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편,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지은이: 네바돈의 한 천사장

1934년

둘째 동산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아담 종족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버티고 그 자손을 땅끝까지 보냈고, 이들이 후일에 놋 부족과 산긱 부족들과 섞이자, 안드 족속으로 알려졌다.

이 논문은 보라 인종의 역사를 묘사하며, 이것은 기원전 약 35,000년부터 기원전 약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으로부터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1. 종족과 문화의 분산 아담이 도착했을 때, 지상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3만5천 년 전에, 종족과 문화의 분산은 다음과 같았다:

(i) 보라 인종 (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 아담 족속 문화의 중심은 둘째 동산이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은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고, 이것은 카스피 바다 남쪽 해안의 동쪽에 있었다.

(ii) 수메르 이전 족속과 기타 놋 족속. 강들의 입구 가까이 고대 문화의 잔재가 있었다. 이 집단은 아담 족속과 많이 섞였다.

(iii) 안돈 족속도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다.

(iv) 홍인은 두 아메리카를 차지했다. 아담이 오기 5만년쯤 전에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v)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 아시아를 장악하였다.

(vi) 청인종(靑人種). 청인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에, 그리고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하여 저하되었다.

(vii)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의 혼합이었다.

(viii)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요소는, 지금 큰 사하라 사막인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ix) 지중해 분지. 여기서 북쪽의 청인과 남쪽의 사하라 주민이 동에서 온 놋 및 아담 족속과 함께 섞였다.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팽창하기 전에, 약 2만5천 년 전에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 둘째 동산에 달려 있었다.

유란시아에 주재하던 하늘 관찰자들은 잘못하는 물질 아들딸의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 보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을 따라서 수고했고, 남쪽에서 치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 훌륭한 사람들은 아담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빼어난 아들딸을 기쁘게 보냈다.

아담 족속의 문명과 사회는 진화 종족들보다 훨씬 앞섰다. 오직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족속의 촌락들 사이에서 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요, 진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까지 악화될 운명이었다.

아담은 지적 문화를 남겼으나, 기계 장치 면에서 진보되지 않았는데, 발명의 성공은 자연 자원과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 족속은 기원전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참 민족이었고, 이미 둘러싼 부족들에게 자손 몇백만 명을 퍼부었다.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카스피 해의 밤 풍경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 전통을 간직했다.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된 것을 설명한다. 인구가 늘어나면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아담 족속 중에 더러는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더러는 아시아로 파고들었으나, 이들은 소수파였다.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 서쪽으로 유럽으로 들어갔다.

약 1만5천 년 전에, 아담의 순수 혈통의 다수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으나, 북으로 가면서 다른 종족들과 뒤섞였다.

기원전 약 3만 년부터 1만 년까지, 대규모의 종족 혼합이 서남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원전 1만5천 년 전에,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이 끝났고, 유럽과 중앙 아시아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더 많이 있었다.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보강되었다. 흑인 종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시달리고,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안돈 족속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다. 녹인종과 주황 인종은 멸종되었다. 남인종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였다.

인도의 민족들은 침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황인은 중앙 아시아에서 자리를 굳혔다. 갈색인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초기의 이동은 기원전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계속되었고,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이동은 기원전 15,000년에서 6000년까지 계속되었다.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가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후일에 안드 족속이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빨리 움직였다.

4. 안드 족속 안드 종족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족속 및 여러 진화 민족을 1차적으로 섞어서 생긴다. 안드 족속은 보라 인종의 피를 1/8에서 1/6까지 섞인 종족들을 언급한다. 현대에 북쪽의 백인조차 이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수사에서 발견된 생명나무 기록

가장 초기의 안드 민족들은 2만5천 년도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지역에서 기원을 가졌고,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순수 핏줄의 보라 종족이 살던 시절 이후로, 안드 족속은 지구에서 가장 좋고 다능한 핏줄이었다.

이 옛 안드 족속은 아리아인이 아니라, 아리아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백인이 아니라 백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형질은 안드 족속의 유산이다.

순수한 보라 인종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고, 따라서 초기의 민족 이동이 평화로웠던 것을 설명한다. 놋 족속은 이때 호전적 민족이었고 아담 족속과 섞여 생긴 안드 민족은 가장 현명한 군국주의자였다.

이 안드 족속은 모험을 좋아했고, 산긱이나 안돈 족의 피를 섞으면, 안정된 민족이 되었다.

5. 안드 족속의 이동 둘째 동산의 문화는 기원전 약 15,000년까지 꾸준히 쇠퇴하였다.

아담 족속이 혼합된 놋 족속과 연합하여 안드 족속을 형성하여 동산이 부흥하자 이 문명이 널리 퍼졌다.

이 안드 족속은 유라시아 대륙과 북 아프리카 전역에 퍼졌다. 이때가 되자,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도 너무 섞여서 이제 더 아담 족속이라 할 수 없었다.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안드 기병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착하여 항상 새로워졌다. 이른바 아리아인의 조상 언어는 투르키스탄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안돈 족속의 방언이 아담손 족속과 안드 족속의 언어와 섞인 것이었다. 많은 현대 언어가 유럽과 인도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중앙 아시아 부족들의 언어로부터 생겨났다.

기원전 12,000년이 되자, 안드 족속의 3/4은 북부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였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탈출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민 인파의 65퍼센트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안드 족속은 유럽 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다. 그들은 또한 사하라의 산긱 종족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이 안드 족속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정복하는 아리아인이었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ㆍ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이 종족 132명은 일본에서 작은 배로 떼지어 출발하여 결국 남 아메리카에 도돌했고, 안데스의 토착민과 결혼하여 잉카 통치자들의 조상을 세웠다.

안드 족속의 정복은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지나간 나라에 유머ㆍ예술ㆍ모험ㆍ음악ㆍ제조업을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고 농업에 전문가였다.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안드 족속은 기원 8000년세 6000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세 차례 인파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동쪽에서 산지 부족들의 압력과 서쪽 평야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쫓겨났다.

카스피 해

65퍼센트는 카스피 바다의 길로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의 백인과 섞였다.

10퍼센트는 동쪽으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10퍼센트는 북향 길을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가 안드 족 황인 거주자들과 섞였다. 이 연합은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크게 개선하였다.

10펴센트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에집트로 들어갔다.

5퍼센트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 집단은 우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잔재이다.

안드 족속은 기원전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비웠다. 그러나 둘러싼 산긱 종족들과 안드 족의 후손은 후일에 침공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둘째 동산의 문화는 열등한 종족들이 더 침투함으로 막을 내렸다. 문명은 나일 강과 지중해 섬들로 옮겨 갔다.

7.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진 홍수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홍수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지질학적 변화로 메소포타미아 유역이 위험해졌다.

첫 에덴이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지중해 동부 해안의 산,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산들이 높아졌다. 이처럼 강설량이 늘어나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큰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거의 1천 년 동안 수십 도시가 이러한 홍수 때문에 버림받았다.

거의 5천 년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의 유래를 아담까지 추적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발견했다. 한 사제가 그런 수고를 집어치우고, 노아 홍수 시절에 온 세상이 물에 빠졌다고 이야기를 줄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아ㆍ방주ㆍ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발명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이후로 세계적 홍수는 한 번도 없었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인 때는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실재한 인물이었다. 그는 에렉 가까이 있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노아는 많은 비웃음을 샀다. 해마다 강가의 촌락으로 가서, 홍수가 오리라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홍수가 몹시 커져서, 갑자기 솟아오른 물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으나, 노아와 그 직계 가족은 배에서 구제되었다.


우륵에 있던 기둥의 모자익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난 것은 안드 족속 문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홍수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사라졌다.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는 이 지역에,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된다. 달라마시아 시절은 흔적은 페르시아 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에, 물 밑에 잠겨 있다.

8. 수메르인―마지막 안드 족속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붕괴를 가져왔을 때, 한 소수(小數)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메르인이었고, 기원전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줄기는 대체로 안드 족속이 되었다.

수사의 유적 (사진: Inspired By Maps).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홍수가 있던 시절에 수사가 크게 번성하였다. 달라마시아는 물에 잠겼고, 높이 있던 마을 수사는 공예품 본부가 되었다. 이 홍수가 줄어들자, 우르는 도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천 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있었고, 그 이후에 퇴적물이 땅을 현재 위치까지 쌓아 올렸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사람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살던 미개인의 침공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이 목자와 사냥꾼들은 말을 많이 소유했고, 이것은 그들을 군사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거주자들을 유럽, 서 아시아, 북 아프리카로 몰아냈다.

이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은 우수한 안드 혈통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문명의 잔재를 기꺼이 동화했고, 강 유역에 있던 부족들의 예술과 수메르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셋째 바벨 탑까지 세우려 애썼고, 나라 이름을 바빌론으로 불렀다.

동북부에서 온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페르시아 만 근처에 거주하던 안드 족속의 잔재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 수메르인은 우수한 지능, 군사적 운하 체계 때문에 자체를 방어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 온 이 칭공자들은 이 수메르인이 유능한 선생이요 행정가인 것을 신임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겼다.

키시에 남은 지꾸랏 (사진: Peter Sobolev)

초기의 수메르 연방이 깨어진 뒤에, 셋 족속의 후손이 도시 국가들을 다스렸다. 각 도시는 자기네 신이 모든 다른 신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도시의 사제들이 통치하던 기간을 키시의 사제 사르곤이 끝냈다. 그는 자기가 임금이라 선포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인접한 땅을 정복하였고, 이것은 도시 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왔다.

키시 연방이 깨어진 뒤에, 오랫동안 도시들 사이에 전쟁이 따랐고, 통치권은 수메르ㆍ아카드ㆍ키시ㆍ에렉ㆍ우르ㆍ수사 사이에 다양하게 바뀌었다.


수사에서 발견된 (손잡이 없는) 컵


하무라비 법전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은 북쪽의 수 족속과 구 족속에 패배하였고, 수메르의 서울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하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되자, 수메르인은 셈 족속에게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라가시의 임금 구데아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이 날뛰었다.

이것이 아담 이후에, 보라 인종과 그들이 살던 두 강 사이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바깥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했다. 그러나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 20세기 문명의 뒷받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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