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 편, 최상과 궁극–시간과 공간

글쓴이: 유란시아에 잠시 머무르는 한 막강한 사자

1934년

[이 논문은 초기의 포럼 회원들도 꼼꼼히 읽었던 논문 중의 하나이다. 계시자들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단을 도려낸 듯하다. 따라서 보충 설명이 필요한 듯.]

신의 몇 가지 성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

(i)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아이다.

(ii) 아들은 함께 존재하는 자아이다.

(iii) 영은 결합되어 존재하는 자아이다.

(iv) 최상위는 진화하고 체험하는 자아이다.

(v) 칠중자는 스스로를 분배하는 신성(神性)이다.

(vi) 궁극위는 초월적이고 체험하는 자아이다.

(vii) 절대자는 실존적이고 체험하는 자아이다.

칠중 신은 최상위를 진화로 달성하는 데 필수이지만, 최상위는 또한 궁극위가 궁극에 솟아나는 데 필요하다.

창조적 성장은 그치지 않지만, 인격을 만족시키는 순간들이 이따금 사이에 낀다. 그러한 순간은 새 모험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전주곡으로서 효과 있게 쓰인다.

수학에는 질적 한계가 있지만, 유한한 머리에게 무한을 곰곰이 생각해 볼 개념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유한한 머리가 생각하기에도, 수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아무리 큰 수(數)를 생각해도, 너희는 언제나 거기에 하나를 더할 수 있다. 또한 그 수가 무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너희가 이해할 수 있으니, 이는 아무리 여러 번 너희가 그 수에 이 덧셈을 거듭해도, 여전히 하나 더 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시리즈는 어느 시점에서도 합계할 수 있고, 이 총합은 인간에게 어느 특정한 시간에 목적을 달성하는 단맛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 인격자는 다시 갈급해지고 새로운 목표를 바란다.

연속되는 각 우주 시대는 다음 시대로 인도하는 문간방이다.

주: 무한한 시리즈에는 (i) 1, 2, 3, 4, … 와 같이 무한까지 발산하는 급수와 (ii) 1, 1/2, 1/3, 1/4, … 와 같이 수렴하는 급수가 있다.

1. 시간과 영원

신과 우주의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사람이 우주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영원은 현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기법을 통해서, 필사 인격은 영과 자신이 일체가 되어 영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순간들의 연속이 사람의 목적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어느 특정한 지능 안에서도 성숙과 시간을 의식하는 단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있다. 시간 단위는 의식하는 자아가 인생의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체험ㆍ지혜ㆍ판단은 필사자의 체험에서 시간 단위가 길어져 생기는 것들이다. 인간의 머리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 때, 지난 체험을 현재 상황에 비춰 보려는 목적으로 머리는 지난 체험을 평가한다. 생각하는 머리가 앞날을 알려고 손을 뻗음에 따라서, 머리는 어떤 가능한 행동이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가하려고 애쓴다.

파악하는 자아가 이렇게 과거와 미래로 손을 뻗음에 따라서, 판단이 순간적 현재에 의존하는 일이 적어진다.

짧은 시간 단위로 생각하는 필사자가 참을성을 연습한다.

성숙하게 되는 것은 현재에 맹렬하게 사는 것이요, 동시에 현재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미숙했을 때의 시간 단위는 현재와 비현재를 분리하고 현재 순간으로 의미를 집중한다.

무한자와 절대자의 수준에서, 현재의 순간은 미래 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스스로 계신 이는 또한 스스로 계셨던 이요, 스스로 계실 이를 의미한다. 이것이 영원과 영원한 자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최선의 개념이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수준에서, 잠재하는 실체는 실재하는 실체와 똑같이 중요하다. 오로지 유한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방대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절대적인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결정을 내린 하늘 가는 필사자는 이미 최후자이다.

2. 두루 계심과 어디에나 계심

[대우주 어디에나 계신 성질과 (ubiquity) 시공 초월 우주, 즉 바깥 공간에 두루 계신 성질 (omnipresence)를 소개하고 구분하는 문단이 편집 과정에 생략된 듯.

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 지구가 속하는 초우주 수준과 바깥의 네 공간 수준을 모두 시공간으로 취급해도 될 듯한데,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영적 존재들은 바깥 공간에 거의 없고, 동력을 다루는 존재들만 바깥 공간에 있다. 또한 여러 초우주의 공간에 사는 존재들은 최상 존재의 현실화에 기여하지만, 바깥 공간의 우주들에서 태어날 존재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바깥에 있는 4 공간 수준을 시공 초월 수준으로 부르며, (i) 시공 세계 어디에나 계신 성질(ubiquity)과 (ii) 시공을 초월하여 바깥 공간 어디에나 계신 성질(omnipresence)을 구분한다.]

(시공 우주) 어디에나 계신 성질을 (시공을 초월하는 바깥 우주에) 신이 두루 계신 성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Ubiquity는 시공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능력이지만, 두 곳이나 여러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에나 있되,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Omnipresence (두루 계심)는 시공을 초월하므로, 동시에 여러 곳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주의 아버지는 시공에 어디에나 계시고,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바깥 공간에 두루 계시는 성질이 있으며, 최상위ㆍ궁극위ㆍ절대자가 이러한 성질을 보편ㆍ절대적 계심으로 보상하고, 이와 통일하는 것이 우주의 아버지의 뜻이다.

[주: ubiquity(시공 어디에나 있는 성질)의 의미를 잘 설명하지 못한 영어 사전이나 영한 사전들이 있다. 라틴어로 ubi (where)는 '곳', '장소', '어디'를 가리키는 공간 개념이고, que (any)는 '어느'라는 말이므로, ubiquity는 '어느 곳이나', '어디나', 또는 '모든 곳'이라는 뜻이며, 비슷한 말은 'widespread' (널리, 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Mosquitoes are ubiquitous during the summer in California'라는 말은 모기가 캘리포니아 주에 여름에는 어디에나 퍼져 있다는 뜻이지, 모기 한 마리가 동시에 두 곳, 또는 여러 곳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한 모기를 주먹으로 때려 잡으면 전체 모기 숫자가 하나 줄어든다.

omnipresence = omni(전부) + presence (있음, 계심)은 하나의 신이 동시에 여러 곳에,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능력, 즉 시공을 초월하여 계신다는 뜻이다.]

필사자는 칠중 신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차츰 식별한다. 하보나를 통해서 너희는 최상위를 발견한다. 파라다이스에서 너희는 그가 한 성격자임을 발견하며, 다음에 최후자로서 너희는 그가 궁극위인 것을 알려고 애쓸 것이다.

최상위는 신이 (시공 우주) 어디에나 계심의 분명한 표현이다.

최상위가 언젠가 시공 우주의 직접 통제를 맡는다면 그 행정이 궁극위의 전반적 통제 밑에서 작용할 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대우주에서 행정 권한을 얻기까지 최상위가 진화하는 데 궁극위의 명시가 늘어난다면, 바깥 공간에서 궁극위가 출현할 때도 비슷하게 절대자 하나님의 계시가 늘어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3. 시공 관계

오직 어디에나 있는 성질로 신은 유한자가 이해하도록 시공에서 명시되는 모습을 통일할 수 있다. 결국, 너희는 분석함으로 시간을 파악하고, 종합함으로 공간을 파악한다.

사물은 시간에 조건을 받지만, 진실은 시간을 초월한다.

진실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지만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창조자의 절대적 진실과 현세의 유한한 사람이 겪는 체험을 연결하는 것은 궁극에 최상위의 가치가 된다.

공간은 비절대 사물 중에서 절대성에 가장 가깝다. 공간을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물체들이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공간이 또한 이 물체들 속에 존재하는 사실 때문이다.

한 물체가 공간을 통해서 움직일 때, 그 물체 안에 있는 공간까지도 가지고 간다.

영 형태는 공간을 차지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며, 공간을 담지도 않는다. 한 개념의 형태가 공간을 차지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개념의 형태는 공간을 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4. 1차 원인과 2차 원인

 

사람들이 닥치는 신학적 문제점 중에 상당수는 신을 잘못 이해하여 절대적 속성을 하위 신에 할당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처음 원인이 있고, 또한 종속된 원인들의 집합이 있음을 잊지 말라.

1차 원인과 2차 원인의 중대한 차이는 1차 원인들이 최초의 효과를 낳는 것이며, 2차 원인은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결과를 드러낸다.

무제한 절대자의 정적(靜的) 잠재성은 신 절대자의 원인 작용에 반응한다.

[무제한 절대자가 신 절대자에 반응하여, 공간에 잠재 에너지(물력)을 뿌린다.]

초월 대리자들은 이 잠재성을 성장하는 상태로 변화시키고,

[물력 조칙책들이 이 잠재 물력을 극자 및 전자 이후 물질로 변화시키고]

이 성숙한 잠재성 위에 대우주의 창조자 및 통제자들이 우주를 진화시킨다.

[극자 이후 물질이 나타나면 미가엘 및 동력 지휘자들이 물질 우주를 진화시킨다.]

이처럼 우주 창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와 달리, 빅뱅 이론은 한 순간에 한 곳에 집약된 물질이 펑 터져서 물질 우주가 생겼다고 본다. 빅뱅 이론에는 최초의 원인이 없다 (어느 순간에 터졌다고 하지만, 왜 그 전이 아니고 그 후도 아니고, 그 시간에 왜 터졌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원인의 기본 구성은 세 가지이다:

(i) 정적 잠재성의 활성화. 신 절대자의 행위로 우주 절대자 안에서 운명이 정해지는 것.

(ii) 우주를 만드는 능력이 궁극에 생기는 것. 이것은 궁극위와 초월 수준의 대리자들(물력 조직책)의 행위이다.

(iii) 우주에 실재하는 것들의 창조와 진화. 성숙한 잠재성을 최상 창조자들이 체험적 실재물로 변화시키려고 작용한다. 창조 아들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을) 변화시키는 창조자이다.

5. 전능과 공동 가능성

 

신이 전능(全能)하다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는 힘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무한한 하나님조차 네모난 동그라미를 만들거나 본래부터 착한 악을 만들 수 없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모든 일을 하지만, 사람들조차 최후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하나님과 협동자가 될 것이다.

언제나 신은 원본 우주와 완전한 성격자들을 마련하고,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을 얻으려고 신 아래에 있는 자들이 애쓰게 만들어야 한다.

6. 전능과 모든 일을 행하심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지만 모든 일을 몸소 행하지는 않는다.

원초적 신이 만사를 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양한 조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1백만 명의 창조 아들들의 특권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의지는 상대적이다. 오직 아버지ㆍ아들ㆍ영이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의지의 특권을 나타낸다.

사람은 선택 범위를 넘어서 선택할 수 없다.

필사자는 선택이 가능한 시절에 여러 길 중에서 항상 결정을 내린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택할 때, 그런 선택은 유한을 초월한다.

신이 전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이 안전함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을 행한다는 허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범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7. 전지(全知)와 숙명

 

창조자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는 으뜸 건축가들이 지정한 한계 안에서 작용한다.

유한한 선택에서 생기는 잘못은 시간에 제한을 받는다.

제약받는 시공에서 죄가 일어나는 것은 유한자가 자유를 가졌음을 증명한다. 죄는 미숙한 자가 자주적 인격의 자유에 현혹되는 것을 묘사한다.

오직 사람이 하나님과 한편이 됨에 따라서, 우주에서 실재하게 된다.

생명의 수여(授與)는 물질 에너지 체계들이 스스로 영속하고, 스스로 번식하고, 스스로 적응할 수 있게 만든다. 인격의 수여는 살아 있는 유기체들에게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진화하고, 신의 융합 영과 일체가 되는 늘어난 특권을 나눠준다.

인격이 없는 살아 있는 존재들은, 처음에 물리 통제자로서, 다음에 보조 지성 영으로서, 에너지와 물질을 활성화시키는 지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인격이 참으로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다면, 자아를 파괴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하급 존재에 두루, 인격자의 선택 한계가 좁아지면서 안전성이 늘어난다. 하늘 가는 인격자가 신의 지위에 도달함에 따라서, 궁극에 선택은 신의 자유에 접근한다.

8. 통제와 전반적 통제

 

시공의 우주에서 (개인의) 자유 의지의 둘레에는 제한하는 조치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필사 인간은 기계요, 살아 있는 기계 작용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보다 훨씬 더 크다. 사람은 지성을 부여받고 그에게 영이 깃든다.

(자아의) 기계적 지배(통제)는 진보하지 않는 대가로 안정성을 보장한다.

영과 연합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을 물리적 수준에서 해방하고, 동시에 신다운 안정성을 보장한다.

인간을 따라다니는 위험은 생명의 기계적 작용에서 해방되고나서 영과 기초적 연락을 통하여 얻는 안정성이 손실되는 것을 보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의 원칙 전체가 원시인이 자제하는 자질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을 진화시키려는 설계는 외부 제한, 즉 배고픔과 두려움을 마련해 주어야하며, 이것들은 원시인이 영적 수준 이하로 선택하는 범위를 제한한다.

인간의 문화가 느리게 진보하는 것은 물질적 타성의 브레이크 작용이 효과 있음을 증거한다. 문화가 너무 빨리 진보할 때, 문명은 자체 속에 퇴보의 씨앗을 품는다.

칼리가스티아의 사악함은 점진적으로 인간을 해방하는, 시간 조절 장치를 피해간 데 있다.

루시퍼는 지역 체계에서 때 이르게, 시간 조절 장치를 깨뜨리려고 애썼다.

사람이 기계로 대륙과 대양을 좁힘에 따라서, 사람은 뛰어넘은 각 제한을 자진해서 부과한 제한으로 갈아치워야 한다.

우주의 자동 반응은 안정되어 있고, 어떤 형태로 우주에서 계속한다. 사람의 큰 모험은 필사 지성이 기계 같이 안정된 상태에서 영적으로 힘찬 신성으로 넘어가는 데 있다.

9. 우주의 기계 장치

 

시간과 공간은 총 우주에서 한데 붙어 있는 장치이다. 시공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와 함께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다. 유한한 인간은 시공으로 인하여 절대 수준과 차단되어 있다. 이 차단하는 매체가 없이 아무 필사자도 존재할 수 없다.

상급 지성들이 만들어낸 기계 장치는 그 근원을 해방하도록 작용하지만, 종속된 지능 존재의 행위를 어느 정도 제한한다.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지만, 그 선택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필사 인격자의 인체는 필사를 초월하는 창조적 설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결코 스스로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오로지 하늘 가는 사람이 조절자와 연락하여 인체를 완전히 통제할 것이다.

대우주는 유기체일 뿐 아니라, 기계이고 살아 있는 장치이다. 최상 존재로서 권능과 성격을 통일하는, 살아 있는 장치이다.

기계 장치들은 창조자의 생각을 단단하게 구체화한 것이다. 어떤 기계 장치라도 그 목적은 기원에 있다.

이러한 기계 장치는 신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 우주 장치들은 첫째 근원 중심의 뜻에 반응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파라다이스의 장치가 어떻게 아들의 성격과 상관되는가 우리는 얼마큼 이해한다. 무제한자의 이론적 기계 장치와 신 절대자의 잠재성에 관하여 우주 절대자가 무슨 작용을 하는가 잘 모른다.

과거 영원에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여 무한한 영을 표현하였다. 미래 영원에 지역 우주의 창조 아들과 영들이 바깥 공간에서 연합한다면,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

최상위는 시간 세계 은하들의 아름다움을 구현한 것이다. 영원한 미래에 최상위는 체험으로, 다양한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종합할 것이다.

10. 섭리의 기능

섭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미리 모든 것을 정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만물 예정설은 우주의 전제(專制) 정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ㆍ아들ㆍ영은―삼위일체로서―전능한 최상위가 아니지만, 최상위의 기능은 삼위일체의 기능과 관련을 가진다.

삼위일체를 한 분의 하나님으로 보기를 바랄 때, 진화하는 최상 존재가 삼위일체의 부분 초상임을 발견한다.

신들은 속성을 가졌지만 삼위일체는 기능을 가졌으며, 섭리도 하나의 기능이다.

하나님은 각 인간을 한 아이로서 사랑하며, 그 사랑은 만세(萬世)와 영원을 통해서 각 인간을 감싼다. 섭리는 전체에 관하여 작용하며, 기능이 전체에 관계되는 대로, 어떤 인간의 기능도 다룬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느 때라도 그의 뜻대로, 우주 사건의 흐름 속에 아버지의 손을 접어넣을지 모른다.

사람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은 흔히 자신이 상상하는 결과요, 우연히 상황이 겹치는 것이다.

사람의 지성이 완전한 수준에 올라감에 따라서, 최상위가 우주 현상의 실제 통일자로서 솟아남에 따라서, 섭리는 점점 더 식별이 가능하게 된다.

필사자가 행운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많은 것은 정말로 불운인지 모른다. 필사자에게 잔인하게 보이는 부당한 운명은 물렁쇠처럼 미숙한 인격을 강철처럼 단련시키는 불인지 모른다.

진화하는 여러 우주에 섭리가 있고, 인간은 진화로 완성됨에 따라서 이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직접 작용한다. 신의 비성격 계심(전능 최상위와 삼위일체)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존중한다.

자연 법칙은 겉보기에 흔히 모질고 무정하며,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서 다음 이유로 수정된다:

(i) 사람의 확대되는 상상력. 물리적 사물의 자(돈이나 권력)로 재는 한, 사람은 시공에서 조화를 발견할 희망이 없다.

(ii) 사람의 증가하는 통제력. 문명화된 사람은 언젠가 행성의 자연력을 비교적 통달할 것이다.

(iii) 사람의 우주 통합. 통찰력이 높아지고 사람이 최상위의 계심과 더욱 조화된다.

사람은 물질 문제를 지배할 뿐 아니라 우주의 경향을 따라서 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각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가 사실이 될 때, 최상 존재의 통치가 달성된다.

시간 세계에서 섭리를 깨달으려면, 사람은 완전에 도달하는 과제를 마쳐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전진을 위하여, 만물이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면 사람은 지금도 섭리의 의미를 미리 맛볼 수 있다.

물질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에 이르려고 위로 손을 뻗을 때, 갈수록 더 사람은 섭리를 알아보게 된다.

섭리는 불완전한 최상위의 통제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다음과 같다:

(i) 부분적이다― 최상위의 현실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ii)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태도는 늘 수준에 따라 달라지며, 최상위의 반응이 변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섭리의 간섭이 있기를 기도할 때, 그 응답은 인생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섭리는 처음에 최상위에, 다음에 궁극위에, 그리고 아마도 절대자 안에 있는 영원의 목표들을 향하여 은하와 성격자들이 확실하게 행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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