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6 편, 예수의 믿음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1935년

필사 존재의 평범한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예수는 하나님이 확실히 보살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숭고한 체험을 하도록 이 개념을 높이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부딪치고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았다.

예수가 인생의 가치에 크게 기여한 것은 새 하나님 관념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팔팔한 믿음을 인간으로서 보여준 것이다.

이 세상과 다른 세계들은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며, 이것은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가지는 관계에 기초를 두는 종교이다.

예수의 믿음

신학은 신앙을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믿음은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확신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다.

종교적 천재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지나친 광신으로 흔히 이끌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이러한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예수의 영적 승진이 하나님과 친히 교통하여 얻는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믿음은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보통 일어나는 사회ㆍ경제ㆍ도덕적 생활 상황에 대하여 공정하게 지적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주는 언제나 믿음을 경험으로 얻은 지혜 및 평가와 조정함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예수는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믿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의식했어도,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고 순간에 대답한 것은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기도와 종교 생활의 측면에서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인생을 거룩히 바쳤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비슷하였다. 아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결코 하늘 아버지가 확실히 보살피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경지에 이르렀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보장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땅에서 예수의 일생은, 한 가지 목적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바쳤다. 예수의 믿음은 주제넘지 않았다. 예수는 건전한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실망을 겪었으며, 의무의 엄격한 조건을 주춤하지 않고 따랐다.

  1. 인간 예수
사람으로서 산 예수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스도가 사람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인간이었다는 진실을 놓치지 말라.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신학(神學)의 무덤에서 회복되고, 기독교 및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 제시된다면 얼마나 숭고한 봉사가 될 것인가!

예수가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교회의 권한이 실추될까 두려워하는가?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사회ㆍ경제적 변화는 철저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와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없이 봉사한 그 정신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드높은 그의 일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생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종교적 동기에 거룩하게 바친 그의 일생을 발표하는 것에 서민들은 다시 반응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하늘나라를 믿는 신자의 목표는 예수가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가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가 자아를 각성한 일곱 단계

인간임을 의식한 때부터 신다운 성품을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을 가진 것을 의식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기까지 올라갔다. 여기에는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일곱 단계가 있었다: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이마누엘의 사자가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4) 변모한 산에서 겪은 체험.

(5) 상물질 부활.

(6) 영으로서 승천한 것.

(7) 최후에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2. 예수의 종교
예수의 종교와 기독교

언젠가 기독교회는 철저한 개혁(改革)을 통해서 예수의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가르침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말로)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는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고,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기독교로 만들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그의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하다.

신약 저자들이 본 예수의 모습

예수는 짧은 인생 동안에 보통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파라다이스에 이르기 전 여러 영 훈련 학교에서 오래 머물러 도달하는 영적 수준에 이르렀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기까지 그는 신성(神性)의 경지에 이른 것을 의식하였다. 인간의 수준에서 신의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그가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자로서 성취한 것이었다.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애썼던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시피,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다운 예수를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투쟁하는 인간 예수를 못 보고 지나쳤다.

신약의 저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신성을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인간다운 주의 모습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경향을 부추겼다.


세례 주는 바울과 베드로,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

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체험적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신자들이 형제 단체가 되는 종교를 세웠다.

어렵게 보이는 주의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에게 내린 명령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었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예수가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가 보통, 바람을 피우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했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긍정적 견해를 가졌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은 자에게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알았다.

사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였다.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사회가 성취할 궁극의 목적은 사람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을 수 없다.

  3. 종교의 우월성
하나님을 찾아내는 체험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이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여 해결할 안목을 준다.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ㆍ관념ㆍ관계이다. 철학은 이러한 개념을 이성ㆍ지혜ㆍ믿음―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로 보고 싶어한다.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은 자아 전체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를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조절자가 지성에 깃드는 증거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로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에 달려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얻는 데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는 영 알맹이, 조절자가 있다. 조절자가 인간 지성에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i) 인도주의적 교제―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인 성질을 드러낸다.

(ii) 우주에 대한 바른 견해―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한 것을 이해한다.

(iii) 인생의 영적 평가―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이 계심을 깨닫고, 그와 함께 충만한 체험을 얻는다.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도덕적 판단

도덕적 가치는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i)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ii) 사회적 판단―윤리적 선택.

(iii) 하나님에 대한 판단―종교적 선택.

따라서, 인간의 진보를 성취하려면 계시를 내리는 기법과 인간을 차츰 진화시키는 기법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

신이 깃드는 것을 깨닫는 체험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자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대체로 이 영적 가치 분류자가 골라놓은 가치를 인간의 의지(意志)가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는 지성으로 발견하는 단계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신이 깃드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로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을 수치로 어림할 수도 없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체험

히브리인은 도덕적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찬양하였으며,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믿음ㆍ소망ㆍ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과 함께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종교를 본보기로 보였다.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혼에 신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지만, 단순히 정신의 환상은 아니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인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배는 실체의 근원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 의식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도덕과 종교

도덕성은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깨닫는 데 필수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이 종교적 체험의 근원은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초월하지만, 영 밑에 있다.

진화하는 지성(知性)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깃드는 조절자는 인간 지성에게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자체의 도덕적 가치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든다. 종교는 도덕이 승인하는 것을 강화하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 속에서 서로 얽혀 있다.

현대인의 도전

사랑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정신의 환상일 뿐이다.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긴다.

종교적 체험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사람의 영적 욕구는 환상이 아니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낙심하지 말지니, 인간의 진화는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지성 안에 거하는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어떤 가치라도 오직 그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 아버지의 영은 필사 인간 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