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의 유적 (Shutterstock)
필라델피아(조르단의 암만)에는 야고보가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적극적 성질에 관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야고보: 성서로부터 좋은 구절을 어떻게 선택하나이까?
예수: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아 주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이 생기게 하옵소서.”
“주는 나의 목자요,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느니라.”
이것이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하늘나라 복음의 배경으로 예수가 예를 든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소극적 교리 속에 적극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새 종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복음의 요구 사항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못한 부분을 버리고 좋은 반쪽을 이용했다.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 하는 구절에서 부정적 부분을 버리고 적극적 부분을 고른 것이다.
참된 선은 지독한 악보다 훨씬 더 힘이 있음을 잊지 말라.
옛 충고―”눈에는 눈으로”―대신에 행악자를 구원하려고 긍정적인 무슨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악에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i)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ii)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부정적인 방법.
(iii) 악을 선으로 갚는 것―적극적이고 올바른 방법.
사도들 중에 하나가 한때 물은 적이 있었다: “주여,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하나이까?”
예수: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 더 나를 수 있느니라.”
유대인은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지만, 예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예수는 화려한 언어를 피하고,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넣는 버릇이 있었다.
정반대를 효과 있게 이용했고, 티끌과 무한 따위를 비교했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그의 그림은 놀라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