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03 유란시아서를 읽으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Vita brevis, ars longa (d003)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글로 잘못 번역되어 있는데, 라틴어로 "인생은 짧고 기술 터득은 오래 걸린다"라는 뜻이다. 태어난 뒤에 처음 20년은 현대 생활의 기본을 터득하고 일생동안 먹여살릴 직업을 얻기 위하여 기술을 얻는 데 쓰인다. 다음 20년은 자식을 낳고 기르는 체험을 얻느라고 바쁘며, 그 다음 20년은 길거나 짧게 직장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하며, 환갑이 되면 자기 인생을 되돌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어볼 겨를이 생긴다. ♦ Don’t put all your eggs in one basket. 달걀을 모두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여러 곳에 분산하여 투자하라) 이와 반대 되는 것은 "go all in," 즉 가진 재산 모두를 한 곳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 곳에 재산을 모두 투자하면, 크게 이익을 볼 가능성도 있지만, 운이 나쁘면, 총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 세상에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 (신이 아닌) 생명을 심는 하늘 존재들도 한 곳에 All-in (집중) 투자하지 않았다. 생명 운반자들은 동일한 생명체를 지구에서 세 군데 나누어 심었다. 중앙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이식, 동부 (오스트랄리아) 이식, 서부 (그린랜드와 두 아메리카) 이식이다. 아메리카에 있던, 인류의 시조 리머 혈통이 베링 해협을 건너서 아시아로 갔으므로, 이 혈통은 중부와 서부 혈통에서 내려왔지만 동부 지역에서 진화되었다. 동부 혈통이 열등했기 때문에 생명 운반자들이 이들을 처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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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동안에 몇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 |
통계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인의 절반이 (48.5%) 책을 읽으며, 독자 1인당 1년에 4권을 읽는다고 한다. (미국인은 12권) 가독 기간을 50년이라고 가정하면 ♦ 한국인 성인의 평생 독서량은 200권밖에 안 된다. ♦ 유란시아서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 다른 책 1천 권을 읽느라고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유란시아서를 10번 읽으면 시간을 적게 쓰면서 독서의 가성비가 (성과÷비용) 높아지는 것을 보이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사람의 연간 독서 시간은 얼마나 될까? 미국이 357시간 (하루 1시간) 영국, 343 시간 중국, 154 시간 (하루 26분) 일본, 135 시간 한국, 125 시간 (하루 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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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sellers 성경 (Bible), (2025년 현재, 5 billion copies sold) Vulgate (Vulgata): Latin translation by St Jerome in 382 AD. 지금까지 Urantia Book (750,000 copies sold) 빛과 생명의 시대가 되면, 성경과 유란시아서의 순위가 바뀔지 모른다. Baruch Spinoza: 구약에 잘못이 있다. 신명기 12:3 신명기 34:5-8절 모세가 120살에 모압 땅에서 죽었고,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른다고 적혀 있으니, 이 글은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임에 틀림 없다. 4복음에도 비슷한 오류가 있다. 마태 복음 16장 24절, 예수 가라사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을 수 없다. 자기가 지어 보지 않은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가 자기처럼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했을 리가 없다. 정작 십자가를 진 뒤에는 그런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번역에 대한 사제들의 태도는 좋지 않았다. 카톨릭은 번역자를 박해하고 사형에 처했다. John Wycliffe’s (middle) English translation was condemned. 파묘를 당하고 그의 유골은 화형에 처해졌다. William Tyndale not only translatied but also used the printing press to print the first new Testament. He was executed in the 1520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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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는 무슨 책인가? | |
♦ 우주에서 제일 중요한 실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각자 자신의 일생을 살다가 끝이 난다. 그러니 ♦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과학 지식은 세상을 항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과학 지식을 쌓았으니 영생을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할 수는 없다. 교양 서적을 1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영생을 보장할 수 없다. ♦ 유란시아서를 읽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영생을 얻는 첫 걸음의 설명서 ♦ 유란시아서는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요약한 하나님의 설명서이다. 토마스와 나다니엘이 파악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똑같이 완전하고 서로 의사를 소통할 분, 즉 아들이 필요하고, 파라다이스가 있는 가운데, 두 분과 합동하여 일할 존재, 즉 무한한 영과 하보나 세계들이 영원부터 존재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필연성이다. 삼위가 계시기 시작한 그 순간은 없다. 항상 계셨던 이요, 항상 계시는 이요, 항상 계실 이이니까. 시공 세계와 진화 인간을 만들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아들이 찬성하고 영이 협조를 약속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을 파라다이스에 때이르게 입장시킬 수는 없는 것. (그리 했다면, 불완전한 존재들이 하보나에서 영원한 싸움을 일으켰을 듯.) 따라서 광대한 천사 계급을 동원하여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고 삼위 품에 안길 수 있게 만드는 사업에 무한한 영이 협조를 약속함으로 시공 세계가 시작된다. ♦ 1부는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설명한다. ♦ 2부는 지역 우주에서 활동하는 인물과 천사들에 관한 글이다. ♦ 3부는 지구를 보살피는 하늘 존재들과 인류의 선사 시대의 역사를 설명한다. ♦ 4부는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중도자들이 예수가 어떤 일생을 살았고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기술한 글이다. 신약보다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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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수학 | |
일생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무신론자는 1백년의 일생을 살기만 하고 (t = 1) 끝이 난다고 믿는다.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행복 지수를 1이라고 가정해 보자. (u = happiness) u(1) = 1. 사람이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둘째 백년 동안 죽어 있는 사람의 행복 지수를 0이라고 하자. 마찬가지로, 셋째 백년, 넷째 백년, … 동안의 행복 지수는 여전히, u(2) = u(3) = … = 0 이다. 한 번 죽고나면 영원히 죽은 상태로 있으니까, 무신론자의 총 행복 지수는 u(1) + u(2) + u(3) +… = 1 + 0 + 0 + … = 1. 아무리 오랫 동안 죽은 상태로 있다 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니까, 무신론자의 총 행복 지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u(2) = u(3) = … = 0을 무한번이나 (∞ -1) 곱해도 여전히 0이 된다. 첫째 생애에서 얻은 복지를 1이라 한다면, 일생을 한 번 살다가 영원히 사라진 사람의 총 복지는 u(1 +0 × ∞) = 1 이 된다.
예루셈에서 훈련하는 중에 (칼리가스티아 1백인의 경우처럼) 진화 세계에서 다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의 복지는 u(1 +1) = 2. 그가 둘 째 인생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이것으로 끝낼 수도 있다. 조절자와 융합한 최후자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의 총 복지는 u(1 + 1 + 1 …) = 1 + 1 +1 … = ∞.
♦ 유란시아는 간단히 말하면, 사람이 어떻게 신이 되는가, 즉 어떻게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설명서이다. ♦ 하나님은 좋은 것을 혼자서 즐기는 분이 아니다.
보수적인 사람의 행복 지수 ♦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났고, 태어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불완전하게 살다가 죽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설명하려고 돌아온 사람도 없다. 따라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필사자가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남아서 완전하게 되는 확률은 0이라고 본다. 이것이 보수적인 사람의 관점이다. (기독교에서는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를 받으며, 죄인을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해 준다.) ♦ 그러나 인생을 하나님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은 사람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다. 죄를 저질렀어도, 죄 없는 사람으로 계산해 준다는 것이 기독교의 속죄 이론이다. 유란시아서에 담긴 하나님 개념은 불완전하게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딸을 어떻게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이요, 그 과정은 유란시아서에 적혀 있다. ♦ 유란시아서를 읽는 사람의 행복 지수 지구에서 일생을 보내며 얻는 행복의 양은 u(1) = 1에 불과하다. 지구 다음에 (예루셈 주위의) 8 세계 (별자리에서) 71 세계 (구원자별 세계, 즉 멜기세덱 대학) 491 세계 합계: 570 세계 이 570개 세계에서 보내면서 지구보다 더 행복할 터이지만, 지구에서 보내는 일생에서 얻는 행복 수준과 똑같다고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하보나를 향하여 출발하기 전까지 도달하는 행복 지수는 최소한 u(1, 2, …, 570) = 570이 된다. 저택 세계에서 얻는 행복의 수치도 u(2) = 1. 저택 세계들을 포함하여, 570개 세계에서 모습을 바꾸어 사는 생애에서 얻는 행복의 수치는 u(2) + u(3) + … = 571. ♦ (하보나) 10억 세계를 거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 사람마다 다르다. 각 세계를 통과하는 데 일생을 보내야 한다, 즉 1백 년이 걸린다고 하고 각 세계에서 도달하는 행복 지수가 1이라고 가정하면, 하보나를 통과하는 승천 필사자의 총 행복 지수는 u(1,000,000,000) = 1,000,000,000 이다. ♦ 그러나 영원히 사는 존재, 최후자가 되어 바깥 우주에서 일하는 자의 행복 지수는 이보다 엄청나게 더 크다. 즉 u(∞)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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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 이야기 1편, 우주의 아버지 2편, 하나님의 성품 3편, 하나님의 속성 4편,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 5편,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 6편, 영원한 아들 7편, 아들과 우주의 관계 8편, 무한한 영 9편, 무한한 영과 우주의 관계 10편,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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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하나님의 속성 | |
글쓴이: 신성한 조언자 1934년 |
인간과 같은 낮은 계급의 존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사람이 알아보기 어려운 아버지의 불가시성을 보상해 준다. 파라다스 신들이 본래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신의 성품 중에서 어느 한 특징이 다른 것보다 먼저 있었는지 우리도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가 먼저 있었다면, 신의 창조자 성품이 모든 다른 것보다 우선할 것이다. 이 논문은 하나님의 여섯 가지 속성을 살펴본다. |
1.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심 |
모든 창조의 총합보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다. 우주는 결코 무한한 하나님 전체를 담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인간 속에서 산다. 너희가 죄를 지을 때, 너희는 깃드는 하나님의 선물을 괴롭힌다. 그가 인간의 지성 속에 갇혀 있고, 함께 생각 조절자가 악한 생각의 결과를 반드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루 어디에나 계시고, 공간은 장벽이 되지 않는다. 중앙 우주에서만 남이 알아 볼 수 있게 계신다. 하보나를 도는 여러 우주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우리 눈으로 지켜 볼 수 없다. 시공 우주의 창조자 및 통치자들의 특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이 거기서 계심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성격 회로와 조절자는 시공 우주에서도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첫째 근원 중심은 무제한 절대자 안에 잠재적으로 계신다. 무제한 절대자는 영원한 미래 우주, 아직 빚어지지 않은 우주의 저장소이다. 첫째 근원 중심은 무한한 영의 지성 회로에 잠재하고, 우주 절대자의 긴장 속에 잠재한다. 인간 서열이 가진 지성은 무한한 영의 딸, 진화 우주에 있는 신성한 봉사자 (성령)이 수여한다. 행성이나 별자리나 지역 우주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최상 존재의 진화하는 계심을 재는 척도가 된다. 지역 우주에 하나님의 계심을 보호하기 위하여, (루시퍼 반란처럼) 어떤 행성이나 체계가 암흑에 빠질 때, 상위의 창조 단위와 교제하는 것이 차단된다. 아버지의 계심이 변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변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 속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직접 좌우한다. |
2. 하나님의 무한한 힘 |
신의 성품에 어긋나지 않는 한, "하나님에게 만사가 가능하다." 모든 속성 중에, 사람은 신의 전능을 가장 잘 이해한다. 물질 에너지ㆍ지성 에너지ㆍ영 에너지, 이 세 가지는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구별할 수 없다. 전능한 창조자의 활동은 멋대로인 듯 보이는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음을 내(신성한 조언자)가 보장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모두 목적이 있고, 영원히 최선을 고려한다. 시간 시대에는 부분의 복지가 전체의 복지와 다른 듯 보일지 모르지만, 영원에서는 그렇게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히 물질을 중시하는 너희의 관점이 장애가 되기 때문에, 너희는 신의 지혜와 친절을 깨달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동기를 오해하는 것은 인간의 선견이 한정되고, 이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가 행하지 않는 많은 일이 진화 세계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힘이 영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조건이 있으니, (i)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그의 성품에 따라서, (ii) 우주 성격자들의 아버지이므로 자비를 베푸려는 그의 뜻에 따라서, (iii) 삼위일체의 공정함을 따르는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서. |
3. 하나님은 만물을 아신다 |
"만물이 벌거벗었고" 그의 눈에 열려 있다. "네가 티끌인 것을 기억하시니라." 그의 성격 회로는 모든 성격자를 포함한다. 인간에 관한 지식은 내려오는 신의 아들을 통해서 간접으로, 그리고 생각 조절자를 통해서 직접 보충된다. 하나님은 결코 놀라지 않는다. |
4. 하나님은 한계가 없다 |
한계 없는 우주에 끝없는 물력과 힘을 부여한 뒤에, 무제한 절대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이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수가 늘어나고 높고 낮은 존재들에게 지성을 계속 수여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적으로 지혜로운 지성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시간 세계의 필사자에게는 앞날이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에 거하신다. (너희와 같은) 유한한 지성은 아버지의 무한성을 이해할 수 없지만, 무한한 아버지의 사랑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가장 귀중한 방법은 사랑으로 접근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5. 아버지의 최상 통치 |
하보나 이후에 생긴 창조들과는 아버지가 직접 연락하지 않고, 그의 아들 및 하위 성격자들을 통해서 연락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통해서 다스린다. 이 통치자들은 행성 영주에서 끝난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경우에 아버지는 반드시 뜻대로 하지 못한다 (자유 의지 때문에) 그러나 신의 계획이 한 행성의 운영을 지배한다. 진화 인간의 생명은 불가피한 것들에 시달린다. (i) 용기는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용기를 길러주기 위하여, 어려움에 부딪치고 실망을 이기는 것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을 길러야 한다.
(ii) 이타심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인간에게 불공평한 상황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iii) 희망은 바람직한가? 인간에게 불안하고 확실치 않은 상황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iv) 믿음은 바람직한가? 머리가 계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믿을 수 있도록 어려운 곤경을 사람에게 마련해 주어야 한다. (v) 진실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사람은 잘못의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세상에서 자라야 한다. (vi) 이상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가? 항상 더 나은 것을 향하도록 자극하는 환경이 있어야 한다. (vii) 충성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배반 당하고 버림 받는 가능성 속에서 견디어야 한다. (viii) 사심(私心) 없는 태도는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인정과 명예를 받으려고 외치는 자아의 소리를 항상 듣고서 이를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ix) 기쁨은 바람직한가? 그렇다면 기쁨의 맛을 누리기 위하여, 고통의 가능성이 늘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하보나에 있는 완전한 존재들은 이와 같이 비교가 되는 것들이 없어도 본래부터 완전하기 때문에, 선을 선택할 수 있다. 필사 인간이 얻는 신다운 것은 무엇이나 체험으로 얻는 것이다. 하보나 존재들의 선천적 올바름과 달리, 필사 인간이 얻는 것은 피땀 흘려 얻은 올바름이다. 하보나의 완전한 인간들은 이상주의자이지만 그렇게 태어났다. (물질적) 유혹을 이기고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쁨을 도무지 모른다. 그들은 사욕(私慾)이 없지만, 사욕을 추구하는 자아를 당당하게 정복하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
6. 아버지의 수위성 |
사심없는 마음으로 우주의 아버지는 권력을 넘겨 주지만, 아버지는 수위(제일 먼저)이다. 기계론적 철학자는 우주에 보편적 최고 의지가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 최고 의지의 작용(자연 법칙)을 존중하니, 터무니 없는 철학이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첫째 근원 중심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자는 어리식다. 하나님이 고통을 받는다면, 어떻게 어떤 성질의 고통을 받는지 모른다. 우주의 아버지의 특성은 미가엘(예수)이 육신화하여 산 일생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아들은 사람에게 봉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