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적 종교는 신봉자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채워줄 사제가 없을 때 오래 버틸 수 없다.
올림푸스 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신자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지도 않았다. 따라서 멸망할 운명이었다.
1천 년 안에 이 종교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 종교가 없이 지냈다. 이것이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이었다.
위로 받으려고 종교를 찾지 않았지만, 철학과 형이상학 속에서 혼의 위안을 찾으려 했다.
엄밀하게 사고함으로 그리스인은 평안을 얻으려 했지만, 철저히 실패했다.
School of Athens, 바티칸의 라파엘 방.
거의 모든 철학자가 살렘 교리의 배경에 허술히 의지했는데도, 그들은 온갖 종교를 업신여겼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솔직하게 일신교를 지지했다고 할 수 있다.
크세노파네스 (Xenophanes, 570 – c.478 BC), 비엔나 국회 앞 석상 (Men always makes gods in their own image)
밀레투스 야외 극장의 유적. (Shutterstock) 밀테투스는 수학자 탈레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와 아낙시만더가 태어난 곳.
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쳤지만, 인간에게 너무나 범신적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기계론자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것은 미덕이요, 남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낫다, 신들은 선하다고 가르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사제와 성서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철학과 미학이 잘 발달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사제와 “신성한 기록”이 거의 없었고,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방하였으나, 그들의 종교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스에서 신앙은 생각에 종속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생각은 신앙에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의 장점은 히브리인의 도덕과 그리스인의 사상으로부터 많이 빌려온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적 교리는 너무 구체화되어서 성장하기가 어려웠고, 그리스에서 인간의 생각은 너무 추상적이 되었으며, 하나님 개념은 비성격 무한자와 다르지 않았다.
이 시절에 보통 사람들은 추상적 신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다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기도를 듣고 친히 상대하는 하나님과 구원의 약속을 몹시 바랐다.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 유행했고, 디오니수스의 자연 숭배가 번성했다.
엘레우시스 신
오르페우스 단체는 도덕을 중시하고 구원을 준다는 약속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디오니수스
오르페우스
종교는 철학의 지지 없이 오래 견디어 왔지만, 어떤 철학도 얼마큼 종교 편에 서지 않고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