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東國通鑑에 따르면, 요임금이 개국한 시기, 기원전 2357년보다 25년이 뒤늦게, 2333년에 고조선이 개국한 것으로 계산하였다 한다. 이러한 문헌 외에 독립된 기록이 있다던가 과학적으로 고증할 자료가 있으면 좋을텐데,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공론으로 끝날 수 있다.

무엇이 고조선 사람을 중국인, 일본인과 구별하는가?

하나는 종족 요소이다. 언젠가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아메리카의 홍인의 DNA분석이 나올 것이고, 한반도에서 나온 옛 고조선인의 뼈에서 추출한DNA 분석이 이러한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줄 것이다. 그 때까지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언어이다. 옛 조선어를 하는 사람은 고조선인으로 취급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옛 고조선어가 어떠했는지 기록이 거의 없으니 이 질문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하기가 힘들다.

1. 단군신화의 배경은 농경사회이다.
단군신화에는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신단수가 있는 곳에 내려가서 신시를 만들었고 그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하였다”고 한다. 환웅이 바람과 비와 구름을 다스리는 무당 또는 사제를 거느렸다는 것은 단군신화의 배경이 농경사회였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 청동기(靑銅期) 이전 시대였다는 것을 말한다.

짐승을 사냥하고 푸성귀나 열매를 거두는 유목 사회에는 사람들이 흩어져 사니, 부족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아메리카 인디안들처럼 다른 부족의 물건이나 사람들을 해지지 않는 기본적 금기(禁忌) 외에는 규칙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목 생활은 먹을 것의 공급이 불안하여, 인류는 강 유역으로 차츰 이동하여 농경사회를 시작함으로 문명이 생기게 되었다. 원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기름진 땅에 많이 모여 살게 되니 자연히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원시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이다. 질서가 없는 사회에서 고도의 기술과 무기(武器)를 가르쳐 주면 사람을 죽이는 데, 그것도 많이 죽이는 데 쓰일 뿐이다. 그러므로 환웅이 서방 또는 수메르에서 왔다면, 도리를 가르쳐 인간사회 다스려 교화하는 것이 새로운 문물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단군신화는 또한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통설에 따르면, 천부인은 청동검, 청동 방울, 청동 거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송호정 교수의 말대로, 고조선이 시작된 것은 청동기였고, 한반도에서 비파형 동검이 가장 일찍 발견되는 기원전 7세기, 중국의 춘추시대밖에 되지 않는다. 단군이 춘추시대에 한반도에 왔다거나 고조선이 공자가 살던 시대 전후에 생겼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이런 주장에 한 가지 문제점은 고조선의 땅이 한반도였다는 가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한 청동기의 정의를 비파형 동검에 국한시키는 것이다. 랴오닝(遼寧) 지방에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10세기에 발견된다 하니, 청동기를 동검에 국한시킨다면, 랴오닝이 고조선의 땅에 속한다 하더라도, 고조선의 시작은 중국의 서주(西周) 시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홍산문명은 기원전 5000-3000년에 해당하고, 뉴하량(牛河梁) 유적지에는 청동을 만드는 데 쓰이는 도구나 슬랙이 발견된다고 한다. 홍산문명이 곰을 숭상하는 곰 토템이니, 환웅 부족의 이들과 합치기전, 고조선 이전의 문화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고조선의 시작은 최대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최소한 기원전 7세기까지 이른다. 고조선의 시작 연대를 더 좁히려면 더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수메르의 갑옷에는 청동 단추가 달려 있고, 고조선 지역에서도 청동 단추가 붙은 투구가 발견된다고 한다. 이것이 확인된 사실이라면, 수메르 문명이 고조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높인다.

청동기를 만드는 야금 기술은 중국이나 고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명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들여온 기술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아시아에서 청동기가 처음 출현한 것은 농경사회가 생긴 뒤이다.
 

2. 홍인종의 아시아 탈출
최근에 루이즈 리나레스(Luiz-Lunares) 교수의 주도하에 하바드 대학의 연구팀이 아메리카 인디안의 를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인디안은 아시아에서 한 번이 아니라 세 차례에 걸쳐서 이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마지막 빙하기에 지금의 베링 해협이 가느다란 육지 다리거나 섬들로 이루어졌을 때 건너갔다. 후기에 이민 한 일파, 특히 에스키모인(eskimos), 알류트인(aleutians) 그리고 카나다의 치퓨얀인(Chipewyan)인은 오늘날의 동아시아인의 피가 많이 섞였다고 한다.

알류트인의 언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주어 + 목적어 + 동사의 순서로 문장을 구성한다. 아메리카에 건너 간 뒤에 다른 민족들과 많이 섞였으므로 그 자세한 과정을 로 분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DNA연구는 종족이 어떻게 갈라지고 흩어졌는가 분석하는 데는 좋으나, 정확한 연대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태초의 황인종 집단에서 조선인이 돌연 변이로 생기는 것보다, 당시의 여건을 보면, 황인종이 다른 종, 특히 홍인종과 섞여서 나왔을 가능성이 더 있음직해 보인다. 지난 1만 5천년 동안 홍인종은 계속하여 기름진 아시아 땅을 버리고 아메리카로 건너 갔다. 이 민족 이동은 홍인종이 자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황인종이 서아시아에서부터 동방으로 서서히 이동함에 따라서, 이들을 피하느라고 떠난 것 같다.

황인종과 홍인종이 처음에는 섞이고 사이 좋게 지냈을지 모른다. 이 때 태어난 종족이 선고조선인이라 가정하자. 이 가설이 맞는지 어쩐지는DNA연구가 밝혀 줄 수 있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토템을 믿고 짐승의 모습을 한 탈을 쓰고 춤추는 인디안 족도 있다고 한다.

손성태 교수는 아즈텍 언어와 한국어가 유사하다고 하는데, 두 언어의 문법을 좀더 체계적으로 분석해야겠다. 어쨋든 이러한 주장은 이 가설을 뒷받침해 준다. 조선인은 또한 홍인종으로부터 서로 싸우는 성향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이동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두 민족이 처음에 싸움은 불가피했을 것이고, 홍인종은 아시아를 버리고 아메리카로 건너가기로 작정한 것 같고, 그 결정을 시행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렸던 듯하다. 그러면 이렇게 두 종족이 섞인 뒤에 선고조선인(고조선이 생기기 이전의 조선 사람)의 일부가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면, 조선어의 흔적이 어딘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황인종의 주류, 중국인을 피하여, 따로 뭉쳐서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되어 홍산 문화 및 기타 인근의 문화를 일으켰을 수 있다.
 

3. 수메르의 영향
수메르의 역사는 간단히 다섯 기로 나눈다.
(가) 우바이드기 (기원전 6500-3800년): 銅期, 이름이 수메르어가 아닌 도시가 있으므로, 수메르인이 아닌지도 모른다.

항아리, 우바이드 3기, 루브르 박물관

(나) 우륵기(기원전 4100-2900년): 이 시기의 마지막 부분은 젬뎃 나스르기(Jemdet-Nasr period, 기원전 3100-2900년)라 부른다.

우륵에서 발견된 궁전 기둥, 페르가몬 박물관 (Berlin)



송아지 석상, 젬뎃 나스르기.


젬뎃 나스르기의 설형문자. 5일 동안의 배급 품목, 군인이나 공직자에게 배급을 주었던 듯. 초기의 설형문자로 쓰여 있다.

(다)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2900 – 2334년): 이 시기에 수메르의 초기 도시 국가들, 곧 키시, 우륵, 우르가 생겨났다. 초기 왕조 2기(기원전 2800-2600년)에 길자메시가 우륵의 왕이 된다. 3기(기원전 2600-2350년)에 종전의 그림 글자가 단순화되고 설형 문자가 자리를 잡는다. 북쪽 아카드 시의 셈족 임금 사르곤 왕이 기원전 2350년에 온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아카드 제국을 만들었다.

(라) 아카드기(기원전 2334 -2218년)



사르곤 왕(기원전 2334-2279년)의 출생을 기록한 진흙서판. 대영 박물관



사르곤의 손자 나람 신(2254-2218년)의 승리 기념비의 파편, 보스톤 미술관.

(마) 구티기(Gutian period,기원전 2218-2047년). 아카드 제국이 망한 뒤에 1백년 동안 암흑시대가 온다.

(바) 우르 제3왕조(기원전 2047-1940년)
수메르인이 다시 부흥하나, 아모리 족이 종국에는 1894년에 바빌론 제국을 세운다.

수메르인이 상심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떠날 적당한 시기는 사르곤 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고 셈 족이 지배하기 시작한 때, 기원전 2350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수메르인의 상당히 큰 일부는 이 때 고향을 등지었을 것이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새로 자리잡은 셈 족과 섞여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통용되었으나 점차 수메르어가 사라졌다. 우르 제3 왕조 시대에 수메르어가 다시 부활하여 잠시 수메르인이 살 만했으나, 아모리 족이 바빌론을 세웠는데, 이 때가 또한 수메르인이 무리를 지어 고향을 떠날 때였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계속 버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환웅과 3천 명이 수메르를 떠나서 조선 땅에 정착하였다면, 그가 수메르를 떠난 시기는 기원전 2350년이고 이것이 대체로 단군신화에 따른 고조선의 시작 연대와 같다. 그렇지 않고 바빌론이 섰을 때 떠났다면, 환웅은 기원전 1900년 경에 떠나서 동방을 향하여 가다가. 내몽고의 랴오닝 지역에서 곰 부족을 만났을 수 있다. 기원전 2350년이든 1900년이든 대체로 이 기간이 한반도와 그 부근에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인 듯하다.

4. 청동병기의 사용
 

우르의 군기(軍旗), 대영 박물관. 기원전 2600년 경, 대체로 길가메시(Gilgamesh)가 우르에서 임금이었을 때에 지어진 왕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맷 윗줄에 군인들이 청동도끼를 들고 있다. 가운데 줄에 군인들은 청동 투구를 쓰고 청동 단추가 달린 갑옷을 입었다.

수메르인은 통나무 바퀴가 둘인 수레와 넷인 수레를 사용했다. 사람을 나르기 위하여 또 전시에 통나무 바퀴가 넷 달린 전차가 쓰였으나 이것은 기동성이 적었다. 아마도 급히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바퀴가 둘 달린 수레가 쓰였다. 이러한 전차는 길자메시 이전부터 쓰였을 것이다. 후일에 아카드인이 가벼운 바퀴가 둘 달린 전차를 개발하였다.

우르의 군기에서 보이다시피, 이 때부터 전문 직종인 군인이 생겼다. 군인들은 청동으로 만든 갑옷 및 칼과 도끼를 든 것 같다. 14개의 도시 국가 중에서 큰 곳에서는 4, 5천명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메르에는 일찍부터 여러 도시 국가가 발달되어, 이 도시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잦았다.
 

최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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