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 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지은이: 중도자 위원회

1935년

나는 중도자의 우두머리와 기록 담당 멜기세덱의 후원을 받고서,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中道者)이다.

나는 안드레가 기록한 대로, 나사렛 예수의 일생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안드레는 자기가 기록한 이야기의 사본을 만들기를 꺼려했다.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예수가 올 때 세계의 조건

미가엘이 육신화했을 때, 세계는 창조 아들의 말씀의 전파를 위하여 최선의 조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이전의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서양과 근동에 퍼졌고, 유대인이 레반트 종족이니까, 유대인은 동양과 서양, 양쪽에 새 종교를 퍼뜨리기 위하여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를 관대한 정치로 다스림으로 조건이 더욱 좋아졌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고, 그리스어로 유대인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한편 로마 시민이었다.

그리스ㆍ로마 세계

유럽의 문명은 세 가지 영향을 받아 통일되었다: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2. 그리스 언어와 문화, 철학

3. 유대인의 종교·도덕적 가르침.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고,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중해 세계의 주요 도시가 좋은 도로로 연결되었으며,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다.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했어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소수(小數)의 상류 계급은 부유했으나, 대다수는 궁핍한 하층 계급이었다. 그 시절에는 중류 계급이 막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을 누렸고, 동서 양쪽과 널리 교역(交易)을 누렸다.


페르시아 병사. 로마 공화국과 파르티아(페르시아)의 전쟁: 기원전 51년에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공했으나 마크 앤토니의 노력으로 37년에 격퇴되었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 하로 들어왔다.

  2. 유대 민족
유대인

셈족은 유대인,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을 포함한다.

기억할 수도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카라반 길이 동양에서부터 이 지역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의 몇 항구에 이르렀고, 이 카라반의 반 이상이 나사렛이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팔레스타인은 동·서양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3대륙의 교차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이 유대 종교의 고향이요, 기독교가 태어난 곳이지만, 유대인은 바깥에 나가서 로마와 파르티아 국가에 흩어져 장사하고 있었다.


헤롯의 성전 모형

유대인과 로마 제국의 정책

로마 제국에는 그리스어와 문화가 지배했다. 로마는 도로를 만들고, 제국을 통일하여 안전한 여행을 보장했다.

유대인이 지중해 세계에 분산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하늘나라 복음이 퍼졌다.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이 유대인의 일신교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이 시절에 유대 민족은 로마의 치하에 있었어도 상당한 자치를 누렸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유대 왕국이 헤롯 왕을 통해서, 반 독립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을 지나가는 무역 및 여행 도로를 장악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레반트에서 로마를 대적할 나라가 생기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시리아와 에집트가 다투게 만들려고,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유대인은 그들이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나타나서 유대 민족을 구하기를 기다렸다.

헤롯 임금

헤롯은 로마 통치자들의 비위를 맞춤으로 유대 땅의 통치권을 얻었다. 헤롯이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전파하는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여러 외국에도 안전히 침투할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 아들 안티파스가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다. 헤롯은 세포리스를 비롯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에 더 가까웠다.


케자리아에 남은 전차 경기장(hippodrome) 유적


세포리스의 유적

  3. 이방인의 형편
1세기의 사회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높지 않았어도 평화가 지배하여, 예수가 오시기에 적당하였다. 서기 1세기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1. 귀족 계급

2. 상인 계층 → 이들은 거상, 무역상, 은행가였다.

3. 중류 계급 →막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체로 기독교회가 성장했다. 바리새인이 이 계층에 속했다.

4. 자유 노동자 계급→ 노예 노동과 경쟁하여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5. 노예 →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다. 돈을 벌면 노예도 자유를 살 수 있었고, 상인 축에도 들 수 있었다.

초대 기독교인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노예가 주축을 이루었다.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큰 사회 문제가 없었다.

여자는 팔레스타인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은 이방 세계보다 가족에게 더 헌신하였다.

  4. 이방인의 철학
(1) 쾌락주의자 그 시절에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이전의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파생된 것이다.

이들은 행복의 추구에 마음을 쏟았으나,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이들의 장점은 사람이 노력하면 현세에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대표자는 에피큐로스 (기원전 342-271)

(2) 금욕주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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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씨포스(기원전 281-208년). 아테네에 금욕주의파 학원을 설립하였다.

금욕주의는 상류층의 믿음이었다. 사람의 혼은 신성하지만, 몸은 악하다고 가르쳤다.

금욕주의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 가르쳤으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 사상은 철학으로 남았다.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자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

(3) 견유학파

견유학파 신조의 상당 부분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에서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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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스테네스 (기원전 450-370년). 첫 견유학파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안티스테네스의 제자,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뒤를 이어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견유학자 디오게네스

견유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이들은 철학을 퍼뜨려 민주화하고, 시장에서 "사람은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적극적 사고 방식)고 가르쳤다.

이들은 갈급한 민중이 후일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자는 지식이 허위라고 가르쳤고, 순전히 부정적인 철학이었다. 따라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러한 철학 사상은 종교에 가까웠지만, 견유파를 제외하고,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강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자에게 복음을 주지 않았다.

  5. 이방인의 종교
예수 시절의 서양 종교

이전의 시대에 종교는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했고, 그러한 종교는 개인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예수의 시절에 서양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1. 이교도 =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 따위. 그다지 심각한 종교는 아니었다.

2. 황제 숭배 = 황제의 신격화는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의 박해를 낳았다.

3. 점성술 = 이것은 바빌론의 사이비(似而非) 과학이었고, 20세기에도 사람은 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 신비종파 = 레반트에서 들어온 종교. 개인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신비 종파는 개인이 똑같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더 우수한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서민들을 준비시켰다.

신비교의 특징

민족 신앙은 하나님이 특정한 민족을 우대한다고 믿는 것인데, 신비종파는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다. 신비교는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 어떤 신화 같은 전설이 있다. 미트라교는 초대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경쟁했다.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3. 정교한 입회 예식과 성찬식이 있다.

4. "악에서 벗어나고, 사후에 살아남고, 슬픔과 노예 제도가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서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바울 종파의 우수성

개종할 가망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래도 기독교는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우수하다:

1. 바울은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2. 죄에서 구원받고, 올바른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했다.

3. 신비교는 신화에 기초를 두었지만, 기독교는 역사적인 인물,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에게 왔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이방인의 종교는 도덕을 강조하지 않지만,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6. 히브리 종교
히브리 신학 예수의 시절에 3 가지 언어가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다.

서민 – 아람어

사제와 랍비 – 히브리어

교육 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 – 그리스어.

히브리 사상의 동부ㆍ서부 학파 사이에 싸움이 있었으나 서양과 레반트는 서부 학파 (헬라파)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신약 성서도 그리스어로 적혀 있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은 바울이 세운 기독교 종파의 기초가 되었다. 빌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필로만큼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일곱 선생: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빌로ㆍ바울.

기독교 신학의 기초 바울의 원죄 교리는 미트라교에서 빌려왔고,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예수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없다.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에게 쓴 글이고,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엮었으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살던 시절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일시 악화되었으나, 박해는 오래 가지 않았고 유대인의 자유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흩어진 유대인은 250만에 이르렀고, 축제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동부(바빌로니아파)와 서부(헬라파) 유대인이 철학과 신학에 차이가 있어도, 모두가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인 것을 인정하고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히에로니무스(347년 경 – 420년)는 구약뿐 아니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라틴어로 옮겼다. 라틴어 성서를 불가타(Vulgata)라고 한다.

  7.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인이 부름받은 이유

예수가 살던 시절이 되자, 유대인은 그들의 기원ㆍ역사ㆍ운명에 대하여 고칠 수 없이 고정된 개념에 도달하였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언젠가 온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들은 모두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하여 유대인은 하늘나라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맡는 민족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의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고 사회의 규칙을 감히 조롱한 예수를 그들이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모세가 그들에게 불변의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하늘나라 사자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유대 종교가 전통으로 인하여 침체되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다른 민족(그리스인)이 부름받았다. 이들이 전한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이었다.

바울의 기독교

바울의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태어난 자국을 드러내지만,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플라톤, 필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

안티옥의 기독교 종파에 담긴 예수의 가르침은 다음과 섞이게 되었다.

1. 그리스인의 철학 (영생을 포함)

2.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쳐서 사람을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 교리

3. 유대교의 탄탄한 도덕성.

예수가 살던 시절에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에서 살던 민족들은 지리(地理)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대한여 원시 관념을 가졌고, 마술을 믿고 기적은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8. 이전에 쓴 기록
1. 마가 복음

가능한 한, 우리는 예수의 일생에 대한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을 참조하였고,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도 이용하였다. 신약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기원을 가졌다:

제일 먼저 쓰인, 가장 짧은 복음서.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이다. 마가는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으나, 로마 교회가 그런 이야기의 기록이 필요하다고 베드로가 격려하였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베드로가 죽은 직후에 쓰기 시작했고 68년에 완성되었다.

최초에 쓴 글에서 마지막 1/5이 없어졌고 다른 글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의 기록 + 안드레의 노트 + 마태의 노트 = 다른 복음들의 기초가 되었다.

2. 마태 복음

마태의 제자 이사돌이 썼는데, 마태가 기억한 것 뿐 아니라, 주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직후에 마태가 써놓았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마태의 기록은 아람어로 썼고, 이사돌은 그리스어로 썼다.

마태가 최초에 쓴 노트는 서기 40년에 편집되고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마지막 사본은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불이 나서 416년에 없어졌다.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직전에 피하여, 마태의 노트 사본을 펠라로 가져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복음을 썼다. 그는 마가의 노트(4/5)를 가지고 있었다.

3. 누가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누가는 의사였고, 바울이 그를 개종시켰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하여 누가는 바울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예수를 따르던 제자가 아니었다.) 또한 바울과 다른 사람들과 회견하여 이야기를 모았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바울이 죽은 후 (67년), 아카이아 지방에서 82년에 기록했다. 세 권의 책을 쓰려고 생각했으나, 둘째 책 사도행전을 마치기 전에 죽었다.

누가의 자료는:

(a) 마가의 기록 (4/5)
(b) 이사돌의 기록
(c) 세데스가 78년에 만든 기록.
(d) 안드레가 적었다고 하는 편집된 사본.

4. 요한 복음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3복음에서 누락된 것,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행한 일을 많이 적는다.

서기 101년에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기록을 부탁했다. 자기의 기억과 다른 3복음을 참조하여, 나단이 적었다. 이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인정하는 말씀
자료

가능한 한, 나는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인간은 초인간이 생각한 개념보다, 다른 인간의 머리에서 생긴 개념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인간의 자료가 부족할 때, (할 수 없이) 다음으로 중도자(中道者)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이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할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행성 바깥의 정보를 이용했다.

이 글을 쓸 때까지 땅에서 산, 2천 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을 수집하였다.

나는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중도자이며, 다른 중도자 11명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독창적인 이야기꾼이 아니라 편집자로서 일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