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053 루시퍼 반란, 보라 인종

  루시퍼 반란, 보라 인종
글쓴이: 한때 유란시아 관리자 집단에 속했던 마노반뎃 멜기세덱

서론

(i) 루시퍼는 네바돈에서 빛나는 1차 라노난덱 아들이었고, 지혜와 명철과 능력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ii) 구약에는 루시퍼가 한 번 언급된다.

이사야 14장: 너희의 옛 선지자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아,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너는 어찌하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세계들을 감히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네가 어찌하여 버림받았는가!”

 

(iii) 70만이 넘는 라노난덱 계급 가운데, 루시퍼는 가장 유능한 1백 존재들 중의 하나로서 지명되었다.

(iv) 네바돈 우주에는 1만 체계가 있다. 라노난덱 아들들의 역사를 통틀어서, 오직 3명의 체계 군주만 창조 아들의 정부를 모욕한 적이 있다. (라노난덱 반란이 3번 있었다)

Outline 1. 반란의 주동자

2. 반란의 원인

3. Lucifer Manifesto (루시퍼 선언문)

4. 반란이 터지다

5. 투쟁의 성질

6. 충실한 천사 사령관

7. 반란의 역사

8. 지구에 오신 사람의 아들

9. 반란의 현재 상태

 

  1. 반란의 주동자
1. 반란의 주동자
(i) 루시퍼는(light bearer, 빛을 가져오는 자, 아침에 뜨는 별이라는 뜻) 하늘 가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 우주에서 창조된 아들이다.

(ii) 하늘 가는 사람은 언젠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서 그의 품에 안기고 최후자가 된다.

이와 달리 라노난덱 계급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

(iii) 루시퍼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었다, “네가 지음받은 날부터 불의가 네 안에서 발견될 때까지, 모든 면에서 너는 완전하였도다.”

(iv) 루시퍼는 한 체계(사람이 사는 607 세계)의 최고 집행관이었다.

(v) 루시퍼가 죄를 지었어도, 하위의 지성 존재들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기까지, 그에게 불경스러운 태도를 보이려 하지 않았다.

미가엘의 천사장조차, 루시퍼에 맞서서 고발하지 않았다.

(vi) 현재 처지: 루시퍼는 이제 몰락하였고, 사타니아 군주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vii) 자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하늘 세계의 높은 존재들에게도 위험하다.

“너의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마음이 높아졌도다. 머리가 좋아서 너의 지혜를 썩게 만들었도다”하고 루시퍼에 관하여 언급이 되었다. (Ezekiel)

(viii) 루시퍼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유란시아에 전해진 것이 없는데, 이것은 이전에 지구에서 그의 운동을 지지하라고, 그의 제1 부관 사탄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ix) “악마”는 바로 칼리가스티아요, 행성 영주 자리에서 해임되었고, 2차 라노난덱 아들이다.

(x) Beelzebub(비엘세붑)은 칼리가스티아 세력과 연합한, 불충한 중도인들의 두목이었다.

  2. 반란의 원인
2. 반란의 원인 (i) 루시퍼와 제1 조수 사탄은 예루셈에서 50만 년이 넘도록 군림했는데, 그때 우주의 아버지와 당시에 그의 대관(vicegerent, 代官)이었던 아들, 미가엘에게 대항하려고 비로소 마음을 먹었다.

(ii) 반란하려는 생각은 루시퍼의 머리 속에서 기원이 있었다고 우리(멜기세덱들)는 믿는다.

(iii) 루시퍼는 처음에 계획을 사탄에게 알렸고, 유능한 그를 설득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일단 반란 이론에 넘어가자, 그는 “자아 주장과 해방”을 열심히 부르짖는 자가 되었다.

아무도 루시퍼에게 반란을 제안한 적이 없다.

(iv) 구원자별의 늘 하나된 이는 몰랐는가?

이마누엘은 1백년이 넘도록, 루시퍼의 머리 속에 만사가 평안하지 않다고 유버르사에 거울로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또한 창조 아들과 별자리 아버지들에게 전달되었다.

(v) 루시퍼의 자유 선언을 선포하기 며칠 전, 가브리엘이 예루셈을 방문하는 기회에 루시퍼는 불충한 마음을 분명히 표시하였다.

(vi) 무엇이 루시퍼 반란의 원인이었는가 꼬집어내기는 어렵다.

반란의 시초는 루시퍼의 머리 속에서 생겼고, 자만심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v) 오랫동안 뉘우칠 기회가 주어졌으나, 루시퍼의 어떤 부하들만 자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3. Lucifer Manifesto (루시퍼의 선언문 내용)
3. 루시퍼 선언문 기원이 무엇이었든지 상관 없이, 마지막 봉기는 루시퍼 자유 선언으로서 시작되었다. 세 가지 주장이 있었다:

(i) 우주의 아버지는 계시지 않는다는 주장.

루시퍼: (체계의 군주이지만, 우주의 아버지 앞에 서 본 적이 없다.)

(a) 정말로 우주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인력과 공간 에너지는 (우주의 아버지가 만든 것이 아니고) 우주에 본래부터 있다. (대부분의 천체물리학자들의 의견?)

(b) 우주의 아버지는 미가엘들이 지어낸 신화(神話)요, 이것을 빌미로 이들은 우주를 계속 통치한다고 비난했다.

(c) 최후자들조차 아버지의 성격에 대하여 뚜렷한 개념을 전하지 않았고, 파라다이스 아들들과 결탁하여 (지역) 우주에 사기를 치려고 한다.

(ii) 미가엘의 정부에 대한 주장.

(a) 지역 체계들은 자립해야 한다. 미가엘은 가상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네바돈의 통치권을 취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충성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b) 루시퍼는 미가엘이 그의 창조자인 것을 인정하지만, 신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c) 루시퍼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 (“외부 권력가”)들이 지역 체계와 지역 우주 사무에 간섭한다고 신랄하게 공격했다.

(d)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사형 집행자들이 부당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모든 존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형 집행자는 명령을 받은대로 체계 군주 및 이하의 존재들을 체포, 구금,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듯.)

(iii) 하늘 가는 필사자 훈련 계획에 대한 공격.

(a) 루시퍼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사자에게 행정 원칙을 가르치느라고 소모된다고 주장했다.

(b) 그렇게 오랜 훈련을 받고도 최후자는 결국 자기가 태어난 구체와 비슷한 구체에 배치받는다고 비웃었다.

이처럼 루시퍼는 필사자 승천 계획을 규탄하였다.

  4. 반란의 경과
4. 반란이 터지다

(i) 루시퍼 선언문은 유리 바다에서, 매년 열리는 사타니아 집회에서, 약 20만 년 전에, 그 해의 마지막 날에 발표되었다.

(a) 예배는 우주의―물리적ㆍ지적ㆍ영적―세력에게 드릴 수 있다, 그러나

(b) 충성 서약은 오직, 실제로 현재 통치자 루시퍼, 곧 “사람과 천사들의 친구”요, “자유의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만 인정할 수 있다고 사탄은 선포했다.

(ii) 자아의 주장이 루시퍼 반란의 투쟁 구호였다.

(a) 자치(自治)가 멜기세덱 집단에게 좋다면, 다른 집단도 자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b) 그는 “지성은 평등”하고 “지적 존재들은 형제”라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모든 정부가 지역 행성들, 그리고 행성들의 자원 연방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iii) 입법 활동이 별자리 본부 에덴시아에 있고,

사법(司法) 사무가 구원자별에 있는 것을 비난했다.

(iv) 체계의 재조직. 루시퍼는 자신의 입법 회의를 수립하고, 사탄의 관할 하에 자기 법정을 조직하였다.

네바돈에 반란이 이전에 두 번 있었지만, 먼 별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퍼의 주장:

(i) 이전의 반란들이 실패한 것은 지성 존재들의 대다수가 지도자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상관들 모두에게 반항했지만, 상관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ii) 반란이 일어나도 즉시 처벌이 되지 않는 것은 파라다이스 아들들의 정부가 반란을 진압하는 능력이 없다는 증거이다.

(iii) 가브리엘이 모반하는 선전에 찬물을 끼얹기 전에, 루시퍼는 반역 정부의 설립이 허락되었다.

몇년 동안 여러 저택 세계에 큰 혼란이 있었다.

  반란의 경과
5. 투쟁의 본질 미가엘의 반응:

반란이 터지자, 미가엘은 이마누엘과 의논했다.

(i) 과거에 비슷한 동란들이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간섭 정책을 취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반란이 있었을 때, 네바돈에는 절대적 통치 권한이 미가엘에게 없었다.

(ii) 당시에 미가엘은 아버지의 대관(代官)으로서 다스렸고, 수여 생애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네바돈의 군주 통치자로 보좌에 앉기까지, 미가엘은 루시퍼의 반란 세력에 간섭하지 않았다.

(iii) 이들은 거의 20만 년 동안 방자하게 구는 것이 허락되었다.

(iv) 오늘날 미가엘은 그러한 불충을 즉결 처리할 권한이 있지만, 우리는 그가 달리 행동할 것인가 의심한다.

(v) 가브리엘은 에덴시아에서 개인 참모진을 소집하고, 최고자들과 의논이 있은 뒤에, 사타니아의 충성한 무리들의 지휘를 맡기로 작정하였다.

(vi) 모여든 충성파 무리 앞에서, 가브리엘은 미가엘의 깃발을 펼쳐 보였는데, 이것은 삼위일체 정부의 상징, 곧 흰 바탕에 푸른 하늘 빛의 세 동심원이었다.

(vii) 루시퍼의 상징은 흰 깃발에 하나의 붉은 동그라미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의 채워진 검은 색 동그라미가 있었다.

(viii) 투쟁 초기에 루시퍼는 행성의 원형 극장에서 열변을 토했다.

(ix) 가브리엘은 가까이 자리잡은 그의 본부에서, 반역자들의 궤변을 폭로하였다. 여러 성격자는 마지막 결심이 서기까지, 이 두 토론회 사이에 오락가락하였다.

  6. 천사 부지휘관 마노시아
6. 충실한 천사 사령관 (i) 사타니아 세라핌의 부지휘관 마노시아의 용감한 행위는 특출하였다.

반란이 터졌을 때, 천사 무리의 지휘관은 루시퍼 운동에 가담하였다.

이것이 어째서 체계의 많은 행정 세라핌들이 잘못된 길에 빠졌는가 설명한다.

마노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ii) “그때 나는 둘째 천사 사령관으로서, 미가엘을 모욕하는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예루셈에 엄청난 격변이 있었지만, 충성파 세라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iii) “루시퍼의 탈퇴로 인하여 별자리 회로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충성파 정보 군단에 의존했다… 새 체계 군주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iv) 이 천사는 아직도 유란시아에서 근무하며, 세라핌의 부지휘관으로서 활동한다.

  반란의 역사
  루시퍼 반란은 체계에 널리 퍼졌다.

(i) 행성 영주 37명이 각 세계의 행정부를 대반역자의 편이 되었다.

(ii) 파놉시아 행성에서는 멜기세덱들의 지휘 하에, 미가엘을 지지하였다.

엘라노라는 그 인류의 지도권을 쥐었고, 단 한 사람도 루시퍼의 깃발 밑에 지원하지 않았다.

(iii) 충성스러운 이 파놉시아 사람들은 일곱째 과도기 세계에서, 아버지의 구체 및 일곱 구류 세계에서 관리자와 건축자로서 근무해 왔다.

(iv) 이 기간 동안, 칼리가스티아는 유란시아에서 루시퍼 운동을 지지하였다.

(v) 방송 서비스와 행성간 통신 방법이 중단되었다.

(vi) 사타니아 체계 전체가 별자리 회로와 우주 회로에서 고립되었다.

천사 대리자와 외톨 사자들이 모든 통신문을 급송하였다.

  반란의 결과 (2년 후)
7. 반란의 역사 (i) 결과: 이것은 라노난덱 반란이었다. 더 높은 아들 계급은 루시퍼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ii) 삼위일체를 체험한 아들들은 하나도 미혹되지 않았다.

(iii) 멜기세덱, 천사장, 찬란한 저녁별들은 모두 미가엘에게 충성했다.

(iv) 파라다이스 기원을 가진 존재들은 아무도 불충에 말려들지 않았다. 이들은 외톨 사자들과 함께 영의 세계에서 본부를 차렸고, 에덴시아의 늘 충실한 이의 지휘 하에 남아 있었다.

(v) 화해자와 하늘 기록자는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

(vi) 최상 세라핌은 하나도 분실되지 않았다.

우수 계급의 상당한 무리가 덫에 걸려들었다.

감독 계급의 천사도 몇몇이 잘못에 빠졌다.

마노시아는 행정 천사 계급 중에 3분의 2를 살렸다.

예루셈 케루빔의 3분의 1은 분실되었다.

(vii) 가장 큰 손실은 천사 계층에서 일어났지만, 하등 계급의 대부분이 불충에 말려들었다.

(ix) 분실된 물질 아들 68만 명 가운데 95퍼센트는 루시퍼 반란의 희생자였다.

(x) 하늘 가는 필사자들은 취약했지만, 예루셈에서 거주하는 승천 시민 중에 한 명도 루시퍼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xi) “하늘에서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루시퍼의 후계자가 임명될 때까지, 체계 시간으로 2년이 넘게 걸렸다. (1.6 years of Urantia time)

새 군주 라나포지가 이 소식을 전해 왔다.

(i) “예루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분실되지 않았다. 하늘 가는 모든 필사자가 불 같은 시련을 견디었고, 중대한 시험을 겪고 성공하여, 온통 승리를 거두고서 솟아났다.”

(ii) 계속하여 구원자별ㆍ유버르사ㆍ파라다이스에, 필사자의 승천 체험은 반란을 방지하는 보호 조치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iii) 루시퍼는 행정 권한을 빼앗겼지만, 그를 구금하거나 소멸에 처할 수 있는 법정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iv)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a) 별자리 아버지들이 체계 정부를 몰수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b) 루시퍼와 사탄을 처분하는 것에 대하여 아직 판결을 내린 적이 없다.

대반역자들은 체계를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이들은 거의 20만 년 동안에 또 다른 세계를 속일 수 없었다.

  8. 미가엘의 제안
8. 지구에 오신 사람의 아들

 

미가엘의 수여 임무가 끝날 때까지, 루시퍼와 사탄은 체계를 멋대로 돌아다녔다.

이전에 행성 영주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기적으로 모였을 때, “사탄도 왔으며,” (욥기 1:6) 그는 몰락한 행성 영주들의 세계를 모두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가엘의 마지막 자신 수여 이후로, 예루셈에서 그러한 자유가 사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배반한 행성 영주들이 다스리던 행성들을 제쳐 놓고, 미가엘의 수여는 사타니아에서 루시퍼 반란을 종결시켰다.

미결 상태: 반역자들의 소멸을 요청하는 가브리엘의 상소에 대하여 유버르사 법정이 집행 결정을 아직 내리지 않았다.

(i)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그러한 선포가 내릴 것이니, 이 소송의 청문회에서 첫 걸음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ii) 유란시아를 떠나기 전에, 미가엘은 마지막으로 칼리가스티아와 달리가스티아에게 자비를 내밀었으나, 이들은 그의 제안을 걷어찼다.

이 두 존재는 생각 조절자와 진실의 영 앞에 비굴하다.

(iii) 칼리가스티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비교적 활동이 없다.

루시퍼 반란 시절에 일찍부터, 미가엘은 모든 반역자에게 구원을 내밀었다.

(iv) 진지하게 뉘우침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그가 완전한 우주 통치권을 얻고 나서, 이들을 용서하고 우주 근무로 복직시킬 것을 제안했다.

  8. 반란의 현재 상태
9. 반란의 현재 상태 (i) 주모자들 가운데 아무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ii) 물질 아들딸 수백 명을 포함하여, 수천의 천사 및 낮은 계급의 하늘 존재들은 이 자비를 받아들였고, 1천9백 년 전에, 예수가 부활했을 때, 명예 회복이 허락되었다.

(a) 이 존재들은 예루셈의 아버지 세계로 옮겨졌다. 절차상으로 가브리엘 대 루시퍼 문제에 대하여 유버르사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까지, 거기에 구금되어야 한다.

(b) 뉘우친 자들이 소멸 선포에서 면제될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c) 이들은 지금 아버지의 세계를 돌보느라고 파놉시아 사람들과 함께 수고한다.

(iii) 미가엘이 네바돈의 군주가 되고 나서, 루시퍼는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의 대리자들에게 구금되었고, 그 이후로 예루셈에, 아버지의 구체 집단의 1번 위성에 죄수로 있었다.

(iv)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에서 초우주 법정이 판결을 내릴 때까지, 미가엘은 루시퍼 반란에 가담한 모든 자를 구류할 권한을 받으려고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에게 탄원했는데, 거의 20만 년 전에 이 소송은 유버르사 최고 법정에 기록되었다.

(v) 옛적부터 늘 계신 이들은 한 가지만 빼고 미가엘의 탄원을 허락했다: 즉 배신 세계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또는 가브리엘 대 루시퍼 소송의 판결이 시작되는 때까지, 사탄은 배신한 세계의 영주들을 방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너희가 행성 영주도 물질 아들도 없기 때문에, 사탄은 유란시아에 올 수 있었다.

(vi) 마키벤타 멜기세덱은 그 뒤로 유란시아의 행성 영주 대관으로 선포되었다.

사탄은 정기적으로 칼리가스티아 및 다른 몰락한 영주들을 찾아보았으나, 이 계시를 발표하기 직전에, 대반역자들의 소멸을 요구하는 가브리엘의 탄원에 대하여 첫 청문회가 있었다. 사탄은 지금 예루셈의 감옥 세계에 무조건 구류되어 있다.

루시퍼가 살아 있는 한, 체계의 회로들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고, 그는 전혀 활동이 없다.

타락한 세계에서 반란은 신성한 아들들이 도착하자마자 종결된다.

우리는(멜기세덱들) 이 반역자들을 소멸하라고 사형 집행 방송이 유버르사의 판결을 발표할 것을 기대한다.

일곱 감옥 세계는 온 네바돈에 엄숙한 경고가 되었다:

“죄 지은 자의 길은 고달프도다.”

   

 


  보라 인종 (78편)
지은이: 네바돈의 한 천사장

1934년

둘째 동산은 거의 3만 년 동안 문명의 요람이었다.

아담 종족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버티고 그 자손을 땅끝까지 보냈고, 이들이 후일에 놋 부족과 산긱 부족들과 섞이자, 안드 족속으로 알려졌다.

이 논문은 보라 인종의 역사를 묘사하며, 이것은 기원전 약 35,000년부터 기원전 약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의 고향에서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outline 1. 여러 종족들의 분산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4. 안드 족속

5. 안드 족속의 이동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7.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8. 수메르인 (끝까지 남아 있던 안드 족속)

  1. 여러 종족들의 분산
1. 종족과 문화의 분산 아담이 도착했을 때, 지상 종족들의 지성과 도덕은 낮은 수준에 있었어도, 신체의 진화는 칼리가스티아의 반란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기원전 3만 3천 년에, 종족과 문화의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i) 보라 인종 (아담 족속과 아담손 족속). 아담 족속 문화의 중심은 둘째 동산이었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 지역).

(ii) 보라 인종의 2차 중심은 아담손 족속의 본부였고, 이것은 카스피 바다 남쪽 해안의 동쪽에 있었다.

(iii) 수메르 이전 족속과 기타 놋 족속. 강들의 입구 가까이 고대 문화의 잔재가 있었다. 이 집단은 아담 족속과 많이 섞였다.

(iv) 안돈 족속도 투르키스탄에 두루 흩어졌다.

(v) 홍인은 남북 아메리카를 차지했다. 아담이 오기 5만 년쯤 전에 아시아에서 밀려났다.

(vi) 황인종. 중국 종족들은 동 아시아를 장악하였다.

(vii) 청인종(靑人種). 청인은 유럽 전역에 걸쳐 흩어졌으나, 그들 문화의 상급 중심들은 지중해 분지에, 당시에 기름졌던 유역에, 그리고 북서 유럽에 자리잡았다.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하여 저하되었다.

(vii) 드라비다 이전의 인도.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의 혼합이었다.

(viii) 사하라 문명. 남인종(藍人種)의 우수한 요소는, 지금 큰 사하라 사막 지역에서 가장 진보된 촌락들을 가지고 있었다.

(ix) 지중해 분지. 여기서 북쪽의 청인과 남쪽의 사하라 주민이 동에서 온 놋 및 아담 족속과 함께 섞였다.

이것이 보라 인종이 크게 팽창하기 전에, 약 2만 5천 년 전에 세상의 그림이었다.

미래 문명의 희망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사이, 둘째 동산에 달려 있었다.

유란시아에 주재하던 하늘 관찰자들은 잘못하는 물질 아들딸의 후손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 보려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2. 둘째 동산의 아담 족속 (i) 몇천 년 동안, 아담의 아들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을 따라서 수고했고, 남쪽에서 치수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북쪽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이 훌륭한 사람들은 아담의 사명을 잊지 않았고, 땅에 있는 종족들에게 밀사로서 빼어난 아들딸을 기쁘게 보냈다.

(ii) 아담 족속의 문명과 사회는 진화 종족들보다 훨씬 앞섰다.

(iii) 오직 반과 아마돈, 그리고 아담손 족속의 촌락들 사이에서 비할 만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요, 진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진화 수준까지 악화될 운명이었다.

(iv) 아담은 지적 문화를 남겼으나, 기계 장치 면에서 진보되지 않았는데, 발명의 성공은 자연 자원과 여가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 족속은 기원전 19,000년에 450만에 이르는 참 민족이었고, 이미 둘러싼 부족들에게 자손 몇백만 명을 퍼부었다.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3. 아담 족속의 초기 팽창
카스피 해의 밤 풍경, Shutterstock

(i) 보라 인종은 수천 년 동안 에덴의 평화 전통을 간직했다. 이것이 그들이 영토를 정복하는 데 오래 지체된 것을 설명한다. 인구가 늘어나면 영토를 더 확보하려고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은 잉여 거주자들을 다른 종족들에게 선생으로 보냈다.

(ii) 아담 족속 중에 더러는 나일 강 유역까지 여행했다. 더러는 아시아로 파고들었으나, 이들은 소수파였다. 반이 넘는 무리가 북쪽으로, 다음에 서쪽으로 유럽으로 들어갔다.

(iii) 약 1만5천 년 전에, 아담의 순수 혈통의 다수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투르키스탄을 차지했으나, 북으로 가면서 다른 종족들과 뒤섞였다.

기원전 약 3만 년부터 1만 년까지, 대규모의 종족 혼합이 서남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iv) 기원전 1만5천 년 전에,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이 끝났고, 유럽과 중앙 아시아에는 아담의 후손들이 더 많이 있었다.

유색 인종은 이 무렵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사람들로 인하여 크게 보강되었다. 흑인 종족들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홍인종처럼 거의 고립되었다.

(v) 사하라 문명은 가뭄에 시달리고, 지중해 분지의 문명은 홍수에 시달렸다. 안돈 족속은 아직도 북극과 중앙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다. 녹인종과 주황 인종은 멸종되었다. 남인종은 아프리카에서 남쪽으로 움직였다.

인도의 민족들은 침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황인은 중앙 아시아에서 자리를 굳혔다. 갈색인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아직 문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초기의 이동은 기원전 25,000년에서 15,000년까지 계속되었고, 후일에 안드 족속의 이동은 기원전 15,000년에서 6,000년까지 계속되었다.

(vi) 아담 족속의 초기 이동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가는 데 너무 오래 걸려서 그들의 문화는 이동하면서 사라졌다. 후일에 안드 족속이 에덴의 문화를 간직할 만큼 빨리 움직였다.

  4. 안드 족속
4. 안드 족속 (i) 안드 종족은 순수한 핏줄의 보라 인종과 놋 족속 및 여러 진화 민족을 1차적으로 섞어서 생긴다. 안드 족속은 보라 인종의 피를 1/8에서 1/6까지 섞인 종족들을 언급한다. 현대에 북쪽의 백인조차 이보다 훨씬 적게 아담의 피를 지닌다.


수사에서 발견된 생명나무 기록, Louvre Museum

(ii) 가장 초기의 안드 민족들은 2만5천 년도 더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지역에서 기원을 가졌고, 아담 족속과 놋 족속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

(iii) 순수 핏줄의 보라 종족이 살던 시절 이후로, 안드 족속은 지구에서 가장 좋고 다능한 핏줄이었다.

(iv) 이 옛 안드 족속은 아리아인이 아니라, 아리아 이전의 종족이었다. 백인이 아니라 백인 이전의 종족이었다. 코카서스 인종이라 부르는 형질은 안드 족속의 유산이다.

(v) 순수한 보라 인종은 평화를 추구하는 아담의 전통을 간직하였고, 따라서 초기의 민족 이동이 평화로웠던 것을 설명한다. 놋 족속은 이때 호전적 민족이었고 아담 족속과 섞여 생긴 안드 민족은 가장 현명한 군국주의자였다.

이 안드 족속은 모험을 좋아했고, 산긱이나 안돈 족의 피를 섞으면, 안정된 민족이 되었다.

  5. 안드 족속의 이동
5. 안드 족속의 이동 둘째 동산의 문화는 기원전 약 15,000년까지 꾸준히 쇠퇴하였다.

(i) 아담 족속이 혼합된 놋 족속과 연합하여 안드 족속을 형성하여 동산이 부흥하자 이 문명이 널리 퍼졌다.

(ii) 이 안드 족속은 유라시아 대륙과 북 아프리카 전역에 퍼졌다. 이때가 되자, 둘째 동산에 있는 종족들도 너무 섞여서 이제 더 아담 족속이라 할 수 없었다.

(iii) 투르키스탄의 문명은 안드 기병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착하여 항상 새로워졌다.

(iv) 이른바 아리아인의 조상 언어는 투르키스탄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안돈 족속의 방언이 아담손 족속과 안드 족속의 언어와 섞인 것이었다. 많은 현대 언어가 유럽과 인도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중앙 아시아 부족들의 언어로부터 생겨났다.

(v) 기원전 12,000년이 되자, 안드 족속의 3/4은 북부와 동부 유럽에 거주하였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지막 탈출이 일어났을 때, 이 마지막 이민 인파의 65퍼센트는 유럽으로 들어갔다.

(vi) 안드 족속은 유럽 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와 인도까지 이주했다. 그들은 또한 사하라의 산긱 종족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vii) 이 안드 족속은 인도에서 이른바 드라비다인, 정복하는 아리아인이었다. 이 종족에서 많은 사람이 신장과 티벳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여행했다. 때때로 작은 무리들이 일본ㆍ타이완, 동인도 제도, 중국 남부로 들어갔다.


잉카에서 발굴된 암포라

(viii) 이 종족 132명은 일본에서 작은 배로 떼지어 출발하여 결국 남 아메리카에 도착했고, 안데스의 토착민과 결혼하여 잉카 통치자들의 조상을 세웠다.

(ix) 안드 족속의 정복은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지나간 나라에 유머ㆍ예술ㆍ모험ㆍ음악ㆍ제조업을 기여했다.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는 기술이 있었고 농업에 전문가였다.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6.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 (i) 안드 족속은 기원 8,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마지막으로 세 차례 인파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동쪽에서 산지 부족들의 압력과 서쪽 평야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쫓겨났다.

카스피 해, Shutterstock

(ii) 65퍼센트는 카스피 바다의 길로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의 백인과 섞였다.

(iii) 10퍼센트는 동쪽으로 이란의 고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옮겨 갔다.

(iv) 10퍼센트는 북향 길을 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신장에 들어가 안드 족 황인 거주자들과 섞였다. 이 연합은 황인종의 북쪽 가지를 크게 개선하였다.

(v) 10펴센트는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에집트로 들어갔다.

(vi) 5퍼센트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 집단은 우수한 놋 족속과 아담 족속의 잔재이다.

(vii) 안드 족속은 기원전 6000년이 되어 이 지역을 거의 비웠다. 그러나 둘러싼 산긱 종족들과 안드 족의 후손은 후일에 침공자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viii) 둘째 동산의 문화는 열등한 종족들이 더 침투함으로 막을 내렸다. 문명은 나일 강과 지중해 섬들로 옮겨 갔다.

  7.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안드 족속 문명의 종지부)
7.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진 홍수 (i)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홍수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지질학적 변화로 메소포타미아 유역이 위험해졌다.

(ii) 첫 에덴이 물 밑에 가라앉은 뒤에, 지중해 동부 해안의 산,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산들이 높아졌다. 이처럼 강설량이 늘어나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큰 홍수가 나기 시작했다. 거의 1천 년 동안 수십 도시가 이러한 홍수 때문에 버림받았다.


British Museum

(iii) 거의 5천 년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였던 히브리인 사제들이 유대 민족의 유래를 아담까지 추적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발견했다. 한 사제가 (Ezra) 그런 수고를 집어치우고, 노아 홍수 시절에 온 세상이 물에 빠졌다고 이야기를 줄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iv) 노아ㆍ방주ㆍ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살던 동안에 히브리인 사제들이 발명한 것이다.

유란시아에 생명이 정착한 이후로 세계적 홍수는 한 번도 없었다. 지구의 표면이 완전히 물로 덮인 때는 시생대(始生代) 동안이었다.

(v) 노아는 실재한 인물이었다. 그는 에렉 가까이 있던 촌락 아람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집을 나무로, 배 모양으로 지으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노아는 많은 비웃음을 샀다. 해마다 강가의 촌락으로 가서, 홍수가 오리라 경고하곤 했다. 마침내, 홍수가 몹시 커져서, 갑자기 솟아오른 물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으나, 노아와 그 직계 가족은 배에서 구제되었다.


우륵에 있던 기둥의 모자익, Pergammon Museum, Berlin

(vi)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난 것은 안드 족속 문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홍수 기간이 끝나자, 둘째 동산은 사라졌다.

(vii)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잔재는 이 지역에, 그리고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발견된다. 달라마시아 시절은 흔적은 페르시아 만의 바다 밑에 존재하고, 첫 에덴은 지중해의 동쪽 끝에, 물 밑에 잠겨 있다.

  8. 수메르인, 마지막 안드 족속
8. 수메르인―마지막 안드 족속 (i) 안드 족속의 마지막 분산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붕괴를 가져왔을 때, 한 소수(小數) 집단이 두 강 입구 가까이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이 수메르인이었고, 기원전 6,000년이 되자 그들의 주류는 대체로 안드 족속이 되었다.

수사의 유적 (사진: Shutterstock).

(ii) 이 홍수가 있던 시절에 수사가 크게 번성하였다. 달라마시아는 물에 잠겼고, 높이 있던 마을 수사는 공예품 본부가 되었다.

(iii) 이 홍수가 줄어들자, 우르는 도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약 7천 년 전에,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있었고, 그 이후에 퇴적물이 땅을 현재 위치까지 쌓아 올렸다.

Louvre Museum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 곡식을 심던 평화로운 농부들은 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에 살던 미개인의 침공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iv) 이 목자와 사냥꾼들은 말을 많이 소유했고, 온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거주자들을 유럽, 서 아시아, 북 아프리카로 몰아냈다.

(v) 이 메소포타미아 정복자들은 우수한 안드 혈통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문명의 잔재를 기꺼이 동화했고, 강 유역에 있던 부족들의 예술과 수메르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셋째 바벨 탑까지 세우려 애썼고, 나라 이름을 바빌론으로 불렀다.

동북부에서 온 이 미개한 기병들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페르시아 만 근처에 거주하던 안드 족속의 잔재를 정복하지 못했다.

(vi) 이 수메르인은 우수한 지능, 군사적 운하 체계 때문에 자체를 방어할 수 있었다.

(vii) 북쪽에서 온 이 침공자들은 수메르인이 유능한 선생이요 행정가인 것을 신임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겼다.

키시에 남은 지꾸랏 (Shutterstock)

(viii) 초기의 수메르 연방이 깨어진 뒤에, 셋 족속의 후손들이 도시 국가들을 다스렸다. 각 도시는 자기네 신이 모든 다른 신보다 우수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ix) 도시의 사제들이 통치하던 기간을 키시의 사제 사르곤이 끝냈다. 그는 자기가 임금이라 선포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인접한 땅을 정복하였고, 이것은 도시 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왔다.

(x) 키시 연방이 깨어진 뒤에, 오랫동안 도시들 사이에 전쟁이 따랐고, 통치권은 수메르ㆍ아카드ㆍ키시ㆍ에렉ㆍ우르ㆍ수사 사이에 다양하게 바뀌었다.


수사에서 발견된 (손잡이 없는) 컵. 기원전 5000년 경. 녹로를 (도공의 바퀴) 사용하기 전 시대에는 이렇게 진흙을 손으로 빚어, 도자기가 완전히 동그랗지 않았다.


하무라비 법전 (기원전 1750년)

(xi)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수메르인은 북쪽의 수 족속과 구 족속에 패배하였고, 수메르의 서울 라가시가 함락되었다.

(xii) 하무라비의 통치가 확립되자 (1750 BC), 수메르인은 셈 족속에게 흡수되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안드 족속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사라졌다.


라가시의 임금 구데아 (2080 -2060 BC), Louvre Museum.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유목민이 날뛰었다.

(xiii) 이것이 아담 이후에, 보라 인종과 그들이 살던 두 강 사이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xiv) 이들의 고대 문명은 우수한 민족들이 바깥으로 이주하고, 열등한 이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했다.

(xv) 동산 문화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으로 퍼졌고, 거기서 유란시아 20세기 문명의 뒷받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