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 편, 서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지은이: 네바돈의 한 천사장

1934년

유럽의 청인은 큰 문화적 문명을 혼자서 일으키지는 않았어도, 아담화된 그 핏줄이 안드 침공자들과 섞였을 때, 진취적 문명을 이룩할 강력한 생물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현대의 백인 종족들은 산긱 종족, 얼마큼 홍인과 황인, 특히 청인과 섞이게 된 아담 혈통의 남은 핏줄을 포함한다. 모든 백인 민족은 안돈의 혈통이 상당히 있고, 놋 족속의 혈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1. 아담 족속이 유럽으로 들어가다 마지막 안드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떠나기 전에, 다수가 모험가ㆍ선생ㆍ상인ㆍ군인으로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옛 시절에 지중해 지역은 지브랄타 지협(地峽)과 시실리 육지 다리로 보호된 (바다가 아니라) 계곡이었다. 옛날의 해상 무역의 얼마큼은 이 내륙 호수에서 있었고, 거기서 북쪽의 청인과 남쪽의 사하라인이 동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났다.

지중해의 동쪽 계곡에서 놋 족속은 광범위한 문화를 세웠고, 여기서 남부 유럽과 북 아프리카로 파고들었다. 놋 및 안돈 종류의 시리아인은 나일 강으로부터 일찍부터 도기와 농업을 들여왔다.


Nile river near Cairo downtown

3만 년이 넘도록 에집트는 메소포타미아인을 받았고, 나일 강 유역의 문화는 부유하게 되었다. 1만5천 년까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이 일어났다. 사하라는 풀 뜯는 땅이었고, 거기에 목자와 농사꾼이 퍼져 있었다.

아담의 피는 대부분의 인종들에게 나누어졌으나, 인도의 혼합 종족과 아프리카 종족들은 아담 족속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홍인이 가까이 있었더라면 아담 족속은 홍인과 자유로이 섞였을 것이다. 황인도 멀리 아시아에 떨어져 있어서 접촉하기 어려웠다. 아담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은 자연히 유럽의 청인 종족들과 섞였다.

청인은 그때 유럽을 휩쓸었고, 보라 인종과 청인종 사이에 성적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동하는 아담 족속은 천천히 청인종의 높은 부류와 연합했고, 한편 남은 네안데르탈 혈통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렸다. 이러한 종족 혼합은 열등한 핏줄의 제거와 함께, 우수한 청인 집단을 열둘 이상 낳았는데, 크로마뇽인이 그 중에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이민은 거의 순전히 유럽으로 갔고, 이러한 상황이 현대 유럽 문명의 전제 조건을 결정하였다.

2. 기후와 지질의 변화 보라 인종이 유럽으로 팽창한 것은 갑작스런 기후와 지질의 변화로 단축되었다. 북쪽의 빙원들이 물러가자 사하라의 큰 목초 지역이 불모의 사막으로 변했다. 사하라의 고원에서 살던 거주자들이 흩어졌는데, 이들은 키가 작고 갈색 머리였으나 얼굴이 길었다.

순수한 남인 부족들은 중앙 아프리카의 숲으로 이주했고,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혼합된 무리는 세 갈래로 흩어졌다. 서쪽의 우수한 부족들은 스페인으로, 동쪽의 후진 부족들은 아라비아로, 중앙 집단은 나일 강과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갔다.

데칸으로부터 지중해의 남북 바닷가를 따라서 흩어진 현대 민족들 사이에는 2차 산긱 종족이 공통된 핏줄이다.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후의 변화가 있을 때, 잉글랜드는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지중해의 서쪽 분지를 보호하던 지브랄타 지협이 무너졌으며, 이 내륙의 호수를 대서양 수준까지 재빨리 올려 놓았다. 대번에 시실리 육지 다리가 물 속에 잠겼고, 하나의 바다 지중해를 만들고 이를 대서양과 이었다. 온 세계 역사에서 홍수로 최대의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지중해 분지가 이렇게 물에 잠긴 것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즉시 줄였다. 아담 족속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북쪽으로 여행하고 투르키스탄에 흩어진 촌락에서 사냥하고 짐승을 기르고 땅을 갈았다. 이들이 유럽으로 들어가서 뒤떨어진 청인의 문화를 발견했는데, 이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전혀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3. 크로마뇽 청인 청인 문화의 옛 중심은 유럽의 모든 강들을 따라서 자리를 잡았지만, 강들의 흐름이 바뀌었고 오직 솜 강이 빙하기 이전 시대의 경로 그대로 지금도 흐른다.

우리는 청인이 유럽 대륙에 침투했다고 말하지만, 몇십의 종족 부류가 있었다. 3만5천 년 전에도 유럽의 청인종은 이미 홍인 및 황인의 핏줄로 어지간히 섞였고, 러시아 지역에서 안돈 족속의 피를 상당히 흡수하고 남쪽에는 사하라 종족들과 접촉하였다.

아담 이후 시절에, 초기 유럽의 문명은 청인의 활력과 아담 족속의 창조적 상상력이 섞임으로 생긴 것이다. 허다한 자가 처녀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경향 때문에,아담 족속은 그들의 종교를 크로마뇽인에게 인식시키기 어려웠다.

청인은 어떤 거래에도 완전히 정직했고, 혼합된 아담 족속처럼 성적 타락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처녀기를 존중했고, 전쟁 때문에 남자가 부족했을 경우에만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실행했다.

이 크로마뇽 민족은 용감한 종족이었다. 부모 양쪽이 아이들을 훈련하였다. 나이가 어릴 때, 여자는 가정 기술과 소박한 농업을 통달했고, 남자는 사냥꾼이요 무사였다.

청인은 배 만들기에 숙달되었다. 통나무 오두막을 세웠는데, 이것은 일부가 땅 밑에 있었고,가죽으로 지붕을 덮었다. 남쪽의 크로마뇽인은 대체로 동굴과 석굴에서 살았다.

청인은 용기가 있었지만 예술가였다. 아담 족속과 섞이면서 창조적 상상력이 가속되었다.

약 1만5천 년 전에 알프스의 숲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사냥터가 불모의 사막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이 기후의 변화는 유럽의 종족들을 목자로, 어느 정도 어부와 농부가 되게 만들었다. 사냥을 하던 시절에 우수한 부족들은 상급의 전쟁 포로들과 서로 결혼하고 열등한 자를 죽였다. 그러나 촌락을 세우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함에 따라서, 청인은 평범한 많은 포로를 노예로 살려두었다. 이 노예들은 크로마뇽 부류를 저하시켰다.

4. 안드 족속의 유럽 침공 안드 족속은 유럽을 일곱 번 침공하였고, 마지막에 도착한 자들은 세 차례 인파를 이루어 말을 타고 왔다.

셋째와 넷째 침공 사이에, 시베리아에서 안돈 족속의 한 떼가 북쪽에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즉시 안드 부족들에게 동화되었다.

이보다 일찍 있었던 순수한 보라 인종의 팽창은 평화적이었다. 아담 족속은 평화를 좋아하고, 놋 족속은 싸우기를 좋아했다. 이 두 핏줄의 연합은 유능하고 공격적인 안드 족속을 낳았고, 이들은 군사 정복을 실행했다.

말은 서양에서 안드 족속의지배를 결정한 요인이었다. 그 전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먼 곳에서는 붕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후일의 인파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단결된 무리로 유럽에 이르렀다.

안드 기마병들이 기원전 제6 및 제7 천년에 등장했을 때,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제외하고, 세계 전체에서 문화의 진보는 제한되었다. 이 기마병들이 청인 중에 우수한 요소를 흡수하고 못한 요소를 없애면서, 이들은 섞여서 한 민족이 되었다. 이들은 노르딕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앙글로 삭슨 종족들의 선조였다.

오래지 않아서 우수한 청인 핏줄은 유럽 전역에서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흡수되었다.

5. 안드 족속의 북 유럽 정복 북 유럽의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흘러 들어오는 이민으로 계속 개량되었고, 마지막 안드 기병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이 지역에서 안드 유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3천 년 동안 북쪽 안드 족속의 군사 본부는 덴마크에 있었다. 여러 세기 동안 이 안드 족속과 정복된 민족들이 혼합되면서, 이들은 안드 성향이 줄어들고, 갈수록 더 백인이 되었다.

청인은 백인 기병 침공자들에게 굴복했다. 크로마뇽인이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혼합된 백인 부족들은 우수한 지능과 수 때문에, 이들을 멸종시킬 수 있었다.

백인과 청인 사이의 결정적 싸움은 솜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5백 년이 넘게 영토를 지켰지만, 이 크로마뇽인은 백인 침공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승리한 사령관 토르는 북쪽 백인 부족들의 영웅이 되었다.

가장 오래 버틴 청인의 본거지는 프랑스 남부에 있었다. 후일의 정복은 열등한 자를 죽이고 우수한 자와 결혼함으로 진행되었다.

한 열등한 포로가 부적당하다고 안드 족 장로 회의가 판결하면, 그를 물속에 처넣어 죽이는 예식을 치렀다. 이렇게 청인은 빨리 끝장이 났다.

크로마뇽 청인은 현대 유럽 종족들의 생물학적 기초였으나, 나중에 강건한 정복자들에게 흡수됨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안드와 청인의 연합은 북쪽의 백인 종족들을 일으켰다.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백인 종족들은 북 유럽에 두루 세력을 떨쳤다. 청인과 둥근 얼굴의 안돈 족속이 한동안 중앙 유럽을 장악했다.

6. 나일 강가의 안드 족속 안드 족속의 마지막 이동이 있던 시절부터 문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쇠퇴하였고, 문명의 중심은 나일 강 유역으로 옮겨 갔다.

에집트 문화가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서 파생되었어도 선두에 서는 듯하였다. 한 집단을 제외하고 다른 여섯 집단이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마지막 탈출이 있었을 때 에집트는 솜씨 있는 예술가와 장인(匠人)을 아주 많이 얻어서 운이 좋았다. 이들은 에집트의 금속 가공 기술에 크게 이바지했다.

안드 족속은 에집트에서 첫 돌 구조물을 지었다.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임호텝 수상(首相)이 세웠는데, 그는 안드 족속에서 건축의 천재였다. 그 이후로 건축 기술은 쇠퇴하였다.

이 찬란한 문화 시대는 살기 어려운 아라비아로부터 온 열등한 부족들과 남쪽으로부터 온 흑인들로 들끓었다.

7. 지중해 섬들의 안드 족속 메소포타미아에서 문화가 쇠퇴하는 동안에, 얼마 동안 지중해 동부의 여러 섬에서 우수한 문명이 지속되었다.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안드 족속에서 한 명석한 부족이 크레테로 이주하였다. 이 집단은 놋 족속의 반 계열과 서로 결혼했던, 키 작은 안드 족속이었다. 이들은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몸이 크로 열등한 동료들에게 본토에서 밀려났다.

크레테로 간 이 이민들은 직물ㆍ금속ㆍ도기ㆍ배관(配管)에, 그리고 돌을 건축 재료로서 사용하는 데 솜씨가 있었다. 그들은 글쓰기에 착수했고, 목자와 농사꾼으로서 생계를 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크레테에 이들이 정착한 뒤 거의 2천 년이 되자, 아담손의 키 큰 후손들이 그리스까지 갔다. 사토는 이 그리스인의 선조를 서쪽으로 인도했는데, 그는 아담손과 라타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집단은 37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태동하는 백인 종족 중에서 가장 귀중한 핏줄이었다. 육체적으로, 이들은 첫 에덴 시절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리스와 에게 해 제도(諸島) 지역은 서양의 무역ㆍ예술ㆍ문화의 중심으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이어받았다. 그리스 민족의 예술과 천재가 아담손과 그의 둘째 아내의 후손으로부터 받은 유산이었다.

에게 해 지역은 다섯 문화 단계를 거쳤고, 각자 이전보다 영적 수준이 낮았다. 나중에 다뉴브 노예들의 후손에 압도되어, 화려한 예술의 시대가 사라졌다.

카인의 후손들 사이에서 어머니 숭배가 유행한 것은 크레테에서 이 시기였다. 이 어머니 숭배는 그리스도의 시절까지 지속되었고, 나중에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구실로 기독교에 합병되었다.

기원전 6500년 무렵까지 안드 족속의 영적 유산이 쇠퇴하였다. 아담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고, 수가 많은 인종들 속에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아담의 순수한 세 혈통은 수메르와 북 유럽과 그리스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아라비아로부터 섞인 종족들이 흘러들어와서 안드 족속의 잔재를 바깥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기원전 약 5000년에, 진취적 메소포타미아인의 무리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와서 사이프러스 섬에 정착하였으나, 약 2천 년 뒤에, 북쪽에서 온 미개한 떼가 이 문명을 뿌리 뽑았다.

또 하나의 식민지가 지중해에, 후일에 카르타고 자리 근처에 정착했다.

에집트의 문화가 쇠퇴했을때, 유능한 가족들이 크레테로 달아나서 이 문명을 크게 키웠다. 에집트에서 열등한 무리들이 도착하여 크레테 문명을 위협했을 때, 문화가 발달한 가족들은 그리스로 옮겨 갔다.

그리스인은 선생이요 예술가일 뿐 아니라, 큰 상인이요 식민지를 일으키는 자였다. 이들이 서쪽으로 문화의 전진 기지들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명의 잔재가 유럽 종족들 안에서 지속되었다.

8. 다뉴브 강의 안돈 족속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안드 종족들은 북으로 유럽으로 가서 청인과 섞였고, 서쪽으로 지중해 지역으로 가서 사하라인과 남쪽 청인 혼혈의 잔재와 섞였다. 얼굴이 넓은 안돈 부족 생존자들은 백인종의 이 두 가지를 널리 떼어놓았다.

안돈의 이 후예는 유럽의 중앙 및 남동부의 산 지역에 흩어졌다. 고대의 헷 족속은 안돈 족속의 핏줄로부터 내려온다. 그들은 창백한 살갗과 넓은 얼굴을 가졌다. 이 핏줄은 아브라함의 조상에 들어 있었다. 유대인 후손은 안드 족속의 문화와 종교를 가졌어도, 안돈 말을 사용했다.

이탈리아, 스위스, 남 유럽의 호수에서 통나무 기둥 위에 세운 집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아프리카인, 에게인, 그리고 다뉴브인이었다.

다뉴브인은 안돈 족속이었다. 그들은 도기를 만들고, 유역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크레테 섬에서 온 선교사들이 수고한 결과로, 다뉴브인은 어머니 숭배자가 되었다. 중앙 유럽의 상당 부분은 얼굴이 넓적한 백인 종족이 차지했다.

9. 세 백인 종족 안드 종족의 이동이 끝날 때, 유럽에서 종족의 혼합은 다음과 같이 세 백인 종족으로 나뉘어졌다:

(i) 북방 백인 종족. 이 노르딕 종족은 주로 청인과 안드 족속의 혼합이었으나, 또한 안돈 족속을 얼마큼, 그리고 소량의 홍인 및 황인의 피를 품었다. 초기의 노르딕인은 얼굴이 길고, 키가 크고 금발이었다.

침공하는 노르딕인이 마주친 것은 다뉴브인의 문화였다. 노르딕인은 다뉴브인을 상대로 큰 상업을 일으켰고, 그들로부터 어머니 숭배와 죽은 사람 화장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어째서 먼저 있던 이 백인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가 설명한다. 이 백인들은 또한 거처를 짓고,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

(ii) 중부 백인 종족. 이 무리는 청인, 황인, 안드 족속의 핏줄을 포함해도, 주로 안드 족속이었다. 거의 2만 년 동안, 안돈 족속은 안드 족속에게 중앙 아시아의 북쪽으로 밀려났다. 기원전 3000년이 되자 건조한 기후는 이 안돈 족속을 투르키스탄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기원전 2500년이 되기까지, 안돈 족속은 서쪽으로 움직여 유럽에 다다랐고, 오래 지속된 문화적 후퇴를 낳았다.

(iii) 남방 백인 종족. 이 지중해 족속은 갈색 머리를 했고, 안드 족속과 청인의 혼합으로 이루여졌다. 또한 사하라인의 피도 상당히 주입되었다.

지중해 바닷가의 땅에는 유목민이 침공하여 육지의 교통과 무역을 중지시켰다. 따라서 해상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지중해 분지의 바닷가 지역에 두루, 안드 족속이 갑자기 팽창하였다. 이 시절 이후로 이 종족은 아라비아의 청인, 황인, 안드 족속과 더 혼합되었다. 이글은 대체로 키가 작고,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를 했다.

북쪽에서 안드 족속은 전쟁과 결혼을 통해서 청인을 말살했지만, 남쪽에서는 청인의 큰 무리가 살아남았다. 바스크인과 베르베르인은 청인의 살아남은 두 가지이지만, 이들도 사하라인과 많이 섞였다.

이것이 기원전 약 3000년에 중앙 유럽에서 나타난 종족 혼합을 묘사한다.

이때는 신석기(新石器) 시대가 청동기 시대와 겹치는 시절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머니 숭배와 관련된 청동기 시대였다. 유럽의 백인 종족들은 건축가였고, 스톤헨지와 비슷하게, 태양 숭배로서 큰 돌들을 세워놓기를 좋아했다.

비교적 최근의 태양 숭배의 미신이 지금도 브리타니에 남아 있다. 기독교인이 된 지 1500년이 넘었는데도, 이 브리타니인은 악한 눈을 쫓아내기 위하여 신석기 시대의 부적을 아직도 지닌다.

그러나 백인 종족들을 노르딕, 알프스, 지중해 종족으로 주제넘게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때는 그렇게 분류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 종족이 널리 섞여서 그럴 수 없다.

이 유럽의 문화는 5천 년 동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서로 섞였다. 이 문화는 북 아메리카의 세계적 인구 속에서 섞이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 이 대륙의 앞날은 사회 문화의 수준 뿐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종족들의 질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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