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 편, 오순절 이후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30년 – 20세기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는 사도들 대다수의 미래 정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기독교회의 진정한 창시자였다. 바울은 기독교를 이방인에게 가져갔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이를 온 로마 제국에 퍼뜨렸다.

전통에 묶여 있던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서로 형제라는 예수의 복음이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베드로와 바울의 선포를 믿지 않았어도, 나머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스 문화를 물려받은 서양 세계의 민족들은 철학ㆍ예술ㆍ문학 면에서 위대한 전통을 가졌지만, 마음에 흡족한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인간 사회에 기독교에 담겨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갑자기 밀어닥쳤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 관습과 예수의 새로운 말씀, 이 둘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고, 역사는 그 투쟁이 타협으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영적 호소였으나, 기독교는 종교 예식ㆍ교육ㆍ마술ㆍ의술ㆍ예술ㆍ문학ㆍ법률ㆍ정부ㆍ도덕ㆍ성(性) 규제ㆍ일부다처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기독교는 새 종교가 아니라 새 체제의 인간 사회로서 나타났다.

처음에 기독교는 낮은 사회ㆍ경제 계층만 개종시켰으나, 갈수록 더 그리스ㆍ로마 사회 전체에 침투하였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공한 이유

새 가르침이 유대 땅에서 거의 실패했는데, 기독교가 급속히 로마 제국의 일류 지성인들을 설득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i)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고, 그 후계자들도 그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ii) 기독교는 철저히 헬라화되었다.

(iii) 기독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을 담았고, 그 안에 온 인류를 구하는 말씀이 반영되었다.

(iv)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미트라교와 타협한 결과로 미트라교의 상류 추종자들이 안티옥 종파에 설득되었다.

(v)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 및 후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와 타협하였고,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설득하였다.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예식을 받아들였어도 이교도가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니까, 기독교는 이교도와 수지맞는 장사를 했다. 기독교는 미트라 종파와 거래한 것보다 이교도와 협상하여 더 이익을 남겼다.

기독교의 초기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상에 상처를 냈으나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상처입은 주의 이상은 아직도 그 복음 속에 잠자고 있으며, 궁극에 그 권능을 십분 주장할 것이다.

기독교가 주도권을 쥔 이유

기독교가 이교화되면서 옛 종교는 예식 면에서 하찮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독교는 다음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i) 기독교는 엄청나게 높은 도덕 기준을 부르짖었다.

(ii) 크게 확대된 하나님 개념을 세상에 주었다.

(iii) 기독교는 불멸의 희망을 주었다.

(iv) 기독교는 사람의 갈급한 영혼에게 나사렛 예수를 보여주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의 바울판 해석이었지만, 그의 가르침 중에서 많은 것이 기독교 안에 잠자고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많은 빚을 졌다.

  1. 그리스인의 영향
그리스인과 예수의 가르침

그리스의 철학과 예수의 가르침에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개인을 중요시했다. 그리스인은 개인의 사회적ㆍ정치적 등장, 예수는 도덕적ㆍ영적 등장이 목표였다.

기독교의 헬라화는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서 아레오파구스 회의 앞에서, 아크로폴리스의 그늘 아래에서, 아데네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하여 이야기한 날에 시작되었다.

그리스인은 지적 자유를 가르쳤고, 예수는 영적 자유를 가르쳤다. 이 두 관념이 한데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 헌장이 되었다.

아크로폴리스 근처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기독교는 다음 이유로 경쟁하는 다른 종교들을 이겼다:

(i) 그리스의 지성인은 유대인한테서도 좋은 관념을 기꺼이 빌렸다.

(ii)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경쟁하는 종파들과 현명하게 타협하였다.

아데네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그리스인은 영적으로 갈급했다. 그리스인은 영적 진실을 찾고 있었다. 로마인은 처음에 기독교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그리스인은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로마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리스인은 아름다움, 유대인은 거룩함을 존중했지만, 두 민족이 진실을 사랑하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인은 종교 외에 사회ㆍ경제ㆍ정치ㆍ철학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토론했다. 이와 반대로 유대인은 종교에만 머리를 쏟고, 다른 분야의 사상을 소홀히 하였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사는 한, 그리스인은 정치를 잘 했으나, 그리스가 큰 제국이 되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커져 가는 제국을 위하여 충분히 좋았지만, 정치와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 종교의 기독교판이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은 정말로 유일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헬라 문화는 그런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리스) 문화의 지배가 계속되었지만, 로마로부터 정치적 수완을 얻은 뒤에,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기독교를 얻은 뒤에 오래 견디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헬라 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학문이 진보되고 있었지만, 천재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기독교에 담긴 예수의 관념과 가르침이 그리스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문화로 동방으로 진격했지만, 바울은 기독교로 서방을 공략했다. 서방 세계 어디에나 그리스 문화가 지배한 곳에, 헬라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예수의 말씀의 동방판은 아브너가 충실히 유지했어도, 헬라화된 기독교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궁극에 이슬람 운동에 파묻혀 사라졌다.

  2. 로마인의 영향
로마인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고, (아데네에서) 제비로 뽑는 정치 대신에 대의정치(代議政治)를 시행하였다. 로마가 다른 언어ㆍ민족ㆍ종교에 대해서 관대했기 때문에, 이 변화는 기독교에 유리했다.

초기에 로마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은 불행하게도 그들이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고 로마인은 예술이나 종교보다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로마의 법은 존경심을 일으켰고, 교육은 충성스러운 시민을 낳았다. 로마인은 정직하고 이상에 헌신했지만, 그 이름에 어울리는 종교가 없었다.

이 로마인은 위대한 민족이었고,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정직하고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당연히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이어받았고, 그리스도를 자체의 도덕 철학으로 채용했다. 기독교가 로마의 도덕적 문화가 되었지만,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종교가 되지는 않았다.

로마인은 법률을 존중하고 자연 법칙까지도 존경했다. 이제 로마인은 자연 법칙에 있는 하나님을 헤아렸고, 헬라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다.

그리스 문화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후일에 신약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어, 로마화된 그리스인은 기독교를 철학화하고 종교 관습을 적응하였다.

유대인과 달리, 그리스인은 어떤 종류의 불멸을 조금이라도 믿었고,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정치가 연속된 것은 지중해의 땅을 한 언어와 한 문화를 가진 제국으로 통합하였고, 서양 세계가 유일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유대교는 이 하나님을 제공했지만, 유대교는 그리스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독교가 상급의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제시했고, 그리스인은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3. 로마 제국 밑에서
기독교의 역할

로마의 정치적 지배가 자리잡히고 기독교가 널리 퍼진 뒤에, 기독교인은 유일한 하나님을 가졌지만 제국이 없었다. 그리스인 및 로마인은 큰 제국이 있었으나 그에 어울리는 하나님 개념이 없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를 채택하였다. 이처럼 로마인은 통일된 정부, 그리스인은 통일된 문화, 그리고 기독교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 제국이 여러 지방에 퍼짐으로 다른 종족들이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독교가 박해당하던 초기에 신자들이 죽을 때 취한 (의연한) 태도도 기독교에 대단히 큰 힘을 주었다. 예수가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가르침 때문에, 아기, 특히 여자 아이를 내버려 죽게 하는 관습이 없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의 예배 방식은 유대인 회당에서 이어받았고, 이에 미트라 및 이교도의 의식이 가미되었다.

서기 2세기

서기 2세기는 세계 역사에서 좋은 종교가 서양 세계에서 발전하기에 좋은 때였다. 기독교는 황제를 받아들이고, 황제는 기독교를 채택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였으며, 사상은 어디에 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채택하여 얻은 영적 추진력은 로마에서 도덕과 종족의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무거운 세금, 무역 적자로 인하여 레반트로 금이 유출된 것, 여자 지위의 격하, 제도화된 교회의 폐단으로 인하여, 기독교도 로마 제국을 구할 수 없었다.

알렌산드리아에서는 조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초기의 학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유지했다. 예수의 이상의 얼마큼은 기독교의 발전에 희생되었어도, 2세기 말이 되자,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지성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리스인의 기독교 대신에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이 퍼졌더라면, 로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중도자)는 때때로 생각해 보았다.

  4. 유럽의 암흑 시대
중세

교회가 정치와 같은 편이었으니까, 교회는 유럽의 암흑 시대에, 지적ㆍ영적 쇠퇴를 함께 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종교는 수도원 중심이 되었고, 금욕이 중시되고 기독교는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암흑 시대에 종교는 (직접 겪는 체험이 아니라), 남(사제들)의 손을 빌리는 것이 되었다. 성자들이 신의 법정에서 죄인들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새로운 영적 위험이 (성자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따위) 생겼다.

기독교는 다가오는 암흑 시대를 막을 힘이 없었지만, 긴 겨울 밤을 통해서 버티었고, 르네상스가 밝아오자, 기독교는 수많은 종파로 갈라졌다. 이 종파들의 다수가 이 발표문을 작성할 때 아직도 지속한다.

기독교의 역사

예수의 종교가 예수에 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질됨으로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다. 헬라화ㆍ이교화ㆍ세속화ㆍ제도화ㆍ지적 쇠퇴ㆍ영적 타락을 겪고, 도덕적 겨울잠을 자다가 절멸의 위협을 겪고, 그 뒤에 회생하고 분열되었으며, 최근에 비교적 회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기독교는 서양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 싸움은 지난날에 겪었던 여러 위기보다 훨씬 더 불길하다.

종교는 과학적 지성과 유물론적(물질주의) 경향을 가진 새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세속의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에서, 예수의 종교는 궁극에 승리할 것이다.

  5. 현대의 문제
종교가 하는 일

20세기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풀어야할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문명이 높아질수록, 사회를 안정시키고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격리하고 지나치게 분석했을 때, (부분적) 진실은 사람을 잘못 인도하기도 한다.

종교는 사람에게 영원한 운명을 계시하는 것이요, 다음의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구별되어야 한다.

(i) 물질적 현실에 대한 논리적 태도.

(ii)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것.

(iii)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의무를 윤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iv) 도덕 감각 자체가 종교는 아니다.

종교적 통찰력

지성은 상대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발견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혼을 위하여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낸다. 초인간적 통찰력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야 얻을 수 있다.

중력이 없는 태양계처럼, 영적 실체에 근거를 둔 도덕이 없이 사회의 체계는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육체를 입고 잠시 사는 일생에, 잠재하는 모험심을 모두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가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생애가 펼쳐지기를 기다리라.

예수가 어린아이들조차 사랑한 것, 인격이 큰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라.

세상을 온통 까만 악의 배경에 이따금 하얀 선의 조각들이 널려 있는 화폭으로 보면 안 된다.

진실의 아름다운 영적 가치는 악이 있는 현상보다 유쾌하고 사람의 정신을 높여준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진실을 추구하고, 의무에 충성하고, 선한 신을 예배함으로 이러한 통찰력에 가까이 간다. 이 모든 것 중에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안내한다.

  6. 유물론
유물론(물질주의)의 공포

과학자는 뜻하지 않게 인류를 유물론(물질 주의)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과학자는 인간의 체험 은행이 (자산이 없는가 하여) 경솔히 지불 청구를 시작했지만, 그 체험 은행은 광대한 영적 재산을 가졌다.

유물론과 세속 주의의 공포가 끝날 때, 예수의 종교는 여전히 자산이 충분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은행은 (예수를 믿고서) "예수의 이름으로" 꺼내 쓰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끝없이 줄 것이다.

너희는 다가오는 시대에 주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종교는 과학과 어떤 논쟁에도 말려들 수 없다. 종교는 단지 과학에 개의하지 않지만, 그 과학자에게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

영적 통찰력이 없이 지식만 추구하는 것은 궁극에 비관과 절망으로 이끈다. 얄팍한 지식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책을 기록할 때, 유물론 시대의 최악의 고비는 지나갔다. 과학 세계의 상급 지성인은 이제 더 전적으로 유물론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 물리적 현실주의 시대는 일시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종교는 질적 체험

인생에서 과학은 양적 체험이요, 종교는 질적 체험이다.

기적이 늘 일어난다고 보던 옛 시대로부터 (과학적) 기계 시대로 들어간 것은 사람을 불안스럽게 만들었다.

현대 생활에서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과 종교적 예배를 위하여 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큰 수학자가 없다면, 수학적 우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과학은 물질의 보존을 길게 논할지 모르지만, 종교는 사람의 혼이 (이 세상을 넘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

오늘날 유물론을 믿는 사회학자는 한 공동체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쓰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버려둔다. 반대로, 1천9백 년 전에,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살펴보았고, 다음에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중세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영적 전투에 나서라고 현대인을 부르려는 종교 지도자들은 잘못을 저지른다. 종교는 새 표어를 마련해야 한다.

지성과 영과 우주

(과학자들처럼) 지성이 물질에서 "솟아났다"는 논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가 단지 기계적으로 작용하고, 지성이 물질에 같이 붙어 있다면,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여러 사람이) 두 가지 다른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진실을 알기는커녕, 아는 능력도, 올바름을 간절히 찾을 능력도 없다. (주문하는 대로 컴퓨터는 계산만 한다.)

과학은 물리적일지 모르지만, 진실을 헤아리는 과학자의 지성은 당장에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은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를 보고 기뻐할 수도 없다.

사람이 (혼이 없고) 겨우 기계라면, 물질 우주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획일적으로 반응할 것이요, 인격은커녕 개성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에는 기계적 작용이 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고, 결정하는 작용이 있어도 (유기체의 자유 의지 때문에) 그것만으로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는다.

지성과 영이 함께 조정하지 않는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궁극에 획일적이 될 것이다. 우주 지성은 물질 세계에서도 항상 자발성을 주입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반응을 낳는다. 결정적이 아니라 확률로 사태를 예측한다.)

존재의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독창성)는 영적 영향과 지성의 통제(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정도)에 정비레하여 커진다. 그래서 일단 너희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이는 하나님이 너희를 이미 찾았다는 확실한 증명이다.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의 진지한 추구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7. 유물론의 취약성
과학적 방법의 약점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론(영이 없고 우주가 기계처럼 작용한다는 이론)과 같이 허약한 이론에 넘어가는 것을 얼마나 어리석은가.

과학은 종교적 신앙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미신(迷信)의 말소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종교가 영적 면에서 사람을 돕는 것 같이, 과학은 물질 면에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 다툴 일이 없다. "과학적 방법"은 물질적 성과를 재는 척도일 뿐이요, 영적 실체와 종교적 체험의 평가에는 쓸모없는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체험은 물질적 성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이렇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기계인 것을 깨달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런 기계 인간은 물질 우주가 존재하는 사실을 도무지 의식할 수 없다.

영원한 가치, 곧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의 가치는 여러 시공 우주에서 현상이 일어나는 사실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영적 가치를 찾아내는 데는 영에게서 태어난 필사자가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희미하게 본 "상대성"의 발견을 집적거리다가 하나님이 영원ㆍ무한하다는 너희의 개념을 잃지 말지어다.

유물론의 허점 1.

이것이 겨우 물질적 우주라면, 물질 인간은 그렇게 순전히 물질로 존재하는 기계적 인품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우주를 기계로 보는 개념 그 자체는 지성의 비물질 현상이다. 모든 지성은 비물질 기원을 가진다. (순수한 기계는 계산하는 능력은 있어도, 비판하고 생각하는 지성이 없다.)

사람의 자만은 가끔 이성을 뛰어넘고 논리를 벗어난다.

허점 2.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비관주의 그 자체가,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을 증명한다. 우주가 참으로 유물론자가 보는 바와 같은 우주라면, 기계적 인간은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판단은커녕) 다른 기계의 성질이나 가치를 의식할 수 없다.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일 수 없으니, 과학은 오직 물질과 사실만 다루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자연히 자연의 물질 수준을 뛰어넘는다.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는 노력은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살하려는 노력이다.

허점 3.

기계는 자체를 재거나 평가할 수 없다. 오로지 기계를 초월하는 어떤 개체가 그런 과학적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우주 실체가 겨우 하나의 광대한 기계라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평가하기 위해서, 그 우주 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 사람이 자기가 겨우 기계라는 것을 어떻게 안다고 주장하는가?

허점 4.

유물론이 사실이라면, 자의식하는 기계론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기 전에, 사람은 먼저 도덕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 (기계론적 우주가 있기 전에. 기계를 초월하고 자의식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유물론을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독단을 부르짖는 지성이 초물질 의식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기계 작용은 나빠질지 모르지만, (생명과 달리)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기계는 생각하거나 창조하거나 꿈을 꾸거나 올바름을 목마르게 찾지 않는다.

우주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닌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높은 문명에서는 예술이 과학을 인간답게 만들고, 참 종교는 예술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자동 인형(人形)이 자동 기계론이라는 철학을 상상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과학자를 인식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어떤 평가도 진정한 평가가 아니다. 신자의 실체 체험이 없이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관리하는 하나님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

과학은 머리의 계산으로 살며, 종교적 체험은 이러한 수학을 초월한다.

언어에서 알파벳은 유물론적 기계 장치이지만, 인격자의 천 가지 다른 생각을 담는다.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는, 불변하는 기계적 작용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러한 우주 현상을 지켜보는 과학자와 같다. 우주는 예술가의 작품, 생명 없는 작품이 아니라, 물질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예술가와 같다.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진화하고 살아 있는 우주를 깨닫는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상물질 세계의 존재를 보여준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영원히 진보하면서 마주치게 될 영 현실이 존재함을 입증한다.

  8. 세속적 전체주의
세속주의의 유래

사람이 유물론과 기계론을 대체로 정복한 뒤에도, 20세기의 세속주의(비종교주의)의 지독한 영향은 수많은 사람이 영적 체험을 무시하게 만들 수 있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19세기와 20세기의 무신론적 과학의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중세의 전체주의적 기독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서양 문명을 완전히 지배한 것에 대한 반발로 비롯되었다.

이 계시(啓示)가 내렸을 때, 유럽과 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지배하는 지적ㆍ철학적 풍토는 명백히 세속적이다―인본주의이다. 3백 년 동안, 서양 사상은 차츰 세속화되었고, 종교는 대체로 예식을 치르는 행사가 되었다.

전체주의적 교회의 압박으로부터 서양 민족의 생각을 해방하는 데는 세속주의의 막강한 영향력이 필요했지만, 세속주의는 현대인 사이에서 신을 모르는 세력을 굳히려고 위협한다. 독재 정치를 행하는 국가는 과학적 유물론과 세속주의 철학의 산물이다.

제도화된 교회의 압제에서 사람을 해방하자마자, (공산 국가에서) 세속주의는 사람을 전체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었고 (서양 국가에서) 정치ㆍ경제적 노예가 되는 처지로 팔아넘길 뿐이다.

세속주의의 잘못

유물론은 하나님이 계심을 부인하고, 세속주의는 아예 하나님을 무시한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하여라! 인간 사회에서 신이 없는 이 세속주의 철학은 오직 불안ㆍ전쟁ㆍ세계적 재난을 일으킬 뿐이다.

세속주의는 결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서양 문명은 세속주의로 저항한 결과로서 오늘날 많은 자유를 누린다.

세속주의의 큰 잘못은 이것이다: 교회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뒤에, 세속주의자들은, 때때로 말없이, 때로는 드러내놓고, 하나님에게 반란을 시작하였다.

세속주의 반란의 결과

서양 문명의 전례 없던 물질적 진보는 세속주의의 반란 덕분이다. 이 반란이 지나쳐 하나님을 간과했기 때문에, 세계 대전과 국제적 불안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다.

세속주의 반란이 가져온 축복, 즉 민주 정치와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최근에 얻는 이익은 세속주의 뿐 아니라,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의 기여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과학적 세속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이권(利權)ㆍ종족ㆍ민족주의를 조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의 붕괴에 저항하는 주요 세력은 민족주의이며,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으뜸가는 장벽이다.

세속주의의 약점

세속주의의 근본 약점은 정치와 권력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단지,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무시하고 사람들 사이에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없다.

세속주의의 앞날이 밝으리라는 사회적ㆍ정치적 낙관은 망상(妄想)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와 해방도, 재산과 재물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ㆍ교육ㆍ산업ㆍ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을 불러올 뿐이다. 20세기의 첫 30년 동안에 유란시아는 기독교 시대를 통틀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였다. 아직도 더 끔찍한 파괴가 (2차 대전이) 다가올 것이다.

  9. 기독교의 문제
종교는 무엇이 필요한가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물론과 세속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흘러내려온 진실의 흐름을 간과하지 말라. 미신에 저항하는 현재의 반란이 끝났을 때, 예수의 복음에 담긴 진실은 더 좋은 길을 밝게 비쳐줄 것이다.

그러나 이교처럼 변하고 사회화된 기독교는 때묻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이 살필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땅에서 사신 주의 일생을 보는 통찰력이 모자라서 시들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계시하는 것은 유물론적 세속주의 제국의 세계 지배를 뒤엎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는 도덕적 각성과 영적 깨우침이 있는 시대의 직전에 지금 부르르 떨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수정되기는 했어도, 태어날 때의 신비 종파,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을 견디고 살아남았고, 지금도 20세기의 유물론ㆍ기계론ㆍ세속주의를 천천히 이기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 예수의 가르침만 따를 영적인 남녀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사회 및 물질 문제에 분주하고 영적 사명을 소홀히 하면, 새 선생들이 나타날 때까지 영적 부흥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사실과 모순되고, 최선의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에 어긋나는 종교를 현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개화된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확신에 지배받기를 두려워한다. 현대의 총명한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 무슨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워 피한다. 예수의 종교는 신자를 변화시키며,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형제를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하기를 요구한다.

형식이 된 종교가 열매 없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야, 사람은 하늘나라 복음으로 향할 생각을 가질 것이다.

세상이 필요한 것

세상은 직접 체험하는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기독교조차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 아니라, 대체로 남(사제)의 손을 빌려서 맛보는 종교이다. 땅에서 사신 그대로 예수를 보고,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가르침을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얻을 것인가!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는 말씀은 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이 기쁨에 떨게 만들 수 없고, 교리의 말씀도, 하나님이 앞에 계심을 깨닫는 체험처럼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의 도전 앞에서 감히 이상을 낮춰 버렸다. 기독교는 지나친 형식 치중, 지나친 조직, 그리고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이른바 기독교는 종교적 관습일 뿐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운동이 되어 버렸다.

  10. 앞날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이다.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하며, 너희는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의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인간성과 신성은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놀라운 그림이었다. 사람 모습을 입었던 하나님의 일생으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사람을 묶어놓는 신조나 신학 체계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항상 기억하라―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우주의 최종에 이르는 신성한 운명을 마침내 성취하는 데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예수의 위대한 말씀이었다.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요를 받거나 의무로 처음 십리를 가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봉사하는 태도로 십리를 더 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도 기꺼이 처음 십리를 가지만, 진정하게 십리를 더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시들고 넘어진다.

기독교가 개선해야 할 것

새롭고 변화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라고 예수가 부르는 소리는 모든 신자를 기쁨에 떨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인하는 어떤 사회 체계나 정치 체제도, 인간 문명의 진보에 이바지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세분되고 세속화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자체의 진보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것은 특히 동양의 경우에 참말이다.

지난 날의 업적을 간직하려는 소망은 때때로 낡은 예배 체계를 방어하게 만든다. 20세기의 기독교회는 진정한 복음, 예수의 가르침을 펼치는 일에 큰 장애가 되지만,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이른바 기독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성품과 일치되는 한, 현존하는 최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다.

기독교회가 주의 계획을 감히 지지하기만 한다면, 무관심한 듯한 수많은 젊은이가 이를 지지할 것이다.

기독교는 자체의 표어에 담긴 운명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갈라져 서로 싸우는 집은 버틸 수 없다." 비기독교 세계는 여러 종파로 갈라진 기독교 세계에 도저히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형제 단체의 진전에 장애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20세기의 기독교조차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신자들의 도덕적 천재의 산물이요, 땅에서 선을 지지하는 큰 세력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상업과 정치에 말려드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 방식의 예배를 선호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었다면, 그러한 교회가 살아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형제 단체에는 종파의 경쟁도, 영적으로 틀릴 수 없다는 주장도, 설 자리가 없다.

기독교의 희망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 민족들에게 가지고 가려고 할 때, 심각한 약점을 드러낸다. 이 민족들은 기독교와 얼마큼 달리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기독교는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유란시아의 큰 희망은 예수의 말씀을 새로 발표함으로 예수의 모습을 새로 밝히는 가능성에 있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훌륭하고 치우치지 않은 인격을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 기어에서 작용해야 한다. 고속 기어의 성과는 예수의 종교가 드러나고 널리 퍼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한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3백 년 안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인들을 설득한 것을 보면, 기독교는 막강한 종교이다.

이 기독교는 히브리 신학과 그리스 철학을 정복하고, 신비교와 이교 사상에 젖어 1천 년이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스스로 살아나서 서양 세계 전체를 다시 정복했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잘 깨달을 수 있기만 하면, 현대인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장애를 겪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사회와 도덕 기준의 일부라고 파악되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서양의 사회와 산업 정책의 후원을 그만두고,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형제라는 복음을 다시 배우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