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술의 보고 트레차코프 미술관

 

전통에 따르면, 사도 안드레가 스키티아 지역과 발틱해 북쪽 해안을 따라 생긴 그리스 식민지를 방문했고, 장차 키에프 시가 설 자리에 도달하여 키에프가 큰 기독교 시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도 안드레는 러시아 정교의 창시자로 인정된다.

서기 863-869년에 성자 키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가 성경의 일부를 슬라브어로 처음으로 번역하여, 슬라브 족의 기독교화를 위하여 기반을 닦았다. 10세기 중반에 이르러 키에프 귀족들 사이에 기독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키에프의 올가 공주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 손자 블라디미르는 서기 988년에 세례를 받음으로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이어받고 정교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몽고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키에프가 정치적으로 약화되자, 주교 막시모스(Maximox)는 1299년에 블라디미르 시로 옮겨 갔고, 뒤이어 피터(Peter)가 1325년에 주거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피터 대제(1682-1725년)는 교회를 정부의 관할 하에 두었고, 모든 주교를 직접 임명했다.

1917년 2월에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교회는 더 이상 국가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있는 그림들 중에 러시아 역사에 관한 것들을 살펴본다.

 

 

크라스나야 플로샤디는 붉은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

  1. 폭군 이반
 

 

이반 4세는 1533년부터 1547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고, 짜(tsar)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썼다. 이반의 어머니 글린스카야가 5년 동안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지만, 이반이 8살 되던 해에 독살당했다.

 

며느리 엘레나가 속이 비치는 옷을 입었다고 때려 유산시키고, 아들이 화가 나서 아버지를 저주하자 이반 황제는 아들을 몹시 때렸다. 아들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그를 부등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 아들은 며칠 후 죽었다.

 

  2. 피터 대제
 

 

아들 알렉세이를 심문하는 피터 대제.

피터 대제는 1682년에 즉위하여 1725년까지 다스렸다. 법정은 아들을 모반죄로 사형을 언도했다. 매듭진 채찍을 25번 맞고 며칠 후에 다시 15대를 맞고 난 후, 이틀이 지나서 죽었다.

 

피터 대제의 대리석상

 

1686년에 멘쉬코프는 피터의 잡일 심부름꾼이었으나, 곧 피터 대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725년에 피터가 퇴위하고, 왕비 카테린 1세가 황제가 되자 그의 지지를 얻어,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카테린이 2년 후에 병이 들어 죽게 되자, 피터 대제의 손자, 피터 2세를 지지하여, 자기 딸을 그와 결혼시켰다. 피터 2세는 적들과 공모하여,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멘쉬코프를 시베리아로 내쫓았다. 이 그림은 말년에 그의 처지를 보여준다.

 

스트렐치(사격수)는 폭군 이반 시절에 (1545-50년) 창설된 친위대이다. 1698년에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스트렐치 2300명이 반란을 일으켜 피터 대제를 제거하고 소피아를 제위에 앉히려 했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 피터 대제는 반군 중에 57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추방했다고 한다. 다음 해에 1182명의 스트렐치가 처형되었고, 모스크바에 있던 친위대는 결국 해체되었다.

  3. 카테린 대제
 

 

1745년에 황태자 피터 3세와 결혼하여, 무능한 남편 대신에 섭정을 하였다. 사전에 군대의 지지를 얻고서, 1762년에 남편 피터 3세를 폐위시키고 여제로 등극하여 1796년까지 다스렸다.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손자는 아버지 파벨을 위하여 거절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르는 후일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격퇴한 황제이다.

  4. 러시아의 전쟁과 근대화 
 

 

프스코프 출신의 올가는 키에프 대공국(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의 왕자 이고르(912-945)와 결혼하였다. 이고르는 드레블리안 족속에게 조공을 강제하려 했으나, 이들은 반항하여 이고르를 죽였다. 아들이 3살 밖에 안 되어 올가가 섭정을 했고, 러시아를 기독교로 개종하려고 애썼다. 이 공로로 올가는 성자로 대우를 받는다.

 

전쟁의 극치, 베레쉬카긴.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티무르(재위: 1370-1405년)의 약탈 전쟁의 참상을 그렸다. 징기스칸의 자손인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사위를 자칭했다. 대외 원정을 되풀이하여,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를 침공하였고, 이란도 지배하에 두었다. 루시(옛 러시아) 제국을 침입하기도 했다.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404년에 티무르는 20만 대군으로 명나라를 격파하고 원나라의 땅을 다시 찾을 목적으로 원정을 개시했으나 갑자기 죽었다.

검은 돌로 된 그의 관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고 적혀 있었는데, 1941년 소련이 이 관을 열어 티무르가 다리에 장애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흘 후에 독일이 3백만의 군대로 러시아 침공(operation Babarossa)을 시작했다.

 

프스코프 공방전.

농노들이 건초를 만드는 광경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 3월 3일 (구력으로는 2월),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당분간 농민이 소작농을 하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로 인하여 농민은 자유를 얻었고, 다수의 공장 노동자들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그래도 빈곤이 계속되어, 후일에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이끄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러시아는 1837년에 처음으로 피터스부르크와 짜르스코예 셀로를 잇는 철로를 놓았다.

  5. 러시아인의 생활과 풍속
 

 

결혼식 장면, 주술사의 축복이 필요했던 듯.

 

러시아는 세계에서 3대 라이(호밀) 생산국이다.

 

러시아인의 춤

  

피터스부르크의 해안가

저녁 종소리

 

마슬레니짜(Farewell-to-Winter Festival)는 사순절 직전이고 그 주에는 정교회 신자들에게 고기는 금지되었어도 버터, 치즈, 달걀과 기타 낙농품을 먹을 수 있다. 이들은 이때 크리프와 팬 케이크를 즐겨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