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西漢) 시대 중국인의 모습

한나라 시대에 중국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고조선 시대에 한국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살림을 살았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유적이나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 진흙 모형이 남아 있는 이유

서한 또는 前漢 시대에 중국인은 진흙으로 여러 가지 모형을 만들어 무덤에 넣었는데, 이 중에는 동물, 사람, 그리고 집 따위의 건물의 모형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모형은 서한 시대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나라의 청동기는 화려했지만, 상 시대의 중국인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안양 지역의 은허에는 여러 가지 청동기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잡아 바친 흔적이 보이고, 주로 강족 같은 이방 사람을 잡아 바쳤다고 한다.  어느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을 1만 명을 바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귀족이나 유지가 죽으면, 그를 시중들던 시종을 순장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순장 관습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조선 여자들이 중국 황제의 후궁으로 끌려간 다음에 황제가 죽으면 순장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사람 잡아 바치는 관습이 비경제적이므로, 실물을 잡아 바치던 풍습이 모형을 대신 무덤에 넣는 풍습으로 차츰차츰 대체된 것 같다. 그것도 천년이나 걸려서. 그러니 전국 시대 말기까지, 중국인에게는 희생에 관한 한, 거의 경제 개념이 없었던 듯하다. 서한 시대에 와서야 사람들이 약아져서 실물을 바치는 대신에 모형을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묻기 시작한 듯하다.

진시황의 무덤에 진짜 군인들 대신에 진흙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허수아비 군인들을 묻으면서, 바치는 사람 (아마도 호해)은 미안하고 죄송하게 생각한 듯하다. 사람들이 이러한 바뀌치기를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대용품의 크기가 차츰차츰 줄어들게 된다. 유대인은 사람 희생 대신에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동물을 희생하는 풍습이 있었고, 고조선에도 돼지를 희생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같은 시대에, 중국인은 대용물을 무덤에 묻었는데, 한반도에서는 희생물을 바치는 풍습이 일찍이 사라진 듯하다. 고조선 시대에 아마도 서민들은 비싼 돼지를 바치기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듯하다.

2. 서한(전한) 시대 중국인의 모습

그러면 서한 시대의 여러 가지 진흙 모형에서 나타난 중국인의 모습을 보자.

서한 시대 여인 허수아비 (人俑)

서한 시대 병사 허수아비, 창을 들고 있었으나 창은 어디 가고 방패만 남아 있다.

창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병사. 서한 시대, 山西 지방.

기병, 서한 시대.

서 있는 여인, 서한 시대.

무릎 꿇은 여인,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 서한 시대. 아마도 제후의 첩인가.

서 있는 하인, 서한 시대.

앉아 있는 여인, 아마도 정부인인가 보다.

서 있는 사람, 서한 시대.

여자 폴로 선수들, 서한 시대. 아마도 부잣집 딸들이었는가 보다. 여자의 위치가 고조선보다 중국에서 더 나았던 것 같다. 막대기는 사라지고 없다.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조상들의 허수아비나 진흙이든 무엇으로든 만든 모형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만들 경제력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고, 사람을 순장하던 풍습이 중국보다 훨씬 전에 없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심청전이나 에밀레 종 이야기는 사람을 바치는 관습이 한반도에서 널리 퍼지지는 않았어도 있기는 했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