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 요약 (3A+E)

 

73편, 에덴 동산 (솔로니아)

74편, 아담과 이브 (솔로니아)

75편, 아담과 이브의 실패 (솔로니아)

76편, 둘째 동산 (솔로니아)

77편, 중도인 (천사장)

78편,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천사장)

79편, 동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천사장)

80편, 서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천사장)

81편, 현대 문명의 발전 (천사장)

73편에서 76편까지 이 네 편의 논문은 동산의 목소리 천사 솔로니아가 진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구에 아담과 이브가 와서 에덴 동산에서 살다가 실수한 뒤에 둘째 동산으로 옮겨간 것을 적은 이야기이다. 다음의 다섯 논문은 보라 종족, 그리고 아담이 진화된 종족의 여자들과 낳은 자식들, 곧 안드 족속이 동양과 서양에서 퍼졌고, 어떻게 현대 문명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는가를 적은 천사장의 이야기이다.

반과 아마돈은 아담이 올 것을 예비하여, 자원하는 일꾼들을 동원하여 에덴 동산을 짓는다. 아담과 이브가 지구에 왔으나 신이 예비한 길에서 벗어나서 빨리 무슨 결과를 보려고 서두르는 실수를 저질러 물질 아들 지위에서 인간의 지위로 강등된다. 이브가 참을성이 없어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사실이지만, 아담은 백년 동안 수고한 결과가 변변치 않은 것에 낙심했고, 그러한 근시안적 낙심을 입으로 자주 표현한 잘못이 있다.

이웃 부족이 에덴 동산을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담과 이브는 동쪽으로 향하여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들 사이의 땅에 정착하여 둘째 동산을 짓는다.

77편은 중도인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들이 인간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가 설명한다. 1차 중도자들은 50만 년 전에 칼리가스티아를 보조하려고 따라온 1백인이 비성교 방법으로 낳은 자식들이며 5만 명이 있다. 1백인 중에서 충성한 40명은 반란 이후에 예루셈으로 이동되었고, 나머지 60명은 반란에 가담하여 인간의 지위로 떨어졌는데, 죽기 전에 성교로 자식들을 낳았다. 이러한 인간 후손들 중에서 라타라는 여자가 후일에 아담손과 짝하여 자식들을 낳았는데, 이 중에서 16명은 가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담손은 이들을 짝짓게 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명의 2차 중도자를 낳았다. 이 중에 상당수가 미가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았고, 오직 1,111명이 충성하여 현재까지 지구에서 근무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영어로 이 계시를 받았다.

78편은 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들이 어떻게 둘째 동산에서 자리잡고 나중에 퍼졌는가 설명한다. 이브의 주선으로 아담은 지구에서 1682명의 여인들과 짝하여 1570명의 자식들을 낳았고 이들은 안드 족속의 시작이다. 79편과 80편은 각각 이 안드 족속이 어떻게 동양과 서양에 침투하고 팽창했는가 묘사한다.

마지막 논문(81편)은 아담 시절 이후로 아담의 피와 섞인 혼합 민족들이 겪은 긴 투쟁의 요점을 설명한다. 인쇄가 발견되기 전에는 진보가 비교적 느렸다. 이제 인간 사회는 지금까지 축적된 여세의 힘으로 앞으로 돌진한다.

  73편, 에덴 동산
 

칼리가스티아의 패망에 따라 생긴 사회의 혼란은 유란시아 민족들의 생물학적 상태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란시아 민족들의 발전이 절정에 가까운 것을 생명 운반자들이 주목하였다. 멜기세덱 행성 관리자들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로부터 물질 아들과 딸을 받으려고 유란시아 검열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에게 올렸는데, 이는 칼리가스티아가 몰락하고 예루셈에서 그의 자리가 빈 이후로, 이 최고자들이 늘 유란시아 사무에 대하여 직접 관할권을 전에 행사했기 때문이다.

십일(十一) 세계를 감독하는 군주 타바만시아가 행성을 검열하려고 왔고, 종족의 진전을 살펴본 뒤에, 타바만시아는 유란시아에 물질 아들들을 보낼 것을 정식으로 추천했다.

검열 후에 1백 년이 안 되어, 아담과 이브가 도착했다.

1.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대부분의 세계에서 아담 이후의 세계는 대단한 과학 시대이지만, 유란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반란이 있은 뒤 1만 년이 되자, 영주의 행정부가 쌓아 놓은 공적이 대체로 지워져 버렸다.

놋 족속은 영주의 참모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분자들의 후손인데, 이 이름은 첫 지도자 놋에서 유래한다.

아마돈 족속은 반과 아마돈과 함께 충성한 안돈 족속의 후손이었다. 이 명칭은 종족을 가리키기보다 문화적 명칭이다. 종족 면에서, 이 아마돈 족속은 본질적으로 안돈 족속이었다.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사이에는 전통적 적대 관계가 존재했다.

달라마시아가 망한 뒤에 놋의 추종자들은 세 집단으로 갈라졌다. (i) 중앙 집단은 페르시아 만 상류 근처에 남아 있었다. (ii) 동쪽 집단은 강 유역의 동쪽에, 엘람의 고지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다. (iii) 서쪽 집단은 시리아의 동북 바닷가와 그 인접 영토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 놋 족속은 산긱 종족들과 짝을 짓고 유능한 후손을 남겼다. 이 후손 중에 더러는 나중에 메소포타미아 북쪽 땅에서 반과 그 추종자들과 합쳤다.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전에,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은 땅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었다.

2. 동산을 짓는 계획

타바만시아의 검열이 있기 전, 거의 1백 년 동안, 반과 그 동료들은 고지의 본부에서, 종족 개량자가 오리라 외치고 있었다.

반과 아마돈과 가까운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약속된 아들을 영접하려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반은 동료들에게 예루셈에서 사는 물질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담과 이브가 도착하기 83년 전에, 반은 이들이 오리라 선포하고, 동산 집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반과 아마돈은 열심 있는 노동자 무리를 3천 명이 넘게 모집했다.

반은 자원자들을 1백 중대(中隊)로 나누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하나, 부관 하나를 두고, 아마돈은 자신의 부관이 되었다.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는 나쁜 일을 하는 힘을 많이 빼앗겼어도, 동산을 준비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3. 동산의 위치

장소 위원회는 거의 3년 동안 자리를 비웠다. 이 위원회는 세 장소가 적당하다고 보고하였다. 첫째는 페르시아 만에 있는 섬이었고, 둘째는 강가의 자리였고, 셋째는 지중해의 동쪽 해안에서 서쪽으로 튀어나온 길고 좁은 반도였다.

그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셋째 장소를 선호했다. 이 자리가 선택되고 나서, 생명나무를 비롯하여 문화 본부를 옮기는 데 2년이 걸렸다. 반과 그 일행이 도착했을 때, 반도 거주자 중에 한 집단만 빼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이 지중해의 반도는 기온이 따듯했고, 내륙의 바다(지중해)에서 실질적으로 섬이었다.

이 땅 덩어리의 해안선은 높이 올라와 있었고, 본토와 연결하는 목은 좁은 곳에서 겨우 43킬로미터였다. 동산에 물을 대는 강은 반도의 고지에서 내려와서, 반도의 목을 거쳐서 동쪽으로, 그리고 거기서 메소포타미아의 낮은 땅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갔다. 이 강은 "에덴에서 나간" 강의 "네 수원(水源)"이며, 이것은 나중에 둘째 동산에 있는 강들의 지류와 혼동되었다.

동산을 둘러싸는 여러 산에는 귀중한 돌과 금속이 많았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다.

바깥에서 세상은 어두움과 무지와 야만 속에 있었지만, 에덴은 유란시아에서 하나의 밝은 곳이었다.

4. 동산을 세우다

생물학적 개량자들이 진화 세계에서 머무를 때, 그들의 거처를 흔히 에덴 동산이라 부르는데, 꽃이 아름답게 피고 식물이 화려한 특징 때문이다. 반은 이 관습을 알았고, 따라서 반도 전체를 동산에 넘기도록 주선했다. 반은 에덴이 오직 동산이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첫 과제는 반도의 목 부분에 가로질러서 벽돌 담을 세우는 일이었다.

동물이 있는 동산은 큰 담 바로 바깥에, 그보다 작은 담을 쌓아서 만들었다. 두 담 사이의 공간은 온갖 종류의 들짐승이 차지했고, 적의 공격을 받을 때 방어 목적에 쓰였다. 이 동물원은 12 대부문으로 조직되었고, 담에 둘러 싸인 길은 이 여러 집단과 동산의 12 대문, 강과 목초지와 연결되었다.

동산을 준비하는 일에는 자원자만 사용되었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쓰이지 않았다. 이들은 동산을 가꾸고, 자신을 부양하려고 동물의 떼를 돌보았다. 가까이 있는 신자들로부터 식량의 기부도 받았다.

기대하던 아들딸이 언제 올지 모르고, 그들의 도착이 늦어질 경우에 젊은 세대도 그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반이 비치자, 사람들은 실망했다. 이것은 믿음이 모자람을 반이 인정하는 듯하여, 많은 탈주자가 생기게 되었다. 반은 탈주자들의 자리를 젊은 자원자들로 채웠다.

5. 동산의 집

에덴 반도 한가운데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다. 북쪽에는 행정 본부가 세워졌고, 남쪽에는 일꾼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집들이 건축되었다. 서쪽에는 아들의 학교들을 위하여 땅이 할당되었고, 한편 "에덴의 동쪽"에는 약속된 아들과 그 직계 후손을 위하여 거처가 세워졌다. 이 에덴에는 1백만 명을 위하여 집과 땅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담이 도착했을 때, 동산은 겨우 4분의 1이 끝났어도, 19,000킬로미터가 넘는 포장된 보도와 도로가 있었다.

동산의 위생 시설은 유란시아의 다른 곳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에덴의 마실 물은 위생 규칙을 지킴으로 좋게 유지되었다. 반은 동산의 수원에 아무것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동료들에게 강조하였다.

하수도를 처리하는 체계가 세워지기 전에, 에덴 사람들은 쓰레기나 썩는 물질을 파묻는 관습을 지켰다. 아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벽돌 파이프로 하수 처리 체계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담 밑으로 이어져서, 에덴의 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기까지, 그 지역에 있는 식물의 대부분은 에덴에서 자라고 있었다.

동산의 약 5퍼센트는 인조 재배 기술로 경작하였고, 15퍼센트는 일부 경작되었으며, 나머지는 아담이 도착할 때까지 자연 상태로 놓아두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은 아담과 그 배우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아담이 도착했을 때, 치장 작업은 끝나지 않았어도, 에덴은 아름답게 식물로 장식되어 보석과 같았다. 이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 지구는 그렇게 원예와 농업을 펼쳐보인 적이 없었다.

6. 생명나무

동산의 성전 가운데에 반은 생명나무를 심었고, 그 이파리는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과일은 반이 오랫동안 땅에서 버티게 해주었다. 물질 형태를 입고 나타난 후에, 아담과 이브도 이 생명나무에 의존할 것을 반은 알았다.

체계 서울에 있는 물질 아들들은 생명나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행성에서 다시 인격화했을 때, 그들은 육체가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나무에 의존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비유적 표현일지 모르지만, "생명나무"는 신화가 아니었다.

에덴시아의 최고자들이 칼리가스티아를 행성 영주로, 그리고 예루셈 시민 1백 명을 참모진으로 임명했을 때, 에덴시아의 한 떨기나무를 행성에 보냈고, 이것은 자라서 생명나무가 되었다.


생명나무를 그린 이쉬타르의 대문, 페르가몬 박물관.

이 초월 식물은 동물이 나이 먹게 하는 요소를 해독하는 공간 에너지를 저장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전지와 같았고, 먹으면 생명을 늘이는 힘을 방출하였다.

생명나무의 자양분은 진화 존재에게 쓸모가 없지만, 참모진 1백 명과 수정된 안돈 족속 1백 명이 무기한으로 살게 만들었다.

영주의 시절에 생명나무는 아버지의 성전, 가운데 있는 뜰에서, 땅에서 솟아나 자라고 있었다. 반란이 터지고 나서, 반과 그 동료들은 생명나무를 가운데 핵심으로부터 다시 길렀고, 나중에 고지 피난처로 가져갔는데, 거기서 그 나무는 반과 아마돈에게 15만 년이 넘도록 쓰였다.


(반 호수 지역에 있던) 우라르트 왕국(기원전 860-590년)의 신화(神化)된 인물(아마도 반이었을지 모른다)

반은 아담과 이브를 위하여 동산을 준비했을 때, 생명나무를 에덴 동산으로 옮겨 심었고, 이것은 아버지를 예배하는 성전의 가운데, 둥그런 뜰에서 자랐다.

물질 아들의 계획이 빗나갔을 때, 아담은 생명나무의 핵심을 동산에서 가지고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놋 좃속이 에덴을 쳐들어갔다가 생명나무의 과일을 아낌없이 먹었지만 그들에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내란이 일어나자 성전과 나무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로 파괴된, 아버지의 성전이었다.

아담과 이브와 그 자손은 시간이 지나자 모두 죽었다. 죽고 나서 저택 세계의 부활이 뒤따른다.

7. 에덴의 운명

아담이 첫째 동산을 비우고 난 뒤에, 여러 족속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나중에 놋 족속의 거처가 되었다.

화산 활동이 있고 시실리와 아프리카를 잇는 육지 다리가 가라앉게 되자, 지중해의 동쪽 바닥이 무너졌고, 에덴 반도도 따라서 바다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에덴 동산이 이렇게 사라진 것은 신의 계획이 유산되거나 아담과 이브가 실수한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자연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보라 인구의 비축 인구가 (50만까지) 축적되었을 무렵에, 에덴이 바다에 가라앉은 듯이 보인다.

멜기세덱들은 아담에게 가족이 50만이 될 때까지, 종족을 혼합하는 순서를 개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동산을 아담 족속의 영구한 집으로 만들기를 뜻하지는 않았다.

멜기세덱들이 아담에게 준 지침은, 아담의 직계 아들딸을 책임질 종족 본부, 대륙 본부, 분과 본부들을 세워야 하며, 아담과 이브는 세계적 직책을 맡는 고문으로서, 이 여러 수도에서 시간을 나누어 써야 함을 의미했다.

   
  74편, 아담과 이브

 

아담과 이브는 서기 1934년(이 글을 쓸 때)부터 따져서 37,848년 전에 유란시아에 도착했다. 봄이 무르익어 동산에 꽃이 한창 피었을 때였다.

정오에 발표도 없이, 두 천사 수송기가 개량자 수송을 담당한 예루셈 직원들을 동반하고, 성전 근처에서, 회전하는 행성 표면에 천천히 내렸다.

아담과 이브의 몸을 다시 물질화하는 작업은 이 성소 구역에서 행해졌다.

도착하고 나서 인간 형태로 다시 지어지기까지 열흘이 걸렸고, 그들은 동시에 의식을 찾았다.

물질 아들딸은 반드시 함께 봉사하며, 쌍을 이루어 일하라고 고안되었다.

1. 예루셈 시절의 아담과 이브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선임 물질 아들 집단에 속했고, 함께 14,311번이었다. 셋째 육체 시리즈에 속했고, 키는 240센티미터가 조금 넘었다.

멜기세덱 검사자들은 자원자들 중에서 아담과 이브를 선택하였고, 이들은 라나포지와 최고자들의 승인을 얻었다.

아담과 이브는 루시퍼 반란이 일어날 당시에 미가엘에게 충성했다. 그래도 유란시아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 샅샅이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아담과 이브는 유란시아에서 닥칠 위험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충분히 가르침을 받고서 새 직책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갔다.

2. 아담과 이브의 도착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잠에 들어갔다. 유란시아에서 환영하는 군중이 모인 앞에서, 아버지의 성전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반과 아마돈과 얼굴을 마주하였다.

에덴의 언어는 안돈 족속의 방언이었다. 반과 아마돈은 24 글자로 된 새 알파벳을 만들어 이 언어를 개량했고, 에덴의 문화가 세상에 퍼짐에 따라서 이 말이 유란시아의 언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을 떠나기 전에 이 방언을 통달하였다.

"새들을 놓아 주어라. 약속된 아들이 오셨다는 말씀을 새들이 전하게 할지어다" 하고 주자(走者)들이 비둘기의 회합 장소까지 달려갔다.

아담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바깥에 퍼지자, 근처의 부족 사람 수천 명이 반과 아마돈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려고 에덴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아담과 이브는 성전 북쪽의 언덕에서 열린 환영회까지 호위를 받았다. 아마돈은 접대 위원회의 의장이었고, 이 위원회는 아마돈을 포함하여, 12명으로 구성되었다:

여섯 산긱 종족으로부터 대표 한 사람씩.

중도자의 임시 우두머리,

놋 족속의 대변인 아난,

동산의 설계자 노아,

거주하는 생명 운반자 2명.

 

다음에 선임 멜기세덱이 행성 관리 직책을 아담과 이브에게 넘겨주었다.

물질 아들딸은 최고자들에게, 그리고 미가엘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반은 이들이 유란시아의 통치자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반은 15만 년이 넘도록 지녔던 권한을 포기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세상 통치자의 자리에 취임하는 이때, 임금다운 예복을 걸쳤다.

그리고 나서 가브리엘이 유란시아의 둘째 심판 점호, 제2 섭리 시대에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의 부활을 선포했다. 영주의 섭리 시대는 지나갔고, 아담 시대가 열린다.

3. 아담과 이브가 행성에 대하여 배우다

정식으로 취임하고 난 뒤에, 아담과 이브는 지구가 고립된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예루셈의 동료들은 자리잡힌 영주와 경험 있는 참모진이 있는 순탄한 세계들로 가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아담과 이브는 보름달이 비치는 동산을 거닐면서 다음 날의 계획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첫날이 끝났다.

둘째 날은 행성 관리자들 및 자문 위원회와 회의하면서 보냈다. 칼리가스티아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관하여 자초지종을 모두 들었다. 이렇게 둘째 날이 저물었다.

셋째 날은 동산을 검열하느라고 보냈다. 에덴 동산을 만들려고 수고한 사람들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잔치를 치르면서 이 셋째 날이 끝났다.

넷째 날에 아담과 이브는 동산 집회에서 연설했다. 세상사를 운영할 행정부에서 일하려고 뽑힌 남녀들을 위한 잔치로 끝을 맺었다.

다섯째 날은 임시 정부를 조직하는 데 보냈고, 이것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떠날 때까지 활동할 행정부였다.

여섯째 날은 수많은 종류의 사람과 동물의 검열에 쓰였다. 수천 가지 동물을 보고 그 성질을 아담이 이해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아담은 눈에 보이지 않게 작은 생물(균)을 설명하여 동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날이 저물었을 때,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쪽"에, 새 집에서 처음으로 쉬었다.

그들의 취임 연설이 동산 거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능을 압도하여, 대다수는 아담과 이브를 신으로서 예배하려고 하였다.

4. 첫 소동

여섯째 날 밤에, 아담과 이브가 잠자는 동안에, 아버지의 성전 근처에서 야릇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흥분한 남녀 몇백 명이, 신(神)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 내려왔고,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신이거나, 아니면 숭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고귀한 쌍을 아버지의 성전으로 모셔오자는 제안에 모두가 찬성했다.

반이 항의했지만, 일축되었을 뿐이다. 반도 신과 가까운데, 그렇지 않다면 그가 땅에서 어찌 그리 오래 살았는가? 하는 비판을 들었을 뿐이다. 반은 중도자들과 통신하여 그 우두머리를 황급히 아담에게 보냈다.

중도자들은 아담과 이브를 성전으로 수송했다. 아담은 신의 아들 계급에 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오직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지명하는 자들만 숭배를 받아도 좋다고 사람들에게 분명히 일러주었다.

아담과 이브의 취임을 인정한다는 소식을 천사 사자가 가져왔을 무렵에, 그들은 말했다: "너희는 이제 아버지의 성전에 가서 그분에게 경배하여라. 다시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경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라."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이 기원이었다. 에덴에서는 이 일곱째 날을 성전에서 정오 집회에 바쳤다. 이것은 법이 되지 않았지만, 아담의 행정부가 있는 한, 관습이 되었다.

5. 아담의 행정

멜기세덱 관리자들은 아담이 온 뒤에 거의 7년 동안 계속하여 근무했으나, 마침내 세상사를 아담에게 맡기고 예루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관리자들과 작별하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고, 저녁 때 멜기세덱들은 각자 아담과 이브에게 조언을 주고 성공을 빌었다.

사타니아의 천사 수송기들은 예루셈을 향하여 14 존재를 싣고 자정에 행성을 떠났고, 반과 아마돈도 동시에 이동하였다.

아담은 멜기세덱들의 조언에 따라, 바깥 세계와 무역 관계를 시작하려고 공업 기술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에덴이 붕괴되었을 때, 1백 개가 넘는 원시 제조 공장이 가동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담과 이브는 세상을 개선하는 기법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야만인ㆍ미개인, 반(半)문명화된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는 일과 같이 코앞에 닥친 문제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담은 이미 여러 중대를 모두 에덴 연맹으로 연합시켰다. 그러나 동산 바깥으로 나가서 아담의 동료들이 일을 시작하는 순간에,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저항에 부딪쳤다.

마침내 아담은 이들과 즉시 교제하려는 계획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반이 조직하던 방법으로 돌아가서, 에덴 사람들을 1백인씩 중대로 나누고, 각 중대에는 중대장, 그리고 10명의 집단을 책임지는 부관들을 두었다.

아담과 이브는 대의 정치를 실현하려고 왔지만, 자격 있는 정부가 하나도 없었다. 에덴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아담은 바깥에서 무역 및 사회 중심을 거의 1백 개 세웠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대사를 보내는 것은 아담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 아담과 이브의 가정 생활

아담 가족의 집터는 12.8 평방 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이 집터 둘레에서, 30만 명이 넘는 순수한 자손들을 돌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겨우 첫째 건물 단위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아담의 가족이 늘어나기 전에, 에덴의 계획 전부가 물거품이 되었다.

아담손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맏아들이며, 그의 누이와 이브손 (아담과 이브의 둘째 아들)이 뒤따라 생겼다. 임무의 불이행이 일어나기 전에, 딸 32명과 아들 31명을 낳았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떠났을 때, 가족은 4대로 이루어졌고 순수 핏줄 후손은 1647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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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아이들은 한 살이 되어 어머니의 젖을 떼었으나, 동물의 젖을 먹지 않았다. 이브는 아이들에게 이가 생길 때까지, 견과의 즙과 과일 주스를 알맞게 섞어 주었다.

아담의 지역 바깥에는 불로 익혀 먹기가 유행했지만, 아담의 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먹을 것이 익었을 때, 과일 따위가 먹기 좋은 것을 알았다. 하루에 한 번, 정오 뒤에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함께, 우주 방사물로부터 직접 "빛과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아담과 이브의 몸은 어렴풋한 빛을 발산했지만, 관습을 좇아서 이들은 반드시 옷을 입었다. 낮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도, 저녁때는 밤옷을 걸쳤다. 그들의 몸에서 방사되는 빛이 대체로 옷에 가려졌으니까, 머리에서 방출되는 빛만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었고, 이것이 후광의 기원이다.

아담과 이브는 약 8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서로, 그리고 친자식들과 교통할 수 있었다.

아담의 아이들은 16살이 될 때까지 학교를 다녔고, 나이든 아이들이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아이들은 30분마다, 큰 아이들은 시간마다 활동을 바꾸었다.

약혼하는 평균 나이는 18살이었고, 이들은 2년 동안, 결혼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스무 살에 결혼할 자격이 있었다.

후일에 신들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왕족들의 형제와 자매가 결혼하는 관습은 아담 후손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 동산의 생활

아담의 아이들은 서쪽 학교를 4년 동안 다녔고,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일했다.

16살이 될 때까지, 예루셈 학교의 방법으로 지적 훈련을 받았고, 16살부터 20살까지 여러 유란시아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거기서 낮은 학급에서 선생으로 봉사하였다.

서쪽 학교 체계의 목적은 온통 교제였다. 오전의 휴식 시간은 원예와 농업에, 오후 시간은 경쟁하는 놀이에 쓰였다. 저녁은 사회적 교제에 이용되었다. 종교 및 성(性) 교육은 가정의 분야, 부모의 임무로 여겼다.

여러 학교에서는 다음을 가르쳤다:

(i) 건강과 몸을 돌보기.

(ii) 황금률.

(iii)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의 관계.

(iv) 여러 지구 종족의 역사 및 문화.

(v) 세계 무역을 개선하는 방법.

(vi) 임무와 감정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

(vii) 놀이ㆍ유머ㆍ경기의 개발.

학교와 동산의 활동이 모두 방문객에게 열려 있었다. 한 유란시아인이 동산에서 머무르려면, "입양되어야" 했다.

동산의 법은 달라마시아 율법에 기초를 두었고, 일곱 항목 아래에 선포되었다:

(i) 건강 및 위생 법칙.

(ii) 동산의 사회 규칙.

(iii) 무역과 상업의 법규.

(iv) 공정한 놀이 및 경쟁 법칙.

(v) 가정 생활의 규칙.

(vi) 황금률을 지지하는 시민 법규.

(vii) 일곱 가지 명령.

에덴의 도덕 법규는 달라마시아의 일곱 계명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아담 족속은 생각 조절자가 깃드는 것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제시되었다.

에덴에서 대중 예배 시간은 한낮이었고, 해질녘은 가족 예배 시간이었다.

아담은 판에 박힌 기도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에덴 사람들은 달라마시아 시절부터 내려온 기도를 계속 썼다.

아담은 여러 종족에게 남녀 평등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그때까지 인류는 출산이 "아버지의 허리"에서 거한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는 기껏해야 태어나지 않은 것을 먹이고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시설로 바라보았다.

아담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가르쳤지만, 그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처럼 아담은 지구의 복지와 향상을 일했지만, 더 이상 진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8. 천지 창조의 전설

유란시아를 엿새 동안에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처음 훑어보는 데 꼭 엿새를 보냈다는 전통에 근거를 두었다. 이 상황은 달라마시아 사람들이 소개한 한 주의 기간을 사람들이 신성시하게 만들었다. 6일을 보낸 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세상을 엿새 안에 만들었다는 전설은 3만 년도 더 지나서, 나중에 생각한 것이다.

아담의 갈비로부터 이브를 빚어냈다는 이야기는 아담이 도착하기 45만 년도 더 전에 유형 참모진이 온 것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물질을 서로 교환한 수술이 혼동된 것이다.

대다수의 민족들은 아담과 이브가 지구에 도착하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지어진 육체를 입었다는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원시 민족들은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된 동물을 "토템"으로 고르는 관습이 있었다.

아담 족속의 문명과 접촉을 가졌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은 사람이 신들로부터 바로 내려왔다고 가르쳤지만, 이것은 진흙에서 창조되었다는 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구약에 천지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모세의 시절이 훨씬 지난 이후에 유래하였다.

초기의 가르침에서 모세는 아담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초기의 전통은 아담 이전의 문명이 있음을 인정했다. 후일의 편집자들이 소홀히 하여, 카인이 "놋의 땅"으로 가서 거기서 아내를 얻었다고 내막을 드러내는 언급을 없애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에 오랫동안, 히브리인은 널리 사용된 글자가 없었다. 이들은 이웃의 필리스티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쓰기를 배웠는데, 이들은 더 높은 크레테 문명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피신하여 온 자들이었다.

크레테 섬의 크놋소스 궁전과 벽화


크레테에서 쓰이던 글자.

히브리인은 기원전 약 900년까지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가지 천지 창조 이야기가 유행하였다.

모세가 아브라함의 핏줄을 추적하여 아담까지 미치려고 애썼기 때문에, 유대인은 아담이 온 인류의 시조라고 가정했다. 모세가 땅에서 머무른 지 거의 1천 년이 지난 뒤에, 엿새 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전통이 기록되었고, 후일에는 모세가 그 글을 썼다고 명예를 돌렸다.

유대인 사제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천지 창조 이야기를 마쳤고, 이 이야기를 모세가 적었다고 주장했다.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소문난 이 가짜 서적은 프톨레미 왕의 눈에 뜨였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새 도서관을 위하여 70인 학자 위원회에게 이것을 그리스어로 옮기게 하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성서"에서 자리를 차지하였다.

기독교의 선생들은 천지 창조 관념을 이어받았고, 한때 황금 시대가 있었는데 사람이 타락했다는 이론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어째서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닌 상태에 있는가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에게 (희망이 아니라) 실망을 준다. 아담의 잘못 때문에 인류를 벌하려는 복수심에 불타 있는 신을 암시할 뿐 아니라, 사람이 진보하지 않고 후퇴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황금 시대"는 신화이지만, 에덴은 사실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서 117년 동안 버티었고, 이브와 아담이 성급하고 판단을 잘못 내려서, 재난을 부르고 망할 정도까지 유란시아의 발전을 늦추었다.

   
  75편, 아담과 이브의 실패

 

유란시아에서 1백 년이 넘도록 수고한 뒤에, 아담은 동산 바깥에서 거의 아무 진전을 볼 수 없었다.

종족 개량은 아득히 먼 일로 보였고, 이를 촉진하기 위하여 최초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무엇이 필요한 듯하였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아담의 머리에 이따금 떠올랐고, 그는 여러 번 이브에게 그런 생각을 말했다.[이런 실망과 불평이 재난의 시작이다]

1. 유란시아의 문제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임무는 벅찬 사업이었다. 인간의 핏줄 사이에서 결함 있는 자와 퇴화된 자를 없애려고 했으나 아주 낙심했다.

정상 조건에서 아담과 이브가 처음에 할 일은 종족을 혼합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유란시아에서 그런 사업은 희망이 없이 보였는데, 종족들이 생물학상으로 건강해도 결함 있는 핏줄을 제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다. 준비된 한 언어를 채용하는 대신에, 수백 가지 다른 지방어가 세계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고,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떠나서 외로운 느낌이 더했다. 겨우 천사 계급들을 이용하여 행성 바깥의 존재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행성에서 맡은 과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멀리 내다보고 참을성이 있었더라면, 언젠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은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어했고, 또 보았지만, 그 결과는 자신들과 세상에 아주 비참하였다.

2. 칼리가스티아의 계략

칼리가스티아는 동산에 자주 찾아와서 아담과 이브와 여러 번 회담을 가졌지만, 그가 어떤 제안을 내밀어도 그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아담의 어린 아이들조차 달리가스티아의 서곡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몰락한 영주는 끈질겼고, 아담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이브에게 옆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보라 인종의 어머니를 옭아매려고 계획을 세웠다.

멀리 내다보면서 장래를 위하여 계획하기보다 당장의 결과를 보려는 여자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멜기세덱들은 고립에 따르는 위험을 이브에게 각별히 일러주었고, 아무런 비밀스런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브는 1백 년이 넘도록 이 지침을 잘 지켰고, 놋 족속의 지도자 세라파타시아의 방문에 무슨 위험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사건 전체가 차츰차츰 발전되어서 이브는 눈치채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3. 이브에게 뻗은 유혹

세라파타시아가 놋 족속의 시리아 연맹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 아담은 땅에서 1백 년이 되었다. 세라파타시아는 달라마시아의 건강 위원회 우두머리와 청인종 여자와 짝지어 낳은 후손이었다.

세라파타시아는 동산에 몇 번 찾아왔고, 시리아의 놋 족속의 지도자가 된 후에 아담과 이브와 제휴 관계를 맺고 싶다고 발표했다. 세라파타시아와 그의 참모진은 아담과 이브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어느 날, 이브와 이야기하는 동안, 궁핍한 부족들을 즉시 개선하려고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세라파타시아에게 떠올랐다. 기원이 일부 보라 핏줄에 있는 지도자가 그들에게 태어난다면,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유대 관계를 강력하게 만들 것이라고 세라파타시아는 주장했다.

세라파타시아는 보라 인종의 예비군을 확보하는 계획에 충성했지만, 이 사업은 몇백 년이 걸릴 터이고, 그는 참을성이 없었다. 세라파타시아는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의 손에 자기가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금방, 자신의 일생에서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5년이 넘도록 이 계획이 남몰래 완성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이브가 카노와 비밀 회담을 가지기로 찬성하였는데, 카노는 놋 족속 거류민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담의 집에서 멀지 않은 데서, 가을 저녁 땅거미가 질 때, 운명의 만남이 일어났다.

칭찬과 열심에 영향을 받아서, 이브는 그때 거기서 이야기하던 사업을 시작하기로, 신의 계획에 자기의 작은 계획을 보태기로 찬성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브는 운명의 걸음을 내디디었다. 엎지른 물이었다.

4. 실패를 깨닫다

행성에 있던 하늘 생명은 술렁거렸다. 아담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브에게 동산으로 오라고 청했다. 아담은 세라파타시아의 사업을 신의 계획과 동시에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달빛 아래서 아담과 이브가 교통하는 동안, 나("동산의 목소리")는 그들이 약속을 어겼다, 멜기세덱들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다, 우주 통치자에게 책임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꾸짖었다.

이브는 선과 악을 실행하기로 찬성한 것이다.

선은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요, 죄는 신의 뜻을 일부러 어기는 것이다. 악은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것이요, 이것은 행성에 혼란을 일으킨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때마다, 동산의 쌍은 선과 악을 섞는 칼리가스티아의 제안에 넘어가지 말라고 이렇게 관리 천사장의 경고를 받고 있었다: "선과 악을 섞는 날에, 너희는 그 땅의 필사자와 같이 될지니라. 너희는 반드시 죽으리라."

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계획이 최고의 동기로 잉태되고 집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이었으니, 올바른 목적을 이룩하는 잘못된 길이요, 신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브는 "인간사에 대하여 지식을 더 얻고, 인간 성품을 빨리 이해하는 것이 아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구실로 유혹자가 약속한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동산에서, 나는 보라 인종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주었다. 그들이 이 충고 가운데 더러는 따르고 더러는 버렸다.

이 회담은 너희의 기록(성경)에 "주 하나님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부르고 ‘너희가 어디 있느냐’"하고 묻는 것으로 나타난다.

5. 실패의 영향

다음날 아담은 라오타를 찾았는데, 그 여자는 놋 족속의 여자였다. 아담은 이브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아담은 (혼자 영생하지 않고) 일부러 이브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동산 거주자들은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놋 족속 촌락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카인의 아버지, 카노도 이슬로 사라졌다.

세라파타시아는 두려움에 빠져 다음 날 큰 강에 빠져 죽었다.

아담의 아이들은 아버지가 헤매는 30일 동안에,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이 30일 동안은 이브에게 몇 년처럼 길었다. 아담이 돌아왔을 때, 이브는 고마움을 느꼈고, 길고도 고된 일생을 함께 사는 동안 그 만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성질의 죄를 저질렀는가 확신이 없었는데, 70일이 되자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돌아와서 세상사의 관할권을 맡았다. 그리고 나서 아담은 자기들이 실패한 것을 알았다.

에덴 가까이 있던 놋 족속의 촌락이 절멸되었다는 소식이 세라파타시아의 고향 부족들에게 전해졌고, 큰 무리가 동산으로 행진해 오려고 집결하고 있었다. 아담과 그 추종자들이 둘째 동산으로 옮겨간 뒤에도, 이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그의 씨와 그 여자의 씨 사이에" 오래 이어지는 불화가 있었다.

6.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나다

놋 족속이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담은 멜기세덱들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그들은 조언하지 않았다. 멜기세덱들은 아담과 이브의 계획에 간섭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아담은 그와 이브가 실패한 것을 알았다. 멜기세덱 관리자들이 돌아온 것이 이를 입증했다. 아담은 추종자 1천2백여 명과 밤새 의논하였고, 다음 날 정오에 이들은 새 집을 찾아서 에덴을 떠났다. 아담은 전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고, 싸우지 않고 첫째 동산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마사치오 작품

에덴의 카라반은 동산을 떠난 지 사흘째에, 예루셈에서 온 천사 수송기들이 도착하여 정지되었다. 선택의 나이(스무 살)에 이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유란시아에 남아 있거나, 최고자들의 피보호자가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3분의 2가 에덴시아로 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부모와 함께 남기로 했다. 선택의 나이에 이르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에덴시아로 데려갔다. 이들에게 어떤 처분이 내릴지 우리는 모른다.

7. 아담과 이브의 지위가 낮아지다

에덴의 카라반이 멈춘 동안에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위반 행위의 성질에 대하여 통지받았다.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i) 아담과 이브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판결을 내린다. 그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수탁자의 서약을 어겼다.

구원자별의 재판관들이 (ii) "우주 정부를 모욕했다"는 죄목에 대해서 그들이 면죄된다고 선고했다는 것을 듣고서 아담과 이브는 크게 기뻐했다.

에덴의 부부는 필사자의 지위로 강등되었고, 이제부터 땅에서 남자와 여자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통지를 받았다.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오기 전에, 선생들로부터 그들이 신의 계획을 벗어날 경우에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가 설명을 들었다. 필사자의 신세로 떨어지는 것이 벌이며, 임무를 집행하지 못할 때, 그런 벌이 어김없이 따른다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그후에도 나는 친히 경고했다. 물질 아들 계급의 불사 지위를 이해해야 한다:

1. 아담과 이브는 영의 지성 회로와 지적 관계를 가짐으로 불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자양분이 끊어질 때, 영적 지위와 상관 없이, 불사의 지위는 없어진다.

2. 물질 아들과 딸은 필사자로 인격화되었으니까, 두 가지 순환 체계에 의존했다. 하나는 신체이기 때문에 생기고, 하나는 생명나무 열매에 담긴 초월 에너지로부터 생긴다. 관리하는 천사장은 임무의 불이행은 지위의 강등을 낳고,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훈계했다.

8. 이른바 사람의 타락

아담과 이브는 높은 물질 아들에서 낮은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졌다. 이것은 사람의 타락이 아니었다.

보라 민족을 유란시아 종족들에게 주는 신의 계획이 유산되었어도, 필사 종족들은 아담의 기여로부터 엄청나게 이득을 얻었다.

"사람의 타락"은 전혀 없었다. 아담이 온 것은 세계 민족들을 크게 개량하였다. 유란시아의 우수한 혈통은 안돈ㆍ산긱ㆍ놋ㆍ아담. 이 네 가지 유전 요소를 포함한다.

아담이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고, 아담과 이브의 지위가 낮아졌어도, 그들은 유란시아의 문명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브는 개인의 해방과 행동의 자유를 부르짖는 선전에 귀를 기울였고, 혼합된 계급의 생명과 때 이르게 물질 아들의 생명질을 섞게 만들었다.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길에, 지름길로 신의 계획을 돌아가려고 애써도, 너희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기계론을 따르는 우주이고, 첫째 근원 중심이 하나의 물력이고 성격자가 아니라면, 완전이 지배할지 모른다. 아무 의견 차이가 없고 마찰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 완전과 불완전이 있는 진화 우주에서, 의견 차이와 오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뻐한다.

   
  76편, 둘째 동산

 

아담이 대항하지 않고 놋 족속에게 첫째 동산을 넘겨주고 떠나기로 했을 때, 아담과 그 추종자들은 바다 모험에 적당한 배가 없어서, 서쪽으로 갈 수 없었다. 북쪽에는 놋 족속이 진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거기로 갈 수 없었다. 남쪽에 적대하는 부족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가기가 두려웠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길은 동쪽이었다. 그래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을 향하여 동쪽으로 여행했다.

카인과 산사는 아담의 카라반이 두 강 사이에 다다르기 전에 태어났다. 산사의 어머니 라오타는 딸이 태어날 때 죽었으나, 이브는 우수한 체력 때문에 살아남았다. 산사는 사르간의 아내가 되었는데, 사르간은 북쪽 청인 종족의 우두머리였다.

1. 에덴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다

아담의 카라반이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에덴 동산의 임금이 행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둘째 동산 거주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서둘러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 장소는 반과 아마돈이 제안한 동산으로서 최초에 선택한 세 장소 중의 하나였다. 두 강 자체가 좋은 천연 방어물이었다.

새 에덴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투박한 생활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했다.

2. 카인과 아벨

카인이 태어난 뒤 2년이 채 안 되어 아벨이 태어났는데, 아벨은 둘째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 사이에 태어난 첫 아이였다. 12살이 되었을 때, 아벨은 목동이 되었고, 카인은 농업을 선택하였다.

그 시절에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을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 관습이었다. 목자는 양 떼를 가져오고, 농부는 들의 열매를 바치곤 했다. 두 소년은 여러 번 자기의 직업이 더 좋다고 다투었다. 아벨은 동물을 바치는 것이 우대받는다고 주장했고, 카인은 에덴의 전통을 예를 들어 들의 열매가 더 낫다고 했지만, 아벨은 형을 조롱하였다.

그 소년들은 각자 열 여덟과 스물이었는데, 아벨의 빈정거리는 말이 형을 화가 치밀게 만들었고, 그래서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아벨은 이상적 유전을 물려받았으나, 열등한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서른까지 살았더라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개들이 주인 없는 양 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벨의 죽음이 부모에게 알려졌다. 그 뒤에, 아담과 이브는 카인이 동산을 떠나려는 결심을 북돋아 주었다.

카인은 부족 표시를 지니지 않았으므로, 이웃 부족의 손에 죽게 될 것을 알았다. 두려움으로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 카인은 어머니 이브에게 가서 영적 도움을 부탁했고, 신의 도움을 정직하게 구했을 때, 한 조절자가 그에게 깃들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카노를 아담 부족 사람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카인은 둘째 동산의 동쪽으로 떠났다. 일생동안 카인은 놋 족속의 한 지파와 아담 족속 사이에 평화를 촉진하였다. 카인은 먼 사촌 레모나와 결혼했고, 첫 아들은 엘람(이란)의 놋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3. 메소포타미아 생활

아담과 이브는 에덴시아로 추방된 자식들뿐 아니라 아름다운 옛 집을 그리워했다.

아담은 아이들과 동료들에게 국가 행정, 교육, 종교적 훈련을 시키느라고 시간의 대부분을 썼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큰 혼란이 생기지 않았다. 자식과 추종자들은 에덴의 영화로운 시절을 차츰 잊어버렸다.

아담 족속의 국가 통치자는 첫째 동산의 아들들로부터 나왔다. 첫 아들 아담손 (아담 벤 아담)은 둘째 에덴의 북쪽에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을 세웠다. 이브손은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큰 아들 잔삿이 아담의 후계자가 되었다.

사제들은 셋으로부터 생겼고, 그는 둘째 동산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셋은 둘째 동산에서 새 사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셋의 사제는 세 가지 일을 했다. 종교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와 위생 검사자로서 일하고, 동산의 여러 학교에서 선생이 되도록 훈련을 받았다.

아담의 카라반은 첫째 동산에서 몇백 가지의 식물과 씨앗ㆍ구근(球根)을 강들 사이의 땅으로 가져갔다. 또한 양 떼와 온갖 종류의 길들인 동물을 데리고 갔다.

첫째 동산을 떠날 때까지, 아담과 가족은 과일ㆍ곡식ㆍ견과를 먹고 살았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약초와 채소를 먹었다. 둘째 동산에서 고기가 소개되었으나, 아담과 이브는 정규 식사(食事)에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담 족속은 세 번째 알파벳을 만들었고 현대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두 강 사이의 땅에서 그들은 글쓰기, 금속 가공, 도자기, 천 짜기 기술을 유지했다.

보라 종족의 가정 생활은 그 시절에 이상적이었다. 아이들은 농업, 장인(匠人)의 기술, 동물 기르기의 훈련 과정을 받거나, 아니면 사제ㆍ의사ㆍ선생이 되는 셋 사람의 훈련을 받았다.

셋 사제들의 종교 개념은 진보되었고, 건강 규칙은 뛰어났다.

4. 보라 인종

아담과 이브는 보라 인종의 시조였고, 보라 인종은 유란시아에서 아홉 번째로 나타난 인종이다. 보라 인종은 푸른 눈을 가졌고, 흰 살결과 밝은 (노란 색, 붉은 색, 갈색) 머리털을 가졌다.

이브는 산통을 겪지 않았고, 초기의 진화 종족들도 그렇지 않았다. 진화 종족이 놋 족속이나 아담 족속과 혼합되어 생긴 종족이 출산의 아픔을 겪었다.

아담과 이브는 음식과 빛을 먹고, 물질을 초월하는 어떤 에너지로 보충되었다.

아담의 자손들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빛을 순환시키는 자질을 물려받지 않았고, 오직 피의 순환으로 영양을 받았다. 오래 살아도 이들은 반드시 죽도록 고안되었다.

아담과 이브의 첫 세대 아이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온통 "나무의 열매"만 먹고 살았다.

아담과 이브의 육체적ㆍ영적 시력(視力)은 모두 오늘날의 민족들보다 더 뛰어났다. 그들은 중도자, 천사, 멜기세덱, 칼리가스티아를 볼 수 있었다.

아담의 아이들에게는 대체로 조절자가 깃들었다.

물질 아들과 그 자손의 몸 세포는 진화 존재보다 훨씬 더 질병에 저항력이 있었다. 토착 종족들의 몸 세포는 질병을 일으키는, 미세한 유기체와 비슷하다.

둘째 동산에서 자리를 잡은 뒤에, 아담은 그의 생명질을 최대한으로 남기려고 했다. 따라서, 이브는 12명으로 구성된 종족 개량 위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아담이 죽기 전에, 이 위원회는 높은 부류의 여자 1682명을 선택하였다. 이들은 아담의 생명질로 아이를 배었다. 이들이 낳은 자녀 1570명은 인류에 이득이 되었다. 이들은 막강한 안드 종족의 시조였다.

5. 아담과 이브의 죽음

둘째 에덴을 세운 뒤에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충분히 뉘우쳤고, 유란시아의 잠자는 생존자 계열에 들어갈 것이라고 멜기세덱들로부터 공식 통지를 받았다.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그리고 첫째 동산에서도, 생각 조절자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필사자의 지위로 떨어진 뒤에 얼마 있다가 그들은 조절자를 받았다. 이것은 여생 동안에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아담은 지구에 도착했을 때 섭리 시대의 부활이 일어난 것을 알았고, 다음 서열의 아들이 올 때 아담과 이브가 다시 인격화되리라고 믿었다. 아담과 이브가 미가엘로부터 받은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위로가 되었다: "나는 너희의 형편을 고려했고, 내가 유란시아로 오거나 하위의 아들들이 너희를 필사의 잠에서 깨우리라."

이 말씀에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특별히 부활하리라는 언질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미가엘이 오시면서 일어날 부활이 있기까지 그들이 잠을 자리라는 암시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덴의 부부는 하나님의 한 아들이 오리라고 선포했다.

아담은 530년 동안 살았고, 육체가 낡아서 죽었다. 이브는 심장이 약해서 19년 전에 죽었다. 그들은 모두 성전 가운데에 묻혔다. 이것이 예배 장소의 마루 밑에, 경건한 남녀를 묻는 관습의 기원이었다.

유형 참모진이 도착했던 시절부터 아담과 이브가 왔을 때까지, 우주 정부의 육체적 대표는 행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아담의 실패와 함께, 45만 년 동안 이어졌던 이 체제는 끝났다. 아브라함의 시절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계획이 필사자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다.

유란시아는 불운했어도, 또한 네바돈에서 가장 운이 좋았다. 이 어두운 배경이 미가엘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성격을 드러낼 무대로서 이 세계를 고른 것을 너희는 이득으로 계산해야 한다.

6. 아담과 이브가 살아남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여러 저택 세계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리라고 멜기세덱들이 약속한 것을 믿고서 죽었다.

그들은 다른 필사자처럼 오랫동안 망각의 잠에 빠지지 않았다. 죽은 뒤에 셋째 날, 가브리엘은 라나포지의 명령을 받았는데,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실패가 있었을 때 탁월한 생존자들의 특별 점호를 지시했다. 이 26번 특별 부활이 지시하는 명령대로, 아담과 이브는 동료 1316명과 함께 저택 세계의 부활실에서 다시 인격화되었다.

아담과 이브는 예루셈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필사자로서 거주자가 되었다. 그들은 유란시아 근무에 즉시 부속되었고, 나중에 24 상담자 가운데 회원 자격을 받았다.

이렇게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끝난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담과 이브는 문명에 힘차게 이바지했고 인류의 생물학적 진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아담의 유전이 일찍부터 묽어지고 궁극에 사라진 마당에, 그런 진보된 문명은 살아남을 수 없다.

문명을 만드는 것은 민족이요, 문명이 민족을 만들지 않는다.

   
  77편, 중도인

 

네바돈에서 사람 사는 대부분의 세계들은 (사람 외에도) 하나 이상 되는 독특한 존재 집단을 품고 있는데, 이들은 필사자와 천사 계급의 중간쯤에서 활동한다. 그래서 이들을 중도인(中道人)이라 부른다.

이들은 어쩌다가 생긴 듯하지만, 우리는 모두 중도자를 하나의 필수 계급으로 여긴 지 오래다.

유란시아에는 두 계급의 중도자들이 활동한다.

1차 군단은 달라마시아 시절에 생겼고, 2차 군단은 아담의 시절로부터 유래한다.

1. 1차 중도자

1차 중도자들은 유란시아에서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의 톡득한 결합에서 생겨났다.

진화하는 행성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연달아 수여되면, 때때로 영적 질서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영주의 유형 참모 1백인이 그런 경우이다. 이들은 자식을 낳는 특권이 없는 초물질 인간이었다. 유란시아에 온 뒤에, 이 남녀들은 물질 자손을 낳을 수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초물질 수준에서 부모가 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초물질 (성교 아닌 방법으로) 연결은 1차 중도자 자식들을 낳았다.

중도자는 크게 쓸모가 있었다. 따라서 각 쌍은 비슷한 존재를 낳으라고 허락을 받았고, 이렇게 중도인 50명이 생겼다. 이들을 1년 동안 지켜본 뒤에, 행성 영주는 제한 없이 중도자의 생산을 허가했다. 이렇게 1차 집단의 50,000명이 생겨났다.

각 중도자를 낳는 사이에 반년의 기간이 끼었고, 중도자 1천 명이 각 쌍에게 태어나자, 더 생기지 않았다.

이 중도자들은 영주의 정부에서 정보 군단이 되었다. 이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계의 종족들을 지켜보고 영주의 작업에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행성의 반란이 있었을 때 1차 중도자 가운데 5분의 4를 조금 넘는 수가 반란에 가담하였다. 충성한 무리는 멜기세덱 관리자들을 위하여 수고하였고, 아담의 시절까지, 반의 밑에서 활동했다.

2. 놋 민족

모반 참모들로부터 내려온 혈통을 따르기 위해서, 1차 중도자의 이야기를 멈춘다.

육체를 가진 참모들은 아담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여, 중도자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었다.

생명 운반자들은 참모진의 합동 자손과 아담과 이브의 1대 자손을 연합시키는 새 종류의 필사자를 전에 계획하였다. 이 자손들이 인간 사회에서 선생이자 통치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한 존재들은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다스리도록 고안되었지만, 이 계획이 유산되었으니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귀족을 빼앗겼는지 알 수 없다. 유형 참모진이 나중에 자식을 낳았을 때, 그들은 체계의 생명 흐름을 빼앗긴 다음이었다.

"그 시절에 네비림(놋 족속)이 땅에 있었고, 이 신들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가서 저희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었으니, 이 아이들은 ‘옛날의 용사’요 ‘이름난 사람’이었더라.” 이것이 땅에 내려와서, 신들이 사람의 딸들과 함께, 고대의 영웅들을 낳았다는 민속 이야기의 기원이다.

유형 참모 1백 명이 안돈의 생식질(生殖質)을 지녔으니까, 그들이 성교로 번식하면, 그 후손은 안돈 족속의 자손을 닮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모반한 참모 60명이 성교로 낳은 후손은 모든 면에서 안돈이나 산긱 종족들보다 훨씬 우수하였다.

놋 족속의 첫 세대에서 일어난 돌연 변이는 안돈 족속의 유전 인자 배치와 화학적 구성 요소의 변화에서 생겨났다. 참모들의 몸 안에 있는 강력한 회로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 이것은 X선으로 식물과 동물의 생식질을 수정하는 과정과 같다.

생식질을 기여한 안돈 족속 1백인은 생명나무를 보완하는 유기체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타니아 생명의 흐름이 그들의 몸 속에 투입되었다. 참모진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 수정된 족속의 44명은 또한 자기들끼리 짝짓고, 놋 민족의 혈통에 크게 기여했다.

안돈 족속의 수정된 생식질을 지닌 이 104명이 (모반 참모 60명 + 부관 44명) 놋 족속의 조상이며, 이들은 유란시아에서 여덟째 종족이었다.

순수 핏줄의 놋 족속은 훌륭한 종족이었으나, 차츰 진화 민족들과 섞였고, 반란이 있은 지 1만 년이 되자, 그들의 평균 수명은 진화 종족들보다 길지 않았다.

놋 족속의 수메르 후손이 만든 진흙 서판을 파낼 때, 수메르 왕들의 목록이 몇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한다. 개별 임금의 통치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25년에서 150년 이상으로 길어진다.

그렇게 오래 산 개인들은 기록은 시간 단위로서 달과 해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성서에 아브라함의 족보나 중국인의 기록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는데, 28일로 된 한 달과 350일이 넘는 한해를 혼동한 것이 그러한 잘못의 근원이다. 9백 "해"가 넘도록 살았다는 기록은 실제로 70년이 못되고, 이를 사람들이 대단히 나이 많은 것으로 여겼다.

한 달을 28일로 계산하는 풍습은 아담 시절 이후로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에집트인이 약 7천 년 전에, 365일로 된 1년을 소개했다.

3. 바벨 탑

달라마시아가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놋 족속은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 가서, 새 도시 딜문을 문화의 본부로 세웠다.

이들의 수가 많아져 인접하는 안돈 및 산긱 부족들과 서로 결혼한 뒤에, 종족의 단결을 위하여 그들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지도자들이 하게 되었다. 부족 회의를 거친 뒤에, 놋의 후손 바블롯의 계획이 승인되었다.

바블롯은 종족을 찬양하는 전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의 계획에 따라서 공사가 시작되었고, 새 도시는 탑을 설계한 자의 이름을 따서 바블롯이라고 이름지을 것이었고, 이 위치는 나중에 바벨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놋 족속은 이 사업의 계획, 목적, 건물의 사용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4년 반 동안 일한 뒤에, 큰 논쟁이 벌어져 작업이 중단되었다. 탑을 세우는 목적에 대하여 세 가지 관점이 있었다.

(i) 가장 큰 무리는 절반을 차지했는데, 놋 족속의 우월성을 기리는 기념탑을 짓고 싶어했다.

(ii) 다음으로 큰 당파는 딜문의 문화를 기념하는 탑을 바랐다.

(iii) 가장 적은 소수파는 이 탑이 칼리가스티아 반란에 참여한 조상들의 잘못을 속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탑을 만민의 아버지의 예배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집단의 의견은 재빨리 부결되었다. 나머지 두 집단은 싸움에 빠졌다. 종교파는 남쪽으로 달아났고, 나머지는 거의 말살될 때까지 싸웠다.

약 1만2천 년 전에 바벨 탑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은 폐허 위에 새 전당을 짓기 시작했으나, 그 사업에 충분한 지원이 없어서 흐지부지되었다.

4. 놋 족속 문명의 중심

바벨 탑 때문에 서로 죽이는 싸움은 놋 족속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내란은 순수 혈통의 놋 족속의 인구를 크게 줄였고, 이것이 여러 모로 아담이 오기 전에 그들이 큰 문명을 세우지 못한 이유이다. 놋 족속의 문화는 아담이 오기 전까지, 12만 년이 넘도록 쇠퇴했다.

놋 족속의 4대 중심 가운데 셋은 바블롯 투쟁 직후에 세워졌다.

(i) 서부 (시리아) 놋 족속. 종족의 기념을 부르짖은 자들의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의 북서쪽에, 중심을 세웠고, 나중에 아씨리아인의 혈통에 기여하였다.

(ii) 동부 (엘람) 놋 족속. 문화와 상업을 주장하던 자들은 엘람으로 옮겨 갔고 거기서 혼합된 산긱 부족들과 합쳤다.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근처에 있던 놋 족속의 촌락을 "놋의 땅"이라고 언급하였다. 아담 족속이 놋 족속과 서로 짝짓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

(iii) 중부 (수메르 이전) 놋 족속.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입구에 있던 집단은 아담 족속과 섞여서 수메르 민족을 세웠던 놋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수메르인이 갑자기,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 무대에 나타났는가 설명한다.

수메르인은 달라마시아가 바다에 가라앉은 뒤에, 20만 년 전에 기원을 가졌다. 이들은 달라마시아의 알파벳을 잃어버렸고, 딜문에서 특이한 글자를 채택하였다. 수메르어는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어도, 셈어가 아니었고, 아리아인의 언어들과 공통점이 많았다.

수메르인의 기록은 옛날의 딜문 도시 가까이에, 페르시아 만에 자리잡은 촌락을 묘사한다. 에집트인은 이 도시를 딜맛이라 불렀고, 나중에 수메르인은 첫째와 둘째 도시를 달라마시아와 혼동하여, 셋을 모두 딜문이라 불렀다. 이 서판들은 땅에 있는 천국을 언급하였다.

사람과 하나님의 천국, 딜문을 묘사하는 이 서판들은 여러 박물관의 선반에서 쉬고 있다.

(iv) 북부 놋 족속과 아마돈 족속 (반 족속). 가장 북쪽에 있던 이 놋 족속은 반과 아마돈의 지휘를 따른 자들의 후손이다.

반의 동료들 중에 더러는 반 호수 근처에 정착하였고, 아라랏 산이 그들의 신성한 산이 되었다. 1만 년 전에 아씨리아인의 반 족속 조상은 신들이 일곱 계명을 아라랏 산에서 반에게 주었다고 가르쳤다.

아라랏 산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신성한 산이었고, 너희의 전통이 바빌로니아인의 홍수 이야기와 상당히 연결되었으니, 아라랏 산과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후일에 유대인 이야기에 섞인 것은 놀랍지 않다.

기원전 약 35,000년에 아담손은 옛 반 족속의 한 촌락을 방문했다.

5. 아담손과 라타

2차 중도자의 족보에서 놋 족속의 윤곽을 그렸으니까, 그 족보의 다른 절반인 아담 족속을 고려해야 한다. 2차 중도자들은 보라 인종의 맏아들, 아담손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아담손은 부모인 아담과 이브와 함께 땅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무리 속에 있었다.

아담손은 반과 아마돈으로부터 북쪽의 고지에 있는 그들의 집 이야기를 가끔 들었고, 둘째 동산이 세워진 뒤에, 어려서 꿈에 그리던 이곳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아담손은 이때 120살이었고, 첫째 동산에서 태어난 순수 혈통의 아이 32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담손은 둘째 동산에서 부모를 돕고 싶었으나, 아내와 아이들을 잃어버려서 낙심했는데, 이들은 아담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모두 에덴시아로 갔다.

아담손은 부모를 유란시아에 버리고 가기가 싫어서 남았지만, 둘째 동산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담손은 즐겁게 떠났지만, 아담과 이브는 큰아들을 잃어버릴까 많이 슬퍼했다.

27명의 일행이 아담손을 따라 갔는데, 3년이 조금 넘자 아담손의 일행은 목적지를 찾아냈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아담손은 스무 살 난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 여자는 영주 참모진의 마지막 순수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라타는 자기가 영주 참모진 가운데 두 사람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석 달이 조금 지나서 아담손과 라타는 결혼했다. 이들은 아이가 67명인 가족을 거느렸다. 네 번째마다 그들에게 태어나는 아이들은 독특한 계급이었고, 흔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담손은 1차 중도자의 존재를 알았고, 무언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이가 두 번째로 생겼을 때, 하나가 남자이고 하나가 여자였으니까. 아담손은 이들을 짝지어 주었다. 이것이 2차 중도자의 기원이다. 1백 년 안에 이 현상이 그치기 전에, 거의 2천 명이 태어났다.

아담손은 396살까지 살았다. 7년마다 아담손과 라타는 둘째 동산으로 여행했고, 그동안에 중도자들은 그의 민족에 관하여 정보를 알려 주었다.

아담손과 라타는 이렇게 놀라운 이 조수 군단을 지휘하였고, 그들과 함께 수고하였다.

아담손 족속은 그 시절부터 거의 7천 년 동안, 높은 문화를 유지하였다. 나중에 아담손 족속은 이웃의 놋 족속과 안돈 족속과 섞이게 되었고, 당시의 진보의 얼마큼은 후일에 유럽 문명의 잠재 부분이 되었다.

이 문명의 중심은 카스피 바다 남단의 동쪽 지역에 자리잡았다. 투르키스탄의 구릉 지대에 옛날 아담손 족속의 본부의 자취가 있다. 이 고지에서 네 가지 다채로운 문화가 일어났는데, 이들 중에 둘째 집단이 그리스와 지중해의 섬들로 옮겨갔다.

6. 2차 중도자

1차 중도자들은 거의 초인간의 기원을 가졌으나, 2차 중도자들은 순수한 아담 족속의 혈통이 유형 참모진(1차 집단의 부모)의 인간 후손과 뭉쳐서 생겼다.

아담손의 아이들 가운데 2차 중도자의 조상이 꼭 16명 있었다. 이 아이들은 남녀별로 똑같이 나누어졌고, 각 쌍은 성의 결합과 비성(非性) 결합을 이용하여 70일마다 2차 중도자 하나를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땅에서 그 전에 결코 가능하지 않았고 그 후에 그런 일이 생긴 적도 없다.

이 아이들 16명은 필사자로서 살다가 죽었으나, 전기로 에너지를 받는 그들의 자손은 계속 살아 있다.

여덟 쌍은 각자 중도자 248명을 낳았고, 이렇게 2차 군단(1984명)이 생겨났다. 2차 중도자에는 8 집단이 있다. 이들은 A-B-C 첫째ㆍ둘째ㆍ셋째, 이런 식으로 부른다. 그리고 나서 D-E-F 첫째ㆍ둘째,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아담의 실패가 있은 뒤에 1차 중도자들은 멜기세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되돌아갔고, 2차 집단은 아담손이 죽을 때까지, 아담손 중심에 부속되었다.

이 2차 중도자 가운데 33명은 2차 계급을 멜기세덱에게 봉사하는 1차 군단과 연결하려고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고, 동료들을 버리고 행성 관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로 옮겨 갔다.

아담손이 죽은 뒤에, 나머지 2차 중도자들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시절까지 못된 일을 많이 저질렀다. 미가엘이 땅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이 2차 중도자들은 자기들의 앞날에 관하여 결정을 내렸고, 충성스러운 대다수는 그때 자원하여 1차 중도자들의 지휘를 받았다.

7. 반역한 중도자

1차 중도자들의 대다수는 루시퍼 반란이 터졌을 때, 죄에 빠졌다. 최초의 50,000명 가운데, 40,119명이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에 가담한 것이 발견되었다.

최초에 2차 중도자의 수는 1984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873명은 미가엘의 통치에 협조하지 않았고, 오순절 날에 유란시아의 행정 심판과 관련하여, 정식으로 구금되었다. 아무도 이들의 앞날을 모른다.

이 두 집단의 반역한 중도자들은 체계 반란의 판결을 기다리면서 구금되어 있다. 이들은 행성의 섭리 시대가 개시되기 전에, 땅에서 이상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 불충한 중도자들은 어떤 상황에 필사자의 눈에 보이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반역한 중도자들을 반역한 케루빔 및 세라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파라다이스 아들이 오신 뒤에, 어느 세계에도 악한 영들이 필사자의 지성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러나 오순절에 진실의 영이 오고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전에, 이 반역한 중도자들은 열등한 필사자의 지성에 얼마큼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저희가 그에게 온갖 종류의 아픈 군중을 데리고 왔더니, 저희는 귀신 들린 자와 미친 자들이었더라" 하는 기록이 있다. 예수는 악령에 들린 자와 미친 자를 구별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였다.

오순절 이전에도, 어떤 모반한 영도 정상 인간의 지성을 지배할 수 없었다. 진실의 영이 오신 이후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광기(狂氣), 정신 박약을 혼동한 사례였다.

반역한 중도자 무리 전체가 최고자들의 명에 따라, 죄수로 붙들려 있다. 오순절 이후로 귀신 들리는 일은 없다.

8. 연합한 중도자

최근에 이 세상의 판결이 있을 때, 미가엘이 생존자들을 옮겼을 때, 중도자들은 행성의 영적 일을 도우려고 남게 되었다. 두 계급의 중도자 10,992명은 이제 단일 군단으로서 활동한다. 오순절 이후로, 각 서열의 선임 회원이 현재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다스린다.

1차 서열은 대체로 숫자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1-2-3 첫째, 4-5-6 첫째, 이런 따위의 이름을 흔히 받는다.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중도자들은, 1차 중도자의 숫자 명칭과 구별하려고, 알파벳 순서로 부른다.

두 계급의 중도자들은 영양과 에너지 흡수 면에서 비물질 존재이지만, 인간의 특성을 많이 가진다. 중도자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자식을 낳는 능력도 없다.

2차 집단은 남자다운가 여자다운가에 따라서 "그" 또는 "그 여자"로 언급된다.

중도자는 사람도 천사도 아니지만, 2차 중도자의 성품은 사람에 더 가깝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너희 종족의 출신이며, 인류의 종족들을 위하여 일할 때 세라핌에게 소중하다. 두 계급은 개인 수호자로 일하는 세라핌에게 필수이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은 다음 집단으로 조직된다:

(i) 중도 사자. 개인적으로 의사를 전하는 봉사에 진화 세계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ii) 행성 파수꾼. 중도자는 공간 세계의 수호자이고, 초자연 존재들을 위하여 관찰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iii) 접촉 성격자. 이 통신문을 전달하는 데 쓰인 주체의 경우처럼, 필사 존재들과 접촉하는 데 중도자가 쓰인다.

(iv) 진보 조수. 여러 계급의 세라핌에게 조수로서 분배된다.

1차 중도자들은 물질 대리자와 접촉하기가 힘들고, 천사 종류와 더 가깝다. 이들은 하늘에서 온 방문자와 학생 체류자들을 안내하는 자로서 행동하며, 2차 중도자들은 물질 존재들에게 봉사하는 데 부속된다.

충성하는 2차 중도자 1111명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필사자의 시력 바로 바깥에 존재하며, 시공의 사물에 대하여 어떤 능력을 지닌다.

"주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왔더라." 베드로가 구출된 경우에 도운 자들은 천사가 아니라 2차 중도자였다.

오늘날 2차 중도자의 주요한 일은 운명 예비병에게 연락하는 자로서 행하는 임무이다. 이 2차 집단이 올린 탄원 때문에, 이 계시가 성사되었다.

현재 유란시아에 사는 중도자들은 모두 명예로운 신분을 가졌고, "강신술"이나 "영매 능력"이라는 현상과 관련이 없다.

9. 유란시아의 영구 시민

진화된 승천자와 천사들과 반대로, 중도자는 여러 세계에서 발견되다시피, 첫째 영구 거주자 집단으로 보아도 좋다.

행성에서 봉사하라고 배치된 다른 하늘 존재들과 달리, 중도자들은 사람이 거하는 세계에서 산다. 세라핌은 오고가지만, 중도인은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천사 집단의 행정을 연결시키는 영구 체제를 마련해 준다.

유란시아의 시민으로서, 이 중도자들은 지구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 행성의 진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는 중도자들의 결의는 그들의 표어에 나타나 있다: "연합 중도자들은 착수한 일을 반드시 이룬다."

에너지 회로를 통과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중도자는 행성을 떠날 수 있지만, 우주 당국이 이들의 해방을 허가하기까지, 행성을 떠나지 않기로 서약했다. 1-2-3 첫째를 제외하고, 충실한 중도인은 아무도 지구를 떠난 적이 없다.

1차 계급에서 가장 위인 1-2-3 첫째는, 오순절 뒤에 곧, 행성 근무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행성에서 반란이 있던 시절에, 반과 아마돈과 더불어 굳건히 지켰고, 그 서열에서 희생자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현재 예루셈에서 24 상담자의 일원이며, 오순절 이후로 한 번, 유란시아의 총독으로서 이미 활동한 적이 있다.

중도자는 행성에 묶여 있지만, 우주의 먼 장소에 관하여 하늘 여행자들과 대화를 가진다. 그래서 이들은 이 체계를 비롯하여 다른 우주들에 관하여 정통하게 된다.

중도자는 완전히 발육된 상태로, 성장 기간이 없이 태어나지만, 지혜와 체험 면에 성장을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진화하는 생물이요, 중도자 군단에는 위대한 인물이 많이 있다.

넓은 각도에서 보면, 지구의 문명은 유란시아의 필사자와 중도자들이 공동으로 지은 작품이다. 두 문화 수준에 차이가 있고, 이것은 빛과 생명의 시대가 오기까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중도자의 문화는 죽지 않는 계급의 산물이니까, 인간의 문명에 짐이 되는 현세의 변천에 대체로 면역이 되어 있다. 사람의 세대는 잊어버리지만 중도자 군단은 기억하며, 이 기억은 너희 세계의 전통을 간직하는 보물 창고이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중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적당한 상황에 그 기억을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죽고 나서, 중도자는 지구의 물질 사무와 영적 사무의 간격을 보상해 주는 봉사자이다. 빛과 생명의 지위에 이를 때까지, 중도자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이들의 역할 때문에, 우리는 중도자들이 영역의 영적 체제에 필수 계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높은 영, 천사, 중도자들의 조직이 필사자의 승천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고 있다. 이것은 필사자와 중도자에게 똑같이, 숭고한 계획이다. 하나님을 사람에게 모셔 오고, 다시 사람을 하나님께 데려가는 것이다.

   
  78편, 아담 시절 이후의 보라 인종

 

둘째 동산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아담 종족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버티고 그 자손을 땅끝까지 보냈고, 이들이 후일에 놋 부족과 산긱 부족들과 섞이자, 안드 족속으로 알려졌다.

이 논문은 보라 인종의 역사를 묘사하며, 이것은 기원전 약 35,000년부터 기원전 약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으로부터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1. 종족과 문화의 분산

아담이 도착했을 때, 지상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3만5천 년 전에, 종족과 문화의 분산은 다음과 같았다:

(i) 보라 인종 (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 아담 족속 문화의 중심은 둘째 동산이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은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고, 이것은 카스피 바다 남쪽 해안의 동쪽에 있었다.

(ii) 수메르 이전 족속과 기타 놋 족속. 강들의 입구 가까이 고대 문화의 잔재가 있었다. 이 집단은 아담 족속과 많이 섞였다.

(iii) 안돈 족속도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다.

(iv) 홍인은 두 아메리카를 차지했다. 아담이 오기 5만년쯤 전에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v)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 아시아를 장악하였다.

(vi) 청인종(靑人種). 청인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에, 그리고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하여 저하되었다.

(vii)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의 혼합이었다.

(viii)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요소는, 지금 큰 사하라 사막인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ix) 지중해 분지. 여기서 북쪽의 청인과 남쪽의 사하라 주민이 동에서 온 놋 및 아담 족속과 함께 섞였다.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팽창하기 전에, 약 2만5천 년 전에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 둘째 동산에 달려 있었다.

유란시아에 주재하던 하늘 관찰자들은 잘못하는 물질 아들딸의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 보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을 따라서 수고했고, 남쪽에서 치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 훌륭한 사람들은 아담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빼어난 아들딸을 기쁘게 보냈다.

아담 족속의 문명과 사회는 진화 종족들보다 훨씬 앞섰다. 오직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족속의 촌락들 사이에서 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요, 진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까지 악화될 운명이었다.

아담은 지적 문화를 남겼으나, 기계 장치 면에서 진보되지 않았는데, 발명의 성공은 자연 자원과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 족속은 기원전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참 민족이었고, 이미 둘러싼 부족들에게 자손 몇백만 명을 퍼부었다.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 전통을 간직했다.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된 것을 설명한다. 인구가 늘어나면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아담 족속 중에 더러는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더러는 아시아로 파고들었으나, 이들은 소수파였다.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 서쪽으로 유럽으로 들어갔다.

약 1만5천 년 전에, 아담의 순수 혈통의 다수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으나, 북으로 가면서 다른 종족들과 뒤섞였다.

기원전 약 3만 년부터 1만 년까지, 대규모의 종족 혼합이 서남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원전 1만5천 년 전에,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이 끝났고, 유럽과 중앙 아시아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더 많이 있었다.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보강되었다. 흑인 종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시달리고,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안돈 족속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다. 녹인종과 주황 인종은 멸종되었다. 남인종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였다.

인도의 민족들은 침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황인은 중앙 아시아에서 자리를 굳혔다. 갈색인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초기의 이동은 기원전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계속되었고,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이동은 기원전 15,000년에서 6000년까지 계속되었다.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가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후일에 안드 족속이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빨리 움직였다.

4. 안드 족속

안드 종족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족속 및 여러 진화 민족을 1차적으로 섞어서 생긴다. 안드 족속은 보라 인종의 피를 1/8에서 1/6까지 섞인 종족들을 언급한다. 현대에 북쪽의 백인조차 이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수사에서 발견된 생명나무 기록

가장 초기의 안드 민족들은 2만5천 년도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지역에서 기원을 가졌고,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순수 핏줄의 보라 종족이 살던 시절 이후로, 안드 족속은 지구에서 가장 좋고 다능한 핏줄이었다.

이 옛 안드 족속은 아리아인이 아니라, 아리아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백인이 아니라 백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형질은 안드 족속의 유산이다.

순수한 보라 인종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고, 따라서 초기의 민족 이동이 평화로웠던 것을 설명한다. 놋 족속은 이때 호전적 민족이었고 아담 족속과 섞여 생긴 안드 민족은 가장 현명한 군국주의자였다.

이 안드 족속은 모험을 좋아했고, 산긱이나 안돈 족의 피를 섞으면, 안정된 민족이 되었다.

5. 안드 족속의 이동

둘째 동산의 문화는 기원전 약 15,000년까지 꾸준히 쇠퇴하였다.

아담 족속이 혼합된 놋 족속과 연합하여 안드 족속을 형성하여 동산이 부흥하자 이 문명이 널리 퍼졌다.

이 안드 족속은 유라시아 대륙과 북 아프리카 전역에 퍼졌다. 이때가 되자,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도 너무 섞여서 이제 더 아담 족속이라 할 수 없었다.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안드 기병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착하여 항상 새로워졌다. 이른바 아리아인의 조상 언어는 투르키스탄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안돈 족속의 방언이 아담손 족속과 안드 족속의 언어와 섞인 것이었다. 많은 현대 언어가 유럽과 인도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중앙 아시아 부족들의 언어로부터 생겨났다.

기원전 12,000년이 되자, 안드 족속의 3/4은 북부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였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탈출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민 인파의 65퍼센트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안드 족속은 유럽 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다. 그들은 또한 사하라의 산긱 종족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이 안드 족속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정복하는 아리아인이었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ㆍ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이 종족 132명은 일본에서 작은 배로 떼지어 출발하여 결국 남 아메리카에 도돌했고, 안데스의 토착민과 결혼하여 잉카 통치자들의 조상을 세웠다.

안드 족속의 정복은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지나간 나라에 유머ㆍ예술ㆍ모험ㆍ음악ㆍ제조업을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고 농업에 전문가였다.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안드 족속은 기원 8000년세 6000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세 차례 인파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동쪽에서 산지 부족들의 압력과 서쪽 평야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쫓겨났다.

65퍼센트는 카스피 바다의 길로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의 백인과 섞였다.

10퍼센트는 동쪽으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10퍼센트는 북향 길을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가 안드 족 황인 거주자들과 섞였다. 이 연합은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크게 개선하였다.

10펴센트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에집트로 들어갔다.

5퍼센트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 집단은 우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잔재이다.

안드 족속은 기원전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비웠다. 그러나 둘러싼 산긱 종족들과 안드 족의 후손은 후일에 침공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둘째 동산의 문화는 열등한 종족들이 더 침투함으로 막을 내렸다. 문명은 나일 강과 지중해 섬들로 옮겨 갔다.

7.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진 홍수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홍수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지질학적 변화로 메소포타미아 유역이 위험해졌다.

첫 에덴이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지중해 동부 해안의 산,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산들이 높아졌다. 이처럼 강설량이 늘어나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큰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거의 1천 년 동안 수십 도시가 이러한 홍수 때문에 버림받았다.

거의 5천 년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의 유래를 아담까지 추적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발견했다. 한 사제가 그런 수고를 집어치우고, 노아 홍수 시절에 온 세상이 물에 빠졌다고 이야기를 줄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아ㆍ방주ㆍ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발명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이후로 세계적 홍수는 한 번도 없었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인 때는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실재한 인물이었다. 그는 에렉 가까이 있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노아는 많은 비웃음을 샀다. 해마다 강가의 촌락으로 가서, 홍수가 오리라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홍수가 몹시 커져서, 갑자기 솟아오른 물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으나, 노아와 그 직계 가족은 배에서 구제되었다.


에렉에 있던 기둥의 모자익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난 것은 안드 족속 문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홍수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사라졌다.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는 이 지역에,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된다. 달라마시아 시절은 흔적은 페르시아 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에, 물 밑에 잠겨 있다.

8. 수메르인―마지막 안드 족속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붕괴를 가져왔을 때, 한 소수(小數)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수메르인이었고, 기원전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줄기는 대체로 안드 족속이 되었다.

이 홍수가 있던 시절에 수사가 크게 번성하였다. 달라마시아는 물에 잠겼고, 높이 있던 마을 수사는 공예품 본부가 되었다. 이 홍수가 줄어들자, 우르는 도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천 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있었고, 그 이후에 퇴적물이 땅을 현재 위치까지 쌓아 올렸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사람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살던 미개인의 침공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이 목자와 사냥꾼들은 말을 많이 소유했고, 이것은 그들을 군사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거주자들을 유럽, 서 아시아, 북 아프리카로 몰아냈다.

이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은 우수한 안드 혈통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문명의 잔재를 기꺼이 동화했고, 강 유역에 있던 부족들의 예술과 수메르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셋째 바벨 탑까지 세우려 애썼고, 나라 이름을 바빌론으로 불렀다.

동북부에서 온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페르시아 만 근처에 거주하던 안드 족속의 잔재를 정복하지 못했다.

이 수메르인은 우수한 지능, 군사적 운하 체계 때문에 자체를 방어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 온 이 침공자들은 이 수메르인이 유능한 선생이요 행정가인 것을 신임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겼다.

초기의 수메르 연방이 깨어진 뒤에, 셋 족속의 후손이 도시 국가들을 다스렸다. 각 도시는 자기네 신이 모든 다른 신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도시의 사제들이 통치하던 기간을 키시의 사제 사르곤이 끝냈다. 그는 자기가 임금이라 선포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인접한 땅을 정복하였고, 이것은 도시 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왔다.

키시 연방이 깨어진 뒤에, 오랫동안 도시들 사이에 전쟁이 따랐고, 통치권은 수메르ㆍ아카드ㆍ키시ㆍ에렉ㆍ우르ㆍ수사 사이에 다양하게 바뀌었다.


하무라비 법전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은 북쪽의 수 족속과 구 족속에 패배하였고, 수메르의 서울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하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되자, 수메르인은 셈 족속에게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라가시의 임금 구데아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이 날뛰었다.

이것이 아담 이후에, 보라 인종과 그들이 살던 두 강 사이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바깥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했다. 그러나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 20세기 문명의 뒷받침이 되었다.

   
  79편, 동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아시아가 인류의 고향이다. 이 대륙의 남쪽 반도에서 안돈과 폰타가 태어났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고지에서, 그들의 후손 바도난은 원시 문화 중심의 기초를 세웠다.

여기서 산긱 민족들이 안돈의 혈통으로부터 분화되었다. 남서 아시아에서 달라마시아 사람, 놋 족속, 아담 족속, 안드 족속들의 문명이 이어졌고, 여기서부터 현대 문명의 잠재성이 세계로 퍼졌다.

1. 투르키스탄의 안드 족속

투르키스탄에서 안드 족속은 유럽으로 들어갔고, 메소포타미아의 민족들은 황인의 땅으로 갔다.

기원전 8천 년이 되어, 중앙 아시아가 건조해져서 안드 족속은 저지대와 바닷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인이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기후 조건 때문에 안드 족속이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 그들은 목자가 되지 않고서. 제조업과 무역에 전념하는 여러 도시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항상 심해지는 가뭄 때문에, 카스피 바다의 남쪽과 동쪽 땅에서 안드 족속의 대탈출이 일어났다. 말을 탄 바빌로니아인이 메소포타미아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드 족속은 메소포타미아와 투르키스탄에서 사라졌다.

중앙 아시아의 안드 족속의 군사적 재능은 서기 1200년에 나타났다. 징기스칸 밑에서 몽고인이 아시아 대륙의 반 이상을 정복하였다. 옛날의 안드 족속처럼 이 용사들은 "하늘에 계신 유일한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2. 안드 족속의 인도 정복

인도는 유란시아의 민족들이 모두 섞인 유일한 지역이며, 안드 족속의 침공이 마지막 혈통을 더했다. 인도의 북서쪽 고지에서 산긱 종족들이 태어났고, 각 종족의 사람들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침투했다.

2차 산긱 혈통들이 인도를 지배하였고, 청인과 홍인이 대체로 없었다. 홍인은 두 아메리카에서 자신을 죽이고 있고, 청인은 유럽에서 즐겁게 놀고, 아담의 후손들은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피부가 검은 민족들과 섞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원전 15,000년 무렵에, 투르키스탄과 이란 전역에서 인구가 팽창하여 인도를 향하여 안드 민족의 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남쪽과 동쪽의 열등한 사람들을 버마와 중국으로 몰았지만, 침공자들은 사라진 종족이 되었다.

이 안드 족속은 서로 결혼하는 것에 제한을 두어 종족 신분을 보존하려고 했지만, 안드 족속은 기원전 10,000년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종족의 혼합은 문화의 융통성을 촉진하므로 언제나 유익하지만, 열등한 요소가 주류를 이룬다면, 이 이익은 잠시일 뿐이다. 여러 나라 말을 쓰는 문화는 열등한 혈통과 충분히 간격을 두고 우수한 혈통이 자체를 번식해야 보존될 수 있다. 우수한 자의 번식이 줄어들면서 열등한 자가 제한 없이 번식하는 것은 문명의 자살이 된다.

3.드라비다인의 인도

인도에서 안드 족속과 토종 핏줄의 혼합은 결국 드라비다 족속을 낳았다. 초기의 드라비다인은 문화적 능력이 있었는데, 안드 족 유산이 묽어짐에 따라서 이 능력은 약화되었다.

인도 종족들의 우수한 문화는 드라비다인이 지배하던 시절로부터 유래하며, 안드 족속과 아리아인의 침공을 통하여 셋 사람 사제들이 많이 인도로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드라비다인은 기원전 7000년이 되어 메소포타미아까지 정기적으로 여행하였고, 이들의 해상 운송은 수메르의 해안을 따라 밀고 들어갔다. 글쓰는 기술과, 알파벳이 이 뱃사람들을 통해서 수메르에서 수입되었다.

이 상업 관계를 통해서 도시 생활의 세련된 물건과 사치품이 일찍부터 나타났다. 생물학적 한계가 있었어도, 드라비다인은 우수한 문명을 세웠다.

4. 아리아인의 인도 침공

안드 족속의 두 번째 인도 침투는 기원전 제3 천년의 중간에 일어났고, 이 아리아인의 침공은 거의 5백 년 동안 벌어졌다.

이 침공자들은 인도의 정복을 끝내지 않고 소홀히 하여 파멸을 만났다.

간지스 강 평야에서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은 결국 섞여서 높은 문화를 일으켰다.

인도에는 다소 민주적인 아리아인 체제로부터 군주 형태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 조직이 번성하였다. 사회의 특징은 카스트였는데, 종족의 신분을 지속하려는 노력으로 아리아인이 이를 시작하였다.

4대 카스트 중에 첫째를 빼고, 모두가 아리아인 정복자가 열등한 백성과 피가 섞이는 것을 막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세운 것이다. 상급 카스트는 셋 사제들로부터 유래한다. 20세기의 브라만들은 둘째 동산의 사제들로부터 직계로 내려온 문화적 후손이다.

기원전 이전 6세기에 일어난 불교는 인도에서 버티지 못했고, 마호메트의 침공이 있기 전에 망했다.

문화는 생물학적 기초 위에 세워지지만, 카스트만 가지고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킬 수 없었다.

5. 홍인과 황인

인도에 관한 이야기는 안드 족속이 오래 된 진화 민족들을 정복하려다가 궁극에 그 속에 파묻혀 사라진 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 아시아의 이야기는 홍인과 황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인과 황인은 저하된 네안데르탈인을 만나지 않고 1차 산긱 부류의 우수한 잠재성을 간직하였다.

인구의 팽창으로, 북쪽으로 움직이는 황인종이 홍인 지역으로 밀고 들어가자, 아시아의 기름진 땅을 놓고 투쟁이 시작되었다.

20만 년이 넘도록 홍인종과 황인종은 지독한 싸움을 벌였다. 초기에는 홍인들이 대체로 성공했으나, 황인은 전쟁 기술을 빨리 배웠고,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능력을 보였다. 중국인은 뭉친 가운데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운 사람이었고, 이들은 용서 없이 북쪽으로 행진을 계속하였다.

10만 년 전에, 홍인 부족들이 베링 지협 위로, 서반구로 가는 통로가 지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홍인은 아시아 대륙을 버리고 떠났다. 북쪽의 중국 종족들은 홍인의 핏줄을 많이 동화하였고, 이렇게 어지간히 이득을 보았다.

북 아메리카의 인디안은 안드 족속과도 접촉이 없었고, 아담이 오기 5만여 년 전에, 아시아를 떠났다. 안드 족속이 이동하던 시절에 순수 홍인의 혈통은 북 아메리카에서 유목민이요, 농사를 짓고 사냥하던 사람이었다. 유럽의 백인 종족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홍인은 나머지 세계와 접촉이 없었다.

안드 족속을 제외하면, 홍인과 황인이 높은 정도의 문명을 이룩하였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문화는 오나모나론톤 중심에 있었으나, 기원전 35,000년이 되어 사라졌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남 아메리카의 산지에서 지속된 문명은 주로 홍인이지만, 황인ㆍ주황인ㆍ청인이 상당히 섞인 종족이 세운 것이다.

안드 족속 혈통이 페루에 다다르기는 했어도, 이 문명은 산긱의 진화적 산물이었다. 에스키모와 폴리네시아 안드 족속 몇을 제외하고, 서반구의 민족들은 서기 1천 년의 끝까지, 나머지 세상과 접촉이 없었다. 최초의 멜기세덱의 계획에는 아담의 순수 혈통 후손 1백만 명이 남북 아메리카의 홍인을 개량하러 가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6. 중국 문명이 밝아오다

북 아메리카로 홍인을 몰아낸 뒤에, 중국 민족은 동 아시아의 여러 강 유역에서 안돈 족속을 깨끗이 쓸어 버리고 시베리아와 투르키스탄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일본 민족의 선조는 기원전 12,000년까지 본토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승리한 황인 부족들은 물가를 따라서, 그리고 강 상류에 최초의 중심들을 세웠다.

2만 년 전에 중국인의 선조는 황하와 양자강을 따라서 중심을 열두 군데 세웠다. 신장과 티벳으로부터 우수한 인파가 꾸준히 도착하여 이 중심들이 강화되었다.

고대 황인종의 우수성은 4대 요인 때문이다:

(i) 유전 요인. 홍인종과 황인종은 저하된 핏줄과 섞이는 것을 피했다. 남쪽의 중국인은 녹인종을 얼마큼 흡수하였고, 인도에서 열등한 민족들의 침투로 약해졌다.

(ii) 사회적 요인. 내부의 평화 성향은 인구 증가에 기여했다. 황인은 대규모로 문화ㆍ사회ㆍ정치 문명을 처음으로 이룩하였다.

기원전 15,000년에 중국인의 수는 1천2백만이 채 되지 않았고, 하나의 공통 언어를 쓰는 집단이었다.

(iii) 영적 요인. 싱랑톤이 선포한 하나의 진리를 숭배함으로 중국인은 오랫동안 대부분의 다른 민족들보다 앞섰다. 진실을 숭상하는 정신은 자연 법칙의 연구를 자극하였다.

(iv) 지리적 요인. 중국은 서쪽에 산, 동쪽에는 태평양의 보호를 받는다. 오직 북쪽에 길이 열려 있지만, 홍인의 시절부터 후일에 안드 족속의 후손이 오기까지, 공격하는 민족이 북쪽을 차지하지 않았다.

산의 장벽이 없고 나중에 영적 문화가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안드 족속을 더 많이 끌어들였을 것이다.

7. 안드 족속이 중국으로 들어가다

약 1만5천 년 전에, 안드 족속이 큰 떼를 지어, 디다오 (狄道) 통로를 가로질러서, 간쑤(甘肅)의 중국 촌락들 사이에서, 황하 상류 유역에 퍼지고 있었다. 이 서방 침투는 대체로 절반이 안돈 족속이요, 절반은 안드 족속이었다.

황하 유역에 생긴 문화 중심들은 양자강의 촌락들보다 더 진취성이 있었고, 이 우위는 늘 유지되었다.

안드 족속이 많지도 않았고 그 문화도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섞인 것은 더 능력 있는 혈통을 낳았다.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진보된 문화를 가져왔다. 안드 족속의 전통은 중국인의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옛 전설은 "신들의 땅"이 서쪽에 있다고 본다.

중국 민족은 투르키스탄에서 기후가 변하고 안드 족속의 이민이 도착하고 나서, 기원전 1만 년이 되기까지 도시를 세우고 제조업을 발달시키지 않았다. 금속 가공과 제조업 기술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에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의 비슷한 시간 계산, 천문학, 행정 방법은 두 중심 사이에 상업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중국 상인은 수메르 시절에도 투르키스탄을 거쳐서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했다.

8. 후일의 중국 문명

홍인은 너무 전투를 많이 겪어서 고생했지만, 아시아를 철저히 정복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국가의 발전이 늦어졌다는 것이 아주 빗나간 말은 아니다. 중국인은 잠재성을 적절히 개발하지 못했는데, 바깥의 침공자들이 주는 자극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잘 발달된 가족 생활은 조상 숭배를 낳았다.

싱랑톤이 가르쳤던 "하나의 진리"를 믿는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황인종은 미지의 것을 추구하기보다, 옛 것을 존중하는 성향이 깊어짐으로, 세상에서 가장 빨리 진보하던 문명이 정체하게 된 이유이다.

기원전 4000년과 500년 사이에 황인종의 정치적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몇천 년 동안 군사 행동의 필요가 없게 된 것은 중국인을 극도로 평화롭게 만들었다.

산시와 허난에서 농본주의자들이 부닥친 부닥친 치수(治水) 문제는 집단의 협동을 요구했다. 그러한 관개 및 토양 보존의 문제는 서로 의존하는 성향을 길렀고, 그 결과로 농업 집단들 사이에 평화가 촉진되었다.

학교가 세워지고 글쓰기가 지식의 보급에 이바지했으나, 복잡한 한자는 인쇄술이 일찍 나타났는데도, 지식 계급의 수를 한정시켰다. 중국인 사이에서 하나님 개념은 상제(上帝) 숭배에 간직된 채로 남아 있다.

조상 숭배의 큰 단점은 뒤를 돌아보는 철학을 조장하는 것이다. 지난날로부터 지혜를 거두는 것이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지난날을 진실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진실은 언제나 현재에 살고, 각 세대의 사람들 안에서 새롭게 표현된다.

조상 존중의 큰 장점은 그러한 태도가 가족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족은 다른 어떤 민족도 접근하지 못하는 그런 종교적 중요성까지 얻었다.

조상 숭배가 강요하는 효도와 가족에 대한 충성심은 우수한 가족 관계를 보장했고, 문명을 보존하는 다음 요소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i) 재산의 보존.

(ii) 한 세대를 넘어서 지식을 한데 모은다.

(iii) 예술과 과학을 아이들에게 효과 있게 교육한다.

(iv) 도덕과 윤리 감각의 향상.

중국 문명은 안드 족속이 오면서 시작하여 기원전 6세기까지 형성된다. 이 시기에 중국인은 원시 농경사회로부터, 도시ㆍ제조업ㆍ금속 가공ㆍ상업 교류ㆍ정부ㆍ글쓰기ㆍ수학ㆍ예술ㆍ과학ㆍ인쇄술을 포함하는 더 높은 사회 조직으로 성장했다.

비록 후퇴가 여러 번 있었으나 한(漢)의 아들들의 문명은 20세기 시대에 바로 이르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계속 진보한 그림을 제시한다. 백인 종족의 기계 및 종교의 발전은 높은 수준이었으나, 가족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적 도덕 면에서 중국인을 뛰어넘은 적이 없다.

이 옛 중국 문화는 인간의 행복에 많이 기여했다. 몇 세기 동안 이 문명은 지난날의 월계관에 기대고 있었지만, 지금도 새 목표를 향한 투쟁을 위하여 다시 깨어나고 있다.

   
  80편, 서양에서 팽창하는 안드 족속

 

유럽의 청인은 큰 문화적 문명을 혼자서 일으키지는 않았어도, 아담화된 그 핏줄이 안드 침공자들과 섞였을 때, 진취적 문명을 이룩할 강력한 생물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현대의 백인 종족들은 산긱 종족(주로 청인)과 섞이게 된 아담 혈통의 남은 핏줄을 포함한다. 모든 백인 민족은 안돈의 혈통이 상당히 있고, 놋 족속의 혈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1. 아담 족속이 유럽으로 들어가다

마지막 안드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떠나기 전에, 다수가 모험가ㆍ선생ㆍ상인ㆍ군인으로서 유럽으로 들어갔다. 옛 시절에 지중해 지역은 지브랄타 지협(地峽)과 시실리 육지 다리로 보호된 (바다가 아니라) 계곡이었다. 옛날의 해상 무역의 얼마큼은 이 내륙 호수에서 있었고, 거기서 북쪽의 청인과 남쪽의 사하라인이 동에서 온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을 만났다.

지중해의 동쪽 계곡에서 놋 족속은 광범위한 문화를 세웠고, 여기서 남부 유럽과 북 아프리카로 파고들었다. 놋 및 안돈 종류의 시리아인은 나일 강으로부터 일찍부터 도기와 농업을 들여왔다.

3만 년이 넘도록 에집트는 메소포타미아인을 받았고, 나일 강 유역의 문화는 부유하게 되었다. 1만5천 년까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이 일어났다. 사하라는 풀 뜯는 땅이었고, 거기에 목자와 농사꾼이 퍼져 있었다.

아담의 피는 대부분의 인종들에게 나누어졌으나, 인도의 혼합 종족과 아프리카 종족들은 아담 족속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홍인이 가까이 있었더라면 아담 족속은 홍인과 자유로이 섞였을 것이다. 황인도 멀리 아시아에 떨어져 있어서 접촉하기 어려웠다. 아담 족속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밀려났을 때, 그들은 자연히 유럽의 청인 종족들과 섞였다.

청인은 그때 유럽을 휩쓸었고, 보라 인종과 청인종 사이에 성적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동하는 아담 족속은 천천히 청인종의 높은 부류와 연합했고, 한편 남은 네안데르탈 혈통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렸다. 이러한 종족 혼합은 열등한 핏줄의 제거와 함께, 우수한 청인 집단을 열둘 이상 낳았는데, 크로마뇽인이 그 중에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이민은 거의 순전히 유럽으로 갔고, 이러한 상황이 현대 유럽 문명의 전제 조건을 결정하였다.

2. 기후와 지질의 변화

보라 인종이 유럽으로 팽창한 것은 갑작스런 기후와 지질의 변화로 단축되었다. 북쪽의 빙원들이 물러가자 사하라의 큰 목초 지역이 불모의 사막으로 변했다. 사하라의 고원에서 살던 거주자들이 흩어졌는데, 이들은 키가 작고 갈색 머리였으나 얼굴이 길었다.

순수한 남인 부족들은 중앙 아프리카의 숲으로 이주했고, 늘 거기에 남아 있었다. 혼합된 무리는 세 갈래로 흩어졌다. 서쪽의 우수한 부족들은 스페인으로, 동쪽의 후진 부족들은 아라비아로, 중앙 집단은 나일 강과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갔다.

데칸으로부터 지중해의 남북 바닷가를 따라서 흩어진 현대 민족들 사이에는 2차 산긱 종족이 공통된 핏줄이다.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후의 변화가 있을 때, 잉글랜드는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지중해의 서쪽 분지를 보호하던 지브랄타 지협이 무너졌으며, 이 내륙의 호수를 대서양 수준까지 재빨리 올려 놓았다. 대번에 시실리 육지 다리가 물 속에 잠겼고, 하나의 바다 지중해를 만들고 이를 대서양과 이었다. 온 세계 역사에서 홍수로 최대의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지중해 분지가 이렇게 물에 잠긴 것은 아담 족속의 서향 이동을 즉시 줄였다. 아담 족속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북쪽으로 여행하고 투르키스탄에 흩어진 촌락에서 사냥하고 짐승을 기르고 땅을 갈았다. 이들이 유럽으로 들어가서 뒤떨어진 청인의 문화를 발견했는데, 이 지역이 메소포타미아와 전혀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3. 크로마뇽 청인

청인 문화의 옛 중심은 유럽의 모든 강들을 따라서 자리를 잡았지만, 강들의 흐름이 바뀌었고 오직 솜 강이 빙하기 이전 시대의 경로 그대로 지금도 흐른다.

아담 이후 시절에, 초기 유럽의 문명은 청인의 활력과 아담 족속의 창조적 상상력이 섞임으로 생긴 것이다. 허다한 자가 처녀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경향 때문에,아담 족속은 그들의 종교를 크로마뇽인에게 인식시키기 어려웠다.

청인은 어떤 거래에도 완전히 정직했고, 혼합된 아담 족속처럼 성적 타락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처녀기를 존중했고, 전쟁 때문에 남자가 부족했을 경우에만 일부다처(一夫多妻)를 실행했다.

이 크로마뇽 민족은 용감한 종족이었다. 부모 양쪽이 아이들을 훈련하였다. 나이가 어릴 때, 여자는 가정 기술과 소박한 농업을 통달했고, 남자는 사냥꾼이요 무사였다.

청인은 배 만들기에 숙달되었다. 통나무 오두막을 세웠는데, 이것은 일부가 땅 밑에 있었고,가죽으로 지붕을 덮었다. 남쪽의 크로마뇽인은 대체로 동굴과 석굴에서 살았다.

청인은 용기가 있었지만 예술가였다. 아담 족속과 섞이면서 창조적 상상력이 가속되었다.

4. 안드 족속의 유럽 침공

안드 족속은 유럽을 일곱 번 침공하였고, 마지막에 도착한 자들은 세 차례 인파를 이루어 말을 타고 왔다.

셋째와 넷째 침공 사이에, 시베리아에서 안돈 족속의 한 떼가 북쪽에서 유럽으로 들어갔고, 즉시 안드 부족들에게 동화되었다.

이보다 일찍 있었던 순수한 보라 인종의 팽창은 평화적이었다. 아담 족속은 평화를 좋아하고, 놋 족속은 싸우기를 좋아했다. 이 두 핏줄의 연합은 유능하고 공격적인 안드 족속을 낳았고, 이들은 군사 정복을 실행했다.

말은 서양에서 안드 족속의지배를 결정한 요인이었다. 그 전에 안드 족속의 인파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먼 곳에서는 붕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후일의 인파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단결된 무리로 유럽에 이르렀다.

안드 기마병들이 기원전 제6 및 제7 천년에 등장했을 때,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제외하고, 세계 전체에서 문화의 진보는 제한되었다. 이 기마병들이 청인 중에 우수한 요소를 흡수하고 못한 요소를 없애면서, 이들은 섞여서 한 민족이 되었다. 이들은 노르딕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앙글로 삭슨 종족들의 선조였다.

오래지 않아서 우수한 청인 핏줄은 유럽 전역에서 안드 족속에게 완전히 흡수되었다.

5. 안드 족속의 북 유럽 정복

3천 년 동안 북쪽 안드 족속의 군사 본부는 덴마크에 있었다. 여러 세기 동안 이 안드 족속과 정복된 민족들이 혼합되면서, 이들은 안드 성향이 줄어들고, 갈수록 더 백인이 되었다.

청인은 백인 기병 침공자들에게 굴복했다. 크로마뇽인이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혼합된 백인 부족들은 우수한 지능과 수 때문에, 이들을 멸종시킬 수 있었다.

백인과 청인 사이의 결정적 싸움은 솜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5백 년이 넘게 영토를 지켰지만, 이 크로마뇽인은 백인 침공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승리한 사령관 토르는 북쪽 백인 부족들의 영웅이 되었다.

가장 오래 버틴 청인의 본거지는 프랑스 남부에 있었다. 후일의 정복은 열등한 자를 죽이고 우수한 자와 결혼함으로 진행되었다.

한 열등한 포로가 부적당하다고 안드 족 장로 회의가 판결하면, 그를 물속에 처넣어 죽이는 예식을 치렀다. 이렇게 청인은 빨리 끝장이 났다.

크로마뇽 청인은 현대 유럽 종족들의 생물학적 기초였으나, 나중에 강건한 정복자들에게 흡수됨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안드와 청인의 연합은 북쪽의 백인 종족들을 일으켰다.

기원전 5000년이 되어서, 백인 종족들은 북 유럽에 두루 세력을 떨쳤다. 청인과 둥근 얼굴의 안돈 족속이 한동안 중앙 유럽을 장악했다.

6. 나일 강가의 안드 족속

에집트 문화가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서 파생되었어도 선두에 서는 듯하였다. 한 집단을 제외하고 다른 여섯 집단이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마지막 탈출이 있었을 때 에집트는 솜씨 있는 예술가와 장인(匠人)을 아주 많이 얻어서 운이 좋았다. 이들은 에집트의 금속 가공 기술에 크게 이바지했다.

안드 족속은 에집트에서 첫 돌 구조물을 지었다.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임호텝 수상(首相)이 세웠는데, 그는 안드 족속에서 건축의 천재였다. 그 이후로 건축 기술은 쇠퇴하였다.

7. 지중해 섬들의 안드 족속

메소포타미아에서 문화가 쇠퇴하는 동안에, 얼마 동안 지중해 동부의 여러 섬에서 우수한 문명이 지속되었다.

기원전 12,000년 무렵에 안드 족속에서 한 명석한 부족이 크레테로 이주하였다. 이 집단은 놋 족속의 반 계열과 서로 결혼했던, 키 작은 안드 족속이었다. 이들은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몸이 크로 열등한 동료들에게 본토에서 밀려났다.

크레테로 간 이 이민들은 직물ㆍ금속ㆍ도기ㆍ배관(配管)에, 그리고 돌을 건축 재료로서 사용하는 데 솜씨가 있었다. 그들은 글쓰기에 착수했고, 목자와 농사꾼으로서 생계를 이었다.


크노소스 궁전의 벽화

크레테에 이들이 정착한 뒤 거의 2천 년이 되자, 아담손의 키 큰 후손들이 그리스까지 갔다. 사토는 이 그리스인의 선조를 서쪽으로 인도했는데, 그는 아담손과 라타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집단은 37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태동하는 백인 종족 중에서 가장 귀중한 핏줄이었다. 육체적으로, 이들은 첫 에덴 시절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리스와 에게 해 제도(諸島) 지역은 서양의 무역ㆍ예술ㆍ문화의 중심으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를 이어받았다. 그리스 민족의 예술과 천재가 아담손과 라타의 후손으로부터 받은 유산이었다.

에게 해 지역은 다섯 문화 단계를 거쳤고, 각자 이전보다 영적 수준이 낮았다. 나중에 다뉴브 노예들의 후손에 압도되어, 화려한 예술의 시대가 사라졌다.

이 시기에 카인의 후손들 사이에서 어머니 숭배가 유행하였다. 이 어머니 숭배는 그리스도의 시절까지 지속되었고, 나중에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구실로 기독교에 합병되었다.

기원전 6500년 무렵까지 안드 족속의 영적 유산이 쇠퇴하였다. 아담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고, 수가 많은 인종들 속에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아담의 순수한 세 혈통은 수메르와 북 유럽과 그리스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아라비아로부터 섞인 종족들이 흘러들어와서 안드 족속의 잔재를 바깥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기원전 약 5000년에, 진취적 메소포타미아인의 무리가 사이프러스 섬에 정착하였으나, 약 2천 년 뒤에, 북쪽에서 온 미개한 떼가 이 문명을 뿌리 뽑았다.

또 하나의 식민지가 지중해에, 후일에 카르타고 자리 근처에 정착했다.

에집트의 문화가 쇠퇴했을때, 유능한 가족들이 크레테로 달아나서 이 문명을 크게 키웠다. 에집트에서 열등한 무리들이 도착하여 크레테 문명을 위협했을 때, 문화가 발달한 가족들은 그리스로 옮겨 갔다.

그리스인은 선생이요 예술가일 뿐 아니라, 큰 상인이요 식민지를 일으키는 자였다. 이들이 서쪽으로 문화의 전진 기지들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명의 잔재가 유럽 종족들 안에서 지속되었다.

8. 다뉴브 강의 안돈 족속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안드 종족들은 북으로 유럽으로 가서 청인과 섞였고, 서쪽으로 지중해 지역으로 가서 사하라인과 남쪽 청인 혼혈의 잔재와 섞였다. 얼굴이 넓은 안돈 부족 생존자들은 백인종의 이 두 가지를 널리 떼어놓았다.

안돈의 이 후예는 유럽의 중앙 및 남동부의 산 지역에 흩어졌다. 고대의 헷 족속은 안돈 족속의 핏줄로부터 내려온다. 그들은 창백한 살갗과 넓은 얼굴을 가졌다. 이 핏줄은 아브라함의 조상에 들어 있었다. 유대인 후손은 안드 족속의 문화와 종교를 가졌어도, 안돈 말을 사용했다.

이탈리아, 스위스, 남 유럽의 호수에서 통나무 기둥 위에 세운 집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아프리카인, 에게인, 그리고 다뉴브인이었다.

다뉴브인은 안돈 족속이었다. 그들은 도기를 만들고, 유역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크레테 섬에서 온 선교사들이 수고한 결과로, 다뉴브인은 어머니 숭배자가 되었다. 중앙 유럽의 상당 부분은 얼굴이 넓적한 백인 종족이 차지했다.

9. 세 백인 종족

안드 종족의 이동이 끝날 때, 유럽에서 종족의 혼합은 다음과 같이 세 백인 종족으로 나뉘었다:

(i) 북방 백인 종족. 이 노르딕 종족은 주로 청인과 안드 족속의 혼합이었으나, 또한 안돈 족속을 얼마큼, 그리고 소량의 홍인 및 황인의 피를 품었다. 초기의 노르딕인은 얼굴이 길고, 키가 크고 금발이었다.

침공하는 노르딕인이 마주친 것은 다뉴브인의 문화였다. 노르딕인은 다뉴브인을 상대로 큰 상업을 일으켰고, 그들로부터 어머니 숭배와 죽은 사람 화장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어째서 먼저 있던 이 백인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가 설명한다. 이 백인들은 또한 거처를 짓고, 동굴에서 살지 않았다.

(ii) 중부 백인 종족. 이 무리는 청인, 황인, 안드 족속의 핏줄을 포함해도, 주로 안드 족속이었다. 거의 2만 년 동안, 안돈 족속은 안드 족속에게 중앙 아시아의 북쪽으로 밀려났다. 기원전 3000년이 되자 건조한 기후는 이 안돈 족속을 투르키스탄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기원전 2500년이 되기까지, 안돈 족속은 서쪽으로 움직여 유럽에 다다랐고, 오래 지속된 문화적 후퇴를 낳았다.

(iii) 남방 백인 종족. 이 지중해 족속은 갈색 머리를 했고, 안드 족속과 청인의 혼합으로 이루여졌다. 또한 사하라인의 피도 상당히 주입되었다.

지중해 바닷가의 땅에는 유목민이 침공하여 육지의 교통과 무역을 중지시켰다. 따라서 해상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지중해 분지의 바닷가 지역에 두루, 안드 족속이 갑자기 팽창하였다. 이 시절 이후로 이 종족은 아라비아의 청인, 황인, 안드 족속과 더 혼합되었다. 이글은 대체로 키가 작고, 얼굴이 길고, 갈색 머리를 했다.

북쪽에서 안드 족속은 전쟁과 결혼을 통해서 청인을 말살했지만, 남쪽에서는 청인의 큰 무리가 살아남았다. 바스크인과 베르베르인은 청인의 살아남은 두 가지이지만, 이들도 사하라인과 많이 섞였다.

이것이 기원전 약 3000년에 중앙 유럽에서 나타난 종족 혼합을 묘사한다.

이때는 신석기(新石器) 시대가 청동기 시대와 겹치는 시절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머니 숭배와 관련된 청동기 시대였다. 유럽의 백인 종족들은 건축가였고, 스톤헨지와 비슷하게, 태양 숭배로서 큰 돌들을 세워놓기를 좋아했다.

비교적 최근의 태양 숭배의 미신이 지금도 브리타니에 남아 있다. 기독교인이 된 지 1500년이 넘었는데도, 이 브리타니인은 악한 눈을 쫓아내기 위하여 신석기 시대의 부적을 아직도 지닌다.

그러나 백인 종족들을 노르딕, 알프스, 지중해 종족으로 주제넘게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때는 그렇게 분류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 종족이 널리 섞여서 그럴 수 없다.

이 유럽의 문화는 5천 년 동안 성장하고 어느 정도 서로 섞였다. 이 문화는 북 아메리카의 세계적 인구 속에서 섞이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 이 대륙의 앞날은 사회 문화의 수준 뿐 아니라, 거기에 들어가는 종족들의 질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81편, 현대 문명의 발전

 

칼리가스티아와 아담의 두 임무로 세상을 개선하려던 계획이 실패함으로 차질이 생긴 것과 상관 없이, 인종의 기본적 유기체는 종족들이 계속 진보하게 만들었다.

보라 인종의 영향은 계획되었던 것보다 수가 적기는 했어도, 문명의 진보를 낳았고, 이 영향은 아담 이후에, 인류가 거의 1백만 년 동안 진보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1. 문명의 요람

아담 시절 이후로 약 3만5천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은 서남 아시아에 있었고, 이것은 나일강 유역의 동쪽에서 아라비아 북부를 가로지로고 메소포타미아를 거쳐서 투르키스탄으로 뻗었다.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을 그치게 한 것은 북 아프리카와 서 아시아의 기후와 지질의 변화였다.

기후의 진화로 인하여 유라시아 사람은 사냥을 버리고, 동물 사육과 농사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화는 느릴까 싶지만, 무섭게 효과가 있다.

초기의 농사꾼들이 노예를 널리 이용했기 때문에, 농부는 예전에 사냥꾼과 목자에게 업신여김을 받았고, 오랜 세월 동안 땅을 경작하는 것은 천하게 생각되었다. 흙을 만지는 일은 저주라는 개념이 생겼는데, 오히려 흙으로 수고하는 것은 모든 축복 가운데 으뜸이다.

사람은 보통 사냥꾼에서, 목자였던 시절을 거쳐서 농부로 진화했다. 사냥에서 농사로 바로 넘어가는 현상은 보라 핏줄이 많이 포함된 혼합 종족들 사이에서만 일어났다.

진화 민족, 특히 중국인은, 먹을 것으로 무덤에 둔 씨앗이 싹트는 것을 보고서, 농작물 재배하는 것을 일찍부터 배웠다.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자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위쪽 고지에서, 동산에서 개량한 밀과 보리를 심었다.

생활 조건이 어쩔 수 없이 변화되어 인류의 상당수가 잡식을 하게 되었다. 가축의 고기를 섞어 먹는 것은 이 고대 민족들에게 더욱 건강과 활력을 주었다.

2. 문명의 도구

문명의 성장은 도구(道具)가 발전하는 데 달려 있다.

사회적으로 문화가 싹트고 진보하는 현대의 장면에서 사는 너희는 사회와 문명에 대하여 생각할 겨를이 조금 있다. 너희의 옛 선조들은 돌이켜보고 사회적인 생각을 할 여가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명에서 처음 4대 진보는 다음과 같다:

(i) 불을 다루기.

(ii) 동물 길들이기.

(iii) 포로를 노예로 만든 것.

(iv) 사유(私有) 재산.

불은 처음으로 큰 발견이었고, 과학 시대로 인도하는 문을 열었지만, 원시인은 자연 원인이 보통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했다.

자연 현상을 비인격 현상으로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참 원인을 찾으려는 두려움 없는 연구가 현대 과학을 낳았다. 그러한 연구가 점성학을 천문학으로, 연금술을 화학으로, 마술을 의술(醫術)로 바꾸었다.

동물을 길들임으로 사람은 손에 살아 있는 연장을 쥐게 되었고, 사람은 이러한 동물이 없이 원시 상태에서 문명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길들이기에 적당한 동물의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어째서 다른 지역보다 아시아에서 문명이 빨리 진보했는가 설명한다.

투르키스탄의 안드 족속은 말을 널리 길들였고, 이것이 어째서 그들의 문화가 오랫 동안 지배했는가 설명한다.

노예 제도와 토지 사유(私有) 제도는 농업과 함께 왔다. 노예 제도는 주인의 생활 수준을 높이었고, 사회의 문화를 누릴 여가를 주었다.

과학 문명은 천천히 인류에게 늘어나는 자유를 부여한다. 사람이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할 여가를 가질 때까지, 문명은 세워지기는커녕, 결코 번영할 수 없다.

사람은 먼저 은신처를 취하고 바위 선반 밑이나 동굴에 거주했다. 다음에 나무와 돌을 가족 움막에 짓는 데 이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집을 지었고, 벽돌과 기타 건축 자재를 만들었다.

투르키스탄 고지의 민족들은 처음으로 나무로 집을 지었다. 평야에 어디나 인간의 거처는 벽돌로 지었고, 나중에는 구운 벽돌을 썼다.

강가에 살던 종족들은 동그라미 안에 높은 장대들을 세워서 움막을 지었다. 가로지르는 갈대를 엮어 지은 움막은 광주리 같았다.

이 초기의 움막으로부터 광주리 짜는 생각이 따로 생겨났다. 도기를 만드는 생각은 이 장대 틀을 젖은 흙으로 바르다가 생겼다. 도기를 굽는 생각은 진흙으로 바른 원시 움막이 타는 바람에 발견되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은 달라마시아와 에덴으로 인하여 까다로워졌다.

3. 도시와 제조업과 상업

기원전 12,000년부터 투르키스탄의 땅이 건조하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농사와 투박한 제조업으로 직업을 바꾸게 만들었다. 더러는 가축 떼를 기르기 시작했고, 더러는 농부나 어부가 되었지만, 안드 족속 중에서 지적 존재들은 상업과 제조업을 선택했다.

무역과 제조업의 증가는 초기에 공동체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 공동체들은 문화와 기술을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광범위한 세계 무역 시대가 오기 전에, 부족 단위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약 1만2천 년 전에, 도시의 시대가 밝아 왔다. 원시 무역과 제조업을 하는 도시들은 농사 짓고 가축을 기르는 지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원시 공동체는 흙과 쓰레기가 쌓인 결과로, 25년마다 30에서 60센티미터가 높아졌다.

초기의 상업 도시 시대에는 금속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너희는 투르키스탄에서 기원전 9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기 문화를 이미 발견하였다.

금은 사람이 처음으로 찾아다닌 금속이었다. 금은 처음에 장식품으로만 쓰였다. 다음에 구리가 쓰이게 되었으나, 주석과 섞어서 단단한 청동을 만들기까지 널리 쓰이지 않았다.

투박한 제조업과 초기 산업이 나타나자, 상업이 문명의 보급에 유력한 영향이 되었다. 기원전 5000년이 되자, 문명화된 지역과 반문명화된 땅에 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다. 후일의 종족들은 길들인 말 뿐 아니라, 4륜차와 2륜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바퀴를 가진 차량이 상업과 전쟁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우르의 군기, 4륜 전차가 보인다

떠돌아다니는 무역상과 탐험가는 모든 다른 영향력의 총합보다 유사(有史) 이후의 문명의 진보에 더 많이 기여했다.

아담의 핏줄이 인간 종족에 주입된 것은 문명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을 뿐 아니라, 모험 성향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 결과로 안드 족속의 혼혈 후손이 유란시아와 북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4. 섞인 종족

유사 시대와 접하면서, 유라시아, 북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에 복합 종족들이 퍼졌다.

신체의 특징으로 유란시아 종족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아담 및 놋 족속은 얼굴이 길었고, 안돈 족속은 얼굴이 넓었다.

산긱 종족들은 중간 얼굴이었고, 황인과 청인은 넓적 얼굴인 편이었다.

청인 종족들은 안돈 족속가 섞였을 때, 넓적 얼굴이 되었다.

두개골 규격은 종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쓸모가 있어도, 뼈대가 더 믿을 만하다. 유란시아에는 최초에 다섯 가지 뼈 구조가 있었다.

1. 안돈 부류, 유란시아 토착민.

2. 1차 산긱. 홍인ㆍ황인ㆍ청인.

3. 2차 산긱. 주황인ㆍ녹색인ㆍ남색인.

4. 놋 족속.

5. 아담 족속, 보라 인종.

이 5대 종족이 섞임에 따라서, 산긱 종족의 유전적 우성(優性)이 안돈의 특성이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뼈 구조의 연구는 대략 인류가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 것을 드러낼 것이다.

1. 코카서스 인종―놋과 아담의 핏줄이 안드 족속과 혼합되었는데, 나중에 1차와 (얼마큼) 2차 산긱과 혼합됨으로 더 수정되었다.

2. 몽고 인종―1차 산긱 부류이다. 중국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이 이 집단에 속한다.

3. 흑색 인종―2차 산긱 종류는 최초에 주황ㆍ녹색ㆍ남색 종족들을 포함했다.

5. 문화가 있는 사회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는 반드시 상관되지는 않는다. 문화가 퇴폐하는 가운데서도 유기체의 진화는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조사하면, 결국 진화는 원인이요 문화는 결과인 것을 관찰할 것이다.

진화는 문화가 없어도 진행될지 모르지만, 문명은 종족이 진보하는 배경이 없으면 번영하지 않는다.

아담의 피는 종족들의 타고난 능력을 확대했고 경제 발전과 산업의 진보를 가속하였다.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길들이고 건축을 개량함으로 인류는 물질적 편안을 늘였고, 제조업과 산업을 통해서 인생의 쾌락 성분을 높이고 있다.

사회는 일꾼들의 동업 조합이며, 세상을 자손들이 살 수 있는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귀족 일꾼들만 받아들인다.

사회적 관계는 생존을 보장하는 보험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고 개인의 자유를 단축하는 보험료를 기꺼이 낸다. 오늘날의 사회 구조는 시행 착오로 생긴 보험 계획이다.

이처럼 사회는 제도를 통하여 시민의 자유, 자본과 발명을 통해서 경제적 자유, 문화를 통해서 사회적 해방, 경찰을 통해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자유를 얻으려고 서로 협동하는 조치이다.

힘이 정의를 낳지는 않으나, 힘은 각 세대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권리를 집행한다.

집단의 규제에 지배되는 자유는 사회의 진화의 정당한 목표이다.

6. 문명의 유지

문화의 진화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파도를 이루어 나갔으며, 순수 혈통을 가진 아담의 후손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을 강화하려고 떠나갈 때까지, 연달아 약화되었다. 종족들은 완전히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문명은 상당히 섞였다.

현재 유란시아에서 진화하는 문명은 다음 요인에서 생겨나고 그에 달려 있다:

(i) 자연 상황. 물질 문명의 성질은 소용되는 자연 자원에 따라 결정된다.

안드 족속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광활한 사냥 지역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북 아메리카요, 하나는 투르키스탄의 북쪽에 있었다.

안드 족속의 문명에 결정적 요인은 이란ㆍ투르키스탄ㆍ신장이 건조해진 것이고, 이들은 생계를 잇는 진보된 방법을 채택해야 했다.

여러 대륙의 지형과 땅의 배치는 평화와 전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북 아메리카의 종족들은 전쟁으로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기회를 누렸다.

(ii) 자본재. 문화는 빈곤한 조건 하에서 발달하지 않는다. 문화를 가진 문명은 오직 물질적 번영으로 여가를 허락하는 조건 하에서만 생긴다.

원시 시대의 유란시아에서 인생은 심각한 일이었다. 인류는 투쟁과 수고를 덜려고 좋은 기후를 찾아서 떠다니는 성향이 있었다. 머리를 써서 노동 일수를 줄임으로 땅에서 생계를 얻는 것을 배우고, 여가를 벌어들인 종족들의 생각과 계획으로 인하여 사회가 진보하였다.

(iii) 과학 지식. 문명의 물질적 측면은 과학 자료가 쌓이기를 기다려야 한다. 동력의 목적으로 동물을 사용한 뒤에 사람이 바람과 물의 사용을 배우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 후에 증기와 전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지식은 힘이다. 발명은 세계적 규모로 문화의 발전을 가속한다. 과학과 발명은 무엇보다도 인쇄기로부터 이익을 보았다.

과학은 사람에게 수학을 사용하게 만든다. 과학은 또한 오류를 없앰으로 철학을 안정시키고, 미신을 없앰으로 종교를 깨끗하게 만든다.

(iv) 인간 자원. 노동력은 문명의 확장에 필수이다. 적정 수준보다 인구가 더 증가하는 것은 생활 수준을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평화로운 침투나 강제 점령으로 영토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사회와 도덕이 충분히 발전하려면 큰 무리의 필사자를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번식과 더불어 곧 인구의 과잉 문제가 생긴다. 성장을 그칠 때를 아는 나라는 현명한 나라이다.

지하 자원이 풍부한 대륙과 앞선 기계 장비가 있어도, 민족의 지능이 쇠퇴하면 거의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지식은 교육으로 얻을 수 있지만, 오직 경험을 통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v) 물질 자원의 효율성. 많은 것이 자연 자원, 과학 지식, 자본재, 인간의 잠재성을 이용하는 데 사람이 얼마큼 지혜로운가에 달려 있다. 잘 조직되고 우수한 소수가 대체로 이 세상을 다스려 왔다.

힘이 사실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지금 존재하고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결정한다.

(vi) 언어의 효율성. 문명의 보급은 언어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언어가 계속 발전해야 한다.

언어는 집단의 교제로부터 진화했고, 각 지역 집단은 자체의 체계를 개발하였다.

언어는 사람의 연장 중에서 가장 쓸모 있지만, 언어는 사회 집단들이 얼마큼 여가를 얻을 때까지 번성하지 않았다.

언어가 다른 것은 평화의 유지에 큰 장벽이었다. 보편적 언어는 평화를 촉진하고 문화를 보장한다. 세상의 언어가 몇 개로 줄어들 때에도, 문화 민족들이 이 언어들을 통달하는 것은 세계 평화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국제어의 개발에 진보가 거의 없었지만, 국제 상업 교류는 많은 업적을 쌓았다.

(vii) 기계 장치의 효율성. 문명의 진보는 연장, 기계 및 분배 경로의 발달과 직접 관계된다.

초기에는 순전한 노동력으로 땅을 갈았다. 사람 대신에 황소를 쓴 것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래 걸린 싸움이었다. 나중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발전은 사회의 진보를 낳았다.

지혜롭게 사용하면, 과학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수단이 될지 모른다.

(viii) 횃불 쥔 자들의 인품. 문화의 횃불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작업에서 가정은 늘 기본 제도가 될 것이다.

곤충은 일생을 위하여 완전히 교육받고 장비를 갖추어 태어난다. 인간의 아기는 교육 없이 태어난다. 사람은 어린 세대를 교육함으로 문명의 진화를 크게 수정할 수 있다.

문명과 문화의 전진에 이바지하는 20세기 최대의 영향력은 세계 여행의 증가와 통신 방법의 개선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회 구조의 변화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현대 문명은 영적 발전과 가정 제도의 보호 면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ix) 종족의 이상. 한 세대의 이상은 후세를 위하여 운명의 경로를 개척한다.

이상은 사회적 흐름의 근원을 높인다. 어떤 흐름도 그 근원보다 높이 올라가지 못한다.

처음에 인생은 존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인생은 이제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다. 앞으로는 생각의 질을 높이는 싸움이 될 것이다. 이것인 땅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목표이다.

(x) 전문가의 조정. 초기에는 노동의 분업, 나중에는 전문화의 결과로 문명은 엄청나게 진보하였다. 능력이 다양화되고 직업이 상이한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 조정하고 협동하는 수단이 개발되지 않으면 사회를 약화시킨다.

(xi) 일자리를 찾는 방책. 사회의 발전에서 다음 시대에는 노동이 다양화됨에 따라서 개인의 일자리를 지도하는 기술이 고안되어야 한다. 산업 및 직업의 전문화는 일자리 찾아주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효과적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잠시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이용할 수 있는 보통의 노동 및 상업 분야에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베푸는 자선조차, 팔다리가 멀쩡한 시민에게 오래 베풀 때 해독이 된다.

훈련받고 극도로 전문화된 인간들을 최선으로 관리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xii) 기꺼이 협동하는 정신. 사회에서 큰 집단과 반대 생각을 가진 집단 사이에 생기는 싸움은 사회의 진보에 큰 장애물이다. 교육과 종교가 국가에 대하여 헌신하는 마음을 기르지 않으면, 어떤 국가의 문명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 문명의 유지는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가를 배우는 데 달려 있다.

(xiii)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지도층. 사회적 협동은 지도층에 달려 있다. 사람이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기까지, 문명은 지혜로운 지도층에 계속 의존할 것이다.

(xiv) 사회의 변화. 사회는 신이 준 제도가 아니요,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현상이다. 어떤 사회적 변화나 경제적 변화도 갑자기 시도해서는 안 된다.

(xv) 과도기 붕괴의 예방. 사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 착오로 얻은 산물이다. 어떤 문명에서도 가장 큰 위험은 과거의 방법으로부터 실험해 보지 않은 미래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붕괴되는 위험이다.

유능한 지도층이 사라질 때까지 문명은 위태롭지 않다. 지혜로운 지도자의 수는 인구의 1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다.

진화의 사다리의 이러한 가로대를 딛고서, 문명은 20세기의 문화를 낳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이것이 아담 시절 이후로 문명을 세우면서 세상의 민족들이 겪은 긴 투쟁의 요점이다. 인쇄가 발견되기 전에는 진보가 비교적 느렸다. 한 세대가 이전 세대들의 업적으로부터 빨리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 사회는 지금까지 축적된 여세의 힘으로 앞으로 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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