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0 편, 알렉산드리아의 로단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29년 9월 18일-25일

마가단 공원

9월 18일 (일요일), 안드레는 다음 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를 제쳐놓고, 사도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찾아보려고 집으로 갔다.

나다니엘과 토마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로단이라는 그리스인 철학자와 토론하느라고 바빴다.

로단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브너의 동료인 한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 요즘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로단은 예수나 사도들 중에 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복음 해석을 듣기를 바랐다.

예수는 그런 회담을 거절했어도, 나다니엘과 토마스에게 로단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듣고, 그 보답으로 복음에 관하여 일러주라고 지시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늘날 모습. 둥그런 모양의 도서관은 2002년부터 운영되었다.

1. 로단의 그리스 철학 9월 19일 (월), 로단은 나다니엘, 토마스, 그리고 마가단에 들린 25명 남짓한 신자 집단에게 열 번 연속된 강연을 시작했다. 현대의 표현으로 하면, 로단이 이런 생각을 말했다.

인생은 세 가지 욕구―충동ㆍ욕망ㆍ유혹―에 담겨 있다.

강인한 인격은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상급 욕망으로 변화시킴으로 얻는다.

문명이 복잡하게 될수록, 살아가는 기술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살아가는 기술은 존재의 기법의 진화와 발걸음을 맞추어야 한다.

사람이 근시안적 욕망의 만족을 버리고 얼마큼 이상적 목표를 택하는가, 이것이 사회의 성숙도를 가리키는 지표이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만 알지만, 사람은 하늘의 기쁨과 영적 환희가 있는 수준에서 살 수도 있다.

인간 사회는 개인의 성숙과 종족의 성숙에 이르는 문제에 부닥친다.

인생에서 성공은 평범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법을 통달하는 문제이다. 큰 잘못은 문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있다.

인생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은 용기와 성실성을 요구한다. 정직한 사람들이 지성의 논리가 이끄는 대로 대담하게 따라갈 수 있다.

동료들의 협동을 얻게 만드는 지혜와 매력 있는 인격을 갖추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문제 해결 방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을 예수로부터 배웠다. 아버지와 교통하는 것이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 철학과 하늘나라 복음을 더하면, 새 종교가 된다.

편견은 이기심과 연결되어 있다. 자아의 추구를 버리고 하나님을 추구해야 편견을 없앨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을 발견하고 받아들인 자가 안정된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의 목표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땅에서 파라다이스로, 인간다운 것에서 신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를 요구한다.

나의 추구는 지향할 확신이 없었고 나의 탐구는 추진력이 모자랐다. 예수의 복음이 이 부족함을 채워주었다.

2. 살아가는 기술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동물의 길과 인간다운 (영적) 길이다.

사람은 생각과 이상에 대하여 동료들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인격을 개발한다.

지식과 지혜가 쌓이는 것은 이 문화적 재산을 뒤잇는 세대들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의 교통은 사회 집단의 형성을 예시한다.

모든 집단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가족, 즉 부모이다. 사랑하는 관계는 다음 이유로 사람을 훌륭하게 만든다.

(i) 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이해하는 것.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어느 정도 인정받는 것은 인품의 성장에 필수이다.

모든 사회 관계에서 이상적인 것은 결혼이다. 나는 가족 생활을 찬미하는데, 너희의 선생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 하늘나라 복음의 주춧돌로 삼았기 때문이다.

(ii) 사람들의 연합―지혜의 동원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얻고 다음 세상에 대하여 어떤 선견을 얻는다.

두려움과 자만은 오직 다른 지성들과 가까이 접촉해야 막을 수 있다. 주는 언제나 너희를 둘씩 내보낸다.

(iii) 살려는 열심

사랑하는 인간 관계는 인생의 슬픔과 어려움을 맛볼 때, 고통의 쓴 맛을 많이 가시게 한다.

(iv) 모든 악에 대한 방어

선생의 말씀대로,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나니”―친구가 위로하려고 가까이 있으면 그렇다.

사람은 고립된 가운데 시든다.

결혼 바깥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허다한 결혼이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참말이다.

이상적 결혼은 단순한 성적 매력보다 더 안정된 무엇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서로 몸소 헌신하는 데 바탕을 두어야 한다.

믿을 만한 가족들을 세울 수 있다면, 그러한 단위들이 모여서 도덕적으로 성숙한 문명을 이룰 것이다.

3. 성숙으로 이끄는 유혹 성숙하려면 일을 해야 하고, 일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주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도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산다.”

혼 속에 있는 이 무한한 힘을 어떻게 방출하도록 유도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해방하도록 유인할 것인가?

이 모든 문제의 신비는 영적 교통, 예배에 감추어져 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가지는 것이 예배이다.

이러한 체험이 버릇으로 되풀이되면, 동료들이 그러한 성숙한 인격을 인식한다.

사회 집단의 활동으로 사람은 성숙해진다.

미숙한 사람은 동료의 반감을 일으키지만, 성숙한 사람은 동료한테서 마음에 우러난 협동을 얻는다.

필요하다면, 옳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가진 주는 수완과 관용으로 승리를 품위있게 얻는다.

주는 어제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을 부수기보다 열쇠로 문을 열리라.”

이 하늘나라 복음은 살아가는 기술에 크게 쓸모가 있다.

4. 균형을 이룬 성숙

중세에 지은 알렉산드리아 요새

영적 성장을 이루려 마음을 다하면서, 너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인생의 두 가지 중요한 문제는, 현세의 생활을 꾸려 나가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성취하는 것이다.

생계를 잇는 문제조차도, 이상적 해결에는 종교가 필요하다. 현세의 생활에 다음이 필수이다:

(i) 육체의 건강

(ii) 맑고 깨끗한 생각

(iii) 능력과 기술

(iv) 재산―생활에 쓰이는 물품

(v) 실패를 견디는 능력

(vi) 문화―교육과 지혜

건강과 능률에 관계되는 신체의 문제조차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최선이다: 육체와 지성은 신들의 선물이 거하는 자리이다.

인생에서 바람직한 것을 한 몫 확보하는 데는 지능이 필요하다.

날마다 할 일에 충실하면 재산을 모으리라는 생각은 그릇되다.

동떨어진 경로에서 부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을 면치 못한다.

성공하려면, 물질적 부(富)가 흐르는 어떤 경로의 일부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능력은 물려받는 것이요, 기술은 얻는 것이다.

능력은 선견, 멀리 내다보는 눈을 선물로 받았음을 뜻한다.

후일의 보상을 위하여, 정직하게 기꺼이 수고하라.

인생에서 힘을 주는 사건들의 기억을 잘 간직하라.

너희는 실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지혜는 사람이 실패한 결과에 적응하는 체험에서 생긴다. 낙관적 망상을 현실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지혜롭게 될 수 없다.


잃어버린 망상

지혜는 사실과 이상, 이 두 가지를 포함하며, 사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 그리고 영적 안목이 없는 물질주의자, 이 두 극단을 피하게 한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실패는 다만 교육이 되는 사건이다.

현세의 인생이 압도적 실패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패 하나하나가 영적 성장을 낳는다면, 영원의 각도에서 볼 때, 큰 성공일지 모른다.

5. 이상적인 자의 종교 나는 종교가 인류의 헌신을 받아 마땅한 것(신)에 반응하는 인간의 체험이라 여겼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섬기는 대상(신)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무엇이 너의 체험에서 종교가 되었으면, 너는 이미 전도사가 된 것이 자명하다.

하나의 도덕률 체계는 예배의 대상을 붙잡아 종교가 될지도 모른다.

한 종교는 헌신을 요구하는 호소력을 잃으면, 그저 철학이나 도덕률의 체계가 될 수 있다.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이상이 없이 사람은 영적 종교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없는 종교는 사람의 발명품이다.

하등 종교는 자연 상태에 대처하려고 자체의 하나님 관념을 형성한다. 상급 종교는 종교적 이상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인간의 마음이 바뀌기를 요구한다.

예수는 아버지를 무한한 실체의 이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과 형제임을 믿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가장 높은 종교 개념이다.

주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왔고, 우리에게 길을 보이리라 하신다. 그가 진실을 말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최고의 이상이 실재한다면, 이 이상에 바치는 헌신은 현재와 미래 우주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값을 우리가 기꺼이 치르겠는가?

아버지의 뜻에 헌신하는 값을 치른 뒤에 큰 평화를 맛본다는 것이 참말이다.

우리의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이 영이요,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종교는 생생한 영적 체험을 요구한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충동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몸소 겪는 체험이 되어야 참된 종교가 된다.

이렇게 위대한 그리스인 철학자의 논설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