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동산 무덤 (Garden Tomb)

참 십자가의 한 조각을 성마가 성당에 모시는 행렬. 2013년 4월

1. 나무 십자가와 성묘교회의 자리

서기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아들의 청탁을 받고서 일행을 거느리고 예수의 유물이 무엇이 남은 것이 없을까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의 주교(bishop) 마카리우스(Macarius)의 도움을 받았다. 예수가 돌아가신지 거의 3백년이 되었으므로 예수의 무덤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여기저기 뒤지다가 어느 날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을 하나 발견했고, 거기서 또한 나무로 된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이 십자가의 일부는 헬레나가 가져가고 일부는 마카리우스에게 맡겨서 이것은 성묘교회에 소장되어 있다. 헬레나는 이와 함께 그 십자가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못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왔다.

콘스탄틴은 이 못 하나를 신의 보호의 상징으로 황제의 투구에, 또 하나는 말 고삐에 묶어 두었다. 나무로 된 이 “참 십자가”의 일부는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 있고, 일부는 콘스탄티노플에 (지금은 이스탄불) 있었다. 이 참 십자가 조각들은 후일에 다시 잘게 나뉘어 유럽의 유명한 여러 교회를 세우는 데 쓰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1204년에 4차 십자군 전쟁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에 십자군은 이것을 가져다가 베니스의 성 마가성당에 두었다고 한다. 여러 성당에 소장되어 있는 참 십자가 조각들의 무게를 다 더하면, 사람이 겨우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라, 배를 하나 가득 채울 정도라 한다. 게다가 이 중에 상당수는 올리브 나무이고, 이것은 십자가 만들기에는 부적당한 나무이다. 나무가 모자랐다면 십자가를 만드느라고 큰 올리브 나무를 썼을 지도 모른다.  

2. 유대인의 1차 독립 전쟁과 십자가 처형

유대인과 로마인의 1차 전쟁은 (First Jewish Revolt)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오래 끈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시리아를 다스리던 세스티우스 갤루스 (Cestius Gallus) 총독이 시리아에서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케자리아와 자파(Jaffa, 지금의 텔 아비브)까지 진출하여 8천명 이상의 반군을 죽였으나, 시몬 바 교라(Simon bar Giora)와 교전하여 로마 군병 500명을 잃었다. 베스 호론(Beth Horon) 전투에서 매복을 당하여, 다시 6천 명이나 잃고 도망친 뒤에, 그도 목숨을 잃었다.

이 패전은 로마에 큰 충격이었다. 네로 황제는 4개 군단(legion)이나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주어 유대인의 반란을 정벌하라고 임명하였다. 알렌산드리아에서 아들 티투스가 합세하여 그의 군대는 6만 명으로 늘어났다. 67년 말이 되자 베스파시안은 갈릴리 지방을 장악하였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Josephus)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갈릴리의 지휘관이었으나 요드팟(Yodfat, Jotapata)이 포위되었을 때 모두 자살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 그는 나중에 티투스의 고문이 되었으나 유대인들에게는 대체로 배반자의 취급을 받았다.

서기 68년에는 상원이 네로를 국민의 적으로 몰았고, 네로는 도망하다가 할 수 없이 자살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중도에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로마로 향하였고, 대신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할 책임을 맡겼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당시에 성의 인구를 110만 정도로 보았고, 로마의 상원이자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당시에 성 안의 인구가 60만이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티투스의 고문이 된 요세푸스가 유대인에게 항복하라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유대의 반군은 배반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쉽게 항복할 기색이 없었고, 그렇다고 직접 성을 공격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티투스는 작전을 바꾸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70년 4월 14일, 유월절) 5월 말이 되어 성 바깥의 둘째 벽을 돌파한 뒤에, 티투스는 포위를 풀고 성 바깥에서 로마 군대가 얼마나 많은가 보여 주려고 이들에게 봉급을 주는 시위를 나흘 동안 벌였으나, 여전히 반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6월 1일에 로마의 군대는 참호를 파고 성벽만큼 높이 흙으로 둑을 쌓기 시작했다. 사흘 안에 예루살렘 성 전체가 8킬로미터나 되는 나무로 방책(防柵)으로 둘러 싸였고, 성에서 16킬로미터 안에 있는 나무는 다 베었다고 한다. 요세푸스는 반군을 설득하느라고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자기 어머니와 아내가 성안에 있다, 우수한 로마 군대에 저항하는 것은 쓸모 없다고 설득했으나 반군은 끄덕하지 않았다.

안토니아 요새가 성전을 내려다 보므로 티투스는 여기에 치중하여 그 앞에만 둑을 쌓기 시작했다. 성 안에는 방어하는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이나 먹고 살 수 있는 마른 식량을 쌓아 놓았는데, 열심당(Zealots)의 시카리(sicarii) 일파가 휴전을 협상하려는 일파의 주장을 묵살하려고 이렇게 쌓아놓은 식량을 많이 태웠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거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금전을 삼키고 성을 달아나는 사람들이 늘어 나서 어떤 날에는 2천 명이나 잡아서 배를 갈랐다고 한다. 라자루스라는 도망병 하나가 5월 1일부터 7월 20일 사이에 성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11만 5천이나 된다고 티투스에게 보고하였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이 110 만명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대부분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성안에 있던 요세푸스의 부모와 아내도 죽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바른 쪽에 안토니아 요새와 성전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다. 대영 박물관.

옛 예루살렘 성벽의 윤곽을 보여주는 지도.

이전에 예수의 재판이 벌어졌던 빌라도의 관정은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안토니아 요새 안에 있었다. 이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처음에 돌파되었다. (7월 24일) 티투스는 아직도 성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참모진과 의논하였고, 될 수 있으면 성전을 보존하려고 애썼다.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8월 말에 함락되었다. 티투스가 명령을 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마 군대가 성전에 불을 질렀다. 9월 26일에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지 다섯 달 만에 완전히 정복하였다.

로마 군대가 성전에서 얼마나 금을 많이 가져갔는지, 시리아의 금값이 반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사제들이 서민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했다면, 그렇게 많은 금이 성전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결국 티투스는 예루살렘 서쪽의 담을 제외하고 성전을 다 부수라고 명령을 내렸다.

베스파시안의 동전 세스테시우스, “유대를 정복했다” (Judea Capta)라고 써 있다.

티투스의 개선문 티투스는 이 승리를 기념하려고 성전 금고를 털어 이 전투를 기념하는 동전을 찍었고, 포로를 97,000명 잡아 갔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로마의 콜로세움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 건물을 짓는 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1천명 정도 되는 잔군이 마사다에 후퇴하여 몇 년 더 버티었으나, 결국은 서기 74년 봄에 모두 자살하였다.

3. 성묘교회 자리가 정말로 예수의 무덤인가?

몇 달 포위 당하여 성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먹을 것을 얻으려고 군병과 시민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하루에 5백 명이나 이렇게 사로잡혔고, 어떤 날은 그보다 더 많이 잡혔다. 이들 중에 더러는 먹을 것을 너무 받아 먹어 죽었다고 한다. 로마 병사들을 키드론 골짜기에 매복시켰다가 먹을 것을 구하려고 나온 자들을 이렇게 사로잡았고, 이들을 고문하고 채찍질한 뒤에, 성의 주민이 잘 볼 수 있도록, 성 주위에 쌓아 놓은 흙 벽위에, 십자가에 포로들을 못박아 늘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불쌍하기는 해도 티투스는 이들을 놓아 보낼 수도 없고, 수용할 자리도 없어서 병사들이 이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버려 두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고 빨리 반란군이 항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잡힌 포로의 수가 너무 많아 십자가를 세울 자리가 부족했고, 사람을 매달 십자가도 부족했다 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16킬로미터 반경에 있던 나무란 나무는 다 베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십자가에 못박힌 수는 수천, 아니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마카리우스와 헬레나가 이 많은 십자가 중에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를 찾을 수 있었을까? 거의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 하나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에는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서기 70년까지는 예루살렘의 성 바깥에, 이러한 무덤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마카리우스의 도움으로 어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과 나무 십자가와 못 두 개를 찾아 낸 뒤에 헬레나는 그 곳이 예수의 무덤이라고 정했다. 마카리우스도 헬레나도 고고학자가 아니고 고증도 없었으니, 이것은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헬레나는 현명하게도 이렇게 정했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돈도 많이 쓰고 로마에 빈 손으로 돌아갈 형편이 아니었을 터이고, 누구 하나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감지덕지한 콘스탄틴은 마카리우스에게 그 자리에 성묘교회를 지으라고 명했다.

근래에 들어와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자리가 과연 예수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인가에 대하여 시비가 일어나고 있다.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 장소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둘째로, 예수의 무덤은 성 바깥에 있어야 할 터인데, 성묘교회의 자리는 옛 성벽 안에 있다. 셋째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와 그의 무덤이 한 교회 안에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시체를 내린 뒤에 바로 코 앞에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3백년 묵은 나무가 생생하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이러한 유물은 초기 신자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4. 동산 무덤이 진짜 예수의 무덤인가?
 

 

다마스커스 성문

1883년에 영국의 고든(Gordon) 장군은 북쪽의 다마스커스(Damascus) 성문 바깥에 해골 같이 생긴 지형과 그 근처에 동산과 무덤을 발견하고, 이것이 아마도 예수의 무덤일 것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9장에는 예수가 묻힌 곳에 동산이 있었다고 했는데, 과연 이 자리에는 동산이 있다. 이 자리가 성 바깥에 있으니, 성묘교회보다는 동산 무덤이 진짜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고든 장군이 이 언덕이 해골처럼 생겼다고 주장했다.

동산 무덤

무덤 안 모습. 이 벽감(우묵한 곳)에 시체를 옆으로 안치하였다.

구르는 돌. 예전에는 이보다 더 큰 돌이 무덤 옆에 있었다.

무덤 앞에 있는 홈. 예전에는 구르는 돌이(rolling stone) 이 홈에 놓여 있어, 사람이 굴려서 무덤의 문을 막고 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을 여기에 굴려 놓으면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빠진다는 것이다. 홈의 바닥이 직으로 파여 있지 않고 둥그스럼하게 파여 있어 구르는 돌이 서 있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홈에 맞도록 구르는 돌을 잘 만들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이 무덤은 기원전 7-8 세기에 쓰이던 종류의 무덤이었고, 홈은 11세기의 십자군이 말과 당나귀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쓰였다고 한다.

성묘교회나 동산 무덤이나 어느 쪽도 예수가 묻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예수의 유물을 찾아서, 병을 고치려고, 또는 신비의 힘을 얻으려 애쓰는 것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동산 무덤은 당시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확하게 어느 지리적 위치에서 예수가 돌아가셨는가 하는 과학적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성묘교회도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서 영적으로 감화를 받고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