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 편, 인간이 체험하는 종교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종교는 각 사람의 진보를 촉진함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든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각자는 더욱 진보한다.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고역(苦役)을 귀중한 일로 만든다.

1. 종교적 성장

사람의 성숙도는 개인의 쾌락 대신에 더 고상한 의미를 찾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영적으로 침체되는 위험에 빠져 있다.

어휘가 늘어난다고 인품이 성장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상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성장을 가리킨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 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가장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히 사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은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모든 보통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가 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겪는 개인적 체험이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은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종교적 성장은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임을 가리킨다.

2. 영적 성장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 영적 세력과 연락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계속 맺는 데 달려 있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울러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의식하는 데 달려 있다.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리고 나서 가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선의 종교는 인격의 지성ㆍ상물질ㆍ영 수준에서, 즉 지성에 대하여,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신에 도달한 정도, 조절자와 조화된 정도를 측정한다.

자아를 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유일하게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은 신답고, 영적이고, 영원하다.

인간은 육체의 기쁨을 즐기고 인간적 사랑의 만족감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멸의 인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기초는 아니다.

인간의 곤경ㆍ이기심ㆍ잔인ㆍ미움ㆍ악의ㆍ질투로 혼이 시련받을 때, 너희는 마음 속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조절자의 요새가 있다는 확신으로 안심해도 좋다.

가장 소중했던 포부가 물거품이 되고 간절함 꿈이 깨어지는 동안에 차분히 구경할 수 있다.

3. 최상의 가치에 관한 여러 개념

종교는 정신의 지극한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시중드는 데 자아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하나님이란 낱말은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을 가리킨다.

혼자서만 누리는 이기적 기쁨은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가치 기준은 결코 정지(靜止)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가치 기준은 언제나 실재하면서도 잠재한다―현재 있는 것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연결하면 성장이 된다.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어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성장은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은 자란다.

사랑을 만들어내거나 돈으로 살 수 없고, 사랑은 자라야 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우주 기법이다.

4. 성장의 문제

새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로지 갈등 속에서 솟아난다.

종교적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아무런 성장이 있을 수 없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지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非靈)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지성은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사람은 건강과 위생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지만, 행복에 관해서 거의 깨우친 것이 없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낳는다.

네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면, 너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짜증나게 하는 이웃을 일단 이해하면, 너는 너그러워질 터이고, 너그러움은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어 사랑이 될 것이다.

너희의 원시 조상 한 사람을 상상해 보아라 ―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러운 뚱뚱이이며,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곤봉을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씩씩거린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사람의 신다운 위엄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을 확대해 보자. 활기가 생긴 이 인간 앞에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 두 그림에서 똑같다.

오직 이 둘째 스케치에서 너희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한 사람 더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잘 번진다. 진정하고 사심 없는 사랑이라야, 참으로 전염된다.

5. 감화와 신비주의

세상에는 길 잃은 혼(사람)이 가득하다.

종교적 권한에 복종하는 대신에 어떻게 생활 철학을 세우는가 배운 사람들이 너무 적다.

(강의 바닥이 강은 아니지만, 강 바닥을 무시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통하여 사람이 성장하므로, 이 경로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종교적 성장의 발걸음은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안정된 길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빠진 처지로부터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이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바울처럼 위기에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 많은 신자가 갑작스러운 갑화 없이 영적 진보를 겪었다.

종교적 감화와 연결된 현상의 대부분은 심리적 성질이 있지만, 영적 체험이 이따금 일어나기도 한다.

상의식 수준은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지대이다. 한 가지 큰 위험은 놀라운 꿈이나 환상과 함께, 신비스러운 체험을 신이 인간과 접촉하는 것이라 잘못 여기는 것이다.

생각 조절자와 접촉하는 더 좋은 방법은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리라.

지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啓示)요,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종교적 백일몽에 잠기는 습관은 현실 도피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격이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황홀경 같은 상태를 종교적 체험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이보다 건전한 태도는 신을 예배하고 감사드리는 기도에 있다.

육체의 피로, 금식, 성욕 충동 따위가 신비스런 상태를 촉진한다.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결코 그런 방법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6. 종교적 생활의 표시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신자가 자신과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성실한 신자는 초인간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의식한다.

초인간적 이상을 달성하려는 노력의 특징은 참을성ㆍ인내심ㆍ불굴ㆍ관대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요, 봉사하는 인생이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존재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종교 생활의 놀라운 표시 중의 하나는 숭고한 평안이니,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이다.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되어 있다.

승리하는 영광을 깨닫고 보장받는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최상위의 실체를 깨달은 신자의 의식 속에 거한다.

계시 종교는 진정할 뿐 아니라 우수하다. 계시를 받아 영적 시력이 확대되면, 사랑과 헌신은 새 수준에 이른다.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차이점은 새 품질의 신다운 지혜이다. 이 지혜가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더해진다.

7. 최고의 종교 생활

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른 동안에 얻은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이다.

어떤 사람(빌라도)은 예수를 고발하즌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그의 강건한 인품을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리를 가르친 그대로 예수는 진리를 실천하였다.

그의 세대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런 진리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분별이 있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비겁하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했으니, 인품이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에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모든 민족에게 그의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일렀다.

그는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실망에 면역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

때때로 슬픔의 잔을 깊숙히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다.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