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8 편, 무덤에 있던 시간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3년 4월 7일(금) – 9일(일)

예루살렘 교외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일요일 새벽 3시까지, 약 36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많이 제공할 수 없다. 예수는 죽은 뒤에 거의 1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유대인 권력자들은 게헤나의 노천 무덤 구덩이에 예수의 시체를 던지게 하려고 전에 계획했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을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니고데모를 데리고 빌라도에게 가서, 장사를 지내려고 예수의 시체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친구들이 시체를 소유하는 특권을 얻으려고 흔히 로마 당국에게 뇌물을 바쳤다. 요셉은 돈이 필요할 경우에 쓰려고 큰 돈을 마련하여 빌라도 앞으로 갔으나, 그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요청을 듣고서 빌라도는 요셉에게 시체 소유를 인가하는 명령서에 재빨리 서명했다.

1. 예수를 무덤에 안치하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골고다에 다다랐을 때, 산헤드린의 대표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요셉이 주의 시체를 가지려고 빌라도의 명령을 백부장에게 내밀었을 때, 유대인들은 시체를 가져가려고 소동을 피웠다. 백부장은 군인 넷을 옆으로 불렀다. 그들은 칼을 뽑아들고, 주의 몸 좌우에 버티고 섰다. 백부장은 다른 군인들에게 두 도둑을 버려두라고 명령했다.

질서를 다시 찾고 나서, 백부장은 빌라도의 허가증을 유대인들에게 읽어주고, 요셉에게 말했다: "이 시체는 네 것이니 좋은 대로 하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도록 나와 내 군인들은 대기하겠노라."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니고데모는 이 법을 알았고, 바위에서 깎아 새긴, 요셉의 새 가족 무덤에 예수를 묻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골고다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길 건너에 있었다.

아무도 이 무덤에 묻힌 적이 없었고, 그들은 주를 여기에 매장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4시 반쯤에, 예수의 장례 행렬이 골고다에서 길 건너 요셉의 무덤을 향하여 떠났다. 네 사람이 나르는 동안 그 시체는 리넨 시트에 둘둘 싸여 있었고, 갈릴리에서 온 충실한 여인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무덤까지 예수의 물질 몸을 진 사람들은 요셉ㆍ니고데모ㆍ요한, 그리고 로마인 백부장이었다.


성묘 교회의 벽화와 모자익. 백부장이 그림에 빠져 있다.

무덤은 가로ㆍ세로가 약 3미터 되는 방이었다. 유대인은 죽은 사람을 정말로 묻지는 않았고, 실제로 방부(防腐) 처리를 하였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몰약(沒藥)과 앨로를 잔뜩 가져왔고, 이제 이 용액으로 적신 붕대로 시체를 감았다. 방부 처리가 끝났을 때, 얼굴 둘레를 냅킨으로 동였고, 시체를 리넨 시트로 둘둘 감고, 엄숙하게 시체를 무덤의 선반에 두었다.


가버나움 가까이에 있는 팔복 교회의 벽화

백부장은 군인들에게 돌 문을 무덤 입구 앞으로 굴리는 일을 도우라고 신호했다. 군인들은 도둑들의 시체를 가지고 게헤나를 향하여 떠났다.

안식일이 막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장례는 성급하게 처리되었다.

여인들은 가까이 숨어 있었다. 이 여인들은 예수가 적절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안식일 동안 쉬었다가 일요일 아침에 주의 몸을 적절히 준비하려고 다시 돌아오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금요일에 무덤가에서 이렇게 머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 예수의 또 다른 이모 마르다, 세포리스의 레베카였다.

다윗 세베대와 아리마대 요셉을 제외하고 제자들 중에 아무도 그가 살아날 것을 믿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2. 무덤을 지키기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가 무덤에서 일어난다는 약속을 흘려들었다면, 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금요일 밤, 유월절 저녁 식사 뒤에, 유대인 지도자들의 한 무리가 가야바의 집에서 모였고, 주가 다시 살아난다는 주장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을 의논했다. 빌라도를 방문할 대표단을 지명하고 이 회의가 끝났다.

이 위원회의 대변인이 빌라도에게 말했다: “주여, 이 사기꾼 나사렛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나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흘이 지난 뒤까지, 그 무덤을 지키게 할 명령을 내려달라 요청하고자 하나이다. 그의 제자들이 와서 밤에 그를 훔치고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을까 걱정되나이다.”

빌라도: "너희에게 군인 10명의 경비대를 주겠노라. 너희는 가서 무덤을 안전히 지키라."

이들은 성전으로 돌아가서 자체 경비대에서 10명을 확보하고, 로마 군인 10명과 함께 요셉의 무덤으로 행진했다. 이들은 무덤 앞에 또 다른 돌을 굴려놓고서, 빌라도의 봉인을 이 돌들 위에, 그리고 그 둘레에 눌러놓았다.

3. 안식일에

이 안식일 내내, 제자와 사도들은 숨어 있었고, 온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때 로마 제국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거의 150만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토요일 밤에 요한 마가는 열한 사도를 아버지의 집으로 오라고 호출하였고, 마지막 만찬을 들던 그 위층 방에서 모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룻과 유다와 함께 베다니로 돌아갔다. 예수의 몸에 방부 처리를 더 하려고 향료를 준비했던 갈릴리 여인들은 아리마대 요셉의 집에서 머물렀다.

예수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쉬었다고 생각된 하루 반의 기간에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맡겼는지 모른다.

이 36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의 인간 지위에 관하여 확실치 않지만, 이렇게 설명하려고 한다.

1. 미가엘의 창조자 의식은 필사 지성에서 벗어났음이 틀림없다.

2. 예수의 생각 조절자는 이 기간에 땅에 계셨고, 집합한 하늘 무리들을 지시했다.

3. 예수의 영 실체가 아버지의 보호에 맡겨진 것이 틀림없다. 확실치 않지만, 이것이 부활한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4. 예수의 인간 의식은 이 36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관계된 여러 가지 사실이 있지만, 우리는 이를 해석할 능력이 없다.

첫째 저택 세계 부활실의 안뜰에는 "미가엘 기념관"이 있는데 이 비문을 지닌다: "유란시아에서 나사렛 예수가 필사자로서 이동한 것을 기념하여."

1백 명으로 이루어진 구원자별 최고 회의가, 가브리엘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유란시아에서 행정 회의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간에 미가엘과 이마누엘 사이에 적어도 한 통신문이 지나갔음을 우리는 안다.

이 기간에 예루셈에서 열린 행성 영주들의 체계 회의에서, 어떤 성격자가 칼리가스티아의 자리에 앉았다고 우리는 믿는다.

놀라시아의 별자리 아버지가 유란시아에 있었고, 이 시간에 미가엘의 지침을 받았다는 에덴시아 기록이 있다.

예수가 죽은 것으로 보이는 이 시간에, 예수의 인격이 전부 무의식에 빠져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4.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의미

예수는 인간으로서 민족의 죄를 대속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용서가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예수는 유란시아에서 육체를 입은 필사자의 일생을 한껏 살기를 바랐고, 죽음은 보통 삶의 일부요, 마지막 막(幕)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조상(아담)의 악행 때문에 한 필사자를 벌하는 것과 같은 상스러운 불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수가 땅에서 살기 전에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도 정당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주가 필사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지 않다.

동물적 성질은 물려받을지 모르지만, 죄는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는 꼭 이 한 세상의 종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우주 전체를 위하여 살다가 돌아가셨다.

예수를 희생하는 자, 몸값 치르는지, 죄값 치르는 자라 하는 것은 도저히 적당하지 않아도, 구원자라 언급하는 것은 옳다. 주는 구원 받는 길, 즉 살아남는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라는 관념, 예수가 가르친 개념을 너희가 깨달으면,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 어떤 대리자가 대신에 죽으려고 자청하지 않으면, 너희를 알맞게 벌받도록 처리하는 엄한 통치자라는 원시적 하나님 개념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신자의 으뜸가는 관심은 개인이 구원받으려는 이기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처럼 동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욕구이어야 한다.

진정한 신자는 앞날에 벌 받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에만 아랑곳한다.

하나님이 엄격한 응보를 내리는 군주라 하더라도 죄 지은 자 대신에 결백한 희생자로 바꿔치기하는 (바울의) 계획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구원은 실재하며, 두 가지 현실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사람이 형제라는 진실이다. 결국, "너희에게 빚진 자를 너희가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의 빚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것이 참말이다.

5. 십자가로부터 얻는 교훈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아들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은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에 핵심 진리가 된다.

신의 사랑은 다만 잘못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실제로 없애버린다.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는 자비로 베푸는 용서를 완전히 초월한다.

구원은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을 옳게 고친다.

사람들을 몸소 사랑하는 힘으로, 예수는 죄와 악의 위력을 깨뜨릴 수 있었다.

나사렛 예수는 필사자로 존재하는 벅찬 십자가에서 25년을 넘게 보냈다. 십자가에서 처형받은 것은 그의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었다.

사람이 사는 수백만의 세계에서, 수십조에 이르는 진화 인간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나서, 사심없이 목숨을 버리는 광경에 영감을 받고서 착실히 전진하였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하고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진리가 승리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린 최초의 복음 선생(스테반)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 때 말했다: "이 죄를 저희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소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기쁘게 버리는 것, 사람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는 광경은 다른 여러 세상에서 필사자들의 감정을 휘저었고, 최상으로 헌신하도록 천사들을 일깨웠다.

십자가는 기분 상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죄 지은 사람 대신에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최고의 헌신의 표시로서 우뚝 서 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는 예수를 바라볼 때, 생각 있는 남녀는 혹독한 어려움에 닥쳐도 도저히 불평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너희는 원시인이나 야만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라. 이들은 하나님이 엄밀하게 법대로 집행하는 무자비한 군주라고 여겼다. 사람의 아들의 죽음 속에서, 인간들에게 쏟는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을 보아라.

사람이 현세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 창조자가 모른다고 아무도 걱정할 수 없다.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과 아들의 끝없는 자비를 사람이 깨닫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