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의 실수와 신약의 편찬

 

1. 마르키온의 역할

유대인의 독립 전쟁은 (서기 66-73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가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함으로 대체로 끝났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일찍부터 뿌리가 말랐고,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Paul)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의 (지금의 터키 지역) 여러 도시에 세운 교회들은 번성했다. 서기 2세기에는 유럽의 여러 교회마다 자기네 취향에 따라서 여러 복음과 바울의 편지와 잡다한 외경을 읽고 있었고, 신약은 아직 편찬되지 않았다. 무언가 교회의 통일성이 필요했던 듯하다.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최초에 신약 경전을 편찬한 사람은 마르키온(Marcion)이었다. 그는 누가 복음과 바울의 서한 10편을 모아 140년 경에 처음으로 신약 경전을 만들었다. 여러 교회의 반응은 좋지 않아서 서기 144년에 그는 이단으로 몰렸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신약 경전을 처음으로 편찬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역사적인 공로가 있다. 시일이 더 걸렸지만, 이를 계기로 결국은 신도들은 신약 편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교회들은 모두가 독립되어 있었는데, 이노슨트 1세 (서기 401-17년)가 처음으로 로마 교회를 베드로가 세웠고, 권한을 이어받았으므로, 다른 교회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2. 콘스탄틴의 승리

서기 285년에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서기 284-305년)은 영토가 너무 커서 다스리기 힘들므로 로마의 장군 막시미안을 (Maximian, 서기 286-309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자리로 승격시켜 그를 서방을 책임지게 하고 자기는 동부 지역을 맡았다. 서기 293년에 다시 디오클레시안은 제국을 4분하여, 자기 밑에 사위 갈레리우스(Galerius)와 막시미안 밑에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를 케자로 임명하여, 나누어 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서기 305년에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 함께 물러났고, 갈레리우스가 동부를 맡은 아우구스투스가 되고 콘스탄티우스는 서부 지역의 아우구스투스 자리로 올라갔다. 디오클레시안은 은퇴한 뒤에 밭에서 양배추를 심고 살았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 제국의 정권을 잡으라고 부추겼어도 그는 끄덕하지 않았다고 한다. 306년에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돌아가시자, 콘스탄틴(Constantine)은 겨우 케자의 자리를 얻어 지금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지방을 다스렸다.

디오클레시안이 하사한 금메달.

서기 305년에 콘스탄틴은 아들을 하나 얻어 이름을 크리스퍼스(Crispus)라고 지었다. 어머니 미네르비나(Minervina)가 정식 부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307년에 막시미안의 딸 파우스타(Fausta)와 결혼하였다. 아들을 잘 교육시키기 위하여, 기독교 신자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317년에 그는 파우스타와 낳은 아들 콘스탄틴 2세와 함께 크리스퍼스를 케자(Caesar)로 삼았고, 크리스퍼스에게는 지금의 독일 지방에 군대를 맡겼다. 그러는 동안에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는 리시니우스(Licinius)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자리에 앉히었는데, 그는 콘스탄틴의 여동생 콘스탄시아(Constantia)와 결혼하고, 막시미안(Maximian)을 313년에 물리쳐 동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막센시우스(Maxentius)와 정권 싸움이 붙어 밀비아 다리 (Milvian bridge) 전투에서 콘스탄틴은 그를 물리쳤다. 이 때 케자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 의 말에 따르면, 그는 환상을 보았는데 방패에 XR 두 글자를 (그리스도를 가리킴) 방패에 칠하고 싸우면 전쟁에 이긴다고 주가 말씀했다고 병정들에게 이야기하여, 그의 군대는 용기가 백배하여 군세가 강한 막센시우스를 물리쳤다고 한다.

리키니우스와 잠시 평화를 유지했지만, 콘스탄틴은 그를 죽이고 325년에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아들 크리스퍼스는 이 전쟁에 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로마에, 콜로세움 옆에, 승리의 아치를 지었다.

3. 콘스탄틴의 실수

파우스타는 한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미안의 망내 딸이었고, 이 결혼은 막시미안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갈레리우스에 대항하여 콘스탄틴과 연합하려는 정략 결혼이었다. 파우스타는 아들을 셋이나 낳아 주었다. 이 아들 중에 하나가 황제가 되어야 할 터인데 크리스퍼스가 걸림돌이었다.

왼쪽 사진은 헬레나의 모습이 담긴 메달, 둘째 금화에는 왼쪽으로부터 크리스퍼스, 파우스타, 콘스탄틴 2세 (콘스탄틴과 파우스타의 첫째 아들).

왼쪽으로부터 콘스탄틴 대제, 파우스타, 콘스탄스 (콘스탄틴과 파우스타의 셋째 아들)

자세한 일은 알 수 없으나, 일설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아내 파우스타가 젊은 크리스퍼스를 유혹하려다 실패하자,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고자질했다고 한다. 성급한 콘스탄틴은 326년에 아들 크리스퍼스를 사형에 처했다. 뒤늦게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크리스퍼스의 결백함을 설득했으나 때는 늦었고, 이미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콘스탄틴을 트라이어 (Trier, 지금 독일의 일부) 지방에서 파우스타를 끓는 물에 넣어 죽였다고 한다.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나무 십자가를 찾아 돌아온 것을 그린 그림. 이로서 헬레나는 성자로 간주된다.  

4. 성경 50권

콘스탄틴은 큰 아들과 아내를 죽이고 난 뒤에 마음이 많이 괴로왔는지, 어머니 헬레나에게 비용은 마음대로 쓰고 예루살렘에 가서 기독교의 유물을 찾으라고 어머니를 보냈다. 헬레나는 이 때 80대 노인이었다고 한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는 아리마대 요셉의 집 뜰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예수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고생 끝에 헬레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의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 바위를 파서 만든, 예수가 묻혔다는 무덤을 찾아 냈고, 예수가 매달렸다는 나무 십자가를 찾아 가지고 327년에 돌아왔다. 콘스탄틴은 그 무덤 자리에,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ure)를 세웠다.

서기 325년에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니케아 종교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신약의 편찬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 회의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homoousion)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파, 그리고 두 분이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homoiousion) 아리우스(Arius) 파가 대결되었으나,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리고 회의가 끝났다. 글자 한 자 차이로 (homo 와 homoi) 두 파가 종교 회의에서 싸웠다고도 볼 수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바티칸 박물관), 왼쪽에 콘스탄틴 대제가 어느 주교(아마도 유세비우스)와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 헬레나는 330년에 돌아가셨고, 331 년에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노플에 큰 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개축되어 오늘날의 아이아 소피아(Hagia Sophia, "Holy Wisdom")가 되었다. 같은 해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케자리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손으로 양피지에 쓴 성경 50부를 주문하였다. 이것은 막대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당시에 3백명이 넘는 서기관들이 성경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콘스탄틴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외에도, 여러 유명한 교회를 지었다. 이 50권을 여러 교회에 비치하려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이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어쨌든 신약에 무슨 글이 들어가야 하는가 교회들 사이에 합의가 없었으므로 당시에 신약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은 뒤에 오래 지나서, 서기 367년이 되어서야 아다나시우스가 오늘날 보는 신약의 목록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세례받는 콘스탄틴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틴은 자식을 잘못 죽여서 후회가 막심했던 듯하다.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노모를 예루살렘에 보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교회들을 짓고 거기에 비치하려고 신약의 편찬을 시작하였으니, 그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역사를 바꾼 사람 중에 하나이다. 신약의 편찬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337년에 세례를 받고 죽었다. 한 사람이 수고하고 많은 사람이 덕을 본 것이다.

콘스탄틴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신약은 언젠가 편찬되었을 터이지만, 몇 백년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콘스탄틴의 덕으로 서양 세계는 로마의 정치 및 사회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그의 힘을 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를 버리고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까지 비단길을 오가면서 중국인은 장사에만 치중하고 서양에서 정치, 종교, 사회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대신에 불교가 들어와 동양인에게 도덕을 가르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