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9 편, 펠라에서 주신 마지막 가르침

글쓴이: 중도자 위원회

서기 30년 3월 6일

펠라

3월 6일(월), 저녁 늦게 예수와 열 사도는 펠라 캠프에 다다랐다.

펠라의 유적 (Shutterstock)

예수는 군중에게 오후에 설교했고, 밤마다 사도들과 상급 제자들을 위하여 질문에 대답했다.

주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나사로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야영지에 이르렀다.

5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후로,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짧은 이 한 주 동안 펠라에서 가르치고, 다음에 페레아 남부 여행을 계획했으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비극까지 바로 이끌었다.

펠라의 유적 (Shutterstock)

바리새인과 주사제들은 다음 이유로 주의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i)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그들과 함께 먹기도 한다.

(ii) 신성을 모독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iii) 율법을 어기는 자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이스라엘의 신성한 율법을 우롱한다.

(iv) 악마들과 결탁하고 있다. 비엘세붑의 힘으로 겉보기에 이적을 행한다.

오늘의 펠라 (성지가 좋다 78부)

1.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목요일 오후에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는 과정에서, 예수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를 다시 했다. 그리고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덧붙였다.

예수: “너희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동안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를 찾고 있음을 보이려고 내가 왔노라.

“아버지는 너희가 미처 뉘우치기도 전에 너희를 받아들이며, 너희를 데려오라고 아들과 그 동료들을 보내시느니라.

“한 여인이 은화 열 잎을 목거리로 만들고서 한 잎을 잃어버렸다가, 어떻게 등불을 켜고 잃어버린 은화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 뒤졌는가 하는 이야기를 너희는 기억해야 하느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노라.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더니, 나이 어린 아들은 명랑하지만 책임을 피하였고, 그 형은 열심히 일하며 책임을 졌더라. 어린 소년은 활발하였으나 게을렀고, 나이 든 형은 부지런하지만 자기 중심이고 자만심이 있었더라. 둘이 사이 좋지 않아서 동생은 아버지께 말하였더라: ‘아버지여, 아버지 재산 가운데 3분의 1, 내 몫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출세 길을 찾아 세상으로 나가게 하소서.’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서 젊은이에게 그의 몫을 주었더라.

“그 젊은이는 자금을 모아서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이익 되는 일을 발견하지 못하여, 곧 유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였더라. 재산을 다 쓰고 나서, 그 나라에 기근이 생겼더라. 배가 고프고 고생이 심했을 때, 그 나라의 한 시민에게서 돼지를 먹이는 일자리를 얻었더라.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팠을 때, 그가 제 정신이 들어 말하되, ‘내 아버지에게는 많은 품꾼이 고용되어 빵을 충분히 먹는데, 나는 낯선 나라에서, 돼지를 먹이며 배가 고파서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리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름받기에 마땅치 않지만, 나를 품꾼으로 만들어 주소서.’ 이 결심이 서자, 젊은이는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떠났더라.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이 집으로 올까 늘 지키고 있었는데, 그가 아직 멀리 있는데도, 아버지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나가서 맞이하였고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더라. 아들이 아버지의 눈물 어린 얼굴을 올려다보고 말하되, ‘아버지여, 나는 하늘에, 또 아버지 보시기에 죄를 지었나이다. 아들이라 부름받을 자격이 없나이다―’ 말을 잇지 못하였으니,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음이라: ‘내가 간직했던 옷을 가져와서 입히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샌달을 가져오라.’

“아버지가 지친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에 종들을 불러 일렀더라: ‘살진 송아지를 가져다 잡으라.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음이라. 그를 잃었다가 찾아냈느니라.’

“이 무렵에 맏아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들었는지라. 한 종에게 무슨 영문인가 물었더니, 그 종이 말하되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당신의 아우가 돌아왔고, 당신의 아버지가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맞아들이 아우의 환영식을 분개한다는 말을 아버지가 듣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맏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더라: ‘여기서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었는데, 아버지는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탕진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아버지가 말하되 ‘그러나 아들아,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라. 네가 친구들을 만들었다면 어느 때라도 새끼 염소를 잡을 수 있었느니라. 네 아우가 돌아왔으니,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들아, 네 아우를 잃었다가 찾았고, 그가 살아서 돌아왔느니라!”

이것은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하려고 말씀한 비유, 감동적인 비유였다.

예수는 이 세 이야기를 같은 때에 하기를 좋아했다. 길 잃은 양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길 잃은 사람을 염려하고, 아들들과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질적 걱정으로 혼동하거나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을 얼마나 신이 찾고 있는가 보여 주려고 잃어버린 은전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잃어버린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완전히 회복되는가 보여주려고, 돌아오는 탕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이웃 정신을 가르치는 데 많이 사용되었다.

2. 기민한 집사의 비유 어느 날 저녁, 열심당원 시몬이 논평하였다: “주여, 다수의 세상 사람들이 불의의 재물을 써서 친구들을 만듦으로 하늘나라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사온데, 무슨 의미이나이까?

예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부지런하였거든, 너희는 하나님의 집사인즉, 어찌하여 하늘나라를 위하여 부지런히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느냐?

“재빠르고 불의한 집사를 둔 어떤 부자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으라. 이 집사는 주인의 자금을 탕진하였더라. 이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 집사를 앞에 부르고 사무를 다른 자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라고 요구하였더라.

이 불충한 집사가 혼잣말을 하되, ‘내가 이 자리를 잃으려 하니, 어찌하리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주인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 환영받을지 아노라.’ 주인에게 빚진 자를 하나씩 불러서, 첫 사람에게 그가 얼마나 빚졌느냐 물으니 그가 기름 1백 되라 하였더라. 그 집사가 가로되 ‘너의 밀랍판 증서에 50이라 고치라’ 하였고, 또 다른 빚진 자에게 얼마나 빚졌는가 물으니 그가 밀 1백 되라 하니, 그 집사가 ‘네 계약서에 80이라 적으라’ 하였고, 수많은 빚진 자들에게 이렇게 하였더라. 주인이 나중이 이를 발견하고, 앞날의 역경에 대비하여 이런 방법을 써서 집사가 현명했다고 인정하였더라.

“하늘의 보물을 얻고 있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불의의 재물과 사귀는 자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땅의 일이 모두 실패할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에서 환영받도록 올바른 세력과 우정을 맺으라.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하며, 한편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또한 큰 일에도 불의하리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느니라.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코웃음쳤는데 재산을 모으는 데 탐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의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를 무익한 논쟁에 말려들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적들과 토론하려 하지 않았다.

3. 부자와 거지 모임이 너무 시끄러워지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여러분, 너희가 다투는 것이 보기 딱하구나. 부자와 거지에 관한 나지르인의 우화를 너희가 들은 적이 없느냐? … 이 옛 비유는 우리의 복음과 일치하지 않아도, 하늘나라 빛을 이해할 때가 오기까지, 요한이 일러준 이야기를 주목하는 것이 좋으리라.

“디베스라 이름하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자주 옷을 입고 날마다 명랑하게 살았는지라. 나사로라 이름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헌데가 가득한 채로 이 부자 집 대문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싶어하였더라. 그러다가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쉬었더라. 얼마 안 있어 이 부자도 죽고, 임금처럼 매장되었더라. 세상을 떠나서 그 부자는 지옥에서 깨어났고,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는지라.

디베스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이리로 보내사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크게 괴로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하되, ‘이 사람아, 너는 일생동안 놓은 것을 누렸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견디었음을 기억하라. 이제는 모두가 바뀌었구나. 우리와 너 사이에 심해가 있어, 우리는 너한테 갈 수 없고 너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그리고 나서 디베스가 말하였더라, ‘내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저희가 여기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사로가 증언하도록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시기를 비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사람아,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희의 말을 듣게 하여라.’

디베스가 대답하되, ‘아니,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저희에게 가면, 저희가 뉘우치리이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더라, ‘저희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지언정 저희가 알아듣지 못하리라.'”

군중이 조용해졌기 때문에, 안드레가 자러 가라고 군중을 해산하였다.

4. 아버지와 그의 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예수는 언제나 애를 먹었다.

사람의 영적 단체를 하늘나라라고, 그 영적 우두머리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는 생각했다.

예수는 아버지를 결코 임금이라 부르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사람의 아들, 그들의 형으로 언급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믿으라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믿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실재함을 증명하는 논리를 내놓음으로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는 선언이었다.

결코 지적 가르침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체험을 겪어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는 잘 알았다.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 깨닫고서 너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부족 신 개념인 야웨라는 낱말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엘로힘)을 보통 사용했다.

예수는 결코 아버지를 임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예수는 신 개념을 가리키려고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쓰고, 하나님을 아는 체험을 가리키려고 아버지라는 낱말을 썼다.

유대인에게 엘로힘은 신 중의 신이었고, 야웨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 예수는 엘로힘 개념을 받아들였다. 종족의 신 야웨 개념 대신에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은 세상에 두루 형제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예수는 그가 엘로힘을 계시하는 자라고 하거나 그를 본 자가 엘로힘을 보았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본 자는 누구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다.

예수는 일생 동안 아버지의 성품을 묘사하는 데 국한시켰다. 삼위일체의 다른 성격자들의 성품에 대해서 말하면, 그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가르침에 만족해야 할 것이요, 아버지의 성품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하여 오직 두 가지만 가르쳤으니, 하나님이 영이요, 지음받은 모든 존재에게 아버지라는 것이다.

예수는 결코 “내 말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지 않았으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영적 렌즈요, 이 렌즈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버지를 물질 인간이 볼 수 있게 만든다. 너희는 영원자가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를 하나님, 창조자로 예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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