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여자 테오도라(Theodora)

테오도라(Theodora, 서기 500년 경 – 548년)는 비잔틴 (Byzantine, 동로마) 제국의 황후, 황제 유스티아누스 (Justinian I) 1세의 부인이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여자였다고 평가된다. 테오도라는 시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싸이프러스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콘스탄티노플의 전차(戰車) 경주장 (hippodrome)에서, 녹색 팀을 위하여 곰을 훈련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테오도라는 언니 코미토(Komito)를 따라서 사창가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무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의 여배우는 몸파는 여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시리아인을 따라서 북아프리카로 가서 4년 동안 고생하고 돌아오는 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 디모데(Timothy III)를 만난 뒤에 테오도라는 일성론자가 되었다.

1.테오도라와 유스티니아누스의 결혼

일성론자(一性論者, miaphysites)는 예수의 몸 안에 신(神)과 인간이 한 성품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칼케도니아 종교회의, 바티칸 박물관

이와 반대로 양성론자(兩性論者, Chalcedonians)의 주장은 뜻이 알송달송한 칼케도니아 신조에 담겨 있는데, 대체로 예수가 신과 인간, 두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두 성품이 한 사람 안에, 한 바탕(hypostasis) 안에, 분리할 수 없이 붙어서 거하고 있었다는 이론이다. 칼케도니아 종교회의 (서기 451년)에서 양성론자의 이론이 채택되고 일성론자는 이단으로 몰렸다.

[주: 서기 451년에 칼케돈 공회가 있은 뒤에 네스토리우스 (Nestorius)는 예수의 신격과 인격, 두 분이 예수 안에 따로 존재했다는 二性論 (Nestorianism)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一性論 (monophysitism) 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 공회 뒤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합성론자와 멜카이트파(Melkites,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의 편, 나중에 그리스 정교가 된다)로 갈라졌다. Miaphysitism (one nature, 合性論, 예수가 동시에 신격과 인격을 가졌다는 이론) 을 주장했다. Dyophysitism(양성론)은 예수가 신격과 인격, 두 성품을 가졌다는 이론.]

테오도라는 522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예전의 일을 청산하고, 궁전 가까운 곳에서 털실 잦는 여인이 되었다. 미모와 재치 때문에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 (Justianus I) 눈에 뜨여, 황제가 테오도라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 때부터 내려온 로마법이 공직자가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금했으나 삼촌인 황제 유스틴 1세가 계급의 차별 없이 결혼을 허락하는 법을 전에 통과시켰다. 그런데도 양어머니 유피미아(Euphemia) 황후는 아마도 제국의 체신 때문인지 이 결혼에 반대했다. 그래서 결혼을 미루다가 서기 525년에 양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로마의 결혼 제한 법규를 고치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스무살이나 나이 어린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테오도라는 사람과 상황을 잘 판단하였고 유스티아누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비탈리(Vitale) 성당의 모자익, 가운데 관을 쓰고 있는 여인이 테오도라(Theodora)이다.  

2. 니카(Nika) 폭동
당시에는 전차 경주가 유행하였고, 청색ㆍ홍색ㆍ녹색ㆍ백색 팀으로 나뉘어져 전차 경주를 진행하였고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였다. 이 때에는 청색과 녹색팀이 유력했고, 유스티아누스는 청색 팀을 지지하였다. 경기 중에 사람들이 모인 것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선전이나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서기 532년에는 1월 13일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전차(戰車) 경주장에 참석하여 경주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군중은 황제에게 아침부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경주가 끝날 무렵에 청색! 녹색!하고 소리치던 군중은 니카 (nika! 이겨라/정복해라!)라는 외침으로 바뀌고 군중은 폭도로 변하여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궁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포위는 닷새나 계속되었는데, 폭도들은 불을 지르고 도시의 상당 부분을 태웠고, 아이아 소피아도 탔다고 한다. 그리고 폭도들은 히파티우스(Hypatius)를 새 황제로 세운다고 선포했다.

폭도를 다룰 수 없게 되자, 유스티아누스는 고관들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는 황제 자리를 내주고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도망가서 산다고 해도, 황후의 대접을 받지 않으면서 살고 싶지 않으니 여기서 차라리 죽겠소. 당신은 돈도 있고 배도 준비되었으니 원하면 가시오. 그러나 자주 옷이 시체 덮기에는 좋은 천이요. 나는 함께 도망가기 싫소. 나는 남아 있으리이다.” [여기서 자주색 옷은 황제, 황후가 입던 옷을 말한다.]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유스티아누스 황제, 바른 쪽에 십자가를 쥐고 있는 사람은 주교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두 사람 뒤에 있는 사람은 나르세스(Narses) 장군, 황제 왼쪽 자주색 천을 허리에 감은 사람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이다. 막시미아누스는 라베나 (Ravenna)의 산비탈레(Basilica di San Vitale) 성당을 지었다.

테오도라는 제국의 반을 나눠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담한 여인이었다. 테오도라의 말에 힘을 얻어 내시였던 나르세스(Narses)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 그리고 게르만 용병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있던 문두스(Mundus) 장군을 시켜 폭도를 진압했는데, 폭도 3만 5천 명이 죽었다고 한다. 폭동이 진압되자,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틴이 처음에 지었던 아이아 소피아 (Hagia Sophia)를 다시 크게 지었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상황을 정확하게 재빨리 판단하였다. 이러한 직감은 남자보다 여자가 나은 것 같다. 유스티아누스가 그 때 도망갔더라면, 히파티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것이고, 군대를 이용하여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죽였을 것이다. 며칠 더 목숨을 이어보았자, 처량한 도망자 신세였을 것이다. 네로도 이처럼 도망가다가 갈 데가 없어서 결국은 자살을 택하지 않았는가?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등용하여 잃었던 서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고 로마도 다시 정복하였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여, 그는 잠을 자지 않는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