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바울이 마지막 해를 보낸 마메르틴(Mamertine) 감옥

예전에는 이 감옥을 툴리아눔(Tullianum)이라고 불렀다. 여기는 많은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재판을 받거나 사형에 처하기 전에 죄수를 잠시 붙들어 두는 임시 감옥이었다.  

1. 마메르틴 감옥의 위치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Roman Forum)는 로마 시대에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이것은 팔라티노(Palatino) 와 캄피돌리오 (Campidoglio) 언덕 사이에 있다. 여기에 이 포럼을 내려다 보는 곳에, 마메르틴 감옥이 있다.

포로 로마노

캄피돌리오 광장에 있는 상원 궁전(Palazzo Senatorio)

2. 마메르틴 감옥에 갇혀 있던 두 사도

1층의 가운데 방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벽화들이 있는데, 다음 벽화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가운데 십자가 모양의 후광은 아마도 예수를 가리킬 것이고, 바른 쪽 사람은 머리가 벗어진 것으로 보아 바울인 듯하다.

이 감옥은 베드로와 바울이 마지막 해를 (서기 67년) 보낸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로마 시대에 이름 있는 죄수는 재판 받기 전에 감옥에 두기보다 개인 집에 가택연금을 하였다고 한다. 바울이 소년기를 보낸 타르수스는 (Tarsus) 킬리키아 (Cilicia)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기원 전 66년에 로마인 시민권을 받았다. 타르수스는 기원전 42년에 자유 도시가 되어,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법대로 다스리는 자치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그를 가르친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가 타르수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바울도 로마에 가기 전부터 이름이 나 있는 로마 시민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로마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의 긴 편지를 썼으니, 신도들과 이야기할 자유가 있을 정도로, 감옥이 아니라 가택에 연금당하여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네로 황제 때 박해가 시작되어 사형 되기 얼마 전에 여기로 옮긴 것 같다.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서기 161-180년) 개선 행진

전쟁에 패한 족속의 유명한 죄수는 개선 행진에 시민들에게 보여 주는 데 써먹고, 행진이 끝난 뒤에 이 툴리아눔 감옥에서 목을 베었다고 한다. 여기서 목을 벤 죄수들의 목록이 있다. 서기 49년에 갈리아 전쟁에서 줄리아스 케자에게 패한 베르신게토릭스(Vercingetorix)가 여기서 목을 베였다. 또한 시몬 바 교라도 (Simon bar Giora) 서기 68년에 유대인의 독립 전쟁을 일으킨 주모자였는데 결국 붙잡혀 여기서 처형당했다.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명을 받아 그 아들 타이투스(Titus)가 성전을 파괴하고 그를 붙잡아 로마에서 개선 행진에 시민들에게 선을 보이고 죽인 것이다.

3. 석판에 있는 글의 해석

지하에 내려가면, 대리석으로 된 한 석판이 이 장소의 내력을 설명한다. 좀 오래된 이태리어로 써 있어서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

아주 확실치는 않은데, 이것을 우리 말로 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여기 기둥에 아주 거룩한 (ss = santissima)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묶여 있었다. 이 샘에서 기적같이 솟아 나온 물로, 거룩한 순교자요 감옥의 간수, 마르티니아노와 프로세소,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 47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또 하나의 돌판에는 비슷한 내용,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 실베스터(Sylvester)에게 무엇을 바쳤다는 따위의 내용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바울과 베드로가 9개월 넘게 갇혀 있었고, 프로세소와 마르티니아노는 이들과 다른 47명을 지키는 간수였고, 나중에 순교당했으며, 샘에서 물이 갑자기 솟아 났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석판 자체는 1726년에 새긴 듯하다.

실베스터 교황은 콘스탄틴 대제에게 세례를 준 교황이고, 그 시절에 콘스탄틴은 라테라노 성당, 성베드로 성당, 그리고 Santa Croce in Gerusalemme 를 지었다. 이 성십자가 교회는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유물을 두기 위하여 서기 327년 경에 지은 교회라고 한다. 헬레나가 살던 곳은 세소리아노 궁전 (Palazzo Sessoriono)이었는데 헬레나가 이것을 예배당으로 바꾸었고, 나중에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흙을 바닥에 뿌려서 성당으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 수녀원 시설의 일부를 여행객에게 제공한다. 이곳에 번번이 묵으면서도, 동네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 외에, 한 번도 Santa Croce(성십자가)를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True Cross와 연결지을 생각을 못했다.

조그만 지하실에는 바울과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에는 후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넷인데, 양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베드로인 듯. 그 바른 쪽에 신자의 머리에 물을 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이다. 머리가 벗겨진 것으로 알 수 있다. 바른 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감옥의 간수이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는 프로세소(Processo)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티니아노(Martiniano)임이 틀림없다.

옆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조각상이 있는데 철창으로 가려져 있다. 바른 쪽이 머리털이 많으므로 베드로이고 왼쪽이 바울인 듯하다.  

4. 베드로와 바울의 죽음

전설에 따르면, 프로세소와 마티니아노는 로마의 병사였는데 바울과 베드로를 지키는 책임을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기적같이 샘물이 솟아나온 뒤에 베드로가 이 두 병사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원래 물 저장소가(cistern)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기적은 아니라도, 물이 말랐다가 갑자기 물이 고여 나와서 물을 본 김에 사도들이 죄수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한 뒤에 이들은 바울과 함께 순교당했다. 로마 시민이므로, 이들은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아마도) 서기 67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어렸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에게 2주 동안 교육받고 사도가 되었다. 초기에 바울은 베드로와 많이 다투었으나, 나이 든 뒤에는 로마에 죄수로 와서 베드로와 함께 일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처형당했는데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때가 서기 67년이라 한다.

Vespasian (치세, 69-79년)

일설에 따르면 두 사도가 서기 67년에 같은 때에 죽었다고 한다. 베드로가 먼저 죽고 바울이 얼마라도 더 살았더라면, 글 쓰기 좋아 하는 바울이 베드로의 죽음에 대하여 한 자 적었을 것이다. 마메르틴은 임시 감옥이고, 이 감옥이 로마시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 코 앞에 있는 사정을 참작하면, 많은 외부 인사가 찾지 못하게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위의 라틴어 해석이 맞는다면, 바울과 베드로가 갇혀 있던 9개월 남짓한 동안에, 두 간수와 감옥 안에 있던 죄수 47명에게 세례를 준 것이다. 박해가 시작되어 유명한 바울까지 죽일 처지였다면, 베드로라고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유대인의 독립 전쟁이 한창 시작되었을 때이니 네로 황제가 하나를 미워하고 다른 하나를 애낄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네로 황제는 서기 67년 4월에 장차 황제가 될 베스파시안을 반란 평정자로 임명하였다. 기독교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소동이 두려워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처형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두 간수가 기독교에 동조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어쨌든 유대인의 독립 전쟁이 박해의 중요한 동기라면, 두 사도와 두 간수, 그리고 죄수 47명이 모두 한꺼번에 같은 날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는 서기 70년, 유월절 직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성은 5개월 만에 함락되었다. 티투스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에게 지금의 통곡의 벽을 제외하고 성전을 허물라고 명했다. 예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시민이 백만 명이 넘어 죽었고, 예전에 성전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전의 자리가 평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몬 바 교라는 잡혀서 로마에 끌려와 마메르틴 감옥에서 70년에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