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이콘화와 서양화

1. 서양화의 발달

서양화의 시작은 1- 3세기에 에집트의 파윰에서 발견된 미라 초상화(Fayum Funeral Portraits)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금들은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작은 부자들은 화가들한테 부탁하여, 미라를 담은 목관 표면에 초상화를 그려넣었다. 2천 년 전에 만든 에집트인의 초상화가 더러 남아 있다. 잘 보존된 밀랍화는 실물을 보듯 생동감 있는 사람 모습을 보여준다. 이 화가들은 초상화만 드렸고, 그 외에 다른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이 없었던 듯하다. 이들은 나무 관의 널빤지 위에, 뜨거운 밀랍에 섞은 물감으로 그렸다.
밀랍화의 한 가지 단점은 그릴 때 밀랍의 온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고,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습도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그림의 크기가 제한되었고, 완성된 후에 습도나 온도가 높아지면 밀랍이 미세하게 터져서, 그림이 뿌옇게 되는 (blooming) 문제가 생긴다. 밀랍화는 습도 뿐 아니라 추위도 잘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파윰의 초상화가들은 템페라 기법을 쓰기도 했다. 화학 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 안료(顔料, 주로 돌이나 흙 가루)를 달걀의 노른 자와 물을 섞어 이겨서 물감을 만들었고, 이것을 템페라(tempera)라고 한다. 화가의 취향에 따라 흰자를 섞기도 했다. 또한 안료가 독성이 있을 경우에 화가는 숨쉴 때 안료 가루를 들이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르조 바사리(Georgio Vasari)에 따르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년) 16 세기에 들어서 아마유(linseed oil)로 녹인 물감을 써서 나무 판자 위에 유화 그리는 법을 발명했다고 한다. 유화의 한 가지 단점은, 모나리자의 경우처럼, 세월이 지나면 물감 칠한 표면이 갈라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또한 유럽에서는 나무 판자보다 캔바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캔바스의 장점은 화폭을 아주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The Transfiguration, Raphael (목판화, 템페라, 1516-20년), Vatican Museum


이태리 화가들은 큰 교회의 벽에 회반죽을 칠하여 그림 바탕을 준비한 다음에 회벽을 화판으로 삼아 프레스코(벽화)를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도, 회벽 위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다.



Annunciation, 1472-5년

레오나르도(Leonardo)와 그의 선생 베로키오(Verrocchio)은 포플라 목판 위에, 수태 고지라는 그림을 같이 그렸다. 선생은 납이 들어간 페인트를 써서 마리아를 그렸고, 레오나르도에게 가브리엘을 그려 넣고 배경을 완성하라고 부탁했는데, 레오나르도는 납이 들어가지 않은 물감을 사용했다. X-레이로 이 그림을 사진 찍으면, (납이 들어가지 않은 페인트로 그린) 천사의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다.

마른 벽에 그림을 그리면 물감이 많이 들어간다. 프레스코화는 벽이 아직 젖었을 때 (fresco = fresh), 그리므로 칠하기 쉽지만, 하루에 그릴 만큼 젖은 회를 벽에 칠하고 회가 마르기 전에 물감을 칠해야 한다. 전날에 그린 그림 모서리의 회를 긁어 내고 다시 회를 칠하고 물감을 입혀야 한다. 천장의 그림은  비계 위에 평평한 자리를 만들고 누워서 그려야 되니까, 보통의 벽화보다 몇 배나 힘들다. 벽화의 수명은 몇백 년을 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그림도 여러 번 복원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캔바스가 발명되어, 평지에서 캔바스 위에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천장에 붙이게 되었고, 벽화는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서양화가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데는 교회의 영향력이 컸다. 서기 585년에 마콘 공회(Council of Macon)에서 십일조를 강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777년에 교회가 십일조 걷는 것을 샬러마니아 대제(Charlemagne the Great)가 공식화하였고,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교회의 경제력이 막강하게 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게 되었다. 재정 부담 때문에 면죄부를 발행한 것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책이 귀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던 시절에, 서양화는 기독교 신자들을 가르치고 기부금을 걷는 데 유용한 매체였다.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자 지식인과 화가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교회의 벽에 성화를 그릴 대가들을 모을 수 있었다. 처음에 화가들은 경제력이 있는 교회를 위하여 성화만 그렸으나, 그림 기술이 발달되자, 그리스 신화나 민족의 역사를 묘사하거나 인상파 화가들처럼, 예술 자체를 위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회는 서양화의 발달에 지대한 후원자 노릇을 했다.

2. 러시아의 이콘화


러시아는 국민 소득이 낮아서 오랫동안 보통 서민들의 가정에 성경이 없었다.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사제 혼자서 강단에 놓인 큰 성경을 펼쳐서 몇 구절 읽어 주고 신도들은 성경도 찬송가도 없이 예배를 본다. 찬송책이 없어도 신도들은 찬송을 다 외우고 있고, 피아노나 오르갠의 반주가 없어도 신도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찬송하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마치 러시아 군가를 부르듯, 한 목소리로 찬송한다.

공산 치하에서 박해를 받은 때문인지 러시아에는 전도 활동이 거의 없고, 신도들의 집에 대체로 성경이 없다.  자연히 평신도는 성경을 읽지 않고, 일요일에 신부가 읽어 주는 구절과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러시아는 피터 대제(1682-1725년)의 시절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피터 대제의 시절에도 성경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피터는 러시아를 근대화시키려고 애쓰고 키릴 문자를 간소화시켰다. 신약은 겨우 1820년에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이콘화는 무지한 서민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듯이 보인다.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러시아의 정교회는 경제력이 없어 유명한 화가들에게  신식의 그림을 부탁하지 못한 듯하다. 비잔틴 제국에서 유행한 이콘화의 전통을 따라서 러시아 교회는 이콘화를 선호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개발된 근대 화법에 등을 돌렸던 듯하다.

긴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이콘화는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야 될 내용을 설명한다.  기독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콘화의 시조는 누가 복음의 저자, 누가였다고 한다.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가 차츰차츰 일상 생활에 쓰이기 시작했고, 또한 라틴어로 예배를 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로마 제국은 476년에 붕괴했어도, 교회가 천년이 넘도록 라틴어로 예배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신도들의 대부분은 예배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콘화와 성화는 신도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성화의 목적이 성경 내용을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나, 기부금을 걷어야 했기 때문에, 교회는 황제와 기부자들이 성화 속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이콘화는 캔바스를 쓰지 않고 나무 판자 위에 그린다. 주로 쓰이는 나무는 포플라, 버드나무, 피나무였다. 그림 크기에 맞게 판자들을 엮고, 뒷면에는 이 판자들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가로로 된 버팀목을 여러 개 대야 한다.

나무 그림틀이 무겁기 때문에, 판자에 그린 그림들은 크기가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목판의 크기는 한 두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크기이다. 보통은 네모난 화판 모서리의 안쪽을 움푹하게 파서 그림틀 안쪽에 네모난 화판을 표시한다. 물론 그림틀에는 보통,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열심인 화가들은 그림틀로 배정된 여백에 그림을 연장하여 그리기도 한다.  목판에 물감이 부착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제소(gesso, 석고 가루)를 판자에 먼저 바른다. 접착제를 바른 천(파볼로카)을 목판에 붙여서 화폭을 만든다.
20세기 초에 전등이 발명되기까지, 어두운 성당에서 신자들이 촛불을 켜서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초의 그을음이 그림 표면에 누적되어 이콘화가 상하기도 하고 더럽게 보이기도 했다. 묵은 때를 벗기면, 이콘 바탕에 밝은 노란 색이나 금박이 드러나기도 한다.

유명한 러시아 이콘화들 중에서 앞에서 본 서양화 두 점과 같은 제목의 이콘화 두 점을 살펴 본다.

수태고지, 무명화가, Novgorod, 1130-40년.

Theophanes the Greek, 변모, 15세기 초, 모스크바.

이 두 그림은 같은 제목의 수많은 서양화보다 앞선다. 이태리의 대가들은 우수한 기술과 재료로 그림을 그렸지만, 이 두 그림은 이태리의 대가들에게 같은 구도로 그림을 그릴 영감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