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필사자는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른 동안에 얻은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수의 인품을 닮을 수 있게 된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이다.
어떤 사람(빌라도)은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는 아마도 그리스어로 말했을 듯.)
(idou ho anthropos in Greek)
(ecce homo in Latin)
그의 강건한 인품은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실을 가르친 그대로 예수는 진실을 실천하였다.
그의 세대에게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런 진실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분별이 있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비겁하지 않았다.
예수의 체포, Dieric Bouts, circa 1485. Alte Pinakothek, Munich.
언제나 침착했으니, 인품이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에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다.
예수는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모든 민족에게 그의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일렀다.
그는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실망에 면역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
때때로 슬픔의 잔을 깊숙히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고 늘 말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이렇게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다.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