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의 찬란한 청동기(靑銅器), 1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청동문화가 처음으로 (기원전 3300년경) 발달된 듯하지만, 아시아에서 청동 문화를 메소포타미아에서 빌려 왔는지 아니면 따로 개발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몇 천년 전에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방에서 살다가 차츰차츰 동쪽으로 이동하여, 황하와 양자강 그리고 조선 반도에 정착하였으니, 메소포타미아의 청동 문화가 중국에 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다.

빌려왔든 독자적으로 개발했든, 중국인은 청동 문화를 최고로 발달시켰다. 한민족은 좋든 싫든 한반도에 정착한 이유로, 중국인에게서 피해도 보고 문화적으로 덕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고조선 사람이 전혀 중국의 청동기를 빌려온 흔적이 없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기껏해야 비파형 또는 세형 청동검이요, 청동 단추이며, 상 나라에서 흔하게 쓰였던 술잔이나 식기(食器) 따위도 전혀 수입된 흔적이 없는 듯하다. 이러한 견해가 옳은가 어쩐가는 상 나라, 서주, 춘추 시대에 중국에서 쓰였던 청동기가 한반도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입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상 시대에 상과 고조선 사이에 거의 문화 교류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상나라의 지도

상(商)나라도 지금의 중국 전체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황하 유역의 여러 도시에, 곧 얼리토, 얼리강, 안양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고 다른 지역에는 지배하는 정치적 조직이 있을 만큼 인구가 많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조선 사람과 미처 무역을 할 정도로 중국인 인구가 황하강 유역에 많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안 창춘에 따르면, 하(夏) 또는 상 시대의 중국 인구는 1천3백 50만 정도되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략 지금 중국 인구의 1퍼센트이다. 조선 사람의 인구가 같은 비율로 성장했다고 가정하면, 고조선의 인구는 지금 인구의 1퍼센트, 곧 70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에 큰 무역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물론 상나라는 주위의 국가와 무역을 할 기본 여건은 갖추었던 것 같다. 이미 조개를 화폐로 사용하였고, 수도를 은(殷)으로 옮기면서(기원전 1350-1046년) 나라 이름을 은나라로 바꾸었다. 은은 지금의 안양 지역이고, 이곳에서 많은 갑골문이 발견되어 상 후기에 (기원전 1200년부터) 한자를 쓴 것을 입증한다.

거북이 배딱지(龜甲)에 쓰인 점치는 글.

수골(獸骨, 소 어깨뼈)에 쓰인 점치는 글.

귀갑과 수골에 쓰인 글자를 갑골 문자라 한다. 상나라가 망한 뒤에, 상나라 사람들은 흩어져 장사를 시작했고, 이것이 商人의 유래라고 한다. 은나라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것 중에, 소금, 터키석, 주석 등,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과 무역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고조선과 어느 정도 무역이 있었다면, 상 시대의 청동 제기와 식기 등이 고조선에 유입되었을 터인데, 전혀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 견해가 틀리다면, 누군가가 언젠가 이런 착오를 지적할 것이다.

상나라의 청동기는 신석기 시대에 도기의 형태로 있었던 것을 청동으로 만든 것들이고, 상 시대에는 도기와 청동기가 공존하였다. 상 시대의 청동기는 대부분 제사를 지내거나, 왕이나 제후들이 연회를 베푸는 데 쓰이는 그릇들이며, 서주 시대나 춘추시대에 들어가면 이 그릇들이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진다. 상 시대의 청동기의 제일 크고 좋은 표본은 대부분 대만의 구공(古宮) 박물관에 있으나, 사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사진은 유럽 최대의 아시아 문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기메 동양 박물관 (Musée Giumet, Paris)에서 찍은 것이다. 작업 도중에 집을 빌려 준 Jean-Pierre에게 감사드린다.

중국 연대표  

1. 얼리토(二里頭) 문화 (기원전 1900-1500년)

얼리토 문화는 룽산(龍山) 문화에서 유래했을지 모른다. 이 문화는 4단계로 나눈다. 제1 단계에는 인구가 몇천 정도였고, 도시를 짓기 시작하는 단계여서, 아직 국가라는 정치적 조직이 생기기 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제2 단계에는 인구가 11,000명 정도가 되고 궁전을 지었다. 제3 단계에는 인구가 24,000명 정도이고 왕궁이 확장되었고, 제4 단계에는 (아마도 인근의 얼리강에 도시가 생기는 까닭에) 인구가 20,000으로 줄고 청동기를 더 생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네 단계는 모두 夏 시대(기원전 2100-1600년)와 연결지을 수 있다. 이 시대가 끝나면서 (기원전 1600 – 1560년경) 얼리토 바로 북쪽에 얼리강(二里岡) 성이 건축되었다. 얼리강은 상나라가 시작된 정저우 지역에 속하고, 여기서 상나라의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작(Jue 爵) 또는 각(角 jiao) 술잔, 기원전 16세기, 얼리토 문화, 뚜껑이 없다.

얼리토 문화의 酒器는 주로 두 가지, 작(爵)과 가(斝)이다. 발견되는 수량은 적지만 술에 물을 타기 위한 그릇 화(盉)가 이따금 발견된다.

작(Jue 爵) 또는 각(角 jiao) 술잔, 기원전 16세기, 얼리토 문화 (二里頭文化, 기원전1880 -1520).  

2. 상나라의 청동기

정(ding,鼎, 밥솥), 얼리강(二里崗)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정(밥솥),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斝(jia, 술잔 가),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력(鬲, 솥 력), 고기 따위의 음식을 끓이는 그릇.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력(鬲, 솥 력), 고기 따위의 음식을 끓이는 그릇. 얼리강과 안양 문화 사이, 기원전 14-13 세기.

준(Zun 尊, 술그릇 준), 아구리가 넓고 바닥이 평평한 술 잔. 얼리강과 안양 문화 사이의 과도기, 기원전 14 세기. 청대까지도 계속 이 모양의 술잔을 모방하였다.

준(Zun 尊,술잔), 안양 시기 (기원전 12-11세기), 잔만 보아도 취하는 기분.

뇌(罍, 술독 뇌) 술 담는 항아리. 얼리강 문화, 보통은 네모난 형(팡레이fanglei 方?)

작(爵, 술컵),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방가(fangia 方斝, 술잔 가), 네모난 술잔. 상대, 기원전 13-12 세기.

언(甗, 시루 언)= 력(鬲)과 증(zeng, 甑, 시루 증)을 합친 것, 얼리강 문화 (二里文化,기원전 1600-1300년)

안양 시기(기원전13-11세기), 덮개가 없는 술잔. 기둥도 없다.

盉(조미할 화), 술의 농도를 조절하는 그릇,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이것으로 물을 따라 술의 농도를 조절했던 듯.

斝(Jia, 술잔 가), 술 항아리.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斝(Jia, 술잔 가), 얼리강 문화 (기원전 1600-1300년), 발효된 술을 덮히고 붓는 항아리. 이 한자는 두 개의 단추까지, 그릇 모양을 그대로 닮았다.

卣(술통 유), 얼리강 문화

斝(Jia, 술잔 가), 얼리강에서 안양 시기(기원전1300-1028년) 사이.

斝(Jia, 술잔), 술을 데워서 마시는 그릇. 안양 시기 (기원전 12-11 세기). 수직의 두 막대기는 안정을 위한 것. 바른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술을 따를 때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두 막대기를 잡는다.

부(瓿, 단지 부), 배가 불룩한 술 단지, 상대(기원전 14-13 세기), 여기에 수수로 만든 술을 담았다.

준(尊), 상 말기에서 서주 초기, 기원전11 세기.

盉(조미할 화), 술을 조절하는 물을 담는 그릇. 상 말기에서 서주 초기 (기원전 11세기).

盉(조미할 화), 술의 농도를 조절하는 물 그릇. 상 말기에서 서주 초기, 기원전 11세기. 통통한 다리는 신석기 시대부터 내려 온 것.

盉(조미할 화), 상 말기에서 서주 초기, 기원전 11세기.

盉(조절할 화), 상 얼리강(二里岡) 문화, 기원전 13-11세기.

爵 (벼슬 작, 술 마시다), 안양 시기(?). 두 막대기를 잡고 술을 마시거나 불에서 작을 껴낸다. 넓은 쪽은 술을 따르는 입, 가는 쪽은 꼬리. 두 막대기는 손잡이 역할.

角+光 (굉), 상 시대

觚(술잔 고), 가늘고 긴 술 잔. 안양 시대

포(瓿,항아리), 안양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