족 자부심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시절에 엄청나게 오그라들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을 높일 생각으로 유대인은 전통을 왜곡하였다.

멜기세덱에 관한 기록도 거의 없앴고, 싯딤 전투 이후에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나는 이야기만 남겨 놓았다.

유대인은 멜기세덱을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가엘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히브리서 저자들 중에 하나는 멜기세덱을 알았고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삶을 시작한 날도 끝날도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처럼 만들어진 까닭에, 그는 사제로 계속하여 거하더라.”

10.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현재 지위 이 멜기세덱은 뒤이은 열아홉 세기 동안, 미가엘이 나타날 때가 되기까지, 살렘의 진실을 살려두려고 애썼다.

미가엘이 유란시아 사명을 마칠 때까지, 마키벤타는 행성 관리자로서 일했고, 최근에야 창조 아들의 개인 대사직으로 승진했으며, 그의 직함은 유란시아 영주 대리이다.

그는 언제까지나 미가엘을 대표하여 행성 봉사자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최근의 판결이 에덴시아의 최고자들로부터 내려왔고, 이것은 유버르사의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확인을 받았는데, 멜기세덱이 행성 영주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암시한다.

마키벤타는 행성 영주 대리로서 활동하려고 땅에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아담과 이브, 아니면 그들의 후손 가운데 누구인가 둘째 아담 대리 직함을 가지고 나타날 것인가?

창조 아들이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약속 때문에 유란시아의 앞날은 확실치 않다.

빛과 생명 시대가 가까워지면, 루시퍼 반란과 칼리가스티아 탈퇴 사건이 판결된 후에, 교육 아들 뿐 아니라, 마키벤타ㆍ아담ㆍ이브ㆍ미가엘이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마키벤타가 24 상담자 집단에 속하는 것은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까지도 유란시아 필사자들을 따라갈 운명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의견이다.

마키벤타는 1천 년 미만 전에, 1백 년 동안 행성에 거주하는 총독으로 행동하였다.

   
  94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동양에 미친 영향
  살렘 종교의 초기 선생들은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멀리 떨어진 부족들까지 침투하였고, 우주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마키벤타의 복음을 늘 전파하였다.

이 선교사들은 여러 종족에서 모집되었고, 원주민의 중개를 통해서 가르침을 퍼뜨렸다.

1. 살렘의 가르침이 베다 시대 인도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의 시절에 인도는 국제적인 나라였고, 이때 반도에서 북부와 서부에 아리아인이 널리 스며들었다.

살렘 선교사들이 인도 북부에 침투했을 때, 아리아인의 신 33명의 혼합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인도에서 최고신교가 진화된 일신교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브라만 사제들은 믿음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과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는 살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살렘 선생들에 대항하여 브라만들은 신성한 기록들을 편집하여 현대까지 릭 베다로서 내려왔다.

2. 브라만교 카스트 제도는 2차 산긱 민족들과 마주쳐 종족 신분이 상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아리안인이 고안한 계획이었다.

이 제도는 아리아 민족을 구하지 못했지만, 브라만을 영속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들은 오늘날까지 주도권을 유지했다.

브라만 카스트는 신에게 희생물 바치는 것은 대단히 효력이 있으며, 우주의 두 가지 신성한 원칙 중의 하나는 브라만 신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 사제라고 선포했다.

윤회(輪廻) 신앙―혼이 다시 육신화한다는 교리―보다 더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 구원받고 영적으로 승진한다는 희망을 필사자로부터 빼앗았다.

이 시절에 아무 생명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종파가 일어났다. 새 종파들 중에 많은 것이 무신론이었다.

브라만들은 인도인의 신 개념에서 사람 같은 모습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개념에서 성격을 없앴고, 절대자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개발하였다.

불교가 생긴 것은 인도에서 우파니샤드를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1천 년 동안 성공했는데도, 불교는 후일의 힌두교와 경쟁할 수 없었다. 호전적 이슬람교 앞에서 불교는 마침내 북부에서 굴복하였다.

3. 브라만의 철학 인도인은 어떤 절대자 개념을 파악했지만, 이 개념에는 성격 특성이 빠져 있고, 따라서 개별 신자가 (기도와 예배와 같은) 개인적 체험을 가질 수 없었다.

브라만 나라야나는 절대자, 스스로 있는 무엇으로 생각되었다. 브라만을 하나의 성격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유란시아에서 가장 진보된 신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대혼이 모든 생물 존재의 총합이라는 인도 철학자들의 개념은 최상 존재에 무척 가까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신이 성격자인 것을 간과하여) 이론적 일신교에 도달하는 개인적 접근법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카르마 원칙은 최상위 안에 시공의 모든 영향이 통합된다는 진리와 가깝기는 했지만, 신자가 개인적으로 나란히 신에 도달하는 길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브라만교는 생각 조절자가 사람에게 깃든다는 것을 거의 깨달을 뻔했다. 혼이 브라만의 깃드심이라는 가르침은, 인간의 개성이 없다는 관념에 오염되지 않았더라면, 그 종교가 진보하도록 길을 닦았을 것이다.

자아의 혼이 대혼과 합쳐진다는 교리는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어 무엇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혼이 브라만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은 조절자가 우주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진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조절자와 달리, 필사자의 상물질 사본이 살아남는다는 개념이 브라만 철학에 치명적으로 빠져 있다.

브라만 철학은 수많은 진실에 가까이 갔지만, 우주의 아버지가 기본적으로 성격 존재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4. 힌두교 힌두교는 불교ㆍ자이나교ㆍ모하메드교ㆍ기독교에 반응하여 변화를 겪었다.

1. 브라만, 절대자, 스스로 존재하는 무엇.

2. 삼신일체. 첫째 구성원 브라마는 브라만(무한)으로부터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생각된다.

시바(둘째)와 비슈누(셋째 구성원)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 동안에 일어났다. 비슈누는 정기적으로 육신화한다는 믿음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힌두교가 살아남은 것은 힌두교가 인도에서 기본 사회 조직의 필수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지러워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큰 성직자 계층이 없다.

5. 중국에 있었던 진실을 위한 투쟁 살렘 선교사들은 선생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민족에게 파고들었고, 기원전 둘째 천년 중엽에 중국에 도착하였다. 수이푸(敘府)에서 1백 년이 넘도록 살렘 사람들은 본부를 유지하면서 거기서 중국인 선생들을 가르쳤다.

이 가르침의 결과로 원시 형태의 도교(道敎)가 중국에서 일어났다. 초기의 도교는 다음 요소의 복합이었다:

1. 싱랑톤의 남은 가르침은 상제 (하늘님) 개념으로 지속되었다.

2. 창조자를 믿는 살렘 종교.

3. 인도인 선생들은 브라만(절대자) 개념을 살렘 사람들의 구원 사상에 불어 넣었다.

일본에서 이 원시 도교는 신도(神道)로 알려졌다.

황인종은 비굴하게 신들을 두려워하던 처지에서 일찍 벗어났고, 귀신을 그다지 무서워하지도 않았으나, 비참하게도 조상 숭배에 빠졌다.

노자와 공자의 시절에 도덕은 살렘 선교사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성장했다.

주: 수이푸(See Fuch, Suifu)는 오늘날, 중국의 이빈(宜賓) 시.

6. 노자와 공자 미가엘이 오시기 약 600년 전에, 멜기세덱에게는 그의 가르침이 오래된 유란시아 신앙에 흡수되어 위태로워진 듯하였다.

그리스도 이전 6세기에, 다양한 종교적 진리가 발표되었다. 중국에서 탁월한 두 선생은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였다.

노자는 도(道)가 모든 창조의 유일한 첫째 근원라고 선포하였다. 노자는 궁극의 원인을 명확히 이해했는데,

“하나는 절대 도로부터 생겨나고, 하나로부터 우주의 이원(二元)이 나타나며, 그러한 이원에서 삼위가 솟아나오고, 삼위는 모든 실체의 최초의 근원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

사람은 창조자에게로 돌아간다고 가르쳤고, 생명을 우주의 잠재성으로부터 인격이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한편 죽음은 인격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공부자(孔夫子)는 6세기에 중국에서 노자와 같은 시대에 살고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었다. 공자의 신조는 황인종의 오랜 역사에서 도덕적 전통에 기초를 두었고, 또한 살렘 선교사들의 남아 있는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일생동안 공자는 거절당한 선생이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교의 도덕은 땅의 길은 하늘의 길이 비친 그림자요, 세상 문명의 이상은 하늘의 질서가 거울에 비친 것이라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묵자(墨者)의 가르침이 이 교리의 영향에 맞서 싸웠으나 헛일이었다. 묵자는 윤리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를 둔 형제 정신을 부르짖었다.

결국 추종자들은 공자와 노자를 신격화하였고, 황인종의 종교는 불쌍한 신학으로 퇴화했다.

한때 인간 사회의 선두에 섰던 중국은 하나님 의식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로 처졌다.

이 하나님 의식(意識)은 개별 필사자 뿐 아니라, 행성에서 복합된 문명이 참으로 진보하는 데 필수이다.

주: 노자, 42장 道化에서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을 풀이한 것.

7. 고타마 싯달타 고타마 싯달타는 네팔에서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났다. 그는 남쪽 히말라야의 계곡에서 어느 족장의 옥좌를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고타마는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풍습은 소용이 없다고 비방하며, 추종자들에게 그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하나인 이가 성격자인 것을 깨닫지 못했고, 윤회 사상에 맞서 싸움을 벌였다.

고타마는 베나레스에서 학교를 세웠는데, 한 생도 바우탄이 살렘 선교사들의 전통을 고타마에게 전파했다.

올바름과 응보를 믿음으로 모두가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고타마는 학생들을 60명씩 떼지어 보내기 시작했다.

고타마의 아내는 여승 계급의 창시자가 되었고, 아들은 후계자가 되어 종파의 세를 떨쳤다.

희생물ㆍ자학(自虐)ㆍ의식(儀式)ㆍ사제가 없이 보편적으로 구원이 있다는 고타마의 복음은 놀라운 교리였다. 여러 세기 동안 변질되었어도, 수많은 인간에게 희망으로서 아직도 지속한다.

8. 불교도의 신앙 “나는 부처임께 피신한다. 교리 속에 피신한다. 단체에 피신한다”는 도피문을 대중 앞에서 고백하면 누구나 불교도가 되었다.

제자들은 일찍부터 그를 깨우친자, 부처, 나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렀다.

고타마의 복음은 네 가지 진리에 바탕을 두었다.

1.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는 진리.

2. 고통의 기원.

3. 고통의 소멸.

4.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와 가까운 것은 팔도(八道)의 철학이었고, 이는 바른 견해, 바른 포부,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생각, 바른 숙고이다.

고타마는 다섯 계율을 전파하였다.

1. 죽이지 말라.

2. 훔치지 말라.

3. 정절을 버리지 말라.

4. 거짓말하지 말라.

5. 독한 술을 마시지 말라.

필사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이론적으로 열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열반이 사람을 소멸된 상태로 여기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열반은 인생의 욕구에 매이지 않고, 다시 육신이 되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고타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최고의 행복은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고, 그렇게 함으로 자아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추종자들은 간과하였다.

싯달타는 우주에 절대적 응보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신이 없이 최선의 철학을 가르쳤다.

불교의 복음에 있는 큰 약점은 사심없이 사회에 봉사하는 종교를 낳지 않은 것이다.

불교 단체는 신자들의 우대 단체가 아니라, 조교(助敎)들의 공동체였다.

그의 일생은 설교보다 훨씬 위대했다.

9. 불교의 전파 불교가 부처(깨우친 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권했기 때문에 불교는 번성했다.

아소카는 이크나톤 다음으로, 멜기세덱과 미가엘 사이에 가장 눈에 띄는 국가 통치자 중에 하나였다.

아소카는 인도 제국을 세우고, 25년 동안에 1만7천 명이 넘는 선교사를 훈련시키고 미개척지까지 보냈다.

아소카는 한 세대 안에 세계의 절반에서 불교가 지배적 종교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고향으로부터 불교가 멀리 퍼짐에 따라서, 불교는 고타마의 가르침과 더욱 달라졌다.

1천 년이 지난 뒤에, 불교는 인도에서 사라졌고, 나중에 이슬람에게 항복했다.

고타마 추종자의 중국 집단과 북부 인도 집단은 히나야나(소승)과 반대로, 마하야나(대승) 가르침을 개발하였다. 이 북쪽 가지는 중국과 일본에서 계속 진화하였다.

10. 티벳에 있던 종교 티벳 사람들은 오래된 마술과 부적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굳어진 교리, 신비스러운 의식과 금식이 있다. 그들의 계층은 중ㆍ여승ㆍ주지(住持)들과 큰 라마를 포함한다.

티벳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사람끼리 형제인 것, 우주에서 늘 올라가는 시민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 종교로부터 무엇인가 얻어 왔다.

11. 불교도의 철학 불교는 그리스도 이후 첫째 천년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불교는 쇠퇴하는 도교에서 남은 풍습과 곧 섞였다. 새로 합성된 이 종교는 중국ㆍ고려ㆍ일본의 민족들이 널리 받아들인 종교가 되었다.

이 철학은 또한 부처의 (신다운) 성품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한다고,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여 이 신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르침은 사람에게 깃드는 조절자의 진실을 뚜렷하게 발표한 것 중에 하나이다.

아시아의 많은 최고 지성인은 절대 진실과 절대자에 관한 진실을 찾느라고 애썼다.

우주들의 시초 근원을 상상하면서 불교도는 어떤 수준에 도달했다.

1. 고타마의 전설. 싯달타가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고타마가 깨우친 자라는 관념을 넘는 속성을 얻을 때까지, 이 전설은 신화가 되었다.

2. 여러 부처. 고타마가 인도 민족에게 왔다면, 아득한 과거에 다른 민족은 다른 진실 선생의 방문을 받았고, 아득한 미래에 또 그런 선생을 축복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추리하였다.

3. 절대 부처. 부처들의 수가 무한에 이르자, 부처가 조건 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하나, 절대 근원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생겨났다. 영원한 부처는 절대자, 스스로 계신 이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

이 절대 신 관념은 아시아 민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지 않았다. 그러한 개념은 철학에 도움이 되어도, 종교의 발전을 좌우하지 않는다.

사람 모습을 한 야웨조차도, 무한히 멀리 있는, 불교나 브라만교의 절대자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때때로 절대자는 스스로 계신 이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이러한 추측은 갈급한 대중에게 찬물을 끼얹어 위로하는 것이었다.

12. 불교에 있는 하나님 개념 불교의 우주론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하나는 인도와 중국의 미신에 불교가 오염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고타마를 영원한 부처로 높인 것이다.

절대자와 반대로, 하나님 개념은 불교에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승 사이에서 하나님과 절대자의 개념이 마침내 무르익었다. 일본에서 료닌(良忍), 호넨 쇼닌(法然上人), 신란(親鸞)의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 개념이 진화하였고, 마침내 아미다 부처 관념에서 열매를 맺었다.

불교의 큰 장점은 신봉자들이 다른 종교로부터 마음대로 진실을 고르는 것이다.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 교파는 세계에서 가장 진취적 종교 집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칭찬받을 경향이다.

불교는 20세기에 기독교와 접촉함으로 사회적 모습이 향상되었다. 배우려는 욕구가 승려들 마음 속에서 다시 불이 붙었고, 불교의 진화를 자극할 것이다.

이 글을 쓸 때, 아시아의 상당 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다. 하나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발표(이 책)에 불교가 다시 한 번 꿈틀할 것인가?

   
  95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레반트에 미친 영향
  레반트는 서양 세계에서 신앙의 고향이었다.

살렘 선교사들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서남 아시아 전역에 퍼졌고 멜기세덱의 복음을 전했다.

1. 메소포타미아의 살렘 종교 기원전 2000년이 되자, 메소포타미아는 셋 족속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일곱째 날을 존중하는 아담 족속의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금기를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고, 이러한 금기는 일곱째 날(샤바툼)을 지키는 바빌로니아 풍습에 기초를 두었다.

살렘의 가르침은 잠시 우세했지만, 예전의 신앙에 차츰 무릎을 꿇었다.

살렘 선생들은 여러 신들 가운데 셋, 벨ㆍ이아ㆍ아누를 최고로 올려놓았으나, 성교와 다산(多産)의 영, 이시타르의 인기를 결코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이시타르 대문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초기에 어지간히 진보했지만, 키시에 있는 학교의 지도자 나보닷이 성전 매춘 풍습을 없애려는 노력에 실패했고, 살렘의 복음도 사라졌다.

멜기세덱은 유일한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치라, 오직 믿음으로 신의 은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전에 경고하였다. 멜기세덱 선교사들은 도덕 관습을 뜯어고치는 운동에 얽혀들게 되었고, 그들의 사명은 옆길로 빠져 실패하였다.

거절당한 후에 살았던 살렘 선교사들은 구약 시편의 많은 부분을 돌에 새겼다. 후일에 히브리 사제들은 포로 생활 시절에 이를 발견했고, 유대인이 저술했다고 여기는 찬송 모음에 합병하였다.

이 찬송들은 살렘 선교사들 후손의 작품이었다. 욥기는 살렘 학교의 가르침을 잘 반영한다.

2. 에집트의 초기 종교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에집트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중에 유럽으로 퍼졌다.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세계 창조에 대한 관념을 받았지만, 에집트인으로부터 섭리 개념을 얻었다.

에집트에서 각 부족의 지도자는 왕좌를 쟁취한 뒤에, 그의 부족 신이 모든 다른 신의 창조자라고 선포하였다.

에집트의 40 부족은 저마다 신을 가졌고, 하나는 황소, 하나는 사자, 이런 따위를 숭배하였다.

에집트인은 벽돌로 만든 지하 저장실에 묻힌 시체들은 썩는데, 벽돌이 없는 무덤에 놓인 시체들은 소다가 스며든 모래의 작용 때문에, 보존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사제들은 관에 부적이 되는 구절을 새기곤 하였고, 이것이 “지하 세계에서 심장 빼앗기는 것”을 막는 조치라고 믿었다. 이러한 주문(呪文)이 수집되었고, 사자(死者)의 서로서 보존되었다.

주문으로 적당히 준비된 사람은 오시리스의 재판실까지 갈 수 있고, 죄가 없으면, 복스러운 나라로 입장이 허락된다고 믿었다.

땅에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저 세상에서 재판받는다는 개념은 에집트로부터 히브리 신학으로 전해졌다.

3. 도덕 개념의 진화 에집트인의 사회 및 윤리적 이상은 나일 강 유역에서 차츰차츰 발달되었다.

사람에게 신다운 영이 깃들기 때문에, 사람은 체험하는 생활로부터 영적 가치 기준을 발달시키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히브리 성서가 쓰여지기 3천 년 전에 이것이 에집트인의 표어였다: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 올바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서느니라.”

“평화로운 자는 생명을 얻고, 죄 있는 자는 죽음을 받느니라.”

“사랑받는 일을 행하는 자는 마음이 평안하며, 미움받는 일을 하는 자는 죄가 있도다.”

후일의 선악 개념을 미처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일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윤리적 기준에 따라서 살았다.

에집트인은 도덕적이었으나 영적 성품이 아주 높지는 않았다. 6천 년 동안에 위대한 선지자가 겨우 4명 에집트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아메니모프를 한 동안 따랐고, 옥반을 죽였다. 이크나톤을 건성으로 받아들였고 모세를 물리쳤다.

4. 아메니모프의 가르침 때가 되자, 많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고 더러는 아메니모프라 부른 한 선생이 나타났다.

이 현자의 가르침(지혜서)은 나중에 히브리어로 번역되었고, 구약이 글로 쓰이기 전에 그 민족의 신성한 책이 되었다.

그의 주요한 설교는 정부가 맡긴 직책에 정직하게 임하라고 아들에게 가르친 것이었고, 이 고귀한 감정은 현대의 어떤 정치가에게도 명예가 될 것이다.

“재산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땅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의 요점은 이러했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결과는 하나님이 정한다. 히브리어로 번역된 그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잠언의 철학이 되었다.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서 헬라인의 종교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 필로는 지혜서의 사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히브리인의 잠언에서 15장ㆍ17장ㆍ20장, 그리고 22장 17절에서 24장 22절까지는 거의 글자 그대로,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에서 가져갔다. 히브리인 시편의 1편은 아메니모피가 썼고, 이것은 이크나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5. 주목할 이크나톤 살렘의 의사의 영향을 통해서, 왕실의 한 여자가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지원하였다. 이 여자는 아들 이크나톤에게 하나님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이크나톤은 유일한 하나님 교리를 에집트에서 살려두었고, 철학적 일신교를 유지했다. 이 공훈을 인정해서, 아이 예수를 에집트로 이주시켰다.

이크나톤이 모세만큼 융통성과 정치적 천재를 보였더라면, 에집트는 일신교를 믿는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젊은 왕은 자기 이름을 고치고 (아멘호텝 4세 → 이크나톤), 서울을 버리고, 새 도시를 짓고,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창조했다.

모세같이 정치적 지혜가 있었더라면, 이크나톤은 서양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크나톤은 태양신으로 가장한 일신교를 세우려고 애썼다.

이 젊은 임금은 글을 많이 썼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해설서의 저자였는데, 31장으로 된 이 책을 다시 권력을 잡은 사제들이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크나톤은 또한 찬송을 137편 썼는데, 이 중에 열두 편이 구약의 시편에 간직되어 있고, 히브리인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이크나톤의 신 개념은 높았지만, 민족주의가 아니었고 그러한 국제적 종교는 전쟁터에서 에집트 군대의 사기를 높이지 못했다.

이크나톤의 사위는 사제들을 따라서 옛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름을 투탄카멘으로 바꾸었다.

대번에 이 사제들 중에 하나가 왕관을 빼앗았다. 그러나 사제들은 일신교의 물결을 이길 수 없었다. 이 개념은 이크나톤이 죽은 지 오랜 뒤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불타올랐다.

그의 영향은 몇 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그리스에서 지속되었고, 이렇게 에집트는 나일 강의 진화된 문화와 유프라테스의 계시된 종교를 후일은 종족들에게 전한 중개인이 되었다.

에집트에서 머무른 결과로 히브리인은 이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을 가져갔고, 이크나톤의 교리 중 상당 부분을 히브리인의 종교 안에 지속하였다.

6. 이란의 살렘 교리 멜기세덱 선교사들 중에 더러는 이란으로 가서 5백 년 동안 선교하고 있었는데, 통치자가 바뀌어 살렘 종파를 거의 멸종시켰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부조

그러나 기원전 6세기에 조로아스터가 살렘 복음의 불꽃을 다시 살리는 듯하였다.

조로아스터는 우르에 순례하러 가서 칼리가스티아와 루시퍼 반란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우르에 전통이 남아 있던 일곱 으뜸 영의 이야기를 들었고, 따라서 아우라 마즈다 밑에 일곱 최상의 신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였다.

이 새 종교는 의식을 치르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종교였다.

조로아스터는 불의 숭배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영의 상징으로서 불꽃을 이용하려 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일곱 으뜸 영에 관한 달라마시아 및 에덴의 가르침을 지속한 유일한 종파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순수한 이원론(선과 악)이 아니었다. 후일에 선과 악이 동등한 조건 하에서 싸운다고 믿었다.

아후라 마즈다

유대인의 천국 및 지옥의 전통, 악마에 관한 교리는 주로 유대인이 페르시아에 지배를 받던 시절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로부터 얻었다.

7. 살렘의 가르침이 아라비아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아라비아에서 최근에 자리를 잡았지만, 군사력이나 국가의 강요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마키벤타의 지시는 살렘 선교사들을 주춤하게 하였다.

각 부족은 자체의 주물을 모셨고, 가족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시는 가족들이 많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온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더 심각히 받아들이고, 사회적 요구 조건을 너무 엄하지 않게 고안했더라면, 아라비아는 예수의 단순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의 모든 아라비아 부족이 메카에 있는 어느 성전의 검은 돌 주물을 숭앙하였다. 이 장소에 나중에 이슬람 종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슬람의 장점은 알라가 하나 밖에 없는 신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96 편, 야웨―히브리인의 하나님
  신을 생각할 때 사람은 먼저 모든 신을 인정하고, 다음에 외국 신의 자기 부족 신에 종속시키고, 마지막에는 한 분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포함ㆍ종속ㆍ배제 과정)

일신교 관념은 살렘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나타난 뒤에 온 세계에 널리 퍼졌다.

멜기세덱이 육신화한 한 가지 목적은 미가엘이 수여되는 것을 위하여 유일한 하나님의 종교를 육성시키는 것이었다.

우주의 아버지를 믿는 민족이 없으면 미가엘은 유란시아에 올 수 없었다.

히브리 종교를 통에서, 에집트ㆍ메소포타미아ㆍ이란의 도덕 및 종교 사상이 서양 민족들에게 전달되었다.

1. 셈 족속의 신 개념 히브리인의 종교는 다신교로부터 최고신교(最高神敎)를 거쳐 일신교까지 진화되었고, 수많은 명칭이 하나님 개념에 적용되었다.

1. 야웨는 남쪽 팔레스타인 부족들의 신이었고, 이것은 시나이 화산과 연결되었다.

2. 엘 엘리욘. 이 교리는 최고 하나님이라는 명칭으로 암시되었다. 셈 족속에서 다수가 야웨와 엘 엘리욘을 숭배했다.

3. 엘 샤다이는 아메니모피의 지혜서에서 유래하고, 이크나톤의 교리에 영향을 받고 엘 엘리욘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4. 엘. 모든 진화하는 신 개념을 통틀어 엘이라고 언급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5. 엘로힘. 키시와 우르에는 세 분이 하나가 된 하나님을 가르쳤다. 삼위일체는 엘로힘이라는 이름, 또는 단수 엘로아로 불렀다.

6. 잡다한 명칭. 셈 족속은 자기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싫어했고, 수많은 다른 명칭(예를 들면, 주의 천사, 전능자, 아도나이 등)으로 불렀다.

여호와는 완성된 야웨 개념을 가리키려고 근래에 쓰인 명칭이다. 예수 이후 1천5백 년이 되기까지 쓰이지 않았다.

기원전 약 2000년까지 시나이 산은 화산 활동이 많았고, 이 호렙 산의 영은 히브리인의 신이 되었다.

가나안 족속은 야웨와 금ㆍ은 송아지를 포함하여, 그들의 부족 신을 계속 숭배했으며, 송아지는 베두인 목자들에게 시나이 화산의 영을 상징했다.

야웨 관념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론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발전하였고, 아시아에서 생긴 부처 개념의 변화와 비교할 만하다.

이처럼 신 관념이 많이 변질되었어도, 유대인은 이 진화하는 신 개념을 계속 야웨라고 불렀다.

2. 셈 종족 동방의 셈 족속은 말 타는 사람들이었고, 비옥한 초생달 동부 지역에 쳐들어가서 바빌로니아인과 함께 뭉쳤다. 아라비아의 셈 족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으나 번번이 밀려났다.

이 베두인 족속은 심한 기근이 있는 동안에 에집트의 공공 사업에 계약 노동자로 들어갔지만, 날마다 힘든 노동을 하는 종의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히브리인의 선조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씨족들 속에 합병된 대다수의 남녀는 에집트에서 머무른 적도 없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라비아 북부를 거쳐 가는 동안에, 모세의 지휘를 따르게 된 유목민에 지나지 않았다.

3. 비할 데 없는 모세 모세의 어머니는 에집트의 왕족이었고, 아버지는 정부와 베두인 포로들 사이의 연락 장교였다. 이처럼 모세는 우수한 종족 근원에서 생겨났다.

모세는 투쟁하는 날에 대비하여, 교육받은 지도자들을 조직하였고, 이들은 토착민의 감독자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와 동생이 에집트 임금과 맺은 협정에 따르면, 이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향하여 나일 강 유역을 평화롭게 떠날 예정이었고, 많지 않은 돈과 물건도 받기로 되었다.

그러나 파라오는 베두인 노예들 사이에서 불충을 발견했다는 핑계로, 조약을 깨뜨렸다.


람세스 2세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않았다. 남쪽에서 리비아인이 공격하고, 북쪽에서 그리스 해군이 침입하는 데 저항하느라고 에집트 군대가 넋이 빠져 있을 때, 모세는 야간에 도주하여 에집트를 탈출하였다.

작은 무리의 에집트인들이 쫓아 왔으나, 모세의 추종자들에게 전리품만 남겨 주었다.

4. 야웨를 선포하다 모세의 가르침은 온 세계의 절반에 영향을 미쳤고, 20세기에도 아직 그 영향이 계속된다.

시나이 산 근처에서 야영할 때가 되자, 모세는 확대된 신 개념을 형성했고, 이것을 야웨 개념으로 선포하였다.

모세는 베두인 족속에게 엘 엘리욘 개념을 가르치려 했지만, 이들이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게 되어, 야웨를 유일한 신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시나이 산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 동안, 히브리인의 종교 예식이 다듬어졌다.

그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산밑에서 머무르던 셋째 주에, 호렙 산이 사납게 분출하여, 모세는 야웨가 막강한 신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히브리인을 선민으로 골랐다고 선포했다.

후일에 유대인이 바빌론에서 종으로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진화하는 야웨는 만국의 하나님이 되었다.

히브리인의 종교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호렙 산의 원시 신으로부터 두 이사야가 말하는 신의 모습까지 발전한 것이다.

5. 모세의 가르침 모세는 마키벤타와 예수 사이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세계적 스승이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던 당시에 히브리인은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세의 업적에 관하여 기록이 거의 없다. 모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그가 죽은 지 천년도 더 지나서 존재하던 전통으로부터 만든 것이다.

모세는 조직에 능한 사람이었다. 에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종교와 도덕 관습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히브리인의 예배 의식 체계를 만들었다.

모세는 하나님에 관하여 큰 환상을 가졌지만, 물질적 축복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너희를 사랑하고 복을 주고 수를 늘리리라. 너희 자궁의 열매와 너희 땅의 소산을 늘리리라.”

이 위대한 모세가 무지한 히브리인이 알아듣도록 엘 엘리욘 개념을 가르치는 것을 구경하기는 참으로 딱했다.

히브리인의 일상적 야웨 개념은 둘러싼 민족들의 부족 신보다 별로 낫지 않은 하나님 개념이었다.

모세가 죽었을 때, 베두인 부족들은 금송아지 숭배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에게 야웨의 상징이었다.

요수아에게 히브리인의 지휘를 넘겼을 때, 모세는 몇천 명을 모았고, 이들을 어느 정도 자치하고 목자 생활을 하는 투사들로 만들었다.

6. 모세가 죽은 뒤의 하나님 개념 모세가 죽고 나서 야웨 개념은 재빨리 질이 나빠졌다.

일단 팔레스타인에 다다르자, 유대인은 유목민 처지에서 농부로 바뀌었고, 이러한 풍습의 진화와 종교 관점의 변화는 야웨의 성품에 대하여 가졌던 개념의 변화를 요구했다.

요수아는 믿지 않는 민족에게 엄격한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었다.

7. 시편과 욥기 시편은 다른 어떤 단일 문집보다도 오랜 세월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각 찬송의 근원과 연대를 고려할 수 있다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시편은 레반트에서 살렘 종교를 믿던 사람들의 하나님 개념을 기록한 것이요, 아메니모프와 이사야 사이의 기간을 포함한다.

욥기에 얼룩덜룩 묘사된 신의 그림은 거의 3백 년에 걸쳐서, 20명이 넘는 메소포타미아의 선생들이 지은 것이다. 이를 읽으면, 너희는 갈대아 지방의 우르 근처에서 참 하나님 개념이 최선으로 간직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엘리후는 이렇게 가르쳤다: “누구라도 ‘나는 죄를 지었고 옳은 것을 곡해하였으며, 그것이 내게 이롭지 않았도다’하고 말하면, 하나님은 그를 구렁에서 구원하실 것이요, 그는 빛을 볼지니라.”

엘리후는 우르의 선지자였고, 한때 메소포타미아에서 멜기세덱 거류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제였다.

이처럼 살렘 선교사들의 잔재는 히브리 민족의 분열기에 진실의 빛을 유지했다. 이 선생들은 야웨 개념의 진화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97편, 히브리인 사이에서 진화된 하나님 개념
  히브리인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하나님 개념에서 사람 모습 벗기는 일을 해냈다. 서민들조차 야웨를 개인의 아버지는 아니라도, 종족의 아버지로 여길 수 있었다.

멜기세덱 시절에, 살렘에서 하나님 개념을 뚜렷하게 가르침 받았지만, 에집트에서 탈출하던 시절에 이 개념은 흐릿했고,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반응하여 히브리인의 머리 속에서 차츰차츰 발달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중요한 선지자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1. 사무엘―처음 히브리 선지자 둘러싼 민족들의 압력 때문에 히브리인은 중앙 집권적 정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행정 권한이 집중된 것은 사무엘에게 개혁자로서 활동하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최고의 야웨를 예배하라고 이스라엘 민족을 설득하려 했을 때 사무엘은 거의 보편적 반대에 부딪쳤다. 지식층만 야웨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나머지 반은 열등한 야웨 개념을 계속 간직하였다.

사무엘은 말로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행동으로 옮겼다. 하루는 바알 사제를 조롱하고 다음 날은 사로잡힌 임금을 찍어 죽였다.

그 시절에 야웨는 항상 무언가 뉘우치고 변덕을 부리는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는데, 야웨가 변함이 없는 신이라고 선언하여, 사무엘은 신 개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성실하며, 계약을 지키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전파했다.

이렇게 선언하면서 사무엘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주는 사람을 부하게도 만들고 가난하게도 만드시며,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시니라.”

그러나 사무엘은 부족 신 개념을 넘어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2. 엘리야와 엘리사 기원전 10세기에 히브리 민족은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분단 이후에 영적 퇴폐의 물결을 막으려고 많은 선생들이 애썼으나, 엘리야가 나타나기까지 별 소득이 없었다.

엘리야는 사무엘처럼 분주했고, 진보된 하나님 개념을 제시할 겨를이 없었다.

엘리야가 떠났을 때, 동료 엘리사가 뒤를 이었고, 미가야의 도움을 받아서 팔레스타인에서 진실의 빛을 살려 두었다.

3. 야웨와 바알 야웨 신도와 바알 종파 사이의 논쟁은 종교 관념의 차이가 아닌, 사회ㆍ경제 이념의 충돌로 생겨났다.

방랑하는 아라비아 부족(야웨파)는 토지가 신이 씨족에게 주는 선물이요, 사고 팔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쪽의 가나안 족속(바알파)는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고 저당 잡혔다.

바알 종파는 두 가지 주요 교리에 기초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유 재산을 정당화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바알이 비를 보낸다고 생각되었다.

일반적으로 바알파는 집ㆍ땅ㆍ노예를 소유했으며, 귀족인 지주였다. 각 바알은 신성한 장소, 사제, “거룩한 여자” (의식에 쓰이는 창녀)들을 거느렸다.

가나안인과 히브리인 사이에 사회ㆍ경제ㆍ도덕ㆍ종교적 충돌이 있었고, 엘리야의 시절에 야웨의 승리로 끝났다.

일신교가 다신교를 물리쳤다.

4. 아모스와 호세아 아모스는 북쪽 부족들의 부도덕을 비난하려고 남부의 산지에서 나타났다.

아모스는 멜기세덱 이후로, 민족의 도덕에 2중 기준을 비난하였다.

야웨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죄를 묵인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이것은 “선민” 교리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고, 그 시절에 많은 히브리인이 이를 분개하였다.

아모스는 야웨가 “만국의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의식(儀式)으로 올바름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돌로 쳐죽임을 당하기 전에 아모스는 진실의 누룩을 넉넉히 퍼뜨렸다.

호세아는 신이 자비롭다는 화음의 첫 음정을 시작했고, 후일에 이사야는 이를 아름답게 노래했다.

5. 첫 이사야 첫 이사야가 등장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고 전했다:

“일어나서 빛날지어다. 너희의 빛이 다가왔고, 주의 영광이 너희를 비춤이라.”

“주의 영이 내 가까이 오시니, 좋은 소식을 유순한 자에게 전파하라고 그가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

“마음이 상한 자를 동여매고, 포로에게 자유를, 묶인 자에게 감옥 문이 열렸음을 선포하라고 나를 보내셨음이라.”

“저희가 받는 모든 고통 속에 그가 고통을 받았고, 그의 앞에 있던 천사가 저희를 구하였도다.”

이사야의 뒤를 미가와 오바디아가 따랐다.

미가는 말했다: “각 사람이 자기의 넝쿨 아래 앉을지며, 아무도 그에게 겁을 주지 말지니, 이는 각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 살 것임이라.”

이때는 위대한 시대였다. 정말로 풍운의 시절이었으니, 2천5백여 년 전에, 사람을 해방하는 소리를 더러가 듣고 믿기도 하였다.

6. 두려움 없는 예레미야 예레미야가 야웨를 국제적 신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히브리인의 종교는 이 무렵 이후로 세계에 두루, 일신교의 부흥을 가져왔다.

예레미야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을 설파하였다.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딸에게 고통 주기를 기뻐하지 않으심이라.”

예레미야가 도시의 항복을 조언했을 때, 사제와 통치자들은 그를 컴컴한 지하 감옥의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7. 둘째 이사야 히브리인 사제와 서기관들은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는데, 이는 유대 나라를 복구하고, 종족의 역사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우기지 않았고, 신성한 책을 쓴다고 떠벌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포로 생활을 하던 동포의 용기를 북돋우려고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후일의 사람들이 이것과 기타 기록을 모았고, 이 안내서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이사야는 가르침을 기록에 남겨 놓았다. 적대하는 사제들은 이를 무시하고 싶었어도,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존경하여 이 기록을 예전 이사야의 기록 사이에 집어넣었다.

이처럼 둘째 이사야의 기록은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 끝까지 포함한다.

예수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어떤 스승도 둘째 이사야가 선포한 높은 하나님 개념에 이르지 못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고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늘이 사라지고 땅이 고갈될지라도 나의 올바름은 언제까지나 버티고, 나의 구원은 대대로 버틸지니라.”

이와 같은 말씀은 포로가 된 유대인 뿐 아니라 그 이후로 허다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살렘의 하나님을 새로 가르치는 그의 복음을 다시 들어 보아라: “주를 섬기는 자는 힘을 다시 찾겠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리라. 저희가 달려도 지치지 아니하겠고, 걸어도 쓰러지지 아니하리라.”

우주의 아버지의 무한한 속성을 그린 그의 글은 시(詩)와 같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그의 신 묘사를 들어 보아라: “나는 영원에서 거하는 높고 높은 자이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 외에 아무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발판이라.”

이사야가 최고의 야웨,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를 부르짖음으로 민족주의적 야웨는 빛을 잃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 선지자는 바빌론의 강가에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뭇 나라의 민족들에게 설파하였다.

사제들이 민족주의에 헌신하지 않았더라면, 두 이사야의 가르침은 유대인이 약속된 메시아를 받아들이도록 길을 예비했을 것이다.

8. 신성한 역사와 세속의 역사 히브리인의 체험 기록을 신성한 역사로, 나머지 세상일을 세속의 역사로 보는 관습은 역사의 해석에 대하여 사람의 머리 속에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이 문제는 유대인에게 세속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바빌로니아에 추방된 시절에 사제들이 이스라엘의 신성한 역사라고 생각된 기록을 준비한 뒤에,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과 “유다 왕들의 업적”을 샅샅이 없애버렸다.

외래 통치자의 압제 밑에서 5백 년을 지낸 것은 유대인에게도 너무 지나쳤다.

에즈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도 여전히 구원은 뒤로 미루어졌다. 다니엘은 메시아의 왕국이 즉시 세워진다는 각본을 제시했다.

이 모든 거짓된 소망이 좌절되었으므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헛갈렸고, 파라다이스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육신화되어 왔을 때, 그를 알아보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약의 저자와 후일에 기독교 작가들은 뜻은 좋았지만, 히브리인 역사를 왜곡하였다. 히브리인의 역사는 교리화되고 신성한 역사라는 허구로 바뀌었다.

일상적인 현세의 역사를 신성한 역사로 바꾸려고 유대인 사제들이 어떻게 기록을 바빌론에서 고쳤는가 되새겨야 한다.

9. 히브리인의 역사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결코 12부족이 없었다. 겨우 서너 부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히브리 국가는 이른바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연합한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딸은 가나안 족속 사이에서 살았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희의 딸들을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가나안 족속의 아들들에게 주었더라.”

히브리인이 가나안 족속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고 사제들이 기록했어도, 그들을 결코 몰아내지 않았다.

유대인은 언제나 북쪽 이스라엘(에브라임) 사람들의 기록에 먹칠하려고 애썼다.

히브리인의 역사는 암몬 족속이 길르앗 족속을 공격하는 데 저항하려고 사울이 북부 씨족들을 불러모음으로 비롯된다.

사울은 3천 명 남짓한 군대로 적을 무찔렀고, 이 공훈 때문에 임금이 되었다. 추방된 사제들은 사울의 군대를 330,000명으로 불렸고, 전투에 참여한 부족들의 명단에 “유다”를 보탰다.

군대의 인기로 사울은 임금이 되었고, 아무 사제나 선지자가 개입하지 않았지만, 사제들은 사무엘 선지가 사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큰 왜곡은 다윗의 이야기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 연맹에 들어갔고, 필리스티아 족속은 사울을 물리쳤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충성했더라면 이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다윗의 군대는 불평꾼의 집합이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본부를 차렸고, 동료들은 다윗을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 선포했다. 유다는 대체로 히브리인 아닌 자들(켄, 갈렙, 예부스 및 기타 가나안 족속들)로 구성되었다.

다윗은 처음에 사울의 딸, 다음에는 나발의 과부, 다음에는 게수르 임금 탈마이의 딸과 결혼하여, 정치적으로 입지를 굳히려고 애썼다. 아내 밧세바는 말할 것도 없고, 예부스의 여인들로부터 여섯 아내를 골랐다.

그런 민족으로부터 다윗은 사라지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

유다의 부족은 유대인이기보다 오히려 이방인이었다. 연합 왕국의 서울을 예부스(예루살렘)에 세웠다. 필리스티아 족속이 공격했으나 다윗은 이들을 물리쳤다.

너희의 기록에 내막을 드러내는 말이 나타난다: “야웨가 내 앞에서 내 적들을 부수었도다. 그런즉 그곳의 이름을 바알 페라짐(바알이 돌파했다)이라 불렀더라.”

필리스티아 족속을 물리친 뒤에 다윗은 “야웨의 상자”를 손에 넣었고, 왕국에서 공식으로 야웨를 숭배하게 하였다.

다윗이 죽은 뒤에 솔로몬은 사치스런 왕궁과 기타 건축 사업으로 나라를 파산시켰고, 그의 후궁들은 거의 1천 명에 이르렀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는 여러 번 전쟁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땅을 사고 팔기 시작한 전제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아합 임금이 나봇한테서 땅을 사려고 했을 때 문제가 터졌다. 그의 아내 나봇은 “엘로힘과 임금”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나봇의 땅을 몰수하라는 서류에 아합의 이름을 위조했다.

엘리야가 그 장면에 나타나서 아합이 나봇 가족을 죽인 것을 비난하였다.

예호아하스와 아들 예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였고, 어느 악당 귀족이 사마리아에서 다스렸는데, 그의 약탈 행위는 다윗 왕조에 필적하였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자, 엘리야ㆍ아모스ㆍ호세아가 비밀 기록을 시작하였고,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 성경의 진짜 시작이었다.

이스라엘 왕이 아씨리아에 더 조공 바치기를 거절하자 3년 동안 포위가 시작되었고, 북쪽 왕국은 사라졌다.

유다에서는 몇 사람의 손에 토지가 집중되었다.

이내 야웨의 성전과 나란히, 바알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생겼다. 소년 임금 요아스의 일신교 폭동이 공포의 통치를 끝냈다.

시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다음 임금 아마시아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 웃시야를 왕좌에 앉혔다. 유다는 아씨리아에 조공을 바침으로 1백 년 동안 존재했다.

아씨리아의 멸망과 에집트의 우세는 한동안 유다에게 구원을 가져왔다.

아씨리아를 도우려고 네코의 막강한 군대가 에집트에서부터 올라오자, 요시아는 패배했고, 유다는 에집트에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떨어졌다.

느부갓네살이 네코를 타도한 뒤에, 유다는 바빌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유다가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이 치려고 왔고, 유다 족속은 야웨에게 영향을 미칠까 하여 노예 해방과 같은 사회 개혁을 시작했다.

히브리인은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잠시 물러나서 기뻐했으나,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멸망이 다가오는 것을 일러 주었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야웨와 바알의 싸움은 포로 생활로 끝이 났다.

바빌론에서, 유대인은 특별한 관습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이념이 이기려면 이방인을 개종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유대 종교는 정말로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생성되었다.

유대 민족의 신성한 역사로 여겨 왔던 많은 것이 평범한 세속 역사의 연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유대교의 토양으로부터 기독교가 자라났지만, 유대인은 기적의 민족이 아니었다.

10. 히브리 종교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는 특별 수고를 하라고 선택된 백성이라고 가르쳤다. 메시아는 그들과 온 세계 위에 평화의 왕으로서 군림하리라고 전에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다.

모세는 작별 웅변에서 놀라운 하나님 이야기를 제시했으나 히브리 씨족들은 이를 물리쳤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민족의 잔재는 사제층의 의식을 지지하고 둘째 이사야의 훌륭한 가르침을 물리쳤다.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신분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종교는 흩어진 유랑자들의 가슴 속에 줄곧 살아 있다.

이 종교가 살아남은 것은 추종자들이 높은 가치 기준을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 신학은 기독교와 모하메드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 종교는 또한 제도 때문에 버티었다. 제도화된 종교의 잘못을 보고서 지도자들은 집단 활동을 없애려고 한다. 의식을 없애는 대신에 의식(儀式)을 개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유란시아에서 일어난 종교의 진화에서 가장 큰 공적을 이루었다. 시나이 화산의 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비로운 아버지 개념이 되기까지, 점진적 변화가 있었다.

   
  98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서양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주로 에집트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갔는데, 철저하게 헬라화되고 나중에 기독교화된 뒤에, 서양 철학에 담기게 되었다.

서양 세계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후일에 그 종교 철학은 예수의 종교 철학이 되었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결국 기독교회를 낳았다.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렘의 가르침을 유지한 자들 중에서 견유학파를 꼽아야 한다.

서양에서 허다한 전투에서 싸웠던 유대인 용병들이 유럽에서 살렘 교리의 상당 부분을 퍼뜨렸다.

그리스 철학ㆍ유대 신학ㆍ기독교의 윤리에서 기본 신조는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1. 그리스인 사이에 남은 살렘 종교 마키벤타가 지워준 서약은 예배하는 조직을 금하였고, 각 선생에게 결코 사제로서 활동하지 말고, 돈을 받지 말고, 오직 먹을 것과 옷과 잠자리를 받는다는 약속을 강요하였다.

살렘 선생들의 초기 영향은 아리아인의 침공을 받아 거의 사라졌다. 이 헬라인 침입자들은 사람 모습을 닮은 하나님 개념을 가져왔다.

헬라 시대 그리스인은 자기네 인신(人神) 제우스를 지중해의 민족들에게 강제하였고, 제우스는 이미 그리스의 하급 신들의 만신전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헬라인은 살렘 선생들의 반(反)사제 신조를 지켜서 그리스에서는 사제가 생겨지 않았고, 신들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예술의 일이 되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사람 모습을 한 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인의 도덕ㆍ윤리ㆍ철학은 이내 신 개념을 훨씬 넘어서 진보했고,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이러한 불균형은 인도에서 입증되었다시피, 그리스에 위험했다.

2. 그리스의 철학 사상 올림푸스 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신자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도 않았다. 1천 년 안에 이 종교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 종교가 없이 지냈다. 이것이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이었다.

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인간에게 너무나 범신적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기계론자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것은 미덕이요, 남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낫다, 신들은 선하다고 가르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사제와 성서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미학이 발달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사제와 “신성한 기록”이 거의 없었고,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방하였으나, 그들의 종교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스에서 신앙은 생각에 종속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생각은 신앙에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의 장점은 히브리인의 도덕과 그리스인의 사상으로부터 많이 빌려온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적 교리는 너무 구체화되어서 성장하기가 어려웠고, 그리스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 되었으며, 하나님 개념은 비성격 무한자와 다르지 않았다.

이 시절에 보통 사람들은 추상적 신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다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기도를 듣고 친히 상대하는 하나님과 구원의 약속을 몹시 바랐다.

오르페우스 단체는 도덕을 중시하고 구원을 준다는 약속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오르페우스

3.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로마에 미친 영향 라틴 족속이 후일에 가졌던 종교는 그리스인의 지적 체계나 다른 영적 종교보다 정치적 준수에 가까왔다.

기원전 6세기에 너무 적은 수의 살렘 선교사들이 이탈리아에 침투했지만, 에투루리아 사제의 영향을 이겨낼 수 없었다.

라틴 부족들의 종교는 그리스인의 종교처럼 시시하거나 돈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히브리인의 종교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그리스로부터 널리 문화를 도입하였고,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대부분 라틴 부족의 만진전으로 옮겨졌다.

라틴 종족들은 성전ㆍ제단ㆍ성소(聖所)를 유지했고, 위기에 신탁을 묻곤 했다. 영웅들의 뼈, 나중에는 기독교 성자들의 뼈를 보존했다.

태어나는 로마 국가는 정치적으로 정복자가 되었지만, 에집트ㆍ그리스ㆍ레반트의 종파ㆍ의식ㆍ신비ㆍ신 개념들에게 정복되었다.

국가 종교를 받드는 어느 사제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최종의 신 교리를 퍼뜨리려고 살렘 선생들이 전에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고, 자신이 모든 사람의 대사제로 행동했다.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이 종교는 번성했고,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에서 두루 신봉되었다.


아우구스투스

견유학파는 살렘 신자 무리의 잔재였고, 로마인들에게 종교 의식을 버리고 멜기세덱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라고 훈계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견유학파를 물리쳤다.

4. 신비교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시 가족 종교와 국가 종교를 잃어버렸고, 그리스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집트와 레반트에서 온 신비교에 눈을 돌렸다.

가장 유행하게 된 신비교는 다음과 같다:

1. 쿠벨레와 아들 아티스를 믿는 프리지아인의 종파.

2. 오시리스와 그 어머니 이시스를 믿는 에집트인의 종파.

3. 인류의 구원자인 미트라를 숭배하는 이란인의 종파.

프리지아인의 예식은 품위가 없었고, 가장 거룩한 날은 검은 금요일, “피의 날”이었는데, 이것은 아티스가 죽은 것을 기념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의식은 프리지아인의 제사보다 세련되었다.

에집트인의 의식은 나일 강 신의 전설을 근거했고, 식물이 겨울에 죽고 봄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관찰한 데서 유래하였다.

5. 미트라 종파 프리지아와 에집트의 신비교들은 결국 미트라 종파에 굴복하였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에서 모집한 로마 군단의 선전을 통해서 로마 제국에 퍼졌다.

미트라 종파는 이란에서 생겨났다. 미트라교가 로마에 이를 때가 되자,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상당히 흡수하여 개선되었다. 주로 미트라 종파를 통해서 조로아스터교는 나중에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태양 신, 솔 인빅투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아우라 마즈다 신 개념이 퇴화한 것이다.

이 종파의 신자들은 동굴과 기타 비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찬송을 부르고, 희생으로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셨다.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렸고, 주마다 태양 신의 날에 특별 예식이 있고, 해마다 미트라 축제, 12월 25일에 가장 공들인 행사가 있었다.

남자는 죽으면 미트라 앞에서 재판을 받고, 세상이 끝날 때 죽은 자는 모두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처음에 이것은 남자만을 위한 종교였고, 나중에는 신자의 아내와 딸들이 큰 어머니의 성전에 들어갔는데, 이 성전은 미트라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6. 미트라교와 기독교 여러 신비교와 기독교가 오기 전에, 개인적 종교는 북 아프리카와 유럽의 나라에서 독립된 제도가 되지 않았다.

종교는 가족, 도시 국가, 제국의 일거리였다.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에게는 사제 계급도 “신성한 책”도 없었다.

제도화는 종교의 영적 질을 떨어뜨린 것이 참말이지만, 어떤 종교도 제도적 조직의 도움 없이,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미트라교와 기독교가 경쟁하던 시절까지, 서양의 종교는 시들고 있었다.

두 종교의 교회는 겉모습과 의식이 무척 비슷했다.

예배 장소의 대부분은 땅 밑에 있었고, 두 종교의 제단 배경은 구세주가 고통받는 것을 다양하게 그렸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손가락을 거룩한 물에 담그는 것이 미트라교 신자들의 관습이었다. 어느 구역에는 한때 두 종교에 속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다수의 기독교회에 이 관습을 들여왔다.

두 종교가 세례를 주었고, 빵과 포도주로 된 성찬을 먹었다.

한 가지 차이점은, 미트라교가 군국주의를 북돋고 기독교는 지나치게 평화적인 것이다.

여자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은 것이 기독교가 미트라교를 이기게 된 주요한 요인이다.

결국, 명칭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서양을 지배했다.

7. 기독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추종자들이 기독교를 레반트와 서양에 두루 퍼뜨렸다.

기독교는 다음 요소가 복합되어 생겨났다.

1. 멜기세덱의 가르침.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모든 종교에 기본 요소이다.

2. 히브리인의 도덕ㆍ윤리ㆍ신학의 체계, 그리고 섭리와 최고의 야웨를 믿는 신앙.

3. 선과 악이 싸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개념. 이것은 이미 유대교와 미트라교에 자국을 남겼다.

4. 미트라교와 큰 어머니 숭배. 미트라가 땅에 온 것을, 천사들의 통지를 받은 몇 목자들이 구경했다고 생각되었다.

5. 요셉의 아들이 땅에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

6. 바울의 개인적 관점. 바울은 그가 쓴 편지들을 후일의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것이라 꿈도 꾸지 않았다.

7. 헬라 민족들의 철학적 생각. 그리스인의 철학은 기독교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예수의 최초의 가르침은 서양에 파고들자 서양화되었고, 모든 민족에게 호소하는 잠재성을 잃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백인종의 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에 잘 적응된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주가 친히 가르친 복음, 하나님이 아버지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을 대체로 잊어 버렸다.

멜기세덱이 유란시아에 찾아온 지 거의 4천 년이 된다.

마키벤타는 이 특별 수여의 목적을 이루었다. 미가엘이 땅에 나타나려고 준비했을 때,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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