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0 편, 하늘나라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30년 3월 11일

펠라

3월 11일(토), 오후에 예수는 펠라에서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는 그 의미가 영적인 것이 분명했는데도, 유대인은 현세의 정부, 땅의 나라로 착각하였다.

한 세대 안에 없애기에는 현세의 임금 관념이 유대인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이전에 하신 말씀을 덧붙이고, 사도들에게 준 논평도 포함하여, 그의 연설을 확대하겠다.

1. 하늘나라 개념

히브리 성서에 두 가지 하늘나라 개념이 있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i) 오늘의 현실이다,

(ii) 앞날의 희망이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하늘나라 개념이다.

예수와 사도들은 이 두 개념을 다 가르쳤다. 두 가지 다른 하늘나라 개념이 있었다.

(iii) 후일에 유대인이 개발한 개념. 기적으로 개시되는 세계적인 초월 왕국 개념.

(iv) 세상의 끝에, 선이 악에 승리하고 신의 나라가 선다는 페르시아인의 가르침.

예수가 오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은 이 하늘나라 개념들을 유대인이 승리하는 시대를 개시하려고 메시아가 온다는 개념으로 통합하였다.

기독교 시대를 통해서 하늘나라는 네 가지 뚜렷이 다른 관념을 담고 있다:

(i) 유대인의 개념.

(ii) 페르시아인의 개념.

(iii) 예수의 개념―"너희 안에 있는 하늘나라."

(iv) 기독교를 전파한 자들이 가졌던 혼동된 개념들.

 

"하늘나라"라는 용어에 관하여 생긴 혼동은 다음 세 가지 요인 때문이다:

(i) 예수와 사도들이 "하늘나라" 개념이 진화되는 것을 보고서 생긴 혼동.

(ii) 유대 지방에서 이방으로 초대 기독교를 전하면서 생긴 혼동.

(iii) 기독교가 예수의 인물에 관하여 조직된 종교가(그리스 정교, 카톨릭 등) 된 사실에서 생긴 혼동. 하늘나라 복음은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다.

2.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진리, 그리고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이 두 개념으로 시작되고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는 밝혔다. 주는 새로운 삶이 다음의 재산으로 인생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i) 하늘나라 복음은 사람이 영생을 바라도록 격려한다.

(ii) 이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담는다.

(iii) 이 복음은 새 인간 사회의 이상을 묘사한다.

(iv)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우수하다고 가르친다.

(v) 이 새 복음은 인생의 참된 목표는 영적 달성이라고 가르친다.

(vi) 땅에서 올바르게 산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영원한 실체들(영생과 할 일)을 얻는다.

(vii) 신의 목적은 구원받은 아들들이 미래에 실현할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하늘나라 가르침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에 거의 담겨 있지 않다.

복음서 기록자들이 예수가 세상에서 잠시만 자리를 비우고,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영광을 입고 곧 돌아오리라는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기록되었다.

예수는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추종자들이 사용하지 않도록 유인하려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는 왕국, 임금, 백성의 관념을 하늘 가족, 하늘 아버지, 해방된 아들들의 관념으로 갈아치우기를 바랐다.

사도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을 배웠다:

(i) 당시에 참된 신자들이 몸소 체험하는 문제,

(ii) 세계 현상의 문제, 하늘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것.

예수는 하늘나라가 영적 생활을 실천하는 개인적 체험이요, 이것은 상급 수준으로 차츰차츰 변화된다고 가르쳤다.

이날 오후에 예수는 다음 두 단계를 묘사했다:

첫째.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최고의 소망.

둘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필사 신자들의 목표.

예수는 두 가지가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라고 가르쳤다:

(i) 믿음. 어린아이처럼 아들 신분을 받는 것.

(ii) 진실을 간절히 찾는 것.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셨다. 동료를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개인적으로 소용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할 무렵(1세기 말), 하나님의 나라 관념이 박해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초대 기독교인은 대체로 이 용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까지 이 하늘나라 개념은 영생 종파로 바뀌지 않았고, 기독교회가 하늘나라의 사회적ㆍ제도적 모습을 이어받았다.

3. 하늘나라와 올바름의 관계

예수는 사도들에게 바리새인을 뛰어넘는 올바름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의 열쇠라고 가르쳤지만, 또한 믿는 어린아이는 점진적 단계를 거쳐서 올라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i) 사람이 동료를 용서하는 한도까지,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다.

(ii) 동료를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은 참으로 동료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iii)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가장 높은 윤리이다.

(iv)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는 그러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참된 종교는 사회에 봉사하는 경로에서 나타난다.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는 동기에 따라서 재야 한다. 가장 높은 형태의 선은 의식되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종교는 개인적ㆍ개별적 종교이다. 그 열매, 그 결과는 가족과 사회에 나타난다.

개인을 높임으로 사회에서 올바름을 실현하는 새 섭리 시대를 열었으니까, 예수는 옛 사회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이 안식일 오후에 설교하면서, 예수는 하늘나라의 다섯 단계를 주목하였다:

(i) 개별 신자가 아버지 하나님과 친교하는 체험.

(ii) 복음을 믿는 신자들의 형제 단체.

(iii)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의 초월 필사 형제 단체.

(iv) 하나님의 뜻이 더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 사회 체제를 향하여 전진하는 단계.

(v) 빛과 생명의 시대. 완전해진 하늘나라.

그러므로 주가 하늘나라를 언급할 때, 이 중에 어느 것을 언급하는가 주의 가르침을 검토해야 한다.

하늘나라 복음 다섯 가지 모습을 주는 강조했다:

(i) 첫째로 개인 (유대인은 단체로 하나님과 협상하려고 했다)

(ii) 사람의 체험에서 의지가 결정 요인이다.

(iii) 하나님과 영적 친교를 가지는 것.

(iv) 사람에게 봉사함으로 최고의 만족을 얻는다.

(v) 인격 안에서 영적인 것이 물질인 것을 초월한다.

너희는 하늘나라 관념이 유란시아에서 느리게 진보한다고 낙심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한 단계가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씀했고, 유란시아로 언젠가 돌아오리라 약속했어도, 그는 이 두 개념을 연결시키지 않았다.

사도와 제자들은 이 두 가르침을 함께 연결시킨 것이 확실하다. 하늘나라가 기대했던 대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이들은 그의 약속이 동일한 사건을 언급한다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예수가 곧 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서 땅에서 살았다.

5. 후일의 하늘나라 관념

우리(중도자)는 후일의 하늘나라 관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하늘나라가 어떻게 미래에 진화할 수 있는가 예측할 허락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몇 세기 동안, 하늘나라 관념은 그리스인의 이상주의적 개념, 현세의 일은 영원한 것이 순간에 나타나는 그림자라는 관념에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퍼지면서 메시아 개념은 교회에서 구원자 개념으로 바뀌었다.

주의 하늘나라 개념은 눈에 띄게 수정되었다:

(1) 유대인 신자들은 계속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고, 예수가 머지 않아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2) 이방의 기도교인들은 바울의 교리를 받아들여, 일찍부터 예수가 구원자라고 믿었다.

교회의 잘못은 교회가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을 거의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지 말라. 주가 가르친 이 하늘나라는 신자들의 가슴 속에 존재하며, 언젠가 이 기독교회에 선포될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는 개별로 영의 인도를 받는 하늘나라 형제 단체의 대용품이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생겨난 불가피한 사회적 결과였다.

하늘나라는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공동체였고, 이방인에게는 기독교회가 되었다. 예수에게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개인들의 집합이었다.

하늘나라 복음이 퍼져서 개별 신자가 신다운 영과 교통함으로 사회적 결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예수는 영적인 나라가 진보하고 뒤따라 교회가 생길 것을 예측하였고, 이것이 사도들이 세례 주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 부분적으로 실패한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의 직계 추종자들은 하늘나라 이상 대신에, 기독교회를 세워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관념이 되었다. 이처럼 교회는 사회적 형제 단체가 되었고, 영적 형제 단체라는 예수의 개념을 갈아치웠다.

주의 가르침 위에 바울은 진취적인 인간 사회를 세웠고, 이것은 그리스 및 페르시아인의 영생 개념으로 보충되고, 영적인 것과 현세의 것을 대조하는 필로의 교리로 인하여 확대되었다.

바울의 교회는 예수가 만들려고 했던 하늘나라의 사회적인 그림자이다.

교회에서 회원 자격을 얻는 것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친교함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는 영적인 것, 다른 하나는 주로 사회적인 것이다.

머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도다"하고 외치는 다른 세례자 요한이 나타날 예정이다. 예수의 실제 가르침이 부활되어야 하며, 그렇게 다시 적은 이야기는 미가엘이 땅에서 머물렀던 사실을 철학적 신앙 체게로 만든 초기 추종자들의 실수를 돌이킬 것이다.

예수의 복음이 여러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몇 세기 안에 그의 가르침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여러 종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예수가 상상했던 하늘나라는 대체로 땅에서 실패했고,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영적 하늘나라의 애벌레 단계요, 이 물질 시대가 지나면 주의 가르침은 더욱 성장할지 모른다.

기독교회의 고치 속에서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은 지금 잠을 잔다. 신다운 형제들의 하늘나라는 아직도 살아 있고, 나비가 애벌레에서 솟아나는 것 같이, 오랜 침체로부터 궁극에 솟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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