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29년 8월 18일 – 9월 16일

데카폴리스

예수와 열두 사도가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 18일 (목), 각 사도는 전도사 한 명과 함께 일해야 한다, 열두 집단이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은 예수와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 여행에 4주를 배당하였고,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에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이 열두 무리는 게라사ㆍ가말라ㆍ히포, 자폰ㆍ가다라ㆍ아빌라, 에드레이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 디움ㆍ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에서 수고했다.

주랑(柱廊)이 있는 게라사의 거리. 게라사는 데카폴리스의 한 도시.

게라사의 거리

1. 용서에 관한 설교 히포에서 한 제자의 물음에 답하여, 예수는 용서에 관하여 가르쳤다.

“마음이 친절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즉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지 않느냐?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면, 기뻐하면서 친구와 이웃들에게 소리치리라,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아냈음이라.’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놓고서 하늘에서 더욱 크게 기뻐하느니라.

아버지는 저희가 뉘우치기를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저희를 찾으러 나가시느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베드로: “주여, 얼마나 자주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어도 그를 용서하나이까? 일곱 번까지이나이까?”

예수: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하늘나라는 집사들과 회계를 명한 어떤 임금과 견주어도 좋으니라.

1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갚을 수 없었는데, 임금에게 탄원하였더라. ‘나를 조금 더 참아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모두 갚으리이다.’

이 우두머리 집사가 임금에게 용서를 받고 나서, 그에게 1백 데나리온을 빚진 하급 집사 하나를 발견하고서 멱살을 잡고 말하였더라, ‘네가 빚진 것을 모두 내라’ 하며 그 집사를 감옥에 던졌더라. 동료 종들이 임금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였더라.

그 임금은 이 사람을 앞에 부르고 일렀더라:’내가 너에게 자비를 보인 것 같이, 어찌하여 너도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아니하였느냐?”

그 임금은 그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붙들어 두라고 간수에게 그를 넘겼더라.”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은 라멕이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의 금속 무기와 적들의 무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 원수를 갚겠다”하고 외친 데서 유래한다.]

2. 이상한 설교자 예수는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보러 가말라로 갔다.

요한: 이 친구는 우리와 한 번도 함께 있은 적이 없었고 우리를 따르지도 않나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 명하였나이다.”

예수: “그를 막지 말라. 내 이름으로 큰 일을 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궁극에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 지시는 요한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하는 주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이 경우에는 사람과 영적 가르침 사이에 개인적 관계를 언급했고, 다른 경우에는 앞으로 생길 세계적 단체,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다는 것을 요한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 밑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을 사도들은 언제나 마땅치 않게 여겼다.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메소포타미아로 갔는데, 예수가 고쳐준 미친 사람,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갔다고 믿은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3. 선생과 신자를 위한 가르침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수고했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면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언제나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라.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면서 자존심을 상하거나 꺾지 말라… 자존심을 잃은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가진 자에게 삼가게 하는 것이 이 복음의 목적이라.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따라서 너희 형제들이 자기가 택한 일을 하는 데 늘 바쁘게 지내라 타이르고, 직업을 찾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일자리를 확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라.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몰려고 애쓰는 것처럼 비열한 술책을 쓰지 말라.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반드시 신다운 영의 인도함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깨달을 것이다.

육신을 입은 인생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상급 생활로 옮겨가는 사람은 갈등을 겪는다. 한쪽 영역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거의 갈등이 없으나, 모든 사람이 과도기에 얼마큼 불안을 겪는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온유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악행을 저지를 때 나에게 용서가 없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한 번 싸우지도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일단 신이 앞에 계시다는 확신을 의식하게 될 때, 믿음은 인격을 단련하고 행복을 키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그렇게 한다고 어쩌다 생기는 사고나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치라.

복음을 믿는 것은 곤경을 면하게 만들지 않을 터이나, 고난이 덥칠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리라.

나는 역경(逆境)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하리라 약속하지 않지만, 그 모든 역경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듣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했고,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되풀이했다.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예수는 아빌라로 갔는데, 거기에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일하고 있었다.

질문과 대답 시간이 지난 뒤에, 나다니엘은 예수를 사람들과 떨어진 곳으로 모시고 가서 물었다: “당신은 성서의 일부만 가르치고, 아브라함 시절 이전에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사오니, 율법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당신은 거절하시나이다. 성서에 관하여 무엇이 진실이나이까?”

예수: “너의 형제들이 모두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저희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너와 함께 이야기하리라.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겨우 요즈음에 와서 수집되었느니라…

“유대 민족의 상급 사상을 담고 있어도, 아버지의 성품과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을 또한 많이 담고 있은즉, 이삭을 줍듯 나는 진리를 골라야 하노라.

“이 여러 기록은 사람들이 쓴 것이요, 더러는 거룩한 사람이었고, 더러는 그다지 거룩하지 않았느니라.

“요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도, 이 이야기의 깊은 진리, 곧 하나님이 니느베와 이교도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여전히 귀중하니라.

“나다니엘아, 하나님이 너의 조상에게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모두, 어른과 아이들을 도륙하라 지시했다는 성서의 기록을 한 순간이라도 믿지 말라.

“그러한 기록은 그다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진지하게 진실을 찾는 많은 사람이 성서가 완벽하다는 이 교리에 낙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

“거룩한 사람들이 영감이 가득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저희의 말씀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느니라.

“나다니엘아, 인간의 성품이 만진 것은 무엇이나 오류가 없다고 여길 수 없느니라.

“성서에 관한 가르침에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봉인된 (누구도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교리이라.

“가장 슬픈 것은 이 전통이 신성하다고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더러가 이 진실을 알면서 그렇게 가르치는 사실이라.

나다니엘은 예수가 승천하기까지 이 회담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때도 주의 말씀을 전부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5. 예수의 종교의 적극적 성질

암만의 유적 (Shutterstock)

필라델피아(조르단의 암만)에는 야고보가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적극적 성질에 관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야고보: 성서로부터 좋은 구절을 어떻게 선택하나이까?

예수: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아 주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이 생기게 하옵소서.”

“주는 나의 목자요,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느니라.”

이것이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하늘나라 복음의 배경으로 예수가 예를 든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소극적 교리 속에 적극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새 종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복음의 요구 사항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못한 부분을 버리고 좋은 반쪽을 이용했다.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지니라” 하는 구절에서 부정적 부분을 버리고 적극적 부분을 고른 것이다.

참된 선은 지독한 악보다 훨씬 더 힘이 있음을 잊지 말라.

옛 충고―”눈에는 눈으로”―대신에 행악자를 구원하려고 긍정적인 무슨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악에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i)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ii)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부정적인 방법.

(iii) 악을 선으로 갚는 것―적극적이고 올바른 방법.

사도들 중에 하나가 한때 물은 적이 있었다: “주여,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하나이까?”

예수: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 더 나를 수 있느니라.”

유대인은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지만, 예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예수는 화려한 언어를 피하고,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넣는 버릇이 있었다.

정반대를 효과 있게 이용했고, 티끌과 무한 따위를 비교했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그의 그림은 놀라웠다.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데카폴리스에서 4주 동안의 임무는 성공이었다.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가 없어도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9월 16일에, 일꾼들이 전부 마가단 공원에서 미리 주선하여 모였다.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구역에 있는 신자들의 복지에 관하여 보고가 있었다.

사자단은 예수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동료들,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 본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다.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사자들의 본부였다.

예수와 동료들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시기를 개시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Interior of Basilica of Nativity, Bethlehem (Shutterstock)

Basilica of Nativity, Bethlehem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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