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에 어떤 사실이 숨겨 있는가?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이 인류가 악한 것을 보고 사람지은 것을 한탄하고 후회했으며, 홍수를 일으켜 악한 인류를 물에 쓸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유대인이 바빌론에 끌려가 수메르/바빌론 사람들의 홍수 이야기를 줏어 듣고 창세기에 올려 놓은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신화요, 전설이고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이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였으니 그다지 머리가 명석하지 않은 이요,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인류를 몰살할 생각을 하였으니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참으로 무자비한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을 그 정도의 머리를 가진 존재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지(全知)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기 전에도 사람이 불완전한 것을 알았을 터이고, 앞일을 내다 본다면 절대로 후회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나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이 이야기에 엄청난 사실이 담겨 있다. 즉 2-3천년 전에 창세기를 적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옹졸한 이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단군신화에도 무슨 사실이 숨어 있을까? 수메르어와 한국어 사이에 뜻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단군과 그 일행이 수메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가정하고서,  논리를 전개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군신화는 그저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1. 단군신화의 작자는 고조선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외래 부족 (환웅 및 3000명)과 곰 부족, 이 두 부족의 연합체가 고조선을 다스렸음을 주장한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사람이 될 기회를 주었으나 곰이 이 시합에 이겨 환웅과 결혼하고 아들 단군을 낳는다.

마늘이나 무엇을 먹는다고 곰이나 호랑이가 사람이 될 리는 없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조선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같은 언어 집단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두 부족이 환웅의 부족과 합치려고 정치적으로 경쟁한 결과, 환웅의 부족이 곰 부족과 결탁했다는 이야기이다. 하늘에서, 즉 서방에서 온 환웅 혼자만 웅녀와 결혼하여 고조선인을 처음으로 낳았다는 말은 아니다.

의자왕이 살던 사비성의 인구는 고작 5만명이었으니, 여인들의 수는 2만 5천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 3천 명이 궁녀였다면, 여인 8명에 1명이 궁녀였다는 말이니, 이것은 그저 옛 사람들이 과장하는 표현, 의자왕이 많은 궁녀를 거느렸다는 말로 생각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환웅이 3천 명을 거느렸다는 것은  환웅이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신단수가 있는 곳에 내려 와서 신시를 정하였다는 이야기로 풀이하면 된다. 물론 이들은 전부 남자가 아니고, 남녀가 섞인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같이 거느리고 왔던 사람들은 그냥 죽었을까? 아니다, 환웅의 예를 따라서 곰 부족의 사람들과 같이 섞여 자식들을 낳았을 터이지만, 신화를 적은 이가 구태여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 뿐이다.

2. 서방 부족과 섞인 단군파는 소수였고, 그들과 처음에 섞이지 않은 호랑이 부족이 고조선 백성의 주류를 이루었다.
단군 신화는 환웅이 곰 부족의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며, 호랑이 부족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두 부족이 경쟁하는 사이였으니, 호랑이 부족도 물론 당시에 조선어를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 땅에는 곰을 숭상하던 부족들의 곰 토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내몽고의 홍산 문화는 곰을 숭상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곰 토템 부족이 살던 곳이 홍산문화가 발견된 내몽고 지역일 가능성이 높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양이나 아사달은 아마도 내몽고 지역에 있었을지 모른다.

단군이 일부 고조선인의 선조이었을 터이지만, 대부분 한국인의 조상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단군의 피를 받지 않은 호랑이 부족이 당시에 살아 있었고, 그 수 또한 많았던 것 같다.

환웅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조상이 환웅이나 단군의 모습을 당시에 그려놓은 것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다. 우리 말과 수메르인의 공통점이 많으므로, 환웅이 수메르인일 가능성이 많다.

수메르인의 후손은 대규모의 종족 혼합이나 이동이 없었다면, 후일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페르샤인과 시리아인 또는 이락인과 같이 생겼을 것이다.



이 부조(浮彫)에서 보다시피, 수메르인은 페르샤인처럼 머리가 꼬불꼬불했다.



기원전 2400년의 수메르인 조각, 이쉬탈 성전, 루브르 박물관.



기원전 3300년의 수메르인 조상(彫像), 우륵(구약의 홍수가 난 곳)에서 발굴, 루브르 박물관. 이 조상에서 보다시피, 수메르인은 수염이 짙게 났다.

현재 한국인이 예전의 수메르인 또는 현대의 이란, 이락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많이 없다는 것은 단군파가 고조선 사람들 중에 소수파였다는 것을 또한 입증한다. 그래도 외래인의 영향은 한국인의 머리털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중국인의 머리털처럼 대체로 곧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도 있다.

누가 호랑이족이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일설에 따르면 예맥족이 호랑이를 숭배했다고 하며, 호랑이족이 남방의 족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쨋든 한반도에는 곰보다는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 많고, 호랑이가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옛날 이야기도 많으니 호랑이 부족이 고조선 초기에는 밀려났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흡수된 다수파였다고 볼 수 있다.
 

3. 신시는 조선이 아닌 곳에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또는 서쪽에) 있고, 환웅과 웅녀가 만난 곳은 곰을 숭배하는 지역, 아마도 우랄 산 근처이고, 아들 단군은 산지에서 죽었다 (산신이 되었다).
환인(하느님)이 환웅을 신단수(神壇樹)가 있는 신시(에덴)로 보내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시를 떠나서 동방으로 가서 나중에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산에서 죽었다 (산신이 되었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나 이 평양이 지금 한반도에 있는 도시라고 보기는 힘들다.
수메르인은 가는 곳마다 신시를 지었고, 제단을 쌓았다. 생명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신단수를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후일의 바빌론 사람들이 지은 여러 성의 벽에 새긴 조각에서 드러난다.


이쉬타 (Ishitar) 성전 벽에 새긴 조각, 임금이 생명나무의 과일을 딴다.

환웅이 수메르인이었다면, 신시는 아마도 바빌론이나 그 지역에 있던 에리두나 에덴 동산이었을 것이고, 적어도 한반도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군신화에는 설명이 없으나, 환웅이 바빌론에서 출발하여 동방으로 갔다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우랄 산맥을 거쳐야 한다. 환웅과 웅녀가 만난 곳은 한반도나 동북 아시아가 아니라, 우랄 산 지역이다. 즐문토기가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및 동북 아시아에서 발견된다고 하니, 환웅과 웅녀가 만난 곳은 아마도 우랄 산맥 지역이나 그 동쪽이었을 것이다.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말은 단군이 산지(山地)에서 죽었다는 말이 된다.

수메르인은 우상을 잘 발달시켰고, 임금의 우상이 신의 우상 앞에서 기도하면, 이것은 임금이 항상 기도하는 것이라 믿었다. 마찬가지로, 웅녀가 신단수 밑에서 기도하여 단군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신시에 있던 신단수를 아사달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신성한 나무의 상징을 세워놓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기도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4.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에는 수를 계산하는 데 60진법, 그리고 칠일을 일주로 계산하는 데 이것은 수메르에서 빌려온 관습이다.
중국에서는 십, 백, 천 따위로 수를 계산하는 데는 십진법을, 시간 또는 해를 계산하는 데는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60진법을 썼다. 중국에서 이렇게 간지(干支)를 사용한 것은 갑골 문자가 나타난 시기, 기원전 12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 지역에서 60진법을 쓴 것은 기원전 2-3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중국이 수메르와 따로, 독자적으로 60진법을 발명했을 수도 있으나,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수메르의 60진법은 중국보다 750-1750년이 앞섰고,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 자체가 로마 숫자나 중국의 숫자보다 월등하다.

한자나 로마 글자에는 십진법의 각 자리 수마다 다른 글자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十은 언제나 열을 표시하고, 百은 백을 표시한다. 로마 글자도 마찬가지로, X는 열, C는 백, M은 언제나 천을 대표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큰 수를 표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억, 조, 경 다음에 다른 한자를 계속하여 발명해야 하지만, 이러한 수는 일상 생활에 거의 쓰이지 않는다.) 수메르인의 숫자 표기 방법은 월등하게 낫다. 똑같은 숫자가 자리에 따라서 1일 수도 있고, 또는 60이나 3600이 될 수 있다. 후일에 이 방법을 십진법에 이용하여, 우리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고 있고, 자리에 따라서 1은 하나일 수도, 백, 천, 또는 십억을 상징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수 중에서, 3천 명 (60 x 50), 삼백예순 가지 일 (60 x 6), 스물 (60/3), 그리곳 1500 (60×25)이 60진법에서 자주 쓰이는 수이다.

노이게바우어(Neugebauer)에 따르면 스물이 60진법의 기본 수였다. 원시 사회가 조직되면서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따로 일하는 것보다 경제적 효율성이 늘어나고 공동으로 생산한 것을 함께 나눌 필요성 때문에 60진법이 생긴 듯하다. 60은 1, 2, 3, 4, 5, 6, 10, 12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흔히 같이 일할 필요성 때문에 60진법이 생긴 듯하다.

7일을 한 주(週)로 계산하는 관습은 유대인의 관습이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기원은 바빌론에서 기원전 6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어로 사바트(sa-bat)는 중간의 휴식, 아카드어(Akkadian)로 달 중간에 노는 날을 뜻한다고 한다. 이 관습을 아마도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 포로생활을 하면서 빌려온 듯하다. 로마인들은 8일 단위로 날짜를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고 줄리아스 케자가 달력을 개혁하면서 七日一週 계산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십일 단위로 (초순, 중순 따위로) 날을 계산하였고, 4세기에 이르러 진(晉)나라에서 칠일을 일주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일연이 단군신화를 쓸 당시에 고려 시대의 달력은 대체로 중국에서 빌려온 선명력(宣明曆)이었고, 칠일일주제를 쓰지 않았다. 이 선명력은 당나라가 722년에 만들었고 70년 밖에 쓰이지 않았으나, 고려와 이조에서 오랫동안 쓰였다고 한다.

일연이 쓴 단군신화에 웅녀가 三七日만에 여자가 되었다는 말은 단군신화가 쓰여진 고려조가 아니라, 수메르에서 칠일일주 계산법을 이어받았음을 가리킨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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