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기원 (korigin)

인생

6-22세까지, 보통 한국인은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다음 20년은 자식들을 기르는 데 바친다.

다음 20년은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실력을 쌓고 인정을 받는다.

60이 되어서야, 은퇴를 생각하고 아직 몸이 건강하다면, 인생을 돌아볼 겨를이 생긴다.

누구나 대답해야 할 질문?

인생의 몇 퍼센트를 자신을 위하여 쓰고 몇 퍼센트를 남을 위하여 쓸 것인가?

젊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위하여 인생의 100%를 쓰겠다면, 나라의 장래가 밝지 않다.

몇 %라도 남의 복지를 위하여 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일기 시작한다.

인생의 목적

돈과 명예와 권력? (모두가 근시안적 추구)

명성: 명성도 잠시 뿐이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런 사람들마저 얼마 안 있으면 죽고, 그들의 기억도 사라질 터인데,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기억을 위하여 인생을 허비하는가?

  한국인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先史시대의 한국인은 어디서 왔는가?
한국인의 뿌리

1. 한국어의 기원 (우리는 수메르와 우랄 산에서 왔다)

2. 수메르인의 7 가지 공헌

3.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상관 관계 (13 가지 유사성)

4. 한국어와 수메르어 문법의 차이

5.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왔다는 5 가지 물증

6. 단군 신화의 의미

7. 환웅 부족이 언제 떠났는가?

8. 왜 떠났는가?

 

이러한 주장은 피상적 언어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므로, 전문가들의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1. 한국어의 기원 (우리는 우랄 산에서 왔다)
한국어와 인도유럽 언어의 공통점

한국인이 어디서 왔는가 그 기원을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 족에 속한다고 하니 그 옛날에 우랄 산 (모스코바와 카작스탄 사이의 지역) 근처에서 살다가 무슨 일인지 동쪽으로 가서 한반도에 정착한 것 같다.

인도 유럽어족이 우랄 산 남쪽, 코카서스 산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졌다고 하니, 우랄 알타이 어와 인도 유럽어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중요한 조상들이 중앙 아시아에서 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사의 과거형이 같다

현대 언어 중에서 우리의 선조가 중앙 아시아(우랄 산 근처)에서 왔다는 증거가 있을까?

대표적인 인도 유럽어는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일 것이다. 현대 영어 단어의 반 이상이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언어들은 우리 말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원시 사회에서는 처음에 어순만으로 의미를 결정하는 고립어가 생긴다. 좋은 예는 중국어이다. "워-아이-니"(나는 너를 사랑한다)에서 주어와 목적어의 자리를 바꾸면, "니-아이-워"(너는 나를 사랑한다)가 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토씨를 사용하는 교착어와 어미를 변화시키는 굴절어가 생긴다. 인도 유럽어는 어미를 변화시켜 뜻을 다르게 만들므로 굴절어이다. 한국어는 (-은, -는, -이, -가와 같은) 토씨를 갖다 붙여서 단어의 역할을 표시하므로 교착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이 2 가지를 다 활용하므로, 굴절어이자 교착어이다.

코카서스 인종은 기원전 3500년까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서스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이 쓰던 인도 유럽어는 굴절어(inflected language)이므로, 동사의 어미를 바꾸어 과거형을 만들었다.

또한 우랄 산 근처에는 이들로 파생된 우랄어들이 정착하지만 수메르인의 영향을 받는다. 우랄 알타이어는 토씨를 많이 쓰는 교착어이다. 수메르어가 교착어이니까, 수메르인의 일파가 북쪽으로 코카서스 산 (인도 유럽어) 지역을 지나고 우랄 산(교착언어) 지역으로 갈라질 때, 유럽어의 과거형을 유지하는 교착어가 생긴 듯하다. (한국어와 일본어)

우랄 산과 한국까지의 거리는 5300킬로미터. (서울-부산 거리의 12배)

규칙 동사를 과거형으로 만들려면, 영어에서는 동사 끝에 -ed 를 붙이면 된다. 예를 들면, pass 의 과거는 passed 가 된다. 독일어의 규칙 동사도 끝에 트 (또는 테, 타) 소리가 들어간다. 예를 들면, Sie spielen Klavier를 과거로 하면, Sie spielte Klavier (그들은 피아노를 쳤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어로 Vorrei pagare il conto (식비를 치르고 싶습니다)이다. 현재형 pagare(지불한다)는 pagato(지불했다)로 변한다. finire(끝내다)가 finito(끝냈다)로 변한다. 물론 영어에서는 pay(지불하다)가 paid (지불했다)로 바뀐다. 과거형은 규칙 동사의 경우에 동사의 원형에 -ed 또는 트 발음이 붙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어에는 불규칙 동사가 없고, 과거를 나타낼 때는 -ㅆ다 라고, 어미에 센 발음이 들어간다.

우리 말과 가장 가까운 일본어도 불규칙 동사가 없고, 과거형이 비슷하게 변한다. わかる(안다, 이해한다)가 わかった (알았다 또는 알갓다. 북쪽 사투리로, "알가서"로 부드러워진다)가 된다. たべます(먹습니다)가 たべました(먹었습니다)가 된다.

한국에 주저앉은 사람은 한국인이요,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은 일본인이 된 것이다. 우리말과 유럽어는 중국어보다 더 가까웠던 것이다.

과거형이 유럽어와 한국어가 같다는 것은 이 두 언어 종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을 가리킨다. 우리 말이 교착어인 것은 우리 선조의 일부가 수메르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과거형의 중요성

 

그러면 왜 동사의 과거형이 중요한가를 설명해야 한다. 원시 사회의 사람들은 어휘가 몇 개 안 된다.

그러나 원시 사회에서는 협동이 필요하다. 사나운 짐승을 잡거나 물건을 나르거나 집을 짓거나, 사람들이 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 동사의 현재형이나 미래형보다, 명령형과 과거형이 더 긴요하다.

수메르어와 한국어에는 지시에 쓰이는 명령형, 그리고 완료형이 중요합니다. 원시 사회에서는, 명령형이 기본형입니다. 가정법이나 무엇을 하고 싶다는 희망이나 미래형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형은 한 동작이 완료되었고 지난 사건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했다’, ‘알았다’, ‘잡았다’ 등의 과거형이 중요하다. 지금 하고 있다든가, 내일 하겠다든가, 앞으로 할 것이라는 등의 약속은 원시 사회에서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말은 중국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중국어의 과거는 (다른 방법도 있지만) 대체로 "-ㄹ라"로 표현한다. ?吃了口+馬?(니, 츨라마?: 너 밥 먹었느냐?)라고 과거를 표현한다.

   

 

  2. 수메르인이 세계사에 미친 일곱 가지 영향(공헌)
수메르인의 모습

대영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베르린)

이 부조(浮彫)에서 보다시피, 수메르인은 페르샤인처럼 머리가 꼬불꼬불했고,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처럼 나뭇 잎을 엮어서 만든 치마를 걸쳤다.

기원전 2400년의 수메르인 조각, 이쉬탈 성전, 루브르 박물관.

수메르에는 직물 짜는 기술이 아직 없었다.

기원전 3300년의 수메르인 조상(彫像), 우륵(구약의 홍수가 난 곳)에서 발굴, 루브르 박물관. 이 조상에서 보다시피, 수메르인은 수염이 짙게 났다.

우리 선조의 소수파는 수메르에서, 대다수는 우랄 산에서 온 듯하다. 현재 한국인이 예전의 수메르인과 비슷한 모습이 많지 않다는 것은 단군파가 고조선 사람들 중에 소수였다는 것을 또한 입증한다.

1. 글자의 발명

젬뎃 나스르 기(기원전 3100-2900년)에 쐐기 문자를 발명했다.

쐐기 문자는 그림 글자로 시작했다. 머리와 빵은 합쳐서 "먹다"라는 동사가 된다.

쐐기 문자는 알파벳이 아니라 일본의 히라가나처럼 음절 문자이다.

상형 문자와 쐐기 문자로부터 알파벳이 후일에 나온다.

2. 맥주의 발명

곡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맥주가 발명되었다.

3. 바퀴의 사용

우바이드 도기 (돌림판을 쓴 것이 분명하다)

4. 생명나무 전통

이쉬타 대문에 새겨진 생명나무 타일. (페르가몬 박물관, 5층 건물 높이)

tree 님롯 궁전에 새겨진 생명나무, 대영 박물관.

수메르인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 메소포타미아에서 살던 사람들이고, 이것은
창세기와 유란시아서에 따르면, 에덴 동산이 있던 곳이다.

수메르인은 어디를 가든지 생명나무 전통을 가지고 갔다. 젬뎃 나스르기 이후에, 바빌론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몰려들어와 정착하면서 수메르인의 전통을 받아들였고, 바빌론에 잡혀온 유대인들은 생명나무 및 홍수 이야기를 구약에 집어넣었다.

5. 지상천국의 전통

 

 

 

 

 

 

 

 

 

 

 

 

 

 

 

 

 

 

 

수메르인은 딜문이 천국과 같은 동산이라고 믿었다. 기원전 2300년 경에 딜문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딜문 동산 이야기는 구약의 생명나무 이야기와 에덴 동산 이야기의 근원인 듯하다. 신시, 에덴, 딜문의 전설은 중국인 사이에 무능도원이 되며, 중국인은 무능도원이 서쪽에 있다고 믿는다.

환인(하느님)이 환웅을 신단수(神壇樹)가 있는 신시(에덴 또는 딜문)로 보내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신시는 조선이 아닌 곳에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또는 서쪽에) 있고, 환웅과 웅녀가 만난 곳은 곰을 숭배하는 지역, 아마도 우랄 산 근처였을 것이다.

단군은 요(堯) 임금 시대에 (기원전 2000년경)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1500년 동안 다스렸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기자 조선이 성립되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로 돌아와 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아사달은 수메르인들이 살던 이쉬타르와 소리가 비슷하고
, 한반도에 있던 도시가 아닌 것 같다.

후일에 흘러들어온 셈족들은 수메르인은 생명나무 전통을 이어받았다. 바빌론 사람들이 지은 이쉬타 대문이나 성벽에는 생명나무 이야기가 적혀 있다.


기원전 2200-2100년경에 새겨진 수메르인의 인장 (대영 박물관). 생명나무의 전설이 그려져 있고, 이 기록은 구약보다 천년이나 앞선다.

6. 60진법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에는 수를 계산하는 데 60진법, 그리고 칠일을 일주로 계산하는 데 이것은 수메르에서 빌려온 관습이다.

수메르인은 동이족 뿐 아니라 중국의 한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십, 백, 천 따위로 수를 계산하는 데는 십진법을, 시간 계산에는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60진법을 썼다. 중국에서 이렇게 간지(干支)를 사용한 것은 갑골 문자가 나타난 시기, 기원전 12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 지역에서 60진법을 쓴 것은 기원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중국이 수메르와 따로, 독자적으로 60진법을 발명했을 수도 있으나,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수메르의 60진법은 중국보다 2천년이나 앞섰고,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 자체가 로마 숫자나 중국의 숫자보다 월등하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수 중에서, 3천 명 (60 × 50), 삼백예순 가지 일 (60 × 6), 스물 (60/3), 그리고 1500 (60 × 25)이 60진법에서 자주 쓰이는 수이다.

원시 사회가 조직되면서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따로 일하는 것보다 경제적 효율성이 늘어나고 공동으로 생산한 것을 함께 나눌 필요성 때문에 60진법이 생긴 듯하다. 60은 1, 2, 3, 4, 5, 6, 10, 12로 나누어지며, 이러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흔히 같이 일하고 수확을 나눌 필요성 때문에 60진법이 생긴 듯하다.

7. 七日一週 체계

7일을 한 주(週)로 계산하는 관습은 유대인의 관습이지만,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갔다가 배워온 전통이다.
수메르의
구티 왕조때부터, 기원전 2150년경에 칠일1주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메르어로 사바트(sa-bat)는 중간의 휴식, 아카드어(Akkadian)로 달 중간에 노는 날을 뜻한다고 한다. 이 관습을 아마도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 포로생활을 하면서 빌려온 듯하다. 로마인들은 8일 단위로 날짜를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고 줄리아스 케자가 달력을 개혁하면서 七日一週 계산법을 채택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십일 단위로 (초순, 중순 따위로) 날을 계산하였고, 4세기에 이르러 진(晉)나라에서 칠일을 일주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일연이 단군신화를 쓸 당시에 고려 시대의 달력은 대체로 중국에서 빌려온 선명력(宣明曆)이었고, 칠일일주제를 쓰지 않았다.

   

 

  3.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상관 관계
 

크게 보아서 수메르인은 백인종에 속하고 우리는 황인종에 속한다. 그러니 수메르인과 한국인이 동족이라는 것은 어거지이다. 또한 고조선 사람이 서방으로 수메르까지 가서 찬란한 문화를 세웠다는 것도 과학적 근거가 없이 민족우월사상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고려하기 전에, 이 두 언어의
13 가지 상관 관계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처음 3 가지는 다른 학자들이 이미 언급하였다.

(1) 어순이 같다

언어의 구성 분자인 단어는 쉽게 바뀔 수 있지만, 문법은 바꾸기가 힘들다.

수메르어는 우리말과 같이
문장의 구조가 ‘주어 + 목적어 + 동사’로 되어 있다
. 고대 황인의 언어는 문법이 바뀌지 않았을 터이니, 현대 영어나 중국어와 마찬가지로 ‘주어 + 동사 + 목적어’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황인종은 다른 종족과 섞이지 않고 따라서 독자적인 문법을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Eridug.a. e gu.a bi.n.du

에리둑에(a), 집(e)을, 강변(gu)에(-a), 그가(n =he/she) (bi=생물) 지었다(du)

두 언어가 또한 교착어라서, 앞토씨(접두어)와 뒷토씨(접미어)를 사용하여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도 의미가 통한다.

(2) 유사음동의어가 많다.

문정창 교수는 여러 사람이 수메르어와 한국어 사이에 유사음(類似音) 동의어가 여럿이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수메르어의 gu는 먹다는 뜻이고 일본어의くう(구우)와 상통한다.

etutu는 어두움이고, dingir(신, 단군?), e2 (장소를 가리키는 어디"-에"), ama (엄마), nuru (빛), umum(어머니), 수메르어 사전이 영어로 출판되어 있으나, 해독된 진흙 서판이 많지 않아서, 불충분하다.

대체로 유사음 동의어는 명사의 경우이고, 비슷한 동사는 거의 없다.

(3) 장소를 가리키는 토씨 = -a

우리 말의 -에와 같다. 예를 들면, An ki-a (안키아) = 하늘(an/anu)과 땅(ki)-에, 에서, 그리고 Iri Lagas-a (in the city Lagas/Lagash)는 ‘라가쉬 시(市)-에서’가 된다. 이 외에도 비슷한 조사들이 더 있다. 예를 들면, ‘우림타 니부르세’는 ‘우림에서“부터” 니부르까지’ 이고, u-bi-ta는 ‘그날/그때부터’이다.

라가쉬의 임금 구데아, 기원전 2120년경. 루브르 박물관.

(4)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일본어처럼 (반짝반짝, キラキラ) 형용사를 되풀이한다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형용사를 되풀이하는 것은 강조를 의미한다. 곱디 고운 것은 아주 곱다는 뜻이다. 수메르어에서도, kal은 “귀한”(precious), 그리고 kal-kal 은 “대단히 귀한” (very precious)의 뜻이 된다. 셴(šen)은 깨끗한 (clean)이고, 셴셴(šen- šen)은 “아주 깨끗한”(very clean)의 뜻이 된다. 또한 Digir-gal-gal은 ‘크나큰 신’이 된다.

중국어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으나 우리와 표현이 다르다. 정당을 강조하느라고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하다"고 말하지만, "정당 정당"이라거나 "명백 명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짝반짝"한다고 말하고 "반반짝짝"이라고 하지 않는다.

(5) 수메르어 동사의 기본형은 "-우"로 끝난다

rabu = compensate

kalu = confine

kanu = convict

manu = count

wabalu = carry

qamu = burn

동사형의 끝이 비슷하다.

일본어의 동사는 대체로 "-우"로 끝난다. 그러나 기본형(명령형)은 "-에"나 "-요", "-로"로 끝난다.

한국어 명령형은 "-어"나 "-아"로 끝난다.

(6) 명사의 동사화

한국인은 빌려온 중국어 명사에 -하다를 붙여 동사를 만든다. 수메르인도 명사에 조동사 -du (to do, 하다)를 붙여서 동사를 만든다. 예를 들면, inim(word)-du는 ‘말을 하다,’ 즉 speak(말하다)라는 동사가 된다. 불규칙 동사가 많다.

(7) 관사(a, an, the)를 피한다. "하나"나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그" 따위의 관사를 잘 쓰지 않는다.
(8) 부정사, -nu, -na

무엇을 부정할 때, nu-를 아니야, " 않아"라는 뜻으로 쓰이며,

na-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말에 "-하지 마"

일본어에 금지형: "-나": 하나스 → 하나스나(말하지 마!), 가에루 →가에루나 (돌아오지 마!)

(9) 명령형 = "-a"

간결 명령형이 "-아"로 끝난다. (드물게는 -e)

petu (open): peta! (open for me)

Kanpa (Remember!)

ziga (Rise!)

ede(Descend!)

?en-na (Go!)

우리 말의 간결한 명령형도 "-아" 또는 "-어"로 끝난다.

예: 먹어! 잡아!

"-압"으로 끝나기도 한다. 우리 말의 "하시압"과 같은 듯하다.

zi-ra-ab (지워라!)

zi-ga-ab (올려랏!)

 

후일에 부드러운 명령형, "-어라/아라" 또는 "-어요/아요"가 등장한다

예: 해라, 먹어라 (하다는 불규칙 활용 동사)

(10) 비완료형 = 현재 + 미래의 뜻

수메르어는 동작이 끝났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분한다. 그래서 (현재ㆍ과거ㆍ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과 비완료형을 구분한다. 동사의 현재형과 미래형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쓴다.

우리 말과 일본어도 같은 버릇을 지닌다. 영어에서는 I will go to school tomorrow가 분명히 미래형으로 표현되는데, 우리 말에서는 "나는 내일 학교에 갑니다"로 쓰고, 일본어에서도 "あした 私は 學校へ いきます”로 현재형 동사를 쓰지만 의미는 미래이다.

(11) 복수 표현

명사들을 나열할 때, 우리는 끝의 명사에만 "-들"을 붙인다.   예를 들면 "개와 돼지들에게만 던져지는 진주"라 말하고, "개들과 돼지들"이라고 들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수메르어도 같은 식으로 말한다.

수메르인은 "-네"를 복수를 표시하기 위하여 명사 끝에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 말에 "너네"에만 남아 있다. 기타 복수에 우리는 "-들"만 사용한다.

(12) 부정형 질문

수메르어에는 물음표가 없어 어떻게 질문하는지 알 수 없다.

부정형 "-나"가 쓰이는데, -하지 않아? 따위로 질문한 듯.

우리말도 흔히 부정형으로 질문한다
: 이것 맛 있지 않아?

우리말도 아직도 그러한 질문 어미를 유지하고 있는데, ‘나’가 변하여 우리 말에서는‘않아,’ ‘-느냐’‘-는가’따위로 니은 소리가 남아 있다.

(13) 관계 대병사의 부재. 3인칭 대명사의 2분화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대명사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한다. (그와 그것)

우리말처럼 관계 대명사가 없다. who 대신에 루(man), which 대신에 닝(thing)을 쓴다.

   

 

  4. 한국어와 수메르 문법의 차이
 

어느 시점에인가 황인종 한 쌍이 부모와 다르게 돌연 변이로 생겨났을 것이다. 두 쌍이 태어났을 수도 있고, 남자 아이 둘과 여자 아이 하나, 아니면 여자 아이 둘과 남자 아이 하나가 태어났을 수도 있으나, 편의상 황인종 한 쌍이 진화로 생겨났다고 가정하자.

이 초기의 황인종 언어를 고대 중국어라고 부르자. 그러면
언젠가 황인종 집단에서 수메르의 영향을 받고서, 고조선인이 가지를 쳐 나온 것이다. 고조선인이 고대 중국인과 동질이었다면 가지를 쳐 나올 이유가 없다.

처음에 수메르어를 하는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이 종족 결합을 하면, 각자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의 언어가 섞이고 달라진다. 환웅 부족은 수메르에서 출발했지만, 우랄 산의 코미 부족과 내몽고 홍산 지역의 부족들은 모두 곰을 숭상하였다. 그러니 환웅 부족과 합친 곰 부족은 우랄산에 있던 부족이라 볼 수 있다.

종족의 결합과 언어의 변화

두 부족이 합쳐질 경우에 언어의 진화에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작용한다.

(경제 효과)
우수한 문화를 가진 종족의 언어가 지배한다
.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에서 필립 2세를 뒤이어 임금이 된 후에 13년 동안 지중해의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 이후에 지중해의 세계는 어디를 가나 그리스어를 해야 되었고, 신약도 그리스어로 쓰여 있다.

고조선이 설 당시에, 환웅 부족은 곰 부족에게 농사와 위생을 가르치고, 고조선 사회에 법을 세워 사회를 안정시켰다. 따라서 곰 부족 사람들은 쉽사리 수메르어를 많이 빌렸을 것이다.

(인구 효과)
큰 인구의 언어가 지배한다
. 두 종족의 인구 비율이 비등하다면 두 부족이 서로 언어를 빌려오고 두 언어가 골고루 섞인 혼합 언어가 개발될 것이다. 그러나 한 부족이 다른 부족보다 월등하게 수가 많으면, 다수의 언어가 지배하게 되어 있다.

서기 1616년에 여진(만주) 족은 金나라를 세우고 차츰 중국을 먹어 들어가 결국은 중국 땅에서 청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여진 족의 수는 중국 인구에 비해서 훨씬 적어, 중국을 지배할 필요성 때문에 중국어를 배울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자기네 만주어를 잃어 버렸다.

고조선어는 수메르어와 고대 황인어의 혼합. 이 두 영향이 서로 반대되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온 환웅 부족의 수가 원래 우랄 산이나 홍산에 있던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보다 훨씬 적었으므로, 이 두 언어의 싸움은 일방적으로 수메르어가 이길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니 곰과 호랑이 부족 언어의 흔적이 무엇인가 남아 있다.

(a) 형용사의 전치

고조선인이 받아들이지 않은 수메르어 문법

수메르어에서는 숫자를 제외하고,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반드시 뒤에 나온다. 예를 들면, Anše (당나귀) tur(작은) mah (높은,큰), 즉 ‘안쉐 투르 마’는 ‘작고 큰/크고 작은 당나귀’가 된다.

그러나 원시 황인어의 문법은 아마도 현대 중국어 문법에 가까웠을 것이다. 수식하는 형용사 또는 과거 분사가 반드시 명사 앞에 나와야 된다. 예를 들면, 노란 꽃은 黃花요, 새로 연 레스토랑은 신카이다 찬팅(新開的餐廳)이다.

(b) 수메르어의 불규칙 동사

수메르어의 동사는 대부분이 불규칙 동사

인도 유럽어는 코카서스 산에서 이 영향을 받았다.

nadanu (give): isruk (gave)

qabu (speak): iqbu (spoke)

napahu(break out): innapih (broke out)

동사 현재형 앞에 i-를 붙여서 (불규칙) 과거형을 만든 듯.

규칙 동사?

eribu (enter): erumma (entered)

코카서스 인종이 쓰는 인도 유럽어의 불규칙 동사는 수메르인의 영향인 듯.

 

  5.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왔다는 물증이 있는가? (다섯 가지 물증)
우르의 군기 (자개 상자)

우르의 군기는 기원전 2600년 경에 만들어진 일종의 자개상자인데 옆면은 사다리꼴로 되어 있고 앞뒤에는 다음과 같이 전쟁 장면과 평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우르의 군기(軍旗)의 전쟁 장면

전쟁 장면은 수메르 군대가 적들(아마도 아카드 군대)을 격파한 것을 그린다. 수메르인 이전에는 말이 끄는 전차에 관한 기록이 없다. 맷 윗줄에는 수메르 군인들이 청동도끼를 들고 있다. 가운데 줄에 군인들은 청동 투구를 쓰고 청동 단추가 달린 갑옷을 입었다. 전쟁 장면의 왼쪽에는 나뭇잎 치마와 갑옷을 입은 두른 수메르 군대가 있고 바른쪽에는 각이 난 치마를 입은 적의 군대가 있다.

수메르와 키시의 아카드 족속 사이에 오랫동안 다툼이 있었으나 결국 사르곤 왕이 수메르를 지배하고 아카드 제국을 세웠다.

우르 군기의 평화 장면.

이 우르 군기에 그려진 임금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으나, 우르 파빌삭(기원전 2550년 사망)이 유력하다.

평화 장면의 셋째 줄에는 정복당한 뒤에, 각이 난 치마를 입은 (아카드) 군인들이 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 중에 두 군인은 어깨에 지게를 지고 있고, 마지막 줄 바른 쪽의 두 수메르인의 지시를 받고 있다.

왼쪽 사다리꼴은 잘 보존되어 있지 않은데, 3층으로 나누어져 있고, 상면에는 생명나무의 꽃과 이파리, 생명나무가 자개와 청금석으로 새겨져 있다. 중면과 하면에는 야생 동물과 염소가 그려져 있다. 바른쪽 사다리꼴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면에는 생명나무의 덩굴과 지키는 동물, 중면에는 수메르인이 생명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하면에는 네 마리의 동물이 가운데 생명나무를 지키다.

(1) 나전칠기

수메르와 고조선의 풍습이나 문물이 같다면 환웅 부족이 수메르에서 왔다는 물증이 될 것이다.

위의 사진은 우르의 군기라고 알려진 자개상자인데 기원전 2600년에 만들어졌다. 바탕은 나무이고 반짝이는 조개 껍질, 청금석, 붉은 화강암 조각으로 장식했고, 검은 색은 역청(아스팔트)였다고 한다. 역청은 높은 온도에서 안정되지 않으므로 중동에서 아스팔트를 장식품에 사용했다는 것은 오류일 수 있다. 학자들이 이것이 옻나무 액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칠화칠기(낙랑칠기)는 중국에서 들여왔다. 1988년에 경남 다호리 고분에서 기원전 1세기(청동기 시대)의 칠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서주 시대(기원전 1046 – 771년)에 중국에서 나전기술이 발달되었으나, 수메르는 1500년이 앞서니, 고조선 시대에 수메르에서 자개 기술이 들어왔을 것이다.

(2) 지게의 사용

수메르가 고조선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지게는 우리 선조가 고안하고 삼국 시대부터 사용된, 한국 고유의 물건으로 생각되어 왔다.(이종호: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들것, 지게)

우르 군기의 평화 장면 셋째 줄에는 두 남자가 등 뒤에 자루를 지고 있고, 또한 두 남자가 지게를 지고 있다. 이것을 보면, 한국인보다 수메르인이 먼저 지게를 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메르인과 조선 사람이 따로 지게를 발명했을 수도 있지만, 수메르인이 지게를 먼저 사용하고, 그 풍습이 곰 부족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지게 모양을 살펴 보면, 두 개의 반듯한 나무 막대기를 H-자 형으로, 세곳, 위ㆍ아래ㆍ중간에 연결해서 만들었고, 가운데는 짐을 묶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반듯한 지게 틀을 만들려면, 망치는 물론 톱을 사용한 듯하다.

(3) 청동 단추 및 거울의 전파

청동 병기는 주조 과정을 거친 뒤에, 갈고 닦아야 하는, 노동 집약적 제조업이다. 무거운 청동 투구나 방패보다는 청동 단추가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용도였을 것이다. 거푸집을 이용해서 대량 생산할 수 있고, 군인의 몸을 완전히 보호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보호한다.

청동 단추가 먼저 수메르에서 쓰였고 나중에 고조선 지역에서도 쓰였다는 것은 수메르의 청동 단추가 고조선의 청동 단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청동 단추는 기원전 2천년 경부터 키르기스탄 유목민이 사용한 청동 거울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초기의 청동 거울은 단추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청동이 당시에 무척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4) 머리에 물건을 이고 가는 여인

짐을 머리에 이는 것은 또한 수메르와 한국의 공통 관습이다. 물론 이것은 두 나라만 가지고 있는 풍습은 아닐지 모른다. 환웅이 가져온 천부인은 지게, 청동 단추/거울, 그리고 망치였을지 모른다. 이 세 가지가 우르 군기에 나타난다. 원시 부족 사회에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도구가 있었을까?

대영 박물관

(5) 7일 일주제 직접 도입

일연이 쓴 단군신화에 웅녀가 三七日만에 여자가 되었다는 말은 중국이 아니라, 곰 부족이 수메르에서 칠일일주 계산법을 이어받았음을 가리킨다.

로마인 7일에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 수레가 전해지지 않았는가?

청동 병기의 사용. 기원전 3200년부터 수메르인은 바퀴가 달린 전차를 사용했다. 우르 군기의 전쟁 장면에는 이러한 4륜 전차가 적군을 밟고 넘어가는 것을 보여 준다.

수메르인이 살던 당시에는 도시 국가 안에만 도로가 발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평야에서 전투할 때는 이러한 전차가 쓰였을지 모르지만, 장거리 여행에, 길이 닦여 있지 않은 먼 곳으로 가는 데, 통나무 바퀴를 단 수레는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환웅이 3천 명을 거느리고 고조선 땅까지 갔다면, 수메르의 수레를 탄 것이 아니라 말을 타거나 걸어서 갔을 것이다.

언제 수메르 문화가 고조선에 전해졌는가?

 

 

 

언제 수메르 문화가 곰 부족에게 전해졌는가? 아카드 제국이 구티 족에게 기원전 2218년에 망했을 때, 아카드 사람이 조선까지 걸어 왔더라면, 지금 한국어에는 많은 셈족어 (유대인어, 아랍어 따위)의 단어나 문법이 섞여 있을 것이다.

우리 말에는 전혀 셈어의 흔적이 없다
. 이것은 아카드의 사르곤 왕이 기원전 2334년에 바빌론 제국을 세우기 이전에, 수메르인들이 떠나서 한반도에 도착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수메르인의 청동기가 고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우르 군기의 전쟁 장면에서 보다시피,
기원전 2600년 경부터 (젯뎀 나스르기) 전문 직업 군인이 생겼다. 이 군인들은 청동으로 만든 갑옷 및 칼과 도끼를 든 것 같다. 14개의 도시 국가 중에서 큰 곳에서는 4, 5천명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메르인의 청동검이 비파형 청동검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메르 문화가 고조선에 미친 영향

이상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a) 기원전 2334년에 수메르인들이 차츰차츰 밀려 들어온 셈족의 수에 눌려 나라를 잃었고, 또한 1900년 경에 다시 세운 수메르 3 왕조도 전복되었다. 따라서, 상심한 수메르인들이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메소포타미아를 떠났다. 그러니 환웅 부족이 고조선 땅에 온 것은 기원전 2334년이나 1900년 경 이전이었을 것이다.

(b) 두 언어의 문법 유사성은 고향을 떠난 수메르인의 일파가 고조선에 가서 정착했음을 가리킨다.

수메르인과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지게, 자개 상자, 청동 단추의 사용, 여인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다니는 풍습은 고조선인이 환웅부족에게서 문화를 전수받은 것을 가리킨다.

   

 

 

6. 단군신화의 의미

단군은 수메르에서 온 사람

조선 사람이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원숭이가 한반도에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진화했거나, 아니면

(2) 조선 사람이 다른 곳에서 한반도로 흘러들어갔다.

이 두 가지 가설 중에서, 둘째가 유력하다는 증거는 단군 신화에 나온다.

단군신화에는 하늘나라 임금 환인의 아들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밑으로 내려와서 이를 神市라 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신화는 환웅 부족이 곰 부족의 영토에 들어와, 갑자기 곰 부족과 합쳐진 것을 암시한다.

1. 환웅 부족 (환웅 및 3000명)과 곰 부족의 연합.

환웅은 아마도 수메르인이었고, 신시는 아마도 바빌론이나, 에리두나, 에덴 동산이었고, 적어도 한반도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웅과 웅녀가 만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우랄 산 지역이다. 즐문토기가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및 동북 아시아에서 발견된다고 하니,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이 만난 곳은 아마도 우랄 산 지역이나 그 동쪽이었을 것이다.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말은 단군이 산지(山地)-우랄 산에서 죽었다는 말이 된다.

웅녀가 신단수 밑에서 기도하여 단군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신시에 있던 생명나무를 아사달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신성한 나무의 상징을 세워놓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거기서 기도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환웅이 3천 명을 거느렸는데 이 사람들은 그냥 죽었을까? 아니다, 환웅의 예를 따라서 곰 부족의 사람들과 같이 섞여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다.

2. 단군파는 소수

호랑이 부족이 나중에 소수파인 단군/곰 부족과 섞여, 고조선 백성의 주류를 이루었다.

원시 사회에서는 부족들 단위로 생활했고, 부족을 대표하는 동물을 토템으로 사용했습니다. 곰이나 호랑이나 마늘을 먹는다고 사람으로 변할 수는 없고, 단군 신화는 환웅이 곰 부족의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랑이 부족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언급이 없지만, 호랑이는 이웃 부족, 아마도 함경도 지방을 뜻할 수 있다. 두 부족이 경쟁하는 사이였으니, 호랑이 부족도 물론 당시에 선고조선어(고조선이 생기기 이전에 쓰인 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 땅에는 곰을 숭상하던 부족들의 곰 토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곰 부족이 한반도 바깥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랄 산이나 내몽고의 홍산에 사는 사람들은 곰을 숭상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랄산과 내몽고 지역이 곰 토템 부족이 살던 곳이다.

환웅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조상이 환웅이나 단군의 모습을 당시에 그려놓은 것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다. 우리 말과 수메르인의 공통점이 많으므로, 환웅이 수메르인일 가능성이 많다.

누가 호랑이족이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일설에 따르면 예맥족이 호랑이를 숭배했다고 하며, 호랑이족이 남방 족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쨋든 한반도에는 곰보다는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 많고, 호랑이 부족이 고조선 초기에는 곰 부족과 다투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흡수된 다수파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인구

수메르어와 고조선어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데 인구를 고려해야 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숫자를 고지식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가 제시된 적도 없으므로, 환웅이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단수가 있는 곳으로 왔다는 기록을 기초로 하여 고조선의 인구를 추정해 보기로 한다.

이 3천 명은 수메르 지역을 떠나서 몇 십년 또는 몇 백년 동안 여행하여 우랄 산이나 그 동쪽으로 이주하였을 터이므로, 남녀가 반반씩이었을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자식도 낳아서 인구가 약간 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 끝에 환웅 부족의 3천 명이 곰부족의 3천 명과 결혼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의사소통을 했다는 것은 호랑이 부족이 세월이 지나면서 이 혼합 부족과 섞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호랑이 부족의 수는 최소한 이 혼합 부족의 두 배가 넘었을 것이다. 이 수를 택하면, 세 부족의 초기 인구는 대략 18,000명이 된다. 인구가 50년마다 10퍼센트씩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현재 남북한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고조선의 기원을 기원전 2300년으로 잡으면 건국된 지 4300년이 지난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의 인구는 18,000 x (1.21)43 = 65,300,000이 된다. 이것은 대충 남북한의 인구를 합한 것이 된다.  

   

 

 

7. 환웅 부족이 언제 수메르를 떠났는가?

 

문법과 풍습이 비슷한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렵다. 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언젠가 접촉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수메르인과 곰 부족, 백인종과 황인종이 서로 접촉하는 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a) 곰 부족이 수메르까지 갔든지, (b) 수메르인이 고조선까지 왔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와 한반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첫째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에 곰 부족은 원시 사회였고, 그러한 경제력이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두번째 방법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수메르에는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고, 단군신화에 나오듯,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메르인의 큰 집단, 3천 명이나 고조선 지역까지 왔다면, 고조선 언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메르인이 한반도까지 갔다는 기록은 수메르에는 없지만 (a) 수메르인이 곰 부족과 합쳤다는 가능성이 단군 신화에 남아 있고, (b)수메르어 문법이 우리말에 동화되었으며 (c)수메르인의 풍습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단군신화에는 3천명이 신시에 왔다고 하니, 이러한 신화가 수메르인이 고조선 지역으로 왔다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따라서, 수메르에서 온 사람들을 환웅 부족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러면 이 환웅 부족이 언제 수메르를 떠났을까?

우바이드기 (기원전 5500-3800년)에는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한 시절이다. 우륵기(기원전 4000 -3100년)에는 수메르인의 문화가 자리를 잡은 시기이며, 이 때 그림문자가 발달되고 우륵에서 도시가 발달되었다.

젬뎃 나스르기(기원전 3100-2900년)에는 그림 문자가 쐐기 문자로 변화되었고, 한창 수메르인의 문화가 발달되는 시기였다. 채도가 발달되고 60진법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키시(Kish), 우르(Ur), 라가시(Lagash)의 도시국가들이 발달되고, 우륵(Uruk)에서는 2750년경에 길가메시(Gilgamesh)가 임금이 되었으며, 이 때가 수메르인의 전성시대라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셈족의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차츰차츰 밀려 들어왔고, 드디어 기원전 2340년에 사르곤(Sargon) 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세웠다. 아마도 셈 족이 반 정도 되어서 일상 생활에 아카드어가 함께 쓰인 것 같다. 이 때가 많은 수메르인이 나라를 잃고 상심하여 고향을 등질 적당한 시기였을 것이다. 적어도 수메르인의 다수가 이 때 고향을 등진 것 같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새로 자리잡은 셈 족과 섞여, 수메르어와 아카드어 모두를 널리 쓰게 되었다. 그래서 수메르어-아카드어의 비슷한 말 사전까지 출판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차 수메르어가 사라지게 되었다.

수메르어-아카디아어의 비슷한 말 사전, 니느베, 기원전 1300-900년. 대영 박물관.

우르 제3 왕조 시대에 수메르어가 다시 부활하여 1백년 동안 수메르인이 살 만했으나, 그 후에 아모리 족속이 밀려 들어와 결국 1894년에 바빌론을 세웠다. 이 때가 또한 수메르인이 무리를 지어 고향을 떠날 때였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계속 버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르곤 왕이 수메르 지역에서 아카드 제국을 세웠을 때, 나라를 잃은 서름으로 환웅과 3천 명이 수메르를 떠나서 조선 땅에 정착하였다면, 환웅 일파가 수메르를 떠난 시기는 기원전 2340년이고
이것은 대체로 단군신화에 따른 고조선의 시작 연대와 같다.

아모리 족속이 바빌론을 세웠을 때, 기원전 1900년 경에 떠났다면, 환웅 부족은 동방을 향하여 가다가, 내몽고의 랴오닝 지역에서 곰 부족을 만났을 수 있다. 기원전 2340년이든 1900년이든 대채로 이 기간은 한반도와 그 부근에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이다.

한반도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물론 가는 도중에 첫 정거장은 우랄 산 밑
이었던 것 같다. 이곳에는 지금도 자신을 곰의 자손이라 하는 코미 족이 살고 있고, 코미 페르미약 자치구의 깃발에는 곰이 그려져 있다.
둘째 정거장은 홍산 지역이다.

이 두 정거장에 살던 사람들은 곰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동하던 수메르인들이 멈춘 우랄 산맥에서는 또한 인도유럽어족과 우랄알타이 어족이 같이 살던 곳이다. 우랄 산맥에서 두 종족들이 퍼져나간 듯하다. 이동하는 수메르 족이 이들을 정복하고 이들의 언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메르인이 이미 말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몇 년이 안에 한반도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구려 사람은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한다. 신라 사람도 또한 그렇다고 한다. 이동하던 고조선 사람이 한반도에 정착하던 때는 유목민에서 농사꾼으로 변하는 기간이었던 듯하다.

 

  8. 왜 환웅 부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났는가?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의도이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기원전 2333년에 시작되었는가, 어째서 그보다 일찍 또는 늦게 시작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성경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는 1천년이 앞선 홍수 이야기를 베낀 것이다. 홍수 이야기는 우르의 제 3왕조(기원전 2100-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길가메시가 통치하던 기간은 기원전 2750년이라 한다. 수메르에 홍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큰 홍수가 한 번 있었기는 하지만, 그런 홍수가 한번만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우륵 땅에 넘친 큰 홍수 외에도 두 강이 범람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을 것이다.

홍수는 어째서 수메르인의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떠난 이유를 설명한다. 이 수메르인들이 어디로 갔는가? 생명나무는 이 수메르인들에게 독특한 전통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디로 가든 생명나무의 전통을 가지고 가서 생명나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니 다른 민족들도 생명나무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물론 수메르로부터 멀리 갈수록 그런 전통이 희미해졌을 것이다.

페르샤인의 생명나무 기록

아라비아에도 가지고 갔다.

그리스에 남아 있는 생명나무 전통

에집트에 남아 있는 생명나무 꽃 목거리

우라르투(Urartu) 왕국의 청동 허리띠 (기원전 7세기). 생명나무와 꽃과 열매따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우라르투 왕국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우랄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우랄 산맥은 우라르투(또는 성경의 아라랏)에서 파생된 듯하다.

신단수는 생명나무였을 것이다. 고조선의 기원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면, 고조선 지역까지 오는 데 어느 정도 시일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환웅 부족이 신단수가 있는 곳에 내려왔다는 것은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아담이 정착한 것을 말한다.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기도했다는 것은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신단에서 기도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