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편, 종교적 체험의 실체

글쓴이: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1934년

이 논문은 종교적 체험이 과연 현실인가 거짓된 망상인가를 다루는 글이다. 자연이나 사회에서 겪는 체험은 되풀이함으로 검증이 가능하지만, 종교적 체험은 내면의 체험이므로, 제3자에게 꺼내서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종교적 체험을 과학적인 사실로 입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과학적 검증의 불가능은 그러한 종교적 체험이 거짓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이 멜기세덱은 사람의 종교는 진화적으로 생기지만,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계시로 이를 보충하여 종교적 발전이 제 궤도에 오르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의 종교적 반응은 예배 보조자의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이 두 가지 영향은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오래 전에 작용한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창문이요, 이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은 믿음으로 우주의 아버지를 볼 수도 있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되지만, 이따금 정기적 계시가 내려 종교의 진화를 돕는다.

유란시아에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i) 자연 종교 (진화된 종교)

(ii) 초자연 종교 (계시된 종교)

(iii) 실제의 종교 (자연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혼합)

(iv) 철학적 종교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1. 종교에 담긴 철학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동일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그러한 해석은 각자 달라야 한다.

두 필사자가 같은 종교 철학을 가졌다면, 이것은 두 존재가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방대한 종교적 체험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신조를 유지하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

신봉자들이 거짓된 것을 많이 믿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로 되지는 않으며, 이것은 종교적 체험에서 믿음이 생김으로 종교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을 가지지 않았다 (조절자가 선(先)인격이니까). 하나님이 적어도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의식할 수 없으며, 의식(意識)이 없다면 사람 밑에 있을 것이다.

2. 종교와 개인 너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종교의 탄생”은 이른바 (바울의 경우와 같이) 종교적 감화와 직접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의 격변을 통해야 하나님과 친교함을 의식할 수 있는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처음 자극하는 것은 공평의 충동, 그리고 친절을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의 갈등을 일찍부터 체험한다. 초인간적 도움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도덕적 충동을 느끼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정상 아이의 지성은 종교적 의식이 생기면서,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아이의 머리 속에서 맨 처음에 일어나는 싸움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이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요, 다른 동물은 그렇게 선택할 수 없다.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정상인 어린아이는 아주 일찍부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이타심을 향한 욕구를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이타심의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활동에 기원을 가진다.

3. 종교와 인류 사회적 상황은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에 도전한다. 열등한 종족조차 자기 이익과 집단의 이익을 구별한다.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영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진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몸소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환경이 흔히 종교를 지배해 왔다.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사람은 귀신 공포증, 동물 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 여러 가지 예식을 개발하였고, 이러한 예식은 부족 신앙으로 구체화되었다.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4. 영적 친교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는 후자가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다운 자와 친교하는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초기의 종교들은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친교 분위기는 궁극에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원시인은 친교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어떤 희생 동물을 바치곤 하였다.

죄를 지은 느낌은 사람이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예수는 속죄하는 예식을 없애 버렸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이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동기를 보고 사람을 자식으로 다룬다. 신의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움직인다.


5. 이상의 기원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일어나게 만든다. 이타주의의 이상은 신다운 영의 충동에서 파생된다.

원시인은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 예수는 (적을 사랑하기까지)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인본주의자는 이타심의 욕구를 지성의 자연스러운 작용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이타심의 요구가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대한 반응인 것을 인식한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둘 중에 어느 것도 개인의 흥미를 독점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겨난다.

오로지 자존심의 욕구와 이타적 욕구가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최다수의 타아(他我)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짧은 인생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逆說)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

이상을 추구하는 것― 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모든 이타적 충동이 군집 본능에서 발달된 것이라 가르치는 것은 이상주의의 싹을 자른다. 이타적 욕구가 조절자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깨달으면, 사람은 자아보다 높이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힘 없는 종이 아니요,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압력을 가하면 인격을 비뚤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어떤 교회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인정하고 구성원에게 아무 교리의 압력을 주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6. 철학적 조정 신학은 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바깥에서 우주를 연구할 때 사람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를 안에서 접근할 때, 신학과 형이상학이 생겨난다. 이 두가지 방법에서 처음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조정하기 위하여 철학이 발달한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우주를 안에서 내다보는 기회를 주며, 모든 창조를 영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지성으로 우주를 분석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물질인 듯하다.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 가설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전자는 내면을 바깥에서 보는 우주로 생각하며, 후자는 바깥의 우주를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지성의 기능에 달려 있고,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하며, 영적 체험을 머리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사람은 에너지 및 사물과 영적 가치를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파악한다.

너희가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상물질 분야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실체가 명시되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에서는 이치를 따지며, 종교에서는 믿음으로 통찰력을 얻으며, 상지혜는 상물질 단계의 기법이다. 형이상학은 상물질계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좋은 의도였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인 것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은 실패였고,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상지혜의 부재를 메울 수 있는 것은 계시뿐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철학이 개발되었다. 상지혜가 없는 상황에,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적절히 활동한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구분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안드족 후계자들이었다.

과학은 반드시 이치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계시는 이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의 철학은 물질에 치우칠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방향으로 치우칠 때, 철학은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필사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철학은 과학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에, 진실을 알아보는 통찰력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7. 과학과 종교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믿음은 종교를 지탱한다.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계시함으로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필사자가 조절자의 계심을 몸소 겪어야 깊어질 수 있다.

지상의 진화에서 직관의 본능이 지식의 출현을 앞서는 것 같이 영적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하늘에서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린다.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영원한 인간,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을 향함에 따라서, 그는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손을 뻗는다.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철학으로 통합하는 것은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체험의 일부이다.

진실이 무슨 결론을 내려도 상관없이 진실이 이끄는대로 따를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으면 논리는 과학의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바깥에서 들여다 보면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 바깥을 보면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계시의 도움을 얻어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 모두를 확인할 있고, 과학과 종교를 모두 안정시킨다.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자아 비판이다.

진실―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실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 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리적 환경을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든다. 영적 체험을 주는 종교는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추리를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이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영원한 최고의 영(신)을 다룬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생각 조절자의 계심은 영적 실체가 있다는 증명이다. 그러나 이 계심이 타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지만, 역사는 과학과 종교가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분야이다.

8. 철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이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지 모르지만,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최상의 신이 확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때때로 혼란을 일으킨다.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 남자라도 애정 심리학 필기 시험에 떨어질지 모른다. 배우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다른 남자는 그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다.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의심을 비치는 말이나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자들의 제안에 흔들리지 말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철학이 과학과 종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9. 종교의 본질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사람의 신학이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최초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역사를 통틀어서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철학적 모순이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과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관여한다.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가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에게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의 세계로 이끈다.

믿음은 이치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기꺼이 이치를 데리고 가며, 지혜를 데리고 철학의 한계까지 간다. 진실과 동반하면서 믿음은 영원한 여행 길을 떠난다.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조절자의 가정에 기초를 둔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진실과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진실을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믿음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실체(확신)가 있으며, 그러한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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