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 편,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서양에 미친 영향

 

멜기세덱의 가르침은 주로 에집트를 거쳐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철저하게 헬라화되고 나중에 기독교화된 뒤에 서양 철학에 담기게 되었다.

서양 세계의 이상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후일에 그 종교 철학은 예수의 종교 철학이 되었으며,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결국 기독교 교회를 낳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렘의 가르침을 유지한 자들 중에서 견유학파를 꼽아야 한다.

서양에서 허다한 전투에서 싸웠던 유대인 용병들이 유럽에서 살렘 교리의 상당 부분을 퍼뜨렸다.

그리스 철학, 유대 신학, 기독교의 윤리에서 기본 신조는 더 이전에 있었던 멜기세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1. 그리스인 사이에 남은 살렘 종교

살렘 선교사들이 임명받을 때 한 서약을 엄격히 풀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인 사이에서 큰 종교적 집단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마키벤타가 지워준 이 서약은 예배하는 조직을 금하였고, 각 선생에게 결코 사제로서 활동하지 말고, 돈을 받지 말고, 오직 먹을 것과 옷과 잠자리를 받는다는 약속을 강요하였다.

살렘 선생들의 초기 영향은 아리아인의 침공을 받아 거의 사라졌다. 이 헬라인 침입자들은 사람 모습을 닮은 하나님 개념을 가져왔다.

이 새 종교는 헬라인 종파에 일부 기초를 두었지만, 더 오래 전에 그리스에 살던 자들의 신화를 함께 가졌다.

헬라 시대 그리스인은 자기네 인신(人神) 제우스를 이들에게 강제하였고, 그는 이미 그리스의 하급 신들의 만신전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결과로 올림푸스 산의 태평한 신들을 믿는 관념이 즉시 개발되었다. 그리스인은 이 신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이 신들을 모시거나 숭배했다고 할 수 없다.

헬라인은 살렘 선생들의 반(反)사제 신조를 지켜서 그리스에서는 사제가 생기지 않았고, 신들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예술의 일이 되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사람 모습을 한 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인의 도덕ㆍ윤리ㆍ철학은 이내 신 개념을 훨씬 넘어서 진보했고,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의 이러한 불균형은 인도에서 입증되었다시피, 그리스에 위험했다.

2. 그리스의 철학 사상

피상적 종교는 신봉자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채워줄 사제가 없을 때 오래 버틸 수 없다.

올림푸스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신자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도 않았다. 따라서 멸망할 운명이었다.

1천 년 안에 이 종교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 종교가 없이 지냈다. 이것이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이었다.

위로받으려고 종교를 찾지 않았지만, 철학과 형이상학 속에서 혼의 위안을 찾으려 했다.

엄밀하게 사고함으로 그리스인은 평안을 얻으려 했지만, 철저히 실패했다.

거의 모든 철학자가 살렘 교리의 배경에 허술히 의지했는데도, 그들은 온갖 종교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솔직하게 일신교를 지지했다고 할 수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보통 사람에게 너무나 범신적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기계론자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것은 미덕이요, 남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낫다, 신들은 선하다고 가르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사제와 성서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미학이 종교와 도덕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에는 사제와 "신성한 기록"이 거의 없었고,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방하였으나, 그들의 종교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스에서 신앙은 생각에 종속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생각은 신앙에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의 장점은 히브리인의 도덕과 그리스인의 사상으로부터 많이 빌려온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적 교리는 너무 구체화되어서 성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리스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 되었고, 하나님 개념은 비성격 무한자와 다르지 않았다.

이 시절에 보통 사람들은 추상적 신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다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기도를 듣고 친히 상대하는 하나님과 구원의 약속을 몹시 바랐다.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 유행했고, 디오니수스의 자연 숭배가 번성했다.


엘레우시스 신

오르페우스 단체는 도덕을 중시하고 구원을 준다는 약속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디오니수스


오르페우스

종교는 철학의 지지 없이 오래 견디어 왔지만, 어떤 철학도 얼마큼 종교 편에 서지 않고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3. 멜기세덱의 가르침이 로마에 미친 영향

라틴 족속이 후일에 가졌던 종교는 그리스인의 지적 체계나 다른 영적 종교보다 정치적 준수에 가까왔다.

기원전 6세기에 너무 적은 수의 살렘 선교사들이 이탈리아에 침투했고, 에투루리아 사제의 영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에투루리아 무덤의 벽화

라틴 부족들의 종교는 그리스인의 종교처럼 시시하거나 돈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히브리인의 종교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그리스로부터 널리 문화를 도입하였고, 올림푸스 산의 신들은 대부분 라틴 부족의 만진전으로 옮겨졌다.

제우스는 주피터,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었고, 올림푸스 산의 많은 신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라틴 종족들은 성전ㆍ제단ㆍ성소(聖所)를 유지했고, 위기에 신탁을 묻곤 했다. 영웅들의 뼈, 나중에는 기독교 성자들의 뼈를 보존했다.

형식적이고 감동이 없는 준종교적 애국심은 멸망할 운명을 가졌다.

태어나는 로마 국가는 정치적으로 정복자가 되었지만, 에집트ㆍ그리스ㆍ레반트의 종파ㆍ의식ㆍ신비ㆍ신 개념들에게 정복되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국가 종교를 받드는 어느 사제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최종의 신 교리를 퍼뜨리려고 살렘 선생들이 전에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황제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사제로 행동하도록 임명했다.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이 종교는 번성했고,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에서 두루 신봉되었다.


아우구스투스

견유학파는 살렘 신자 무리의 잔재였고, 로마인들에게 종교 의식을 버리고 멜기세덱의 예배 형태로 돌아가라고 훈계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견유학파를 물리쳤다.

4. 신비교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시 가족 종교와 국가 종교를 잃어버렸고, 그리스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집트와 레반트에서 온 신비교에 눈을 돌렸다.

가장 유행하게 된 신비교는 다음과 같다:

1. 쿠벨레와 아들 아티스를 믿는 프리지아인의 종파.
2. 오시리스와 그 어머니 이시스를 믿는 에집트인의 종파.
3. 인류의 구원자인 미트라를 숭배하는 이란인의 종파.

프리지아인의 예식은 품위가 없었고, 가장 거룩한 날은 검은 금요일, "피의 날"이었는데, 이것은 아티스가 죽은 것을 기념했다.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의식은 프리지아인의 제사보다 세련되었다.

에집트인의 의식은 나일 강 신의 전설에 근거를 두었고, 식물이 겨울에 죽고 봄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관찰한 데서 유래하였다.

5. 미트라 종파

프리지아와 에집트의 신비교들은 결국 미트라 종파에 굴복하였다.

미트라교는 레반트에서 모집한 로마 군단의 선전을 통해서 로마 제국에 퍼졌다.

미트라 종파는 이란에서 생겨났다. 미트라교가 로마에 이를 때가 되자,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상당히 흡수하여 개선되었다. 주로 미트라 종파를 통해서 조로아스터교는 나중에 기독교에 영햐을 미쳤다.

태양 신, 솔 인빅투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아우라 마즈다 신 개념이 퇴화한 것이다.

이 종파의 신자들은 동굴과 기타 비밀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찬송을 부르고, 희생으로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고 피를 마셨다.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렸고, 주마다 태양 신의 날에 특별 예식이 있고, 해마다 미트라 축제, 12월 25일에 가장 공들인 행사가 있었다.

성찬을 먹는 것은 영생을 보장했고, 세례받지 않은 자는 모두, 미트라가 돌아올 때 절멸되었다. 남자는 죽으면 미트라의 앞에서 재판을 받고, 세상이 끝날 때 죽은 자는 모두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처음에 이것은 남자만을 위한 종교였고, 나중에는 신자의 아내와 딸들이 큰 어머니의 성전에 들어갔는데, 이 성전은 미트라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6. 미트라교와 기독교

여러 신비교와 기독교가 오기 전에, 개인적 종교는 북 아프리카와 유럽의 나라에서 독립된 제도가 되지 않았다.
종교는 가족, 도시 국가, 제국의 일거리였다.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에게는 사제 계급도 "신성한 책"도 없었다.

제도화는 종교의 영적 질을 떨어뜨린 것이 참말이지만, 어떤 종교도 제도적 조직의 도움 없이, 아직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미트라교와 기독교가 경쟁하던 시절까지, 서양의 종교는 시들고 있었다.
두 종교의 교회는 겉모습과 의식이 무척 비슷했다.

예배 장소의 대부분은 땅 밑에 있었고, 두 종교의 제단 배경은 구세주가 고통받는 것을 다양하게 그렸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손가락을 거룩한 물에 담그는 것이 미트라교 신자들의 관습이었다. 어느 구역에는 한때 두 종교에 속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에 이 관습을 들여왔다.
두 종교가 세례를 주었고, 빵과 포도주로 된 성찬을 먹었다.

한 가지 차이점은, 미트라교가 군국주의를 북돋고 기독교는 지나치게 평화적인 것이다.

여자들이 기독교회에서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은 것이 기독교가 미트라교를 이기게 된 주요한 요인이다.

결국, 명칭으로는 기독교 신앙이 서양을 지배했다.

7. 기독교

창조 아들은 성난 하나님을 화해시키려고 육신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도록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기원과 전파를 다루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 아니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 갈릴리 사람의 추종자들이 기독교를 레반트와 서양에 두루 퍼뜨렸고, 이들의 선교 열정은 불교 신도, 셋 족속, 살렘 선교사들의 열심과 맞먹었다.

기독교는 다음 요소가 복합되어 생겨났다.

1. 멜기세덱의 가르침.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모든 종교에 기본 요소이다.
2. 히브리인의 도덕ㆍ윤리ㆍ신학의 체계, 그리고 섭리와 최고의 야웨를 믿는 신앙.
3. 선과 악이 싸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개념. 이것은 이미 유대교와 미트라교에 자국을 남겼다.
4. 미트라교와 큰 어머니 숭배. 미트라가 땅에 온 것을, 천사들의 통지를 받은 몇 목자들이 구경했다고 생각되었다.
5. 요셉의 아들이 땅에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
6. 바울의 개인적 관점. 바울은 그가 쓴 편지들을 후일의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길 것이라 꿈도 꾸지 않았다. 후세에 이어받은 사람들의 잘못을 그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7. 헬라 민족들의 철학적 생각. 그리스인의 철학은 기독교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예수의 최초의 가르침은 서양에 파고들자 서양화되었고, 모든 민족에게 호소하는 잠재성을 잃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백인종의 사회ㆍ경제ㆍ정치 관습에 잘 적응된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다.

기독교는 주가 친히 가르친 복음, 하나님이 아버지요,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을 대체로 잊어 버렸다.

멜기세덱이 유란시아에 찾아온 지 거의 4천 년이 된다.

마키벤타는 이 특별 수여의 목적을 이루었다. 미가엘이 땅에 나타나려고 준비했을 때, 하나님 개념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존재했다.

저자: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