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웅 부족이 언제 수메르를 떠났는가?

수메르인과 고조선인이 절대로 접촉한 적이 없다면 수메르어와 우리 말은 전혀 상관이 없어야 한다.  거꾸로, 수메르어와 고조선어가 상관이 있다면, 수메르인과 고조선인이 접촉한 적이 있다 것을 가리킨다 (contrapositive).
언제 수메르인과 고조선인이 접촉했는가 그 시기를 추정하기 전에, 수메르인의 역사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수메르인의 역사

수메르인의 역사는 간단히 일곱 기로 나눈다.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기원전 5000년에 등장하여 그리스-로마 이전의 서양 문화의 기초가 되었고, 기원전 1894년까지 계속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가) 우바이드기 (기원전 5000-4000년): 수메르의 도시 우르 근처에 우바이드에서 개발된 문화. 곡식을 심고 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대는 동기(銅期)였고, 수메르인은 바퀴를 사용했다. 이들은 한국어처럼 토씨를 활용하는 교착어를 썼다고 하며, 일설에 따르면 우랄 알타이 언어와 비슷했다고 한다.

단색 채도 (monochrome pottery), 우바이드 말기, 루브르 박물관.

중국 마자야오 (기원전 2200-2000년, 신석기) 채도. 2천년 앞선 우바이드기의 항아리처럼, 윗부분을 조금 넘어서 도료를 칠했다. 신석기 시대의 중국 채도가 서방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 우륵기(기원전 4000-3100년): 도시 국가가 발달하고 그림 글자가 처음으로 쓰인다.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의 지도.

초기의 그림글자가 쓰인 진흙판의 복사판, 우륵기 (3300-3100년), 대영 박물관. 원본은 이락 박물관에 있다.

그림 글자가 쓰인 진흙서판, 기원전 3100-3000년, 대영박물관. 맥주를 담은 술통이 첫째 줄에 보인다.

머리 앞의 삼각형(빵)은 ‘먹다’라는 동사.

우륵에서 발견된 궁전 기둥, 페르가몬 박물관 (Pergammon Museum, Berlin)

(다) 젬뎃 나스르기(Jemdet-Nasr period, 기원전 3100-2900년): 채도를 사용하였다. 추상적 설형문자가 개발된다. 가느다란 원통 형의 인장이 쓰였다.

송아지 석상, 젬뎃 나스르기.

젬뎃 나스르기의 설형문자. 5일 동안의 배급 품목, 군인이나 공직자에게 배급을 주었던 듯. 초기의 설형문자로 쓰여 있다. 도시를 세울 만큼 사회 조직이 잘 발달되었음을 가리킨다.

젬뎃 나스르기. 초기의 그림 문자.

(라)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2900 – 2334년): 이 시기에 수메르의 초기 도시 국가들, 곧 키시 (Kish), 우륵(Uruk), 우르(Ur)가 생겨났다. 초기 왕조 2기(기원전 2800-2600년)에 길자메시가 우륵의 왕이 된다. 3기(기원전 2600-2350년)에 종전의 그림 글자가 단순화되고 설형 문자가 자리를 잡는다.

우바이드에서 발견된 청동 송아지, 초기 왕조 3기, 기원전 2500년. 이 때 벌써 수메르는 청동기에 들어 섰다.

청금석과 금으로 된 목걸이, 초기 왕조 3기. (마) 아카드기(기원전 2334 -2218년) 북쪽 아카드(Akkad) 시의 셈족 임금 사르곤(Sargon)이 기원전 2334년에 온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아카드 제국을 만들었다.

사르곤 왕(기원전 2334-2279년)의 출생을 기록한 진흙서판. 대영 박물관

사르곤의 손자 나람 신(Naram Sin, 2254-2218년)의 승리 기념비의 파편, 보스톤 미술관.

(바) 구티기(Gutian period, 기원전 2218-2047년). 아카드 제국이 망한 뒤에 1백년 동안 암흑시대가 온다.

(사) 우르 제3왕조(기원전 2112-1940년) 수메르인이 잠시 동안 다시 부흥하나, 아모리 족(Amorites)이 종국에는 1894년에 바빌론 제국을 세운다.  

2. 환웅 부족이 언제 수메르를 떠났는가?

문법과 유사음 동의어의 빈도로 보아서 수메르어와 우리 말이 상관 관계가 있다면, 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접촉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수메르인과 선고조선인 (고조선이 생기기 이전의 곰 부족 사람), 백인종과 황인종이 서로 접촉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a) 선고조선인이 수메르까지 가든지, (b) 수메르인이 고조선까지 오든지 아니면, 아니면 (c) 언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서로 왕래를 자주 가지는 방법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한반도가 멀리 떨어져 있고 예전에 교통이 불편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셋째 가능성은 희박하다. 첫째 가능성도 희박한데, 수메르어에 영향을 주려면 많은 사람이 고조선을 떠나서 수메르에 갔어야 하는데, 당시에 곰 부족인은 그러한 경제력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번째 방법이 제일 가능성이 많다.

수메르에는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고, 단군신화에 나오듯,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메르인의 큰 집단 (3천 명)이 고조선 지역까지 왔다면, 고조선의 언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메르에서 누가 한반도 근처로 갔는가에 관한 기록은 수메르에도 동아시아에도 없다. 다만 단군신화에는 3천명이 신시에 왔다고 하니, 이러한 신화가 수메르인이 고조선 지역으로 왔다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따라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수메르에서 온 사람들을 환웅 부족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이 환웅 부족이 언제 수메르를 떠났을까?

우바이드기에는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한 시절이다. 우륵기에는 수메르인의 문화가 자리를 잡은 시기이며, 이 때 그림문자가 발달되고 우륵에서 도시가 발달되었다.

젬뎃 나스르기에는 한창 수메르인의 문화가 발달되는 시기였다. 채도가 발달되고 60진법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키시(Kish), 우르(Ur), 라가시(Lagash)의 도시국가들이 발달되고, 우륵(Uruk)에서는 길자메시(Gilgamesh)가 임금이 되었으며, 이 때가 수메르인의 전성시대라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셈족의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차츰차츰 밀려 들어왔고, 드디어 기원전 2334년에 사르곤(Sargon) 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세웠다. 아마도 셈 족이 반 정도 되어서 일상 생활에 아카드어가 함께 쓰인 것 같다. 이 때가 많은 수메르인이 나라를 잃고 상심하여 고향을 등질 적당한 시기였을 것이다. 적어도 수메르인의 일부는 이 때 고향을 등진 것 같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새로 자리잡은 셈 족과 섞여, 수메르어와 아카드어 모두를 널리 쓰게 되었다. 그래서 수메르어-아카드어의 비슷한 말 사전까지 출판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 수메르어가 사라지게 되었다.

수메르어-아카디아어의 비슷한 말 사전, 니느베, 기원전 1300-900년. 대영 박물관.

우르 제3 왕조 시대에 수메르어가 다시 부활하여 1백년 동안 수메르인이 살 만했으나, 그 후에 아모리 족속이 밀려 들어와 결국 1894년에 바빌론을 세웠다. 이 때가 또한 수메르인이 무리를 지어 고향을 떠날 때였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계속 버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르곤 왕이 수메르 지역을 점령했을 때, 나라를 잃은 서름으로 환웅과 3천 명이 수메르를 떠나서 조선 땅에 정착하였다면, 환웅 일파가 수메르를 떠난 시기는 기원전 2334년이고 이것은 대체로 단군신화에 따른 고조선의 시작 연대와 같다.

아모리 족속이 바빌론을 세웠을 때, 기원전 1900년 경에 떠났다면, 환웅 부족은 동방을 향하여 가다가, 내몽고의 랴오닝 지역에서 곰 부족을 만났을 수 있다. 기원전 2334년이든 1900년이든 대채로 이 기간은 한반도와 그 부근에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이다.

한반도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물론 가는 도중에 여기저기 쉬어 갈 수도 있으니 아라랏 산 같은 곳에서, 또는 우랄 산맥 밑이나 홍산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메르인이 이미 말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목적지만 분명하다면, 1년이 안 되어 한반도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 사람은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한다. 신라 사람도 또한 그렇다고 한다. 고조선 사람이 이동하고 한반도에 정착하던 때는 유목민에서 농사꾼으로 변하는 기간이었던 듯하다.

3.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왔다는 물증이 있는가?

이러한 심증은 수메르인이 고향을 떠날 동기만 설명한다. 과학적인 물증이 또한 필요하다. 수메르인과 고조선인의 풍습이나 문물이 같다면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왔다는 물증을 제공할 것이다.

우르의 군기(軍旗)의 전쟁 장면, 대영 박물관, 기원전 2600년 경.

우르 군기의 평화 장면.

이 우르 군기는 길자메시(Gilgamesh)가 우르에서 임금이었을 때에 지어진 왕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전쟁 장면의 맷 윗줄에는 군인들이 청동도끼를 들고 있다. 가운데 줄에 군인들은 청동 투구를 쓰고 청동 단추가 달린 갑옷을 입었다. 평화 장면의 셋째 줄에는 두 남자가 어깨에 지게를 걸치고 있다.

(가) 지게의 사용 지게는 한국 고유의 물건으로 생각되어 왔다. 지게는 대마도에도 전해져 그 섬사람들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우르 군기의 평화 장면 셋째 줄에는 두 남자가 등 뒤에 자루를 지고 있고, 또한 두 남자가 지게를 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 조선인이 쓰기 전에 수메르인이 먼저 지게를 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풍습을 곰 부족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다.

지게 모양을 살펴 보면, 두 개의 반듯한 나무 막대기를 세곳, 위, 아래, 그리고 중간에 연결해서 만들었다. 반듯한 지게 틀을 만들려면 망치는 물론 톱을 사용한 듯하다.

(나) 청동 병기의 사용 수메르인은 통나무 바퀴가 둘인 수레와 넷인 수레를 사용했다. 사람을 나르기 위하여 또 전시에, 통나무 바퀴가 넷 달린 전차가 쓰였으나 이것은 기동성이 적었다. 우르 군기의 전쟁 장면에는 이러한 4륜 전차가 적군을 밟고 넘어가는 것을 보여 준다.

통나무 바퀴가 둘 있거나 넷 있는 수레는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에서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교통 및 수송수단일 것이다. 로마인이 이탈리아 전역에 비아 아피아(Via Appia )를 깔아 놓은 뒤에 교통이 원할해지자, 송아지들이 끄는 수레를 이용하여 수많은 상인이 무역을 하느라고 이 길을 따라 갔고, 또한 기독교 신자들도 이 길을 따라서 지중해 여러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수메르인이 살던 당시의 도시 국가에는 이렇게 도로가 잘 발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평야에서 전투할 때는 이러한 전차가 쓰였을지 모르지만, 장거리 여행에, 길이 닦여 있지 않은 먼 곳으로 가는 데, 통나무 바퀴를 단 수레는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환웅이 3천 명을 거느리고 고조선 땅까지 갔다면, 수메르의 수레를 탄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갔을 것이다.

아카드 제국이 구티 족에게 기원전 2218년에 망했을 때, 아카드 사람이 조선까지 걸어 왔더라면, 지금 한국어에는 많은 셈족어 (유대인어, 아랍어 따위)의 단어나 문법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없다.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하고 아모리 족속이 바빌로니아를 기원전 1894년에 세운 뒤에 남아 있던 종족, 수메르인과 셈 족의 혼혈이 수메르를 떠나서 조선땅에 왔더라도, 지금 한국어에는 수메르어와 셈어의 혼합된 단어들이 남아 있을 터인데 우리 말에는 전혀 셈어의 흔적이 없다.

기원전 18세기가 되어서 힛 족속( Hittites)이 아나톨리아 (지금의 터기 지역)를 지배할 때바퀴살이 6개 달린 2륜 전차를 개발하여 전투에 많이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고조선 땅까지 가는 데는 수메르인의 통나무4륜 전차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수메르인의 청동기가 고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a) 바퀴나 전차는 고조선에 전해지지 않았다.

통나무 바퀴를 단 수메르의 수레나 전차는 고조선에 가져 온 기록이 없다. 단군신화에도 전혀 바퀴 이야기는 없다. 평평한 길이 발달되어 있지 않음으로 수레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b)수메르인의 청동검이 고조선의 청동검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단군신화에는 물론 청동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언급의 부재는 수메르인의 청동 문화가 고조선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우르 군기의 전쟁 장면에서 보이다시피, 기원전 2600년 경부터 (젯뎀 나스르기) 전문 직업 군인이 생겼다. 이 군인들은 청동으로 만든 갑옷 및 칼과 도끼를 든 것 같다. 14개의 도시 국가 중에서 큰 곳에서는 4, 5천명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파형 청동검은 수메르인의 청동검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청동 병기는 주조 과정을 거친 뒤에, 갈고 닦아야 하는, 노동 집약적 제조업이다. 무거운 청동 투구나 방패보다는 청동 단추가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용도였을 것이다. 거푸집을 이용해서 대량 생산할 수 있고, 군인의 몸을 완전히 보호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보호하고, 또한 갈고 닦으면 적군에게 위세를 떨치는 효과가 있다.

(c) 청동 단추가 먼저 수메르에서 쓰였고 나중에 고조선 지역에서도 쓰였다는 것은 수메르의 청동 단추가 고조선의 청동 단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청동 단추는 기원전 2천년 경부터 키르기스탄 유목민이 사용한 청동 거울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초기의 청동 거울은 단추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다.

(a) 기원전 2334년에 수메르인들이 차츰차츰 밀려 들어온 셈족의 수에 눌려 나라를 잃었고, 또한 1900년 경에 다시 세운 수메르 3 왕조도 전복되었다. 따라서, 상심한 수메르인들이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메소포타미아를 떠났다. 그러니 환웅 부족이 고조선 땅에 온 것은 기원전 2334년이나 1900년 경이었을 것이다.

(b) 두 언어의 문법의 유사성과 유사음 동의어가 많은 것은 고향을 떠난 수메르인의 일파가 고조선에 가서 정착했음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지게가 조선 고유의 풍습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수메르인 사이에서 지게를 쓴 것은 고조선인이 환웅부족에게서 지게 쓰는 것을 배웠다는, 한 가지 물증을 제시한다. 여인들이 머리에 물건을 이고 가는 것도 또한 수메르와 한국의 공통 관습이다. 물론 이것은 두 나라만 가지고 있는 풍습은 아닐지 모른다. 또한 앞으로 고고학적 자료가 더 필요하지만, 두 나라가 청동 단추를 사용한 것도 그러한 물증이 될 수 있다. 환웅이 가져온 천부인은 지게, 청동 단추/거울, 그리고 망치였을지 모른다. 이 세 가지가 우르 군기에 나타난다. 원시 부족 사회에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도구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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