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 편, 기도의 진화

글쓴이: 유란시아 중도자 우두머리

1934년

기도는 예전에 종교적 의미가 없이 뱉는 혼잣말과 대화로부터 진화했다.

원시인이 자의식을 가지게 되자, 남을 의식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불가피하게 두 가지 결과가 생겼으니, 하나는 사회에 대한 반응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깨닫는 가능성이다.

초창기의 기도(祈禱)는 (하나님 개념이 아직 생기지 않았으니까) 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표현은 큰 일을 시작할 때 친구에게 "내게 행운을 빌어주렴"하는 말과 비슷했다.

행운을 비는 말은 처음에 혼잣말이었다.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에게 행운 빌어주기를 부탁하였고, 이내 씨족이나 부족 전체를 포함하는 예식이 거행되곤 하였다.

귀신과 영 개념이 진화되자, 이러한 간청은 인간을 초월하는 연설이 되었고, 신들을 의식하게 되자, 이것은 진정한 기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인도의 토다 부족은 어떤 특정한 이에게 향하지 않고 기도하는 관습을 지금도 지킨다.

초기 진화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주물ㆍ부적ㆍ귀신ㆍ통치자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에게 기도를 올렸다.

1. 최초의 기도

초기 종교의 기능은 필수인 사회적ㆍ도덕적ㆍ영적 가치 기준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종교의 이러한 임무는 주로 기도의 기능이다.

기도하는 관습은 상급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집단적 노력을 가리킨다.

종교의 으뜸 매체는 기도이며, 사회에 인식된 가치 기준과 연결되어 있다.

원시인이 염치없이 이기적 포부를 채우려할 때, 그는 종교적 위안을 얻지 못하고 기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기도는 일찍부터 사회의 진화, 도덕의 진보, 영적 달성을 장려하는 수단이 되었다.

초기의 인간은 물질적인 것이 기도의 분야가 아닌 것을 깨닫지 못했다.

생각이 단순한 원시인은 먹을 것과 기타 물질의 축복을 얻으려고 빌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도의 타락은 한 민족의 영적 가치를 낮추지만, 그래도 경제ㆍ사회ㆍ윤리적 관습을 직접 향상하였다.

가장 원시 종류의 지성에게 기도는 혼잣말일 뿐이다.

기도는 일찍부터 대화가 되고, 집단 예배의 수준으로 확대된다.

종교의 효력이 개인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참된 기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는 물활론과 상관이 없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이 그들이 죄가 많다고 생각될 만큼 기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바치는 것 같지는 않다.

2. 진화하는 기도

사람이 처음 드린 기도는 단지 소망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다음에 기도는 영이 협조하도록 설득하는 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기도는 종교를 돕는 높은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너무나 물질적 기도를 드렸고, 그래서 기도는 노력하지 않고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마술 기법으로 굴러떨어졌다.

기도가 신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기도는 간청이 되었다.

참된 기도는 사람과 창조주 사이의 교통이다.

어떤 종교에서도 희생물을 바치는 것은 사람이 물질 재산 드리기를 추구하므로 기도의 효력을 어김없이 떨어뜨린다.

종교가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기도는 신학과 철학 수준으로 변질된다.

참된 기도는 반드시 사람이, 성격을 가진 우수한 존재와 교통함을 나타낸다.

보통 필사자의 일상 체험에서 기도는 잠재 의식과 대화하는 현상과 가깝지만, 깃드는 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수준의 기도가 있다.

3. 기도와 타아

아이들은 언어를 배울 때, 듣는 사람이 없어도 생각을 말로 해보는 경향이 있다.

상상력이 싹이 트면, 아이들은 상상의 동무들과 이야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 방법으로 싹트는 자아는 가상(假想)하는 타아(他我)와 교통하기를 추구한다.

이 기법으로 그 아이는 일찍부터 혼잣말을 가짜 대화로 바꾸기를 배우고, 이 대화 속에서 타아는 말로 하는 그의 생각, 바람을 표현한 것에 대답한다.

어른의 생각에서 상당한 부분이 대화 형태로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다.

원시 형태의 기도는 오늘날 토다 부족의 마술로 쓰이는 암송, 어느 누구에게 향하지 않은 기도와 비슷했다.

이러한 기도는 타아의 관념이 태어나면서 대화 형태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기도는 더 진화하여 윤리적 기도 수준으로 진화한다.

대대로 기도하는 필사자들이 깨달은 바와 같이, 타아는 다신교의 신들을 거쳐서, 궁극에는 유일한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진화한다.

이처럼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가장 높은 가치와 이상을 보존하는 대단히 유력한 매체로서 작용한다.

가상하던 타아와 가졌던 대화는 무한자와 교통하는 수준까지 높아진다.

물질적 도움을 얻기 위하여 하의식 수준을 보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조절자와 접촉하는 상의식(上意識)의 경계를 보라고 기도는 자아를 유도한다.

깨우침을 얻은 기도는 바깥에 계시고 성격을 가진 하나님 뿐 아니라, 또한 안에 있고 비성격인 조절자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4. 윤리에 맞는 기도

간청하는 자가 이기적으로 동료보다 이점을 찾을 때는 기도가 윤리적일 수 없다.

이기적이고 물질을 추구하는 기도는 윤리적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정도까지 타락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도를 드리더라도 공정하여라.

하나님이 편애를 보이고, 이웃, 아니 적보다도 너희를 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진화된 종교에서 처음 드리는 기도는 후일의 계시된 종교처럼 윤리가 있지는 않다.

기도는 이기적이나 이타적일 수 있다.

기도가 기도자를 위해서나 동료를 위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러한 태도는 참된 예배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용서를 구하고 자제를 위한 지혜를 찾을 때, 기도는 더 윤리가 있다.

물질적 기도는 실망을 주고 궁극에 환상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민족이나 개인이 어릴 때에는 이기적 기도를 드리는 특징이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그런 부탁은 응답을 받는 방향으로 수고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효력이 있다.

믿음으로 드리는 진정한 기도는 영적 가치가 없더라도, 사는 기법을 터득하는 데 반드시 이바지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앞선 사람은 미숙한 자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말려서는 안 된다.

기도가 비록 하나님을 바꾸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 속에서 흔히 오래 가는 변화를 일으킨다.

5. 기도의 사회적 영향

기도는 신의 이상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기도의 결과는 인품을 높이고 통일한다.

집단이나 집회에서 하는 기도는 사회에 영향이 퍼지므로 효과적이다.

너희가 어떤 친구를 비난하는 버릇을 고치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날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버릇을 가지는 것이다.

기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두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i) 누구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 사람이 이를 알아야 한다.
(ii) 누구를 위하여 기도할 때, 기도자가 그 사람과 가까운 사회적 접촉을 가져야 한다.

시간이 되면, 기도는 2차적 매체와 결합되는데, 사제, 신성한 책, 예배 의식과 같이 더러는 유익하고 더러는 해롭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상징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예식이 없이 신을 숭배하기가 어려운 자에게 예식을 무시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6. 기도의 범위

한 영역에서 영적 세력의 뜻과 연결되지 않으면, 기도는 사람의 물리적 환경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기도는 유기체의 질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지만, 정신 및 신경의 질병을 고치는 데 이바지했다.

믿음으로 성실하게 드리는 기도는 개인의 행복과 자제를 높이는 데 막강한 힘인 것을 잊지 말라.

충분히 곤경에 빠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도움의 근원에게 기도를 드리고 싶어한다.

너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할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지 말지어다.

그러나 각오하고 닥친 문제에 용감히 달려들면서, 지혜와 영적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여라.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친 것 같이, 정직하게, 사심 없이, 공평하게,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필사자의 업적와 상관 없이, 누구나 창조주와 교통할 수 있고, 생각 조절자와 접촉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7. 신비주의와 황홀경과 영감

신비주의는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의식을 가지는 좋은 기법이라고 칭찬할 수 있지만, 그런 풍습이 사회적 고립과 종교적 광신으로 이끌 때 비난을 받아야 한다.

흥분한 신비주의자가 신의 영감으로 받았다는 생각은 흔히 자신의 머리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위대한 종교 스승과 선지자들은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자주 사도들을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가서 기도하게 했지만, 대체로 사도들이 군중과 접촉하게 하였다.

사람의 혼은 영적 영양 뿐 아니라, 영적 운동이 필요하다.

종교적인 사람은 강렬한 감동의 체험을 모두 신의 계시라 여겨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에 빠지는 열심과 종교적 황홀경은 영감을 받았다는 증명은 아니다.

이상한 종교적 체험이 진정한가는 이 현상이 개인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살펴보아 알 수 있다:

(i) 건강이 나아지는가.
(ii) 더 효과 있게 활동하게 되는가.
(iii)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즐겁게 사회와 연결시키는가.
(iv) 나날의 생활을 영적으로 더 낫게 변화시키는가.
(v)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을 개인이 더욱 사랑하게 되는가.
(vi)
인정된 사회적ㆍ도덕적ㆍ윤리적ㆍ영적 가치 기준을 보존하게 하는가.
(vii) 하나님 의식을 높이는가.

기도는 이러한 종교적 체험과 아무 관계가 없다.

기도가 지나치게 미학으로 흐를 때, 기도는 친교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신비주의와 고립으로 이끈다. 집단 기도와 공동 예배가 이를 고치고 예방한다.

8. 기도는 몸소 겪는 체험

원시인은 두 가지 상황에서 비는 버릇이 있었다:

끔찍한 곤경에 빠졌을 때와 큰 기쁜 일이 있을 때였다.

기도와 마술은 따로 생겨났다.

마술은 신을 형편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시도였고, 기도는 사람을 신의 뜻에 맞게 조정하려는 노력이다.

참된 기도는 도덕과 종교성이 있지만, 마술은 도덕도 종교성도 없다.

많은 사람은 남이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더러는 때맞추어 기도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기도한다.

때때로 기도는 영적 목마름의 표현이고, 때때로 경건한 구절을 뻔뻔히 외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어린아이처럼 드리는 부탁일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려는 희망의 표현일 수도 있고, 자아를 변화시키는 기법일 수도 있다.

현대인은 기도가 하나님과 여러 가지를 의논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압력을 받고서 비상시에야 기도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어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오직 영적 어린이가 하나님의 생각을 주제넘께 바꾸려 할 것이다.

참된 기도는 실체에 이른다. 어떤 새든지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아오를 수 없다.

기도는 영적 기류를 타고 날아오르는 기법이다.

기도는 인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얻으려고 손을 뻗는 것이다.

말은 기도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에 응답하고 말에 응답하지 않는다.

물건이 아니라 오직 가치 있는 것을 위하여,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장을 위하여 기도할진저.

9. 효과 있는 기도의 요건

효과 있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다음의 법칙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i) 현실의 문제에 성실하게 맞섬으로 기도자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ii) 사람으로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iii) 너희는 영적 성장에 모든 희망을 기울이어야 한다.

(iv) 신의 뜻을 마음을 다하여 선택해야 한다.

(v)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데, 조건 없이 헌신했어야 한다.

(vi) 기도는 특정한 문제를 푸는 신의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vii) 팔팔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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